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천화 29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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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72회 작성일소설 읽기 : 귀환천화 291화
291화
여인이 얼굴에서 면사를 떼어냈다.
사야의 아름다운 모습이 드러났다.
“제가 오면 안 되는 곳인가요?”
“안 될 건 없지. 무원장은 언제든 문이 열려 있으니까. 그런데 화광이는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나? 성주님은 좀 어때?”
사야는 쓴웃음을 지은 채 답했다.
“소성주님께선 깨어나지 못하셨어요. 그리고 주군께선 좀 나아지시긴 했는데, 깨어 있는 시간이 하루에 반도 안 돼요.”
“신도명산이 그렇게 강할 줄은 몰랐군.”
사야가 입술을 삐죽였다.
“주군께서 다른 자들과 싸우느라 공력을 소모하지만 않았어도 신도명산은 상대가 안 되었을 거예요.”
천양묵을 위해 변명하는 사야의 모습에 혁무천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왜 웃어요?”
“내 맘대로 웃지도 못하나? 트집 잡지 말고, 왜 왔는지 그거나 말해 봐.”
그제야 사야가 찾아온 목적을 말했다.
“협약을 맺었으면 해요.”
“협약?”
“그래요.”
“그대에게 만마성을 대표할 권한이 있을 줄은 몰랐군.”
“주군께 허락을 받은 사항이에요.”
혁무천은 그 말에 무심한 눈길로 사야를 직시했다.
“좋아. 우리에게 뭘 바라지?”
“저는 천하에서 작금의 혼돈을 정리할 수 있는 사람은 당신밖에 없다고 봐요.”
“나를 너무 과대평가하고 있군.”
“저 혼자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에요. 성주님과 태대장로님께서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천두공이 자신의 정체를 말했나?
하지만 사야의 얼굴을 보니 그건 아닌 것 같다.
“무원장은 상가야. 강호의 일에 직접적으로 끼어들고 싶지 않아.”
“당신도 아시잖아요. 무원장이 강호와 완전히 남이 아니라는 걸.”
“물론 무력만 따지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하지만 나는 강호에 뛰어들 생각이 조금도 없어.”
“천화상단이 귀천교와 철혈마련, 사도맹, 패왕문의 주인들과 모종의 협약을 맺고 있다는 건 아세요? 어떤 협약을 맺었는지 알고 싶지 않아요?”
짐작은 하고 있었다.
깊은 관계가 아니라면 천화상단의 무력이 저토록 클 때까지 그냥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악사광도, 우문척도 그래서 당장 그들을 압박하지 못하는 것이겠지.
그런데 사야의 입에서 그 이야기가 나오는 걸 보니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더 깊은 내막이 있는 것 같다.
“그게 우리와 무슨 상관이지?”
혁무천은 일단 시치미를 뗐다.
사야의 입가에 묘한 웃음이 번졌다.
“진짜 상관없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죠?”
“어디 네 생각을 말해 봐.”
“그들이 협약을 맺은 것은 이미 오십 년이나 된 일이에요. 마도가 정파를 완전히 밀어내긴 했는데 마도천하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많은 자금이 필요했죠. 그래서 당시 천하제일상가였던 천화상단에 손을 내밀었어요.”
“훗, 손을 내민 게 아니라 협박을 했겠지.”
혁무천이 냉소를 지으며 말하자, 사야가 미소를 지었다.
“맞아요. 그러자 천화상단은 자금을 대주는 대신, 자신들이 상가를 보호할 무력을 자체적으로 갖추는 걸 도와달라고 했어요.”
비천에 대항할 사대천화와 오대의 토대를 만든 것도 그때부터인 듯했다.
“지금이야 천화상단이 마도와 관련이 없고, 천기회를 돕는 걸 보면 오히려 정파 쪽인 것처럼 보이지만, 만약 그들에게 문제가 생기면 사대마세가 나설 거예요. 아직도 암암리에 막대한 금액이 그들에게 흘러들어가니까요.”
“저번 복우산 전쟁 때, 철혈마련과 사도맹, 귀천교가 우리와 거래를 한 걸 모르진 않겠지? 그들이 천화상단과 그런 사이라면 왜 우리와 거래를 한 거지?”
“사대마세도 자존심이 있잖아요. 그들은 천화상단에 끌려갈 마음이 조금도 없었을 거예요. 그리고 사실 모든 거래를 무원장과 한 것도 아니고요.”
그렇다. 실제로 가장 많은 거래를 한 곳은 만마성과 마천문이다. 철혈마련과 귀천교, 사도맹은 일부만 했다.
‘그래서 악사광이 그런 말을 했던 건가?’
