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천화 28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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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6화
“우하하하! 그의 말이 사실이었어. 역시 너도 그 기운을 얻었구나!”
백색 피풍의를 두른 자가 대소를 터트리며 검을 뽑았다.
순간, 땅바닥이 원을 그리며 촥! 밀려나고, 붉은 빛이 나는 기운이 폭사하듯 솟구쳤다.
천화광이 백색 피풍의의 사내 위로 하강하며 검을 내질렀다.
초식의 대결이라기보다는 검을 빌린 공력의 대결이었다.
두 사람의 기운이 찰나 간 뒤엉키는가 싶더니,
콰아앙!
굉음을 일으키며 폭발했다.
백색 피풍의를 두른 자를 중심으로 이 장 반경의 대지가 솟구치고, 먼지구름이 일었다.
허공으로 솟구친 천화광이 빙글빙글 돌며 오 장이나 날아가서 내려섰다.
푹푹.
땅에 내려선 천화광의 두 발이 단단한 땅바닥을 다섯 치나 파고 들어갔다.
치켜뜬 그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먼지구름이 가라앉은 저 앞에 백색 피풍의를 입은 자가 서 있었다.
땅에 한 자나 박힌 발을 천천히 빼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크읍.’
가슴에서 뭔가가 울컥 치밀었다.
강제로 그 느낌을 억누른 천화광도 땅에서 발을 빼내고 흔들린 진기를 진정시켰다.
그때 문득 상대의 정체가 머릿속에서 스쳤다.
“혹시…… 네놈이 정혈단주?”
백색 피풍의를 걸친 사내, 사마신이 하얗게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래, 내가 바로 정혈천의 주인이니라.”
“본 성의 일…… 네놈들이 저지른 짓이냐?”
“그래도 멍청하지는 않군.”
“이, 이 죽일 놈이……!”
“세상은 피로써 정화가 될 것이다. 천화광, 내가 직접 네 심장을 거두는 걸 영광으로 알아라!”
사마신이 오만한 태도로 말하고는 천화광을 향해 날아갔다. 사선으로 들고 있던 검이 앞으로 향하면서 핏빛 혈광이 검신에서 뻗쳤다.
천화광은 검에 십성 공력을 집중시키고 마주쳐갔다.
두 사람에게서 뻗어나간 검강의 기운이 용호상박의 기세로 뒤엉켰다.
쩌저저정! 콰광!
귀청을 찢는 굉음.
대기를 찢어발기는 검강의 파편.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격돌한 두 사람을 중심으로 기의 폭풍이 휘몰아쳤다.
솟구치는 대지.
휘몰아치는 먼지구름.
팔마위는 멀리서 그 광경을 보며 달렸다.
하지만 그들은 두 사람의 격전지까지 갈 수 없었다.
휘리리릭.
우측의 절벽 위에서 하얀 구름이 떨어지듯 백의를 입은 복면인 다섯이 날아내렸다.
그들은 곧장 팔마위를 향해 몸을 날리며 무기를 뽑아들었다.
바로 그때,
콰광!
천화광과 사마신 쪽에서 천둥 같은 굉음이 터져 나왔다.
얼굴이 일그러진 채 뒤로 튕겨나간 천화광의 몸에서 핏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사마신도 이마를 찌푸리고 주춤주춤 두어 걸음 물러섰다.
바로 그 순간, 피를 뿜으며 튕겨나간 천화광이 땅을 박차고 숲속으로 날아갔다.
사마신은 그 모습을 보고 이마를 찌푸렸다.
하지만 그뿐, 천화광을 추적하지 않고 냉소를 지었다.
심장을 뽑아내지 못한 건 아쉬웠다.
그러나 만마성이 절망을 맛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천외의 힘을 얻은 놈 중 하나가 사라지는군.’
문득 의문이 들었다.
천하에 천외의 그 힘을 얻은 자가 몇이나 될까?
‘그들을 하나하나 사냥하는 것도 재미있겠어.’
***
충격과 분노에 휩싸여 있던 만마성에 또 하나의 충격이 더해졌다.
남양에서 만마성으로 달려오던 천화광이 십 리 떨어진 곳에서 중상을 입은 상태로 발견된 것이다.
온몸이 피로 물든 천화광을 발견한 만마성 순찰무사들은 그를 업고 급히 만마성으로 돌아왔다.
의원들이 달라붙어서 천화광의 몸 상태를 살펴보았다.
하지만 결과는 그리 좋지 못했다.
기경팔맥이 몇 군데나 막혀 있고, 근육과 힘줄이 끊긴 곳도 있었다.
더 큰 문제는 하루가 지나도록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제는 목숨을 구할 수 있을지 그조차도 장담할 수 없었다.
천화광에 대한 소식은 혁무천에게도 전해졌다.
