귀환천화 26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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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7화
주르륵.
더 버티지 못하고 끌려간 은서경이 손을 들어서 혁무천을 공격하려 했다.
그러나 어떻게 된 것인지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 사이 혁무천이 은서경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바짝 당긴 후 말했다.
“내가 배우기로는, 돈을 우습게 아는 사람은 장사를 하면 안 된다고 하더군. 서주상단을 지키고 싶으면 그 오만함부터 버리고, 돈 한 푼의 가치부터 새로 배워. 세상은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만만한 곳이 아니니까.”
휙, 은서경을 은화청 쪽으로 밀친 혁무천이 차갑게 말을 이었다.
“오늘은 단주의 얼굴을 봐서 손을 쓰지 않겠다. 하지만 다음에 만났을 때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상태면, 아주 확실하게 교육을 시켜주지.”
고개를 돌린 혁무천은 은화청을 향해 말없이 포권을 취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막아섰던 자들이 눈치를 보며 은화청의 명령을 기다렸다.
은화청이 손을 들어서 저었다.
무사들은 기다렸다는 듯 후다닥 물러섰다.
은화청은 무사들 사이를 지나가는 혁무천의 등을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
혁무천은 서주를 바로 떠나지 않고 객잔에서 하루를 더 머물렀다.
그날 밤, 한 사람이 객잔으로 찾아왔다.
서주상단의 총관이자 은화청의 의제인 도운삼이었다.
그는 이각 정도 머무르며 혁무천과 이야기를 나누고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객잔을 나섰다.
서주상단으로 돌아온 도운삼은 늦은 밤인데도 은화청을 찾아갔다.
은화청은 잠을 자지 않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 할을 제하는 것으로 합의를 봤습니다.”
도운삼의 말에 은화청은 쓴웃음을 지었다.
“서경을 교육시킨 대가를 확실하게 받아내는군.”
“어쨌든 한 시름 덜었습니다. 계속 붙잡고 있어야만 했다면 최소 삼 할, 최대 오 할은 손해를 봤을 겁니다.”
“아우 말이 맞네. 아마 상해서 손해 보는 것만 해도 이삼 할은 되었을 거야.”
“그건 그렇고, 서경이가 너무 큰 충격을 받지 않았을까 걱정됩니다.”
“언젠가는 겪어야 했을 일이네. 이겨내지 못한다면 서주상단을 이끌어갈 자격도 없는 게지.”
냉정한 은화청의 말에 도운삼은 고개를 끄덕였다.
상단을 이끌어가는 사람은 사소한 개인 감정에 좌우되어서는 안 된다. 은서경이 이번의 아픔을 잘 넘긴다면 서주상단은 다음 대도 걱정이 없을 것이다.
“천화상단과의 관계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나는 남의 뒤치다꺼리나 하려고 서주상단을 만든 게 아니네.”
“하오면…….”
“일단 지켜보세. 그들이 정말로 천화상단을 상대할 능력이 있는지, 아니면 그냥 스쳐 지나가는 바람인지 곧 드러날 게야.”
***
아침식사를 하고 서주를 출발한 혁무천 일행은 사흘째 되던 날 제녕에 도착했다.
제녕의 거상 왕두관을 구슬리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왕두관 역시 서주상단의 물량까지 무원장에 넘어간 걸 알고 순순히 계약을 체결했다.
그렇게 목적했던 일곱 곳 중 한 곳을 제외하고 여섯 곳과 거래를 마친 혁무천은 흡족한 마음으로 제녕을 출발했다.
아직 눈은 내리지 않았지만 날씨가 쌀쌀해져서 어느덧 겨울로 접어들고 있었다.
두 시진 후.
혁무천 일행은 호수와 갈대숲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풍경 사이로 난 관도로 들어섰다.
혁무천은 은설과 나란히 걸었는데, 여행객이라도 되는 것처럼 주위 풍광을 즐기며 편안한 표정이었다.
마영산도 송비와 농담 따먹기를 하며 제법 잘 어울렸다.
그런데 갈대숲 사이로 난 관도에 들어선 지 일각쯤 지났을 때, 더 앞쪽에서 달려오는 사람이 보였다.
멀리서 봐도 정말 열심히 달려오고 있다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어? 소궁단이잖아?”
동대안이 그를 알아보고 말했다.
“저 게으른 친구가 왜 저렇게 열심히 달려오는 거지? 수상한데?”
소궁단도 혁무천 일행을 알아보고 손을 들어서 흔들었다.