우문척도 천화상단을 치는 일에 소극적이었다. 부친 핑계를 대면서.
혁무천도 그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을 듯했다.
한편으로는 목에 걸렸던 껄끄러운 짐 하나를 덜어낸 것 같아서 마음이 편해졌다.
“이제 결론을 말해 봐.”
그 말이 떨어지자, 사야의 표정도 다시 가라앉았다.
“만마성은 지금 주군과 소성주님의 부상이 심해서 당분간은 정은맹을 공격할 수가 없어요.”
“설마 우리더러 정은맹을 공격해달라는 건 아니겠지?”
“저나 주군도 그런 부탁을 할 정도로 멍청하지 않아요.”
“그럼 뭐지?”
“천하에서 작금의 혼돈을 정리할 수 있는 사람이 당신밖에 없다고 했죠?”
“그건 그냥 넘어가고…….”
혁무천은 가볍게 넘기려 했지만, 사야는 그럴 수가 없었다.
“천하를 좌우하는 괘(卦)에서 그 어떤 흔적도 없는 괘는 당신밖에 없어요. 무슨 말인지 당신은 알 거예요.”
사야를 바라보는 혁무천의 표정이 무심하게 가라앉았다.
“그래서?”
“언젠가 당신이 혼돈의 세상을 정리하는 날이 오거든, 그때 만마성을 지켜달라는 게 조건이에요.”
“너무 많은 걸 바라는군. 나에게 정말 그 정도의 힘이 있다고 보는 거냐?”
사야가 그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솔직히 말하면, 저도 잘 몰라요.”
“뭐? 몰라?”
“그저 하늘도 모르는 당신의 운명이라면 모든 혼돈을 다 집어삼킬 수 있을 거라 생각할 뿐이죠.”
“어이가 없군. 겨우 그런 이유 때문에 나를 지목하다니.”
“정말 아니라면…… 당신의 진정한 정체를 말해보세요.”
“…….”
“이름, 나이, 태어난 곳 등등…….”
“그건 네가 알 것 없어.”
“말을 할 수가 없겠죠. 당신은 그 어디에도 있지 않으니까.”
정말 집요한 여인이다.
하지만 그것만큼은 절대 말할 수 없었다. 꿈속에서라도.
할 수 없이 혁무천은 한발 물러섰다.
“어쨌든, 정말 그런 날이 올지 안 올지 모르지만, 그런 날이 온다면…… 네 조건을 받아들이지.”
그제야 사야의 얼굴에 밝은 미소가 떠올랐다.
정말 아름다운 미소였다.
지금까지 봤던 그 어떤 여인의 미소보다 환하게 느껴졌다.
“저도 그렇게 미운 얼굴은 아니죠?”
갑작스런 사야의 말에 움찔하며 정신을 차린 혁무천은 짐짓 짜증을 내듯 말했다.
“헛소리 말고, 이제 대가를 말해 봐.”
사야가 여전히 미소를 지은 채 입을 열었다.
“십 년 동안 만마성의 모든 물자 수급을 무원장에 맡기겠어요.”
심드렁하던 혁무천의 표정에 만족감이 떠올랐다.
만마성처럼 규모가 큰 거래처와 안정적으로 거래를 할 수 있다면 물품 수급도 그만큼 쉬워진다.
“괜찮군. 앞으로 만마성에 별 일만 없다면.”
문제는 만마성이 힘을 잃을 경우다. 그럴 경우 십 년 거래약속도 무용지물이나 다름없다.
사야도 혁무천의 말에 가시가 박혀 있다는 걸 알고 바로 대답했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사실 지난번에도 주군께서 마존대만 데려갔어도 상황이 달라졌을 거예요.”
“마존대?”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만마성에 그런 조직이 있던가?
그의 의문을 짐작한 듯 사야가 묘한 미소를 지었다.
“주군과 소성주님만이 명령을 내릴 수 있는 만마성 최강의 무사대죠.”
“마존대가 정말 대단한 자들이라면 왜 안 데려갔지?”
“주군께서 주모님과 소성주님을 정혈단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남겨 두셨어요. 주군께서도 나중에 아쉬워하셨죠.”
혁무천도 천양묵이라면 정말 그랬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마성이 왜 천하제일마세인지 사람들은 가끔 잊곤 해요. 사실 정은맹만 상대하는 거라면 본 성만의 힘으로도 할 수 있어요. 양패구상 당하면 남들의 먹이로 전락할 것이기 때문에 참고 있는 것뿐이죠.”
혁무천도 그 점은 인정했다.
그가 본 만마성은 정은맹에게 그리 쉽게 밀릴 곳이 아니었다.