“천화광이 당했다고?”
“예, 대형. 만마성에서 벌어진 일을 알고 달려가다가 당한 것 같습니다.”
혁무천은 천화광이 사경을 헤맨다는 소식을 듣고 쓴웃음을 지었다.
우스개처럼 맺은 사이지만, 어쨌든 친구처럼 지내기로 했던 자 아닌가.
성정도 마도 인물치고는 그리 악한 것 같지 않았고.
“범인은?”
혁무천이 묻자, 목량이 씁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정혈단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천화광을 호위하던 팔마위가 모두 시신으로 발견되었는데, 그 시신에서 정혈단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합니다.”
그 말을 들은 혁무천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정혈단이라…… 천화광이 그들을 우연히 만난 거라고 보느냐?”
“아닐 겁니다. 아마 정혈단은 천화광이 만마성으로 달려올 것을 알고 기다렸을 겁니다.”
이현이 냉정하게 분석해서 말했다.
혁무천도 그 말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내 생각도 같다. 어쩌면 정혈단주 사마신은 천화광이 혼돈의 힘을 얻었다는 것도 알고 있었을지 모르겠군.”
“후에 자신을 위협할 강적이 될지 모르는 천화광을 유인하려고 만마성에 독을 풀었을 수도 있겠군요.”
“너무 비약된 추측이긴 하지만, 결과를 보면 아니라고 할 수도 없지.”
참으로 무서운 일이었다.
“지금 만마성의 모든 무사들에게 대기 명령이 떨어져 있는 상태입니다.”
“정은맹도 보고만 있지는 않을 것 같은데.”
“이 기회에 권역을 넓히려고 할 겁니다.”
“목량, 풍마루와 개방에게 그들의 움직임을 철저히 지켜보라고 해라.”
“예, 대형.”
***
혁무천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연속된 충격으로 만마성의 분위기가 나락으로 떨어져 있던 그때, 정은맹 삼천 무사가 밤을 틈타 여양의 만가장을 나와서 일제히 남하했다.
십 개조로 나누어진 그들은 관도가 아닌 서쪽의 복우산 줄기를 타고 이동했다.
이틀 후, 남양에 도착한 그들은 옥가장을 비롯해서 남양 일대의 마도문파들을 해일처럼 덮쳤다.
만마장 장로 파구청이 무사들을 독려하며 대항했다.
하지만 신도명산이 직접 그를 상대해서 목을 베자 만마성 무사들의 사기가 바닥까지 떨어졌다.
단숨에 옥가장과 중소 마도문파 네 곳을 무너뜨린 정은맹은 곧장 당주와 등주, 신야, 필양 등에 있는 마도문파들을 공격했다.
개중에는 만마성의 지부도 있었고, 나름대로 세를 키우던 마도문파도 있었다.
이틀 동안 이어진 정은맹의 공격으로 마도 무사 이천여 명이 죽어갔다.
그리고 사흘째 되던 날에는 정은맹이 남양 일대의 분지를 장악했다.
만마성의 살아남은 무사들은 일단 조양까지 후퇴했다.
혁무천은 삼현에게 하루에 서너 번씩 보고를 받으며 상황을 주시했다.
복우산을 중심으로 벌어졌던 전쟁이 이제는 남양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철혈마련과 귀천교가 대규모로 움직이고 있다 합니다.”
목량의 말을 들은 혁무천이 물었다.
“인원은?”
“각기 최소 일천 명, 최대 이천에 이르는 전력입니다.”
복우산의 정사대전 때보다 더 많은 인원을 투입했다.
“창파에서 패배한 충격이 컸던 모양이군.”
“남양에서 결판을 내려는 것 같습니다.”
만마성이 엄청난 피해를 입은 상황. 이 기회에 팔대마세의 판도를 바꾸어보고 싶은 욕심도 한몫 했을 것이다.
“섬서성 쪽도 피가 마를 날이 없다고 합니다.”
혈왕곡과 마황궁이 정은맹과 정혈단에 의해 무너졌던 섬서성 남쪽을 다시 차지하려고 무사대를 파견했다.
하지만 긴 잠에서 깨어나기 시작한 정파가 강력하게 저항하고 있어서 쉽지 않았다.
특히 남궁무룡과 이사명은 정은맹의 맹도 일부를 규합했는데 그 숫자가 천 명도 더 되었다.
“여기저기서 아귀다툼이 벌어지는군.”
“대형께선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목량이 물었다.
혁무천은 무심한 표정으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러고는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우리를 건들지만 않으면 일단 지켜보면서 대응하자.”
“대규모 싸움이 벌어지면 식량과 무기 등 공급할 전략물자가 부족할지도 모릅니다.”
백리양은 장사꾼답게 걱정거리가 목량과 달랐다.
