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천화 28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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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9화
“혹시 무혈자 이정 어른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다네. 자네도 아는가 보군.”
“숙부님이 되십니다.”
이현이 머쓱한 표정으로 말하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호오, 그래?”
“그런데 저…… 꼭 그분이 필요하겠습니까?”
“하남에서 강하기로 따지면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분 아닌가?”
“무공이 강한 건 저도 압니다만, 보주님께서 말씀하셨다시피 성격이 좀… 당신 하시고 싶은 대로 하시는 걸 좋아하셔서……. 오죽하면 칠사에 이름을 올리셨겠습니까.”
“하긴 그 선배 성격을 누가 이기겠나.”
듣고 있던 혁무천이 그쯤에서 입을 열었다.
“일단 만나보지요. 또 다른 분 없습니까?”
이현이 한 사람에 대해 말했다.
“동백산에 가시면 숙부님의 친구 분이 계실 겁니다. 다만, 그분 성격도 숙부님과 크게 다르지 않죠.”
괴팍하고 성격이 더러운 사람이라면 수없이 상대해 본 혁무천이다.
그에 대해선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동백산이면 멀지 않군. 내가 가보지.”
***
다음날, 혁무천은 동대안과 호광, 두 사람만 대동하고 무원장을 나섰다.
겨울답지 않게 햇살이 따뜻한 날씨였다.
경공을 펼친 세 사람은 유시 무렵 동백산 아래쪽에 있는 동화진에 도착했다.
해가 지기 시작한 시각.
혁무천은 동화진에서 밤을 보낸 후 산에는 아침에 올라가기로 했다.
동화진은 동백산에서 나오는 약초와 짐승의 가죽 등이 집결되는 곳이었다. 한마디로 돈이 도는 마을인 것이다.
그 덕분에 제법 많은 객잔과 술집이 늘어서 있었다.
혁무천 일행은 마을의 남쪽 거리에 있는 동상객잔으로 들어갔다.
객잔은 크지 않았는데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세 사람은 창문 쪽에 자리를 잡고 요리를 시켰다.
동대안과 호광, 둘 다 산에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동대안은 촉산에서 삼십 년을 살았고, 호광은 대별산 산왕이라 불린 사람 아닌가 말이다.
오랜만에 편한 마음으로 산을 앞에 두자 식사를 하는 표정도 밝았다.
“동백산에도 산적 많지?”
동대안이 요리를 먹으며 물었다.
호광이 피식 웃고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당연하지. 제일 유명한 놈은 동백귀호 조구삼인데… 예전에 나한테 뒤지게 터지고 동백산으로 도망쳐서…….”
신나게 말하던 호광이 어딘가를 보며 눈빛을 빛냈다.
동대안도 그의 시선을 따라서 고개를 돌렸다.
몇 사람이 객잔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다섯. 그들 중 중앙에 있는 자는 얼굴만 봐도 직업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인상이 더러웠다.
쭉 찢어진 눈매에 거무스름한 안색, 튀어난 불룩 튀어나온 광대뼈, 두툼한 입술. 뺨에는 십여 줄기 주름이 있는데, 자세히 보면 주름이 아니라 칼자국이었다.
그 칼자국 중 눈에서부터 콧등을 지나 귀밑까지 난 자국은 보는 이를 섬뜩하게 만들 정도였다.
어깨에 힘을 주고 안을 쓱, 훑어본 그는 어느 곳을 보더니 딱 움직임을 멈췄다.
“오랜만이다, 귀호.”
호광이 씩 웃으며 말을 건넸다.
안 그래도 더러운 조구삼의 인상이 시궁창처럼 구겨졌다.
“너, 너……!”
“전에는 안 그랬는데, 이제는 말도 더듬네.”
“이 개시끼…….”
“어허, 부하들 있는 곳에서 한판 붙자는 건 아니겠지?”
“…….”
조구삼은 흠칫하며 잔뜩 경계했다.
“두목, 저 새끼 뭡니까?”
옆에 서 있던 인상파 사내 중 하나가 슬쩍 물었다.
공력이 높은 호광은 그 소리를 다 들었다. 하지만 씩 웃기만 했다.
다른 사람은 화를 낼지 몰라도 그는 이해할 수 있었다. 말투가 그 정도는 되어야 산적 짓도 해먹을 수 있는 것이다.
그때 동대안이 물었다.
“저 친군가?”
“맞아.”
“성깔 좀 있겠는데?”
“성깔만 따지면 아마 저 산 위에 있는 양반들보다 못하지 않을걸?”
“실력도 좀 있을 거 같고.”
“넌 뭐야? 눈깔이나 아니나 젖만 한 넘이 어디서 씹다 뱉은 앵두 같은 조딩이로 까불대는 거냐?”
