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천화 28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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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411회 작성일소설 읽기 : 귀환천화 280화
280화
자신이 잘못 본 줄 알았다.
그가 살아 있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하지만 백십이 년 전에 봤던 그의 얼굴과 너무나 같았다.
눈, 코, 입, 귀. 피부가 좀 하얗고 윤기 나는 것만 다를 뿐, 모든 게 같았다.
그리고 그의 옆구리에 매달린 검!
‘천망검이었어.’
그 검을 어찌 잊을까.
천망검이 자신의 얼굴에 남겨놓은 흔적이 아직도 그대로 있거늘. 잘려나간 오른손 새끼손가락이 있던 자리가 비만 오면 아직도 쑤시거늘.
하긴 자신도 소림에서 깨달음을 얻어 백사십 살 넘도록 아직까지 살아 있는데, 그라고 해서 살아있지 말란 법은 없지 않는가.
“아미타불…….”
“왜 그러시는가?”
원공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철우를 바라보았다. 철우의 오늘 같은 모습은 함께 지낸 칠십여 년 동안 처음이었다.
철우의 눈이 천천히 뜨여졌다.
“헛것이 보이는 걸 보면 이 땡초도 이제 갈 때가 다 되었나 보네.”
“……?”
대보암에서 나온 혁무천은 은설과 동대안이 있는 대웅전 앞으로 돌아갔다.
대웅전 앞에 십여 명이 모여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혁무천은 이마를 찌푸렸다.
은설과 동대안이 네 사람과 대치하고 있었다.
학이 수놓아진 갈색 비단옷을 입은 청년과 청색 무복을 입은 장한 셋.
싸움이 난 것은 아니지만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저렇게 눈이 쥐똥만 한 사람과 다니느니 나와 함께 다니는 게 낫지 않겠느냐?”
혁무천은 청년의 오만함이 배인 말투를 듣고서야 어떻게 된 일인 줄 알 수 있었다. 아마도 청년이 은설을 보고 수작을 부리는 듯했다.
그런데 은설이 말했다.
“당신도 우리 오빠에 비하면 못 생긴 얼굴이거든요? 그러니 향화를 올리러 왔으면 저쪽으로 가보세요. 저쪽에서 얼빠진 아가씨들이 당신만 쳐다보잖아요.”
“어느 분 앞이라고 감히……!”
장한 하나가 눈을 부라리며 나서려다가 청년의 제지를 받고 멈칫했다.
“제법 대가 센 여인이구나.”
청년은 은설의 툭툭 쏘는 말투를 듣고도 미소를 지었다.
오만한 말투를 사용하긴 해도 행동까지 함부로 하지는 않는 자 같았다.
“그럼 차나 한잔 하는 건 어떠냐? 그 정도는 괜찮겠지?”
“여기서 오빠를 기다리기로……. 어? 오빠!”
은설이 고개를 돌렸다가 다가오는 혁무천을 발견하고 활짝 웃었다.
비단옷의 청년도 고개를 돌렸다.
혁무천은 쓴웃음을 지으며 은설이 있는 곳으로 갔다.
비단옷을 입은 청년의 눈이 커졌다.
“호오, 정말 네 말대로 대단한 미남이구나.”
조금은 묘한 느낌이 드는 말투다.
‘강호의 사람이 아닌가?’
혁무천은 청년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사소한 부분 하나하나조차 신경을 쓴 듯 보이는 차림이었다. 영웅건도 비단에 고급스럽게 수가 놓아져 있었고, 하다못해 신발조차 피혁에 비단을 입혀서 일반인들은 신을 엄두도 내지 못할 고급품이었다.
거상들 중에 고급스런 복장을 한 사람들이 많지만, 그들도 저렇게까지 화려한 차림은 하지 않는다.
더구나 소림사까지 오면서 남들 눈에 다 띄는 차림을 한다는 건 산도적에게 ‘날 잡아먹으셔.’라고 광고하는 것과 같았다.
“나는 성유라고 하네. 자네가 이 여인의 오빠 되는가?”
이제 이십 대 중반쯤으로 보이는데도 반말이 자연스러웠다.
“맞아. 그런데 무슨 일이지?”
혁무천도 반말로 물었다.
청년은 가만히 있는데 장한들이 다시 노한 표정을 지었다.
“말을 조심해라. 이분 나리께서는 네가 그리 말해도 될 분이 아니니라.”
“그래? 그렇게 대단한 분이면 누군지 신분부터 밝히고 말하시지 그러나?”
“뭐야?”
“아아, 그만해라, 연봉.”
비단옷의 청년이 다시 장한을 말렸다. 장한은 씩씩거리면서도 청년의 말을 거역하지 못하고 물러섰다.
“함께 차라도 한잔 하지 않겠나?”
“우린 일행을 기다려야 해서 그건 어려울 것 같군.”
혁무천이 거부했음에도 청년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내 사람을 여기에 남겨 놓고, 누가 자네를 찾으면 데려오라고 하겠네. 어떤가?”
혁무천은 청년의 청을 거부하려고 했다.
그런데 전음이 들렸다.
