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천화 28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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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281회 작성일소설 읽기 : 귀환천화 284화
284화
팽조환이 나가고 반각쯤 지났을 때였다.
적상천이 열기 띤 표정으로 들어왔다.
그 표정을 본 신도명산이 의아해 하며 물었다.
“무슨 일이냐?”
“정혈단이 만마성 당주지부를 공격해서 무너뜨렸다 합니다.”
“그래?”
“등주에 이어서 당주지부까지 무너졌으니 남양 일대를 지배하던 만마성의 힘도 현격히 약화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기회에 우리가 남양을 차지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신도명산은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흐음, 그것도 나쁘지 않은 생각이군.”
어떻게든 흔들린 정은맹을 안정시켜야 했다.
만마성의 구역이나 다름없던 남양 일대를 차지한다면 내분을 잠재우는데 상당한 도움이 될 듯했다.
이익이 되는 것은 그뿐이 아니었다.
“적은 힘으로 만마성의 잔당들을 남양에서 몰아내면 망설이던 정파무사들도 방향을 정할 수밖에 없을 거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
마룡성에 머물던 혁무천은 풍마루 정보원으로부터 창평의 소식을 듣고 표정이 굳어졌다.
자신과 은설이 예상했던 대로, 창평의 정혈단은 미끼에 불과했다.
그로 인해 사찰을 공격한 악사광과 우문척이 큰 낭패를 당했다.
특히 귀천교는 오백여 명 중 살아남은 자가 백여 명에 불과하다고 했다.
“그 이후 어떻게 됐지?”
혁무천이 찻잔을 들며 무심한 어조로 물었다.
풍마루 정보원이 그런 혁무천을 힐끔 본 후 대답했다.
“악사광과 우문척이 힘을 합쳤습니다. 아무래도 협력해서 정혈단과 정은맹을 치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정혈단이 어디로 갔는지 찾아냈나?”
후루룩.
혁무천이 질문을 하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찾고 있는 중입니다. 당시 감시하던 두 사람이 모두 죽어서 바로 뒤쫓지 못했습니다.”
감시하던 자가 죽임을 당했다면, 그들이 감시자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혁무천은 찻잔을 내려놓고 담담하게 말했다.
“최대한 정보원을 풀어서 그들을 찾아내라고 문주께 말하게.”
“예, 장주.”
풍마루 정보원을 내보낸 혁무천은 다시 찻잔을 들었다.
‘정혈단주. 어떤 자인지 만나보고 싶군.’
미완의 마공을 익혀서 피를 추구하는 살귀가 된 자.
그렇게만 알았다.
물론 뛰어난 병법을 기본적으로 갖추었을 거라는 것을 모르진 않았다.
그 정도 머리가 되니 자신이 혈천여록에 숨겨 놓은 미완의 마공을 풀이해낸 것이겠지.
그런데 생각했던 것보다 더 뛰어난 것 같다.
‘뭘 원하는 거냐?’
문제는 그가 원하는 것이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전까지는 마도를 물리치고 정파를 일으키는 일에 자신의 힘을 썼다.
그러다 이제는 독립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주 자신만만하게.
그가 강호를 혼돈에 빠뜨리려는 이유는?
천하를 얻고 싶은 걸까?
아니, 지금까지의 움직임으로 봐서는 그런 욕심을 부리는 것 같진 않다.
그럼…….
혁무천은 찻잔을 입술에 댄 채 손을 멈췄다.
‘설마……?’
천천히 손을 움직인 그는 찻잔을 비웠다. 그리고 빈 찻잔 속을 바라보았다.
찻물이 비워진 찻잔 속에 미세한 찌꺼기만 남아 있었다.
혁무천의 입술이 서서히 벌어지며 어이없다는 듯 실소가 맺혔다.
‘정말 그걸 원하는 건 아니겠지?’
만약 자신의 추측이 사실이라면, 과거의 자신보다 더 미친놈이라는 말이었다.
‘아무래도 일찍 돌아가야 할 것 같군.’
***
혁무천은 백룡대와 청룡대를 마룡성에 남겨 놓고 무원장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느낌이 이상했다.
무원장의 무사 숫자가 이백 명이나 줄었는데도 이상하게 별 차이가 없는 듯 느껴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회의를 하는데 이현이 어색한 표정으로 말했다.
“장주, 무원오공에 대한 소문이 퍼지면서 사흘 동안 백여 명이 새로 들어왔습니다.”
자질과 인성을 가려서 뽑았는데도 그렇단다.
그리고 오늘도 이미 삼십여 명이 시험을 통과했다고 한다.
“결국 그대로군. 아니지, 더 많아지겠는데?”
지금도 시험에 응하려는 무사들이 줄을 서 있었다.