동대안이 그 말을 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쫌 신선하긴 했어. 그런데 씹다 뱉었다는 말은 좀 그렇군.”
조구삼의 양 옆에 있던 자들 중 큰 칼을 든 덩치가 앞으로 나섰다.
“까고 있네. 너는 내가 맡아주지.”
“어디든 꼭 이렇게 나대는 애들이 하나씩 있다니까.”
덩치가 눈을 부라리며 칼을 잡았다.
“이런 개……!”
순간!
슉!
한 줄기 빛이 번쩍이는가 싶더니 동대안의 섬혼이 덩치의 목에 닿았다.
덩치는 목을 뚫고 들어오는 서늘한 검기에 몸이 얼어붙었다. 칼은 이제 겨우 한 뼘밖에 빠져나오지 못한 상태였다.
“계속 하고 싶으면 해. 근데 아마 한마디도 다 하기 어려울 거야. 목이 시원하게 뚫릴 테니까.”
덩치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동대안이 섬혼을 거두면서 조구삼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피를 보고 싶으면 언제든 말해. 싹 다 턱 밑에 구멍을 뚫어주지.”
조구삼은 단 한 수만 보고도 동대안이 자신의 적수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어쩌면 놈은 산왕 호광보다 더 강할지도 몰랐다. 성격도 더 더러운 것 같고.
그래도 놈을 보고 있으니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크크크, 진짜 눈깔이 우리 집 지붕 위에 사는 다람쥐처럼 작네.”
의외로 동대안은 화를 내지 않았다.
“오, 다람쥐. 그거 귀엽지.”
그냥 쥐보다는 다람쥐가 그래도 훨씬 귀여웠다.
그때 혁무천이 말했다.
“동백산에 살면 그 사람들도 알겠군.”
호광은 혁무천의 말뜻을 바로 알아들었다.
“그럴걸?”
그래서 조구삼에게 물어보았다.
“조가야, 너 무삼곡에 사는 이정이란 사람 아냐?”
째려보던 조구삼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무, 무삼곡?”
“아는가 보군. 거기에 성격 뭐 같은 사람 있지?”
“그 미친놈은 왜……?”
“좀 만나려고.”
조구삼은 재빨리 눈알을 굴렸다.
그놈과 싸워봐서 안다. 멋모르고 대들었다가 딱 안 죽을 만큼 맞았다.
아마 그 미친놈이라면 호광도 함부로 할 수 없을 것이다. 잘하면 둘이서 미친 듯이 싸우다가 둘 다 죽을지도 모르고.
“알긴 아는데…….”
“그럼 내일 우리 좀 안내해 줘.”
“내가 왜 네놈 말을 듣는단 말이냐?”
“안 그럼 네 산채가 사라질지도 모르거든.”
“뭐야?”
조구삼이 눈을 부릅뜨고 쳐다보자, 호광이 혁무천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안 그런가, 장주?”
“표행에 방해가 되는 산적은 없는 게 낫지. 말 안 듣는 산적은 더더욱 필요 없고.”
“맞아, 무원장의 표행에도 방해가 될 거네.”
“무원장?”
흠칫한 조구삼의 눈이 커졌다.
동백산을 주름잡는 산적답게 그도 무원장에 대한 이야기를 귀가 따갑게 들어본 터였다.
“맞아. 여기 있는 분이 바로 그 무원장의 주인이지.”
“설마…… 무천?”
조구삼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한편으로는 희망에 찬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정말 저 낯짝 번지르르한 놈이 무천이라면 무삼곡의 미친놈과 싸우다가 죽지는 않을 것 같다.
대신 그 미친놈을 죽이거나 데려갈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그놈만 떠난다면 동백산에 평화가 올 것이다.
“좋아, 안내해주지.”
***
조구삼 덕분에 무삼곡을 찾는 일이 쉬워졌다.
아침 일찍 객잔을 나선 혁무천 일행은 조구삼을 따라 동백산으로 들어갔다.
무삼곡은 입구에서부터 삼십 리 정도 들어간 곳에 있었다.
“그 미친놈은 저 안에 있다.”
조구삼이 절벽 사이로 난 계곡 안을 가리키며 말했다.
절벽 사이의 공간은 이십여 장 정도 되었다. 우측으로 계곡물이 흘렀다. 좌측에는 숲이 우거져 있는데, 한 사람이 겨우 통과할 수 있는 소로가 나 있었다.
우거진 숲으로 인해 안쪽이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대략적인 지형만 봐도 제법 넓은 공간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앞장 서.”
호광이 조구삼에게 말했다. 하지만 조구삼은 들어가기가 싫은 듯 멈칫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싫어. 난 안내만 하기로 했잖아.”
“안내를 하려면 마지막까지 해야지. 저 안에 그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알아?”
“에이 씨, 그 미친놈이 다음에 또 보이면 가만 안 둔다고 했는데.”