<받아들여라. 팔왕야께서 차를 청하는 걸 영광으로 알고, 앞으로는 말을 조심해라.>
왕야?
어쩐지 보통 신분이 아닌 것 같다 했더니…….
혁무천은 그제야 청년의 말투와 행동이 왜 다른 사람과 다르게 느껴졌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청년이 황족이라면 상인으로서 한번쯤 대화를 나누어볼 만했다.
“그건 괜찮은 생각이군. 그런데 차를 어디에서 마시자는 거지?”
“저쪽에 내가 쉬는 방이 있네.”
“좋아, 그럼 자네가 앞장서게.”
혁무천의 여전한 반말에 전음을 보냈던 장한이 눈을 치켜떴다. 하지만 혁무천은 못 본 척하고 몸을 돌렸다.
청년도 흥미가 인 표정으로 미소를 지으며 몸을 돌렸다.
“가세. 연봉, 사람을 하나 이곳에 남겨 놓아라.”
혁무천을 못마땅한 표정으로 노려보던 장한이 대답하며 고개를 숙였다.
“예, 나리.”
청년, 주성유의 방은 대웅전에서 멀지 않은 요사채에 있었다.
귀빈을 위해 마련된 곳인 듯 방 안이 고풍스런 장식으로 꾸며져 있었다.
혁무천은 다탁을 가운데 두고 주성유와 마주앉았다.
은설과 동대안이 혁무천의 좌우에 앉았다.
곧 장한 하나가 찻주전자를 가져와서 찻잔에 차를 따랐다. 찻주전자를 잔 숯불 위에 올려놓았던 터라 김이 모락모락 났다.
“나는 무림인이 아니네. 그래서 항상 무림을 동경했지. 그런데 자네 이름은 뭔가?”
주성유가 차로 입술을 축이고는 말문을 열었다.
“무천. 이쪽은 동생인 은설.”
혁무천은 이름을 말하는 김에 은설의 이름도 말했다. 성까지 말했으니 둘의 관계를 알아서 생각하지 않겠는가.
아니나 다를까, 주성유가 눈치 채고 물었다.
“친동생 아닌가?”
“아니야.”
“아쉽군. 정말 마음에 드는 소저인데.”
“소림사에는 어쩐 일이지? 설마 여자 구경하려고 온 것은 아닐 것 같은데.”
“불문 무공에 관심이 많은데, 오랫동안 소림을 떠나 있던 무공비결을 얼마 전에 찾았다고 하더군. 그래서 그걸 익힌 사람이 있으면 구경이나 해볼 수 있을까 해서 왔네. 비무를 할 수 있다면 더 좋고.”
의외의 대답이었다.
“해봤나?”
“아쉽게도 아직은 보여줄 정도가 아니라고 하지 뭔가.”
주성유는 정말로 아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혁무천은 그 모습을 보고 주성유에 대한 판단을 조금 바꿨다.
주성유는 무공을 익히고 있었다. 그것도 일반적인 수준을 넘어서서 절정 수준에 이른 고수였다.
그래서 오만한 것이 아닌가 했는데, 그보다는 황족이라는 본질 때문에 몸에 배인 태도인 듯했다.
“그런데 자네 무천이라고 했나?”
“맞아.”
“혹시 무원장이라는 곳의 그 무천?”
“왕야나 되는 분이 내 이름을 알다니. 제법 귀가 밝군.”
“호오, 내가 황족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리 말하다니. 배짱이 제법인데?”
“먼저 반말한 사람은 그대 아닌가? 나이도 나보다 적은 것 같고. 그러니 이해해.”
“하긴 비슷한 나이에 그것도 괜찮지. 흠, 아예 친구처럼 지내는 건 어떤가?”
“친구? 그럼 내가 손핸데…… 좋아, 그렇게 하지.”
혁무천은 망설이는 척하다가 흔쾌히 받아들였다.
왕야를 친구로 둬서 나쁠 건 없었다.
‘손해’라는 말에 어이없어 하던 주성유도 환한 웃음을 지었다.
“하하하, 요즘 황가에서 매일 입에 오르내리는 무천을 친구 삼다니. 정말 잘 나왔어.”
“내가 장사꾼이란 걸 잊지 말게.”
“장사꾼들은 선물도 잘 준다고 하던데.”
“난 그런 선물을 잘 안 주네. 대신 좋은 물건을 싸게 팔지.”
주성유는 그 말을 듣고 형형한 눈빛으로 혁무천의 눈을 직시했다.
“선물 대신 좋은 물건을 싸게 준단 말이지?”
“그래. 그게 내 원칙이네.”
“나도 그걸 바라네. 요즘 황궁에 썩은 내가 넘쳐나는데, 장사꾼들이 던져준 선물이 썩어서 나는 냄새거든. 이번에 여행 삼아 나온 것도 사실은 그 냄새가 싫어서 나온 거야.”
“그럼 앞으로 할 이야기가 많을 것 같군.”
“나 역시 같은 생각이네, 친구.”
혁무천과 주성유는 서로를 쳐다보았다.
