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천악 8화
무료소설 소천악: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91회 작성일소설 읽기 : 소천악 8화
"에잇! 불난 집에 부채질하지 말고 들어가요."
혈사부는 싱긋 웃으며 방에 들어갔다. 소천악은 책을 확 찢어버리고 싶은 강력한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그 후 돌아올 결과를 생각하니 부르르 몸이 떨렸다. 절대 살아남지 못 할 건 분명했다. 저놈의 혈사부는 순간 웃으면서 머리통을 두부 깨듯 부술 철혈의 심장을 지닌 사람이었다. 한숨을 푹푹 쉬며 책을 펼쳐 들었다.
"제기랄, 이게 뭐야?"
성질을 버럭 내는 소천악이었다. 책은 그의 간절한 바람을 사뿐히 뭉개주었다. 책 안은 빽빽하게 글자로 도배되어 있었다.
"도대체 뭔 놈의 비급이 그림도 얼마 없고 글씨도 깨알만 하냐? 이걸 어떻게 반나절 만에 외워? 제길, 한 달 밤낮을 외워도 힘들겠다."
투덜거리는 소천악의 등 뒤로 혈사부의 목소리가 스산하게 들렸다.
"정확히 사만 팔천오백 자니라. 열심히 외우거라. 자정에 검사해서 틀리면 한 글자당 한 대씩이다."
"커헉! 말도 안 돼요.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혈사부님?"
엄살에 아부까지 곁들여 말하는 소천악의 속셈은 혈사부의 다음 말에 무참히 깨졌다.
"분명히 사람 말이지. 그럼 늑대 울음으로 들리냐? 잔소리 말고 어서 공부하여라. 공부해서 남 주는 거 아니다. 커험!
소천악은 절로 마음이 조급해졌다. 저 악질 사부는 한다면 하는 성격임을 사 년간의 경험으로 익히 아는 터였다. 책을 펼치고 서장부터 부지런히 읽으며 머릿속에 쑤셔 박았다. 초죽음을 면하기 위한 그의 노력은 정말로 눈물겨웠다. 화장실도 비급을 들고 가는 강행군을 거듭했다.
시간은 물 흐르듯 흘러갔다. 해가 떨어지고 달도 어느새 중천을 향해 달려갔다. 이마에 비지땀을 흘리며 부지런히 외우려 발버둥을 치는 소천악이었다. 죽을힘을 다해 암기하려 온갖 꼼수를 다 부렸다. 한 자라도 더 외우려는 그의 사투는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천악아! 이리로 오너라. 시간 됐다."
저승사자의 목소리가 저보다 더 흉악할 리 없다고 느낀 소천악이었다. 하지만 반항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평소엔 개개도 암말 안 했지만 이럴 때는 절대 금지사항이었다. 전에모르고 실수했다가 삼 일 밤낮을 오뉴월 개 패듯 얻어맞았다.
혹시나 다른 말을 할까 가느다란 희망을 품고 방에 들어간 소천악은 냉정하게 말하는 혈사부의 말에 절망했다.
"헛수작 부릴 궁리 말고 어서 암송을 시작해라."
"네, 혈사부님! 제자 명에 따르겠습니다."
공손히 대답하는 소천악을 보며 싸늘한 코웃음을 날리는 혈사부였다.
"잔머리 굴리지 마라. 네가 이런다고 한 대라도 덜 때릴 내가 아니다. 어서 구결을 외워봐라."
단칼에 속마음을 눈치챈 혈사부에게 더 이상 아부를 못 하고 할 수 없이 구결을 외우기 시작했다.
"혈검구식은 인간이 가진 잠재능력을 자연의 흐름에 맡겨 ……."
온 정신을 집중해 한참을 외우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 구결이 생각나지 않았다. 식은땀을 흘리며 구결을 생각해 봐도 더 이상은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혈사부가 앉은 자세에서 허공을 붕 날아 소천악의 턱주가리를 발로 찼다.
퍼퍼퍽!
"크아악! 소천악이 죽는다."
비명을 지르며 방바닥을 구르는 그의 턱은 어느새 퉁퉁 부어올랐다.
"안 죽어. 염려 마라. 단지 아플 뿐이야. 정확히 오천 삼백 자 외웠다. 얻어맞을 매는 사만삼천이백 대다."
그 가공할 매질 숫자에 소천악은 눈앞이 아득해졌다.
"혈사부님! 살려주십시오."
"어허, 내가 왜 사랑스러운 제자를 죽이겠느냐? 아무 걱정 말아라. 절대 안 죽이마. 사부가 아무리 피에 굶주린 혈마란 소리를 들었어도 하나밖에 없는 제자야 설마 죽이겠냐?"