심지어 철혈마련조차 모든 힘을 다 드러내면 정은맹과 일전을 겨룰 수 있는 정도의 힘이 있었다.
남황궁이라는 변수만 없었다면 말이다.
“좋아, 그럼 그 조건으로 협약을 맺지.”
“받아들일 줄 알았어요. 근데 저녁식사는 언제 해요? 설마 저녁식사도 안 주고 보낼 생각은 아니죠?”
“……기다려.”
저녁식사는 여러 명이 함께 했다.
사야는 느긋하게 저녁식사도 하고, 후식에 차까지 마시며 하하호호 즐겁게 이야기를 나눈 후 해시(亥時) 정(正)에 돌아갔다.
“후우우, 생각보다 엉덩이가 무겁군.”
혁무천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손님에게 퉁명하게 할 수 없어서 이야기를 다 받아줬더니 머리가 아플 지경이다.
‘무슨 말이 그렇게 많은지…….’
그런데 무엇 때문인지 은설이 쀼루퉁해 있었다.
“설아야, 넌 또 왜 그래?”
입을 두어 번 삐죽인 은설이 고개를 홱 돌렸다.
두어 사람이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뭐 잘못한 거라도 있나?”
답답한 혁무천이 사람들에게 넌지시 물었다.
눈이 마주친 사람들이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눈치도 없는 동대안이 말했다.
“없는데?”
은설이 이번에는 동대안을 째려봤다.
눈빛이 어찌나 날카로운지 동대안은 후다닥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할 수 없이 혼인을 한 이현이 한마디 해주었다.
“봄은 결실을 맺는 가을을 시샘하고, 여름은 시원한 겨울을 시샘하고, 가을은 산천에 꽃이 만발한 봄을 시샘하고, 겨울은 땅이 얼지 않는 따뜻한 여름을 시샘한다. 라는 말도 있지요.”
“그래서?”
“후우우…….”
결국 이현도 한숨을 쉬고 말았다.
그 정도 이야기했으면 눈치 채야지 말이야.
할 수 없이 목량이 해결사로 나섰다.
“대형, 대형이 봤을 때 사야라는 여인하고 은 소저하고 누가 더 예쁩니까?”
혁무천이 곧바로 대답했다.
“그거야 물어보나마나지. 어떻게 저 여우같은 사야를 우리 설아와 비교해?”
그제야 슬쩍 혁무천을 훔쳐본 은설의 표정이 조금 펴졌다. 입술을 삐죽이면서도 얼굴이 살짝 붉어진 걸 보니 기분이 괜찮은가 보다.
목량도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다행히 별 일은 없겠군.’
몇몇은 혁무천을 힐끔거리며 속으로 혀를 찼지만.
‘쯔쯔쯔, 팔불출이 따로 없다니까.’
***
이틀 동안은 조용했다.
남양에서도 특별한 보고가 없었고, 정혈단의 혈풍도 기이할 정도로 잠잠했다.
철혈마련과 귀천교도 움직임이 거의 없었다.
그렇게 사흘째 되던 날.
아침 식사를 마치고 한 시진쯤 지난 후, 이백여 명이 열 차례에 걸쳐서 무원장을 나섰다.
개중에는 지천주도 있었고, 율이명을 비롯한 검마보의 고수들도 있었다.
이정과 전교, 천위도 비룡단과 함께 나섰다.
숫자는 많지 않았지만 평균적인 무위만큼은 팔대마세 어디에도 뒤지지 않았다.
사시 무렵에는 무원장 뒤쪽에 있는 장원에서 밀소림 제자 백팔 명이 길을 나섰다.
그들은 곧장 제남으로 가서 혁무천과 만날 예정이었다.
수백 명이 빠져나간 무원장의 하늘에서 언젠가부터 솜털 같은 눈이 떨어지고 있었다.
비룡단과 함께 북상한 혁무천은 사흘 후 조주에 도착했다.
그들은 마을의 중심부로 가지 않고 북쪽 외곽에 있는 만수장원으로 갔다.
만수장원은 담장이 곧 무너질 것처럼 허름해 보이긴 해 제법 규모가 컸다.
비룡단이 정문으로 다가가자, 어슬렁거리며 근처를 돌아다니던 장한이 다가왔다.
“무슨 일로 오셨수?”
“무원장에서 왔네.”
장한은 그 말을 듣고는 더 물어보지도 않고 문을 세 번 두들겼다.
곧 정문이 열렸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장한이 공손히 말하고는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혁무천과 비천단원들도 가타부타 아무 말 없이 그를 따라서 걸음을 옮겼다.
장한은 혁무천 일행을 제법 큰 전각으로 안내했다.
전각 안으로 들어가자 세 사람이 앉아 있다가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