둘 모두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남궁무룡과 이사명은 이각이 더 지나서야 혁무천 일행을 찾아왔는데, 표정이 잔뜩 굳어 있었다.
혁무천은 주성유와 작별인사를 나누고 요사채의 객방을 나섰다.
“맹주는 소림에서 맡아주기로 했네. 그런데 아무래도 오래 사시지 못할 거 같다고 하는군.”
소림사에서 내려오며 이사명이 말했다. 그 때문에 표정이 굳은 듯했다.
“깨울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하던가요?”
정신만 깨울 수 있다면 어떻게든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남궁무룡과 이사명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힘들 것 같다고 하는군.”
소림에는 의술에 밝은 승려들이 많았다. 무림에서 유명한 대환단과 소환단을 연단한 곳 아닌가.
그럼에도 사마진웅을 치료할 수 없다면 천하의 누구도 치료하기가 힘들다는 뜻이었다.
“우린 뜻이 맞는 사람들을 규합할 생각이네.”
남궁무룡이 분노를 갈며 말했다.
“조심하셔야 할 겁니다. 신도명산이 눈에 불을 켜고 있을 테니까요.”
“알고 있네. 하지만 우리에게도 나름대로 계획이 있네.”
남궁무룡의 말을 듣고만 있던 이사명이 그쯤에서 입을 열었다.
“아마 한 달쯤 걸릴 거네. 돌아오면 연락하지.”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에 뵙죠.”
소림사에서 내려온 후, 남궁무룡과 이사명은 수하들과 합류해서 서쪽으로 떠나갔다.
그들 말로는 만장곡으로 간다고 했다. 아마도 복우산의 정사대전 때 정은맹이 피신했던 곳인 듯했다.
그들과 헤어진 혁무천도 비룡단과 함께 무원장으로 향했다.
아무래도 본격적인 겨울이 오기 전에 폭풍이 불 것 같았다. 그에 대한 대비책을 세워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천기회가 얻을 뻔했던 밀소림의 힘을 자신이 얻었다는 것이다.
***
정혈단이 일으킨 혈풍은 찬바람이 무색할 정도로 강호를 뜨겁게 달궜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신출귀몰한 그들의 행적은 마도세력을 혼란의 바다에 빠뜨렸다.
보름 사이, 마도의 중소문파 일곱 곳이 피에 잠겼다.
팔대마세나 마도십문의 지부도 있었고, 그들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문파도 있었다.
심지어 정혈단을 비난하던 정파의 봉은산장조차 혈해가 되었다.
그 와중에 죽어간 사람만 일천오백여 명. 온 강호에 피비린내가 넘쳐흘렀다.
안 그래도 바짝 긴장해 있던 마도 문파들은 공포에 질렸다.
정도 문파들 역시 봉은산장의 혈겁을 알고 충격에 휩싸였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는지, 그동안 전열을 정비하며 눈치만 보던 팔대마세와 마도십문에서 마침내 정혈단에 대한 추적을 시작했다.
한편, 신도명산은 정은맹을 완전히 장악하기 위해 조직을 새롭게 개편했다.
본래 맹주 아래에 부맹주 둘, 육기주, 삼단, 사당으로 되어 있는 조직 중 육기주를 없애고 삼전, 삼단, 팔당으로 바꾸었다.
그러고는 천기회와 남황궁 고수 여덟 명을 주요 간부로 배치했다.
기존 정은맹의 간부들은 불만스러웠지만 대놓고 따지지는 못했다.
안 그래도 기존의 정은맹 간부 몇 명이 떠나버려서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지금 불만을 토로해봐야 눈총만 받을 뿐.
신도명산도 떠난 간부들 때문에 심기가 상한 상태였다.
“남궁무룡이 정은맹 간부들을 빼내고 있소. 빌어먹을 늙은이.”
신도명산은 마주앉은 주금화를 보며 자신의 마음을 그대로 드러냈다.
주금화가 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남궁무룡과 이사명이 빠져나간 이상 어차피 한 번은 겪어야 할 일이네.”
“문제는 피해가 너무 크다는 거요.”
“그들이 우리를 공격할 거라고 보나?”
“그건 어려울 거요. 확실한 증거가 없는 한.”
“그럼 그 문제는 너무 신경 쓰지 말게. 지금은 남아있는 자들을 우리 쪽으로 확실하게 끌어들이는 게 우선이네.”
신도명산의 표정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주금화의 말이 옳았다. 지금은 떨어져 나간 사람들 때문에 화를 내기보다 있는 사람들을 지키는 게 먼저였다.
“왕야의 말씀이 옳소.”
“마음을 하나로 만들기 위해서는 함께 싸우는 것이 최고지.”
신도명산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지금 마도는 정은맹에 대한 공격도 미루고 정혈단의 뒤를 쫓느라 바빴다.
그로 인해 정은맹을 옥죄어 오던 마도의 압박이 그만큼 약해진 상태였다.
문득 괜찮은 생각이 떠올랐다. 입술 끝이 비릿하게 치켜 올라갔다.
“마침 적당한 곳이 있소.”
“그래?”
“마룡성을 쓸어버려야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