"혈사부님!"
처량하게 혈사부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지는 소천악이었다.
"바지 놔라, 이놈아! 저번처럼 또 바지 찢지 말고. 그리고 온몸에 힘을 주어라. 혹시 잘못 맞아 죽으면 다시 제자 구하러 다녀야 하는 불상사가 생길 수도 있다. 힘 주고 잘 맞아라."
"통촉하시옵소서. 제발 한 번만."
"어허, 자세 잡아라. 전에 말했듯이 자세 풀면 바로 뒈진다."
금방이라도 후려칠 혈사부의 기세였다. 소천악은 어쩔 수 없이 가부좌를 틀고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이래서 배우고 싶지 않았다. 혈검구식의 수련법은 딱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지옥이었다.
운기조식하는 상태에서 전신혈도를 사정없이 두들겨 맞으면서 수련에 들어가야만 했다. 혈사부의 눈이 시뻘건 살광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그의 손은 서서히 들리며 소천악에게 다가갔다.
펑! 펑!
가죽 북 치는 소리가 들렸다. 번뜩하는 사이에 손은 무수한 호선을 그리며 소천악의 전신대혈을 사정없이 강타했다. 삽시간에 머리부터 가슴까지 오십여 개의 대혈을 두드리는 그의 손길은 빛살같이 쾌속했다.
"커헉!"
처절한 비명이 소천악의 입에서 절로 터져나왔다. 전신에서 칼로 난도질당하는 고통이 느껴졌다. 이마는 잔뜩 찡그려진 채 온몸이 부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이놈! 정신 차리지 못할까? 몸을 바로 세워라. 죽고 싶으냐?"
추상같은 노성이 흐릿해지는 소천악의 정신을 깨웠다. 깜짝 놀라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아내려 사력을 다했다.
혈사부의 권은 놀라웠다. 느리게 때리는 듯한 손짓에 담긴 묘는 순식간에 백여 타를 때리는 가공할 속도를 선보였다. 촌각 동안 무려 오백여 타가 소천악의 전신혈도를 정신없이 타격했다.
소천악은 살아서 생지옥을 보는 기분이었다. 살이 으깨지고 뼈가 부서지는 고통이 연속으로 뇌리를 강타했다. 아비지옥이 따로 없었다. 일각이 천년 같은 극악한 고통의 시간은 흐르고 흘렀다. 이를 악물고 참아내던 소천악은 어느새 비몽사몽인 정신으로 버텨냈다.
"됐다. 오늘은 여기서 멈추자. 첫날이고 해서 특별히 많이 봐줬다. 이놈아, 겨우 사만 삼천 대만 때렸다. 이백 대는 맞은 것으로 쳐주마."
독기가 치민 소천악이 본성을 드러냈다.
"으 이 악질 혈사부! 차라리 다 때리슈. 사만 대도 넘게 때려놓고 겨우 이백 대 깎아주십니까? 지나가던 늑대가 웃습니다."
"어라, 이놈 봐라! 오냐, 마저 때려주마. 이게 봐주니까 기어오르네."
비릿한 냉소를 지은 혈사부는 기진맥진해 누워 있는 소천악을 향해 사정없이 손속을 뿌렸다.
전과는 달리 기세가 충천한 살기 어린 권격이었다. 아차 한 소천악이 악을 썼다.
"크아악, 혈사부! 남아일언은 중천금입니다."
"오냐, 이놈아. 말 잘했다. 다 때리라며? 사부가 되어 어찌 제자를 거짓말쟁이로 만들겠느냐. 암, 절대 그럴 일은 없다. 흐흐흐!"
소천악은 죽고 싶었다. 사만 대보다 이백 대의 강도가 훨씬 강했다. 공연히 말대꾸했다가 당하는 대가였다. 결국 이백 대를 꼬박 두들겨 팬 후에야 혈사부는 자리를 떠났다. 물론 이미 거품을 물고 기절한 소천악은 전혀 알지 못했다.
혈검구식은 참으로 그 수련방법이 참혹했다. 혈사부는 장난처럼 소천악을 팼지만 사실은 아니었다. 이 방법이 유일한 혈검구식 전수방법이었다. 혈사부가 전신대혈을 하루도 빠짐없이 타혈해 줘야 연성이 가능한 검법이었다.
곰방대를 입에 물고 혈사부는 회상에 잠겼다. 오래전에 사부이신 무유자(撫柔子)에게 전수받을 때의 기억을 떠올리니 담배 맛이 썼다.