무사의 숫자가 많아지는 걸 좋아해야할지, 걱정해야 할지…….
“혹시 몰라서 장원을 두 곳 더 매입했습니다.”
“두 곳이나?”
“한 곳은 전면 이백여 장 떨어진 곳에 있고, 한 곳은 우측 백여 장 정도 거리에 있습니다.”
“흠, 그래? 그럼 왼쪽만 빈 건가?”
“그래서 왼쪽에 있는 장원도 매입할까 합니다. 그럼 오행의 방위에 따라 방어망까지 완벽하게 구축할 수…… 왜 그러십니까?”
이현이 설명을 하다 말고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혁무천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현.”
“예, 장주.”
“자네 돈 아니라고 너무 막 쓰는 거 아니야?”
혁무천이 눈을 가늘게 좁히며 말했다.
하지만 이현은 눈썹 한 올 꿈쩍하지 않았다.
“저희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오가다 보니 이 부근 상권이 빠르게 살아나고 있습니다. 아마 이삼 년쯤 지나면 가격이 서너 배는 올라 있을 겁니다.”
혁무천은 그 말에 즉시 표정을 바꿨다.
“음? 그래? 그렇다면 뭐 상관없지. 왼쪽의 장원도 괜찮은 것 나오면 사. 기왕이면 큰 걸로.”
“예, 장주.”
혁무천이 이번에는 백리양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양, 수금은 제대로 되고 있나?”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겨우 참은 백리양이 대답했다.
“예, 대형.”
거상들의 여유 물량을 매입한 일은 성공적이었다.
이미 대부분의 물량을 선매도 했다. 그것도 현금을 먼저 받고.
거기다 없는 품목은 무원장의 물량을 넘겼다. 물론 그 물량은 이익을 톡톡히 봤다.
장사는 현금 흐름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런데 나갔던 현금을 모두 회수했을 뿐만 아니라 이익까지 봤다.
거기에 거상들을 우군으로 끌어들이기까지!
최상의 결과라 할 수 있었다.
“좋아, 내년 구룡대총회에서 창피 당하지는 않겠군.”
“아마 대형께 구룡상단 총단주를 맡으라고 할지도 모릅니다.”
구룡상단 역사상 이렇게 빠른 성장을 보인 상인은 없었다.
더구나 무력에서도 어지간한 강호세력에게 밀리지 않았다. 이제는 강호문파들도, 심지어 녹림도들도 구룡상단 소속이라고 하면 한발 양보했다.
구룡상단이 언제 지금처럼 어깨 펴고 장사한 적이 있던가?
한 번도 없었다.
“그건 싫어. 하고 싶으면 네가 해. 난 세상이 조용해지면 설아하고 놀러 다닐 거다.”
“제가 한다고 하면 미쳤다고 할 겁니다.”
그때 목량이 넌지시 말했다.
“대형, 그냥 맡으시죠.”
“응? 왜?”
“앞으로 혼돈천하가 될 거라고 하셨는데, 힘을 하나로 모으는 게 낫지 않을까 합니다.”
구룡상가의 구주 중 한 곳에서 이백 명씩만 보내도 모두 이천 명에 가깝다. 그들 모두 무천이 건네준 무원오공으로 인해 실력이 빠르게 늘고 있었다.
어쩌면 그들 역시 무원장처럼 인원도 늘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혁무천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어차피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니까.”
***
공손락과 차를 마시고 있던 천양묵은 보고를 들으며 이마를 찌푸렸다.
당주지부가 무너진 지 닷새가 지났다.
남양 옥가장에 있던 아들이 급히 당주지부로 달려갔지만 정혈단의 꼬리도 잡지 못했다.
그 사이 들어온 소식에 의하면, 철혈마련과 귀천교 역시 정혈단과 싸워서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천하가 정혈단에게 농락을 당하는 듯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정은맹이 만마성의 주 활동무대 중 하나인 남양을 기웃거리고 있다지 않는가 말이다.
“흥! 어수선한 기회를 틈타서 남양을 먹겠다는 건가?”
“등주와 당주가 무너졌으니 욕심을 내는 것이겠지요.”
사야의 조용조용한 말에 천양묵이 이마를 씰룩거렸다.
“어림없는 소리. 놈들에게 절대로 남양을 내주어서는 안 된다.”
“놈들을 남양으로 끌어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천양묵은 이마를 찌푸린 채, 오른쪽에 서 있는 사야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끌어낸다?”
“신도명산은 욕심이 많은 자입니다. 여양의 촌구석에 처박혀서 지내고 싶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그들을 상대하기에도, 복우산을 등지고 있는 여양보다는 남양이 더 낫습니다.”
천양묵은 사야의 말에 이마를 좁히고 콧등을 씰룩였다.