“무처어어언!”
일그러졌던 얼굴 표정이 환해졌다.
제녕까지 달릴 작정이었다. 그런데 반 시진은 더 달리지 않아도 된다. 그것만 해도 어딘가 말이다.
혁무천 앞에 멈춰선 소궁단은 과장되게 헥헥거리며 숨을 골랐다.
사실 그 정도로 지치지는 않았다. 그래도 많이 지친 듯 보여야 그만한 대접을 받는 곳이 세상이다.
“헥헥헥, 정말 다행이네. 이곳에서 만난 덕분에 두 시진은 아낄 수 있겠어.”
동대안이 머리를 삐죽 내밀고 물었다.
“무슨 일인데 뼈다귀 본 개처럼 정신없이 뛰어온 건가?”
누구든 개 취급하면 기분이 상하는 게 정상이다.
하지만 소궁단은 조금도 기분 나쁜 표정을 짓지 않았다. 거지에게 개는 결코 욕이 아니었다.
“개봉이 피바다가 됐수.”
“뭐?”
동대안의 작은 눈이 동그래졌다.
혁무천이 굳어진 표정으로 말했다.
“자세히 말해봐.”
“개봉 일대와 황하 건너 쪽의 정파무사들이 개봉으로 모여들었어.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지 귀천교가 마도 쪽 무사들과 함께 정파무사들을 급습해서 수백 명이 죽었어.”
“혹시 황보세가 사람들도 연루되었나?”
소궁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황보 가주께서 돌아가셨어. 그나마 황보중이 겨우 빠져나와서 목숨을 구했지.”
“그나마 다행이군.”
“사실 그래서 달려온 거야. 황보중이 자네를 찾고 있거든.”
“황보중이 나를?”
“최대한 빨리 찾아달라고 하더군. 전에 만났던 곳에서 기다리겠다고 했네.”
소궁단의 그 말에 동대안이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얼마 받았어?”
소궁단이 움찔하며 말을 더듬었다.
“뭐, 뭘?”
“받았군. 걱정 마, 안 뺏어가니까. 뭐 열심히 알아봐달라고 돈을 줄 수도 있지. 난 그냥 얼마 받았는지 그게 궁금할 뿐이야.”
“……백 냥.”
“겨우 백 냥? 천 냥쯤 달라고 하지. 우리 단주 같으면 그 정도는 줬을 텐데.”
“정말이우?”
“그렇다니까.”
“쉰 소리 그만 하고 갑시다.”
혁무천이 짐짓 차갑게 말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아무래도 이제부터 소궁단을 부려먹으려면 돈이 더 들어갈 듯했다.
***
사마진웅은 신도명산을 보며 표정이 굳어졌다.
“회주,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정혈단과 더 이상 함께 가는 건 위험하오. 이쯤에서 거리를 두는 게 좋을 것 같소만.”
“정혈단 덕분에 그나마 마도와 싸울 발판이 마련되었소. 그런데 이제 와서 외면하자는 거요?”
“그들의 이용가치는 그것으로 끝났소. 이제는 정파를 정리해서 힘을 하나로 뭉쳐야 하오. 그런데 정혈단이 있으면 방해만 될 뿐이오.”
“이용가치라…… 회주는 목숨을 걸고 함께 싸운 사람을 이용가치로만 따지나 보군요.”
“지금은 마도를 물리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오. 내 말이 과했을지 모르지만, 그에 대해서는 나중에 역사가 판단해줄 거요.”
사마진웅은 신도명산을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고는 침잠된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소. 그에 대해서 고민해 보리다.”
신도명산도 그쯤에서 한발 물러섰다.
“부디 좋은 방향으로 결정을 내렸으면 하오. 그럼…….”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포권을 취하고 곧바로 방을 나섰다.
살짝 비틀린 입가에 조소가 걸렸다.
‘흥! 정파의 맹주는 당신처럼 마음 약한 사람이 맡아서는 안 되는 자리야.’
방을 나와서 문을 닫은 그는 방문 앞에 서 있는 이사명을 보고 바로 조소를 지웠다.
“회주께서 오셨군요.”
“할 말이 있어서 왔네. 아마 들어가면 뭔 말이 있을 거네. 잘 생각해보시라고 전해주게.”
신도명산은 무뚝뚝하게 말하고는 그곳을 떠났다.
‘기분 나쁜 놈이야.’
그래봐야 곧 끈 떨어진 신세가 될 놈이다.