"제길! 그때만 생각하면 그놈의 사부를 그냥!"
혼잣말로 중얼거리던 혈사부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깜짝 놀랐다. 그때 마음을 생각하니 지금 소천악이 자기에게 품는 마음도 어림짐작이 갔다. 내심 뜨끔한 그는 좀더 강하게 다루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한편으로는 마음 한쪽으로 소천악이 가엽기도 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오랫동안 수련해야 했다. 이런 식으로 전신을 마구 구타당하면서 배워야 하는 게 영 마음에 걸렸다.
"에잉! 할 수 없지. 나도 했는데 제 놈이 못 할라고."
태연하게 말하고 휘적휘적 걸어가는 혈사부였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갔다.
다음 날 새벽같이 일어난 소천악은 비급을 들고 외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천악아! 밥 차려야지."
혈사부의 태연한 목소리에 열불이 치밀었다. 남은 죽을 둥 살 둥 외우느라 정신이 없는데 밥 타령이라니!
"혈사부! 오늘부터는 시간이 없어 밥 못 해요."
"저런, 그렇구나. 세월이 참 그러네. 내가 배울 때는 사부님 밥 꼬박꼬박 차려놓고 경건하게 수련했다. 네 녀석은 그 정도 비급 하나 못 외워서 사부를 굶기다니, 말세다. 말세."
"혈사부님이 어떤 소리를 해도 오늘부터 밥 안 해요."
비장하게 소리치는 소천악의 내심은 웃고 있었다. 수련을 핑계로 그 지겨운 밥 수발을 피할 요량이었다.
"어허! 이놈의 손은 왜 하루가 지나니 더욱 힘차지는지 모르겠구나. 이러다 아차 잘못 구타하면 하나밖에 없는 제자 죽일라!"
음산하게 들리는 혈사부의 목소리에 소천악의 어깨가 절로 들썩였다. 위협이란 걸 머리가 바로 깨달았다. 더 이상 거부는 곧 죽음이었다.
"알았어요. 해드릴게요. 내참, 더러워서."
"지금 뭐라고 했느냐?"
아직도 귀가 밝은 혈사부였다.
"아무 말도 안 했어요. 식사 준비할게요."
소천악은 쏜살같이 식사준비를 위해 사라졌다. 혈사부는 빙긋 웃으며 모른 척하고 넘어갔다. 하루 종일 비급 외우기에 정신이 팔린 소천악이었다. 외워도 외워도 비급의 두께는 줄어들 줄을 몰랐다. 어느새 해는 서산에 넘어가고 정말 듣고 싶지 않은 혈사부의 음성이 들렸다.
"천악아! 숙제 검사해야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가 이럴까? 천악은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혈사부에게 다가갔다.
"제자, 혈사부님의 존명을 받자와 대령했습니다."
"안 어울리는 짓 하지 말고 어서 비급이나 외워라."
차가운 혈사부의 말에 천악은 머리를 짜내며 비급을 외워갔다. 하지만 역시 얼마 후 더듬거리며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검의 선은 공간의 점이 되어… 점이 되어……."
가만히 눈을 감고 듣던 혈사부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감돌았다. 여기까지 외운 걸 확인한 그는 스산하게 말했다.
"점이 되어 어쨌다는 거냐? 계속 외워 보아라."
아무리 기억하려 해도 이미 머리는 먼 산 구경만 할 뿐이었다. 체념한 소천악은 미친 척하고 구결을 아무렇게나 외웠다.
"점이 되어 검은 휭하니 날아 회음혈을 가격했다. 하늘에 내리치는 검은……."
엉터리 구결을 듣던 혈사부는 어이가 없었다.
"아주 골고루 하는구나. 아예 이참에 새로운 비급 하나 만들어라. 약속대로 계산하자. 오늘은 몇 대인가?"
손가락으로 계산하는 혈사부을 본 소천악은 울상이 돼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
"혈사부! 살려주세요. 오늘도 맞으면 전 정말 지붕에 목매달아 자살할 겁니다."
애절한 호소에 혈사부는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자살? 웃기고 있네. 네놈이 어디 자살할 놈이야? 죽으라고 칼 주면 악을 바락바락 쓰면서 살겠다고 악다구니나 안 치면 다행이지. 까불지 말고 좋은 말 할 때 이리 와라. 도망가다 잡히면 곱빼기로 맞는다."
저놈의 혈사부는 한다면 하는 성격임을 잘 아는 소천악이었다. 결국 체념하고 가부좌를 틀며 사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