일리 있는 말이었다.
옆에 앉아 있던 공손락이 사야의 의견에 동의했다.
“네 말은, 놈들이 남양에 들어오도록 놔두자는 거냐?”
“예, 문주. 그물을 쳐서 고기를 잡으려면 먼저 고기를 한곳으로 모아야 하지요. 방심하게 만들면 더 좋고요.”
“흠…….”
천양묵은 탁자 위를 손가락으로 톡톡 치며 생각을 정리했다.
상황이 꼬인 이유는, 놈들을 치려고 복우산에 들어갔다가 너무 큰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정은맹, 정확히는 사마진웅의 잔꾀에 말려든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정은맹을 지휘하는 자가 사마진웅이 아닌 신도명산이다.
교활한 것은 사마진웅보다 몇 배나 더한 놈.
무공도 절대경지에 오른 고수.
하지만 놈은 그래서 오만하다. 마도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래서 상대하기가 더 쉬운 놈이다.
천양묵은 두 눈에서 묵광을 번뜩이며 호위에게 명을 내렸다.
“장로와 간부들을 소집하라.”
한편, 천두공은 장로회의에 참석하지 않고 혼자 고민에 빠졌다.
무천이 마천제의 후예라는 걸 말해야 하나?
그 말을 하면 성주는 어떻게 생각할까?
천두공도 과거 만마성이 마천제를 배신했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무천이 그 일에 대해서 아무런 말도 없는 걸 보면 과거의 일은 따지지 않으려는 듯했다.
아니면 그 일을 모르고 있든지.
“후우, 그나마 소군께서 우리 만마성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서 다행이긴 한데…….”
천두공은 답이 나오지 않자 답답해서 방을 나섰다. 찬바람이라도 쐬면 좀 나을 듯했다.
그런데 밖으로 나오자,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
어느새 눈이 내린 것이다.
“허어, 언제 내렸지?”
호위무사대의 조장이 그를 보고는 고개를 숙였다.
“일각 전부터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장로회의는 아직도 안 끝났느냐?”
“예, 태대장로님.”
만마대전 쪽을 슬쩍 돌아본 천두공은 입맛을 다시며 발길을 다른 쪽으로 돌렸다.
“눈도 구경할 겸, 바람 좀 쐴 것이니 따라올 것 없다.”
한참을 걷던 천두공은 만마총으로 발길을 옮겼다.
눈이 쌓인 만마총은 유난히 장엄한 광경을 연출하곤 했다. 오늘 같으면 더 멋진 풍광을 구경할 수 있을 듯했다.
아니나 다를까, 만마총은 거대한 석총 위에 눈이 하얗게 쌓여서 장관을 연출했다.
한참 동안 만마총을 바라보던 천두공이 피식 웃었다.
무천을 만난 곳이 이곳이었다.
그때 혼내주겠다고 주접떨던 걸 생각하니 웃음만 나왔다.
“소군께서 그때 작심했으면 이 늙은이의 뼈가 부러졌을 텐데.”
쓴웃음을 지으며 만마총을 천천히 한 바퀴 돈 그의 눈에 노인이 하나 보였다.
만마총을 관리하는 노인이었다.
천두공은 노인에게 다가갔다.
“수고가 많구만.”
“어이구, 눈이 오는데 어찌 나오셨습니까.”
“바람 좀 쐬러 나왔지. 혹시 거처에 차 있나?”
“예, 있습죠. 하지만 싸구려 차라 입에 맞으실지…….”
“차는 싼 게 더 맛있는 법이지. 더구나 이런 경치를 보며 마신다면 아마 최상의 용정차보다 나을 게야.”
“그건 그렇습죠. 안으로 드시지요.”
천두공은 노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노인의 뒷모습을 보던 천두공의 눈빛이 묘하게 반짝였다.
‘저 걸음걸이는…….’
노인은 불씨가 남은 화로 위의 찻주전자를 들어 차를 따랐다.
누런빛이 나는 차였는데, 은은한 약향이 났다.
“제가 이것저것 약초를 넣어서 달인 차입니다요.”
“호오, 그래?”
천두공은 투박한 찻잔에 따라준 차를 들어서 살짝 맛을 보았다.
첫맛은 씁쓸했지만 곧 달짝지근한 맛이 나면서 약향이 입안으로 은은하게 퍼졌다.
“흐음, 이거 좋은데?”
“어이구, 입맛에 맞다니 다행입니다.”
“이 좋은 차를 혼자 마시고 있었다니, 자네도 욕심이 많구먼, 사마곡.”
“욕심은 무슨…….”
미소를 띤 채 대답하던 노인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졌다.
그러고는 차를 마시는 천두공을 빤히 바라보았다.
“어떻게 아셨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