복우산 정사대전 때와 달리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었다. 식량 확보도 가을과는 상황이 달랐다.
그럼에도 혁무천은 걱정할 것 없다는 듯 태연히 말했다.
“봄에 풀려고 비축해 놓았던 물량을 모두 풀어라.”
“그럼 봄에 공급할 물량이 부족할 텐데, 괜찮겠습니까?”
“일단 풀고 상인들 것을 사들여. 웃돈을 삼 할 얹어준다고 하면 마다하지 않을 거다.”
백리양의 눈이 커졌다.
“삼 할이나요?”
“걱정할 것 없어. 마도세력 쪽에 두 배로 팔면 되니까.”
“예?”
이번에는 이현과 목량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저들이 두 배나 주고 사겠습니까?”
“가격은 시간과 물량, 필요의 절실함에 의해서 결정되는 법이다. 급한데 살 물건이 없으면 두 배가 아니라 세 배, 네 배라도 사게 돼 있어.”
“…….”
“그런데 세 배 이상 받는 건 너무 도둑놈 맘보 같으니 두 배만 받으려는 거야. 그 정도면 양심적이지.”
“아!”
백리양이 감탄하며 존경의 눈빛으로 혁무천을 바라보았다. 대하면 대할수록 장사꾼 자질이 대단한 대형이다.
반면 목량과 이현은 혁무천을 바라보는 표정이 꼭 ‘도둑놈’이라고 말하고 싶은 눈치였다.
혁무천도 그들의 표정이 무슨 뜻인지 모르지 않았다.
“왜 그런 표정으로 봐? 장사는 뭐 흙 파서 하는 줄 알아? 솔직히 나는 마음이 약해서 아직 장사꾼이 되려면 멀었어. 이럴 때는 눈 딱 감고 세 배는 받아야 되는데 말이야.”
“…….”
***
남양의 상황을 보고 받은 천양묵은 대기 중이던 정예무사들을 직접 이끌고 조양으로 향했다.
만마전의 주요고수들이 모인 만마전과 검마전, 혈마전의 고수들도 총동원되었다.
더 이상 밀리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아들에 대한 복수는 물론이고, 그 동안 죽어간 만마성 무사들의 원혼을 위로해야 했다.
특히 생사를 오가는 아들을 보면서 부인이 흘린 눈물의 대가를 반드시 받아낼 작정이었다.
공손락도 만마성에 머물고 있는 마천문 무사들을 모조리 이끌고 동행했다.
자른 손가락에서 고통이 느껴질 때마다 분노가 활화산처럼 솟구쳤다.
공손두가 공손락을 보좌했다. 하지만 그는 분노보다는 뜨거운 호승심 때문에 눈빛이 타올랐다.
천외의 힘을 얻은 천화광이 당했다. 자신이 인정한 호적수 중 하나인 천화광이.
정혈단주. 누군지 모르지만 자신의 모든 것을 드러내서 그자와 한판 대결을 펼치고 싶었다.
그날 오후.
만마성 조양지부에 도착한 천양묵은 오래 지체하지 않았다.
“내일 당주를 치고 모레 남양을 되찾을 것이다!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라!”
사야가 불길함을 느끼고 말리려 했지만, 이번만큼은 천양묵도 자신의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
“사야, 이번만큼은 내 뜻대로 할 것이다. 그것이 내가 죽어간 무사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니라. 너는 물러서 있어라.”
사야는 자신의 힘으로는 말릴 수 없음을 깨닫고 순순히 물러섰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아침을 먹은 후 조양지부를 출발했다.
만마성과 마천문의 삼천 무사는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북상했다.
겨울의 추위조차 그들의 열기를 식히지 못했다.
두 시진 후.
만마성의 당주지부였던 장원이 백여 장 앞으로 다가오자 천양묵의 눈에서 파란 광채가 번뜩였다.
“철저히 쓸어버려라! 한 놈도 남기지 말고 모조리!”
그의 목소리가 평원에 울려 퍼졌다.
삼천 무사의 무기를 빼드는 소리가 가슴을 진동시켰다.
“만마의 영광을 위해!”
“가자, 만마의 무사들아!”
“마천이여, 영원하라!”
멀리 보이던 장원이 빠르게 가까워졌다.
장원 앞에는 정은맹 무사 수백 명이 늘어서 있었다.
그런데 만마성과 마천문 무사들이 오십여 장 거리까지 다가오자 갑자기 담장을 넘어서 허둥지둥 안으로 들어갔다.
“놈들이 도망친다!
“우하하하! 겁쟁이 같은 놈들!”
“모조리 죽여라!”
만마성 간부들이 고함과 욕설을 내지르며 무사들의 투지를 독려했다.
무사들이 옆으로 넓게 퍼져서 내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