이사명은 멀어지는 신도명산의 등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당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내가 모를 줄 아나?’
그는 신도명산이 회랑을 돌아서 사라지자,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사마진웅이 고요히 앉아서 찻잔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맹주. 다녀왔습니다.”
“앉게.”
이사명은 사마진웅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제야 사마진웅이 고개를 들었다.
“정혈단과 결별을 선언하자고 하더군.”
“우리의 결집력을 약화시키고 자신의 조직을 더 강화시키겠다는 생각일 겁니다. 그런 연후에 또 다른 욕심을 내겠지요.”
“나는 어차피 맹주 자리에 연연할 생각이 없네.”
“맹주…….”
“하지만 자신의 욕심만 챙기려는 후안무치한 자가 맹주 자리에 앉는 것도 원치 않아.”
“신도명산은 위험한 자입니다. 지금이라도 거리를 두는 게 어떻겠습니까?”
“후우, 그게 어렵다는 게 문제네.”
사마진웅이 한숨을 쉬며 씁쓸한 어조로 말했다.
이사명도 모르지 않았다.
신도명산은 합류한 지 한 달 만에 특유의 언변으로 많은 정파의 고수들에게 호감을 얻었다.
거기다 무위 역시 절대경지에 올라섰다는 게 알려지면서 인기가 급격히 치솟고 있었다.
그의 연합 제의를 받아들일 때까지만 해도 상상치 못했던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그의 욕심이 단순하게 인기를 얻는 데에서 머물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사명은 착잡한 표정으로 사마진웅을 바라보았다.
정파의 비전절기를 얻었음에도 사마진웅은 절대경지는커녕 초절정경지에 겨우 턱걸이 한 상태였다.
정은맹 내에서 그보다 강한 사람이 열 명은 되었다.
최근 들어 그 점에 대해 수군거리는 정파 원로들이 많았다.
“자칫하면 정은맹 전체가 흔들릴 수 있습니다. 아니 그것보다, 정파의 부활을 위해 만들어진 정은맹이 욕심 많은 자의 입에 들어갈 수도 있다는 겁니다. 결별로 인한 피해가 크더라도 결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으음, 알았네. 고민해보지.”
신도명산은 차가운 눈으로 앞을 응시했다.
그의 앞에는 한 사람이 고개를 숙인 채 서 있었다.
놀랍게도 그자는 맹주의 호위를 맡고 있는 호위무사 중 하나였다.
그에게서 방 안의 대화 내용 중 일부를 전해들은 신도명산은 입술 끝이 치켜 올라갔다.
“알았네. 수고했어. 자네의 충정을 잊지 않겠네.”
“감사합니다, 회주.”
무사가 방을 나가자, 신도명산의 눈에서 한광이 번뜩였다.
‘사마진웅, 나를 원망하지 마라. 그대처럼 마음 약한 자가 정파를 이끌어서는 마도를 이길 수 없어.’
***
무거운 분위기가 개봉 전체를 짓눌렀다.
며칠 전 삼백여 명이 죽은 이후 피비린내가 아직도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그나마 황군이 뒤늦게라도 개입해서 마도의 무사들이 개봉 일대에서 철수한 상황이었다.
혁무천 일행은 개봉성에 들어가자마자 일단 객잔에 방을 잡았다.
그러고는 혁무천만 나와서 민가장으로 갔다.
민가장까지 가는 동안 감각을 집중해서 살펴봤지만, 특별히 자신을 감시하는 자는 없는 듯했다.
황보경과 황보중 부자가 피신했던 민가장은 다행히 이번 혈겁에 휘말리지 않았다. 황보경이 손자와 며느리를 보호하기 위해 민가장의 존재를 철저하게 감추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언제 발각될지 알 수 없었다.
혁무천은 바람처럼 민가장의 담을 넘어 안으로 들어갔다. 움직임이 워낙 빨라서 걸어가던 사람이 갑자기 사라진 듯했다.
“헛!”
황보중은 자신의 방으로 불쑥 들어서는 혁무천을 보며 벌떡 일어났다.
문이 열리는데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마 문 쪽을 보고 있지 않았더라면 혁무천이 들어온 것도 몰랐을 것이다.
혁무천이 황보중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나를 찾았다고 들었소만.”
“그렇소.”
황보중은 전에 비해서 살이 많이 빠진 듯 보였다. 아마 최근 며칠 사이에 그리 된 것이 아닐까 싶었다.
“말씀해보시오. 뭘 바라는 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