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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천악 28화

무료소설 소천악: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1,204회 작성일

소설 읽기 : 소천악 28화

 

  "하오나!"

 

  "며느리는 더 이상 말하지 말아라. 단목기 향주는 어서 시행하지 않고 무엇 하는가?"

 

  질책의 빛이 강한 단목휘경의 말에 찔끔한 단목기 향주가 서둘러 단목산산에게 다가섰다.

 

  "아가씨,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이미 눈동자에 눈물이 글썽거리는 단목산산이었다. 자신의 말을 무시하는 소천악을 혼내려던 단순한 생각이 이리 일을 크게 만들 줄은 꿈에도 몰랐다.

 

  심사가 영 불편한 단목기 향주였다. 마지못해 단목산산의 혈을 제압하고 조심스럽게 데려가려 했다. 괜히 소천악을 데려와 평지풍파를 만들었다는 자책감이 고개를 들었다. 돌아가는 형세를 가만히 지켜보던 소천악이 불쑥 나서서 포권하며 단목휘경에게 말했다.

 

  "태상가주님! 제가 한마디 드려도 될까요?"

 

  "오, 말씀하시오. 단목세가의 전대 가주로 이런 불미스런 모습을 보여준 데 대해 진심으로 사죄드리오!"

 

  평생 몇 번 굽혀본 적이 없는 고개를 깊숙이 숙이는 단목휘경이었다. 그 모습에 내심 싸늘한 비웃음을 던지는 소천악이었다. 남취려를 비롯한 세가의 수뇌진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렇게까지 단목휘경이 나올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혈사부와 지내면서 인간의 이중 성격에 대해 지겹도록 터득한 소천악이었다. 단목휘경이 아무리 위장한 말투를 보여도 그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같잖은 기분이 들었지만 이내 웃으며 말했다.

 

  "단목 낭자가 잠시 오빠의 안위가 걱정되어 당황감에 이런 행동을 한 거라 봅니다. 너무 질책하지 마시고 어린아이의 치기 어린 소행이라 보시고 눈감아 주십시오! 저는 별 감정 없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세가의 은인이신데. 이런 무례는……."

 

  마음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단목휘경이 아예 말뚝 박기에 들어갔다. 그 장단에 척척 맞춰주는 소천악이었다.

 

  "하하, 지나고 나면 다 별게 아닌 것이 인생이지요. 제 체면을 봐서 너그러이 용서하시지요. 원래 한 번 실수는 병가지상사라 했습니다."

 

  "오호, 역시 신의이시라 도량도 한없이 넓으시구려! 이 단목 모, 새삼 감탄했소이다. 허허허!"

 

  아주 죽이 착착 맞는 두 사람의 호흡이었다. 옆에서 지켜보는 이들은 이들의 속마음은 전혀 모른 채 그 호방한 기세에 감탄사를 연발했다.

 

  "자! 그럼 없던 일로 하고 저도 실수한 것이 있으니 소공자를 치료해 드리지요."

 

  "오! 그래 주시면 삼생의 은혜로 생각하겠소이다."

 

  입에 발린 공치사를 내뱉는 단목휘경을 뒤로하고 소천악은 다시 전각 안으로 들어가 소공자를 치료했다. 이번 치료는 유난히 비명이 요란했다. 심기가 극도로 불편한 소천악이 최악의 치료법을 선택한 연유였다. 아주 극악한 고통을 단목세가 소공자에게 퍼부었다.

 

  말도 제대로 못 하고 당한 소공자는 극악의 고통에 전신을 푸들푸들 떨다 기절해야 했다. 옆에선 단목산산이 도끼눈을 뜨고 소천악을 째려봤다. 오라비의 고통이 그대로 전해지는 듯해 안타까운 마음이었다.

 

  일부러 고통스럽게 한다는 심증은 있는데 딱 집어낼 물증이 없어 더욱 울화통이 터지는 그녀였다. 복수의 칼날을 가는 그녀의 머리에 찬물을 뿌리는 소리가 들렸다.