“우리가 있는데 뭔 걱정이야?”
맞다. 이번에는 자신과 수하들만 온 것이 아니다.
녹림삼왕 중 하나인 대별산의 산왕이 함께 왔다. 거기다 산왕도 한 수 깔고 들어가는 무천이란 놈도 있지 않은가.
눈깔이 쥐똥만 한 놈도 있고.
“조, 좋아. 알았다.”
그때였다. 혁무천이 계곡 안쪽을 노려보더니 휙 몸을 날렸다.
생각지 못한 행동에 호광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 장주!”
반면 동대안은 곧장 뒤따라서 땅을 박찼다.
“뭐야, 대체?”
구시렁거린 호광도 두 사람을 따라서 몸을 날렸다.
수하들과 남은 조구삼은 눈만 껌벅였다.
이대로 떠나버려도 상관없었다. 자신은 약속을 지켰으니까.
그런데 궁금증이 그를 놔주지 않았다.
“아, 씨바. 야, 너희들은 산채로 먼저 돌아가. 나는 저 안쪽 좀 구경하고 갈 테니까.”
그러고는 소로를 통해서 빠르게 사라졌다.
비록 대별산의 산왕에게 깨지긴 했지만 그도 절정 경지를 맛본 고수였다.
짐작했던 대로 계곡 안은 제법 넓은 분지였다.
백여 장 정도 들어가자 공터가 보였다. 직경 이십여 장 정도 되는 공터였다.
그 공터에서 세 사람이 대치하고 있었다.
색 바랜 갈의를 입고 헝클어진 머리에 거친 수염이 난 사십대 중년인. 누더기 같은 가죽옷을 입고 있는 중년인. 그리고 두 중년인 맞은편에는 짙은 청색 무복을 입은 장한이 서 있었다.
갈색옷의 중년인과 청색 무복의 장한은 검을, 가죽옷의 중년인은 칼을 들고 있었다.
혁무천은 청색 무복을 입은 장한을 보고 눈빛을 반짝였다.
‘천위가 여긴 왜?’
수염이 거칠게 났고 옷도 허름해진 상태였지만, 장한의 정체를 아는 건 어렵지 않았다.
자신과 대결을 벌였던 천화상단의 천위. 분명 그였다.
혁무천은 이십여 장 떨어진 곳에서 세 사람의 대치를 지켜보았다.
천위의 실력은 자신이 알고 있었다.
셋의 대결을 지켜보면 두 중년인의 무위도 대충은 알 수 있지 않겠는가.
“저 사람들인가?”
혁무천 옆에 내려선 호광이 눈을 홉떴다.
초절정경지에 오른 그는 멀리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세 사람의 실력이 자신의 아래가 아니라는 걸 바로 느낄 수 있었다.
동대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세 사람을 자신의 심상에서 띄워놓고 상대해보았다.
자신도 모르게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조또, 겁나 세네.’
셋 중 누구도 만만한 자가 없었다.
그때 오 장 간격을 두고 서 있던 세 사람 중 가죽옷을 입은 중년인이 앞으로 나아가며 천위를 공격했다.
그가 칼을 휘두르자 푸르스름한 도기가 구름처럼 일어났다.
천위는 갈색옷의 중년인은 신경 쓰지 않고 가죽옷의 중년인만 상대했다.
그의 검이 구름처럼 일어난 도기 사이로 벼락같이 뻗어나갔다.
쩌저저저정!
따다당!
검과 도가 뒤엉키며 기의 파편이 비산했다.
두 사람도 전후좌우로 빠르게 신법을 펼쳐서 그림자만 보일 지경이었다.
순식간에 칠팔 초의 공방이 벌어졌다.
두 사람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상대의 빈틈을 파고들기 위해 눈을 번뜩였다.
속도만 빠른 것이 아니었다.
두 사람의 격돌로 인한 기파는 단단한 대지를 들썩일 정도로 강력했다. 주먹만 한 자갈이 기의 파편에 맞아서 부서졌다.
그렇게 십여 초식쯤 흘렀을 때였다.
콰광!
유난히 큰 굉음이 울리더니 두 사람이 반대방향으로 튕겨 나갔다.
가죽옷을 입은 중년인은 이를 악물고 부릅뜬 눈으로 천위를 노려보았다.
툭.
가죽옷 한쪽이 잘라져서 떨어졌다.
그 안쪽에서 핏기가 보였다.
큰 상처는 아니었다. 그래도 자신이 밀렸다는 것에 자존심이 상한 듯했다.
천위는 허무함마저 느껴지는 눈빛으로 중년인을 바라보았다.
“아쉽게도 조금 부족해.”
중년인은 눈을 치켜떴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이만 악물었다.
천위의 시선이 이번에는 갈색옷을 입은 자에게로 향했다.
“이번에는 당신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