 

  "허, 상처가 심하네. 아무래도 내일까지 치료해야 할 것 같소."

 

  이미 그녀의 속셈을 처음부터 끝까지 간파한 소천악의 한마디였다. 아무 말도 못 하고 노려만 보는 그녀의 속은 부글부글 끓었다. 모르는 척하고 발길을 돌려 단목기 향주와 사라져 가는 그를 보며 단목산산은 복수의 칼날을 시퍼렇게 갈았다.

 

  "두고 보자. 감히 나 단목산산을 능멸한 놈."

 

  여자의 한은 오뉴월에도 서리를 내리게 한다는 속담이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섬뜩한 여인의 한도 소천악에게는 별 영향을 주지 못했다. 단목기 향주의 안내로 빈객의 처소에 든 그는 단잠을 곤하게 잔 채 새로운 아침을 맞이했다.

 

  어제 치료한 이와 새로 들어온 부상자를 중상자부터 차례대로 나름대로 부지런히 손보았다. 그의 손길이 닿은 환자들은 훨씬 생기 어린 표정으로 변해갔다. 세가의 의원들도 혀를 내두르며 그의 치료법을 훔쳐 배울 욕심에 한시도 옆을 비우지 않았다.

 

  환자들은 모두 소천악에게 감사와 증오의 감정이 공존했다. 치료받을 때의 고통을 생각하면 이가 갈렸다. 하지만 나아가는 환부를 보면 할 말을 잃고 감사하는 마음마저 들었다.

 

  "자, 이제 얼추 치료가 끝난 듯하오. 난 이제 그만 갈 길을 갈까 합니다."

 

  마지막 환자를 손봐 주고 일어서며 소천악이 말했다. 수십 명의 환자를 돌보는 건 아무래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귀찮은 생각이 문득문득 들었으나 신의란 말에 우쭐해 꾹 참아 넘겼다.

 

  "정말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단목기가 진심에서 우러난 포권을 하자 소천악이 마주 포권을 취했다.

 

  "환자들은 이제 잘 정양만 하면 조만간에 자리를 털고 일어날 겁니다."

 

  "이제 가시니 섭섭합니다. 이건 남취려 가주 대행께서 변변치 않지만 여비에 보태시고 약재 구입비에 쓰시라고 주신 겁니다."

 

  슬쩍 건네주는 전표 뭉치였다. 첫눈에 봐도 적지 않은 금액이란 게 눈에 확 들어왔다.

 

  "뭘 이런 걸 다. 하하, 좌우간 이건 세상의 아픈 이를 고칠 약재를 사라는 뜻으로 알고 요긴하게 쓰겠소이다."

 

  냉큼 받아 넣는 소천악이었다. 가벼운 인사치레를 마친 후 빈객의 처소로 간 소천악은 얼른 전표를 확인했다. 무려 이천 냥이 담겨 있었다. 남취려는 자기 딸을 도와준 공을 생각해서 애초 생각보다 후히 넣어주었다.

 

  "흐흐, 이거면 전에 흑사방주에게 뜯은 거와 합쳐서 한동안 강호주유에 어려움이 없겠군!"

 

  마음이 한결 가벼워져 휘파람이 절로 나왔다.

 

  강호 십대미녀라는 단목산산을 보며 느낀 점이 많았다. 미모도 떨어지는 주제에 콧대만 높아 싹수없는 여인네의 실상을 하나하나 깨달아갔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그렇게 실망감이 들지는 않았다. 남아 있는 많은 여인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 생각하니 저절로 발이 근질거렸다.

 

  "기다려라, 여인들이여! 강호제일인이 간다."

 

  조용히 중얼거리며 행낭을 정리한 후 처소를 나왔다. 빈청을 지나 대청으로 향했다. 앞으로의 처신을 위해 내키지는 않지만 세가 수뇌진과 작별인사를 해야만 했다.

 

  "크아악! 적이다."

 

  갑자기 비명이 요란하게 귓전을 때렸다. 전신의 신경이 바로 긴장되며 머리끝이 쭈빗해 왔다. 소란스러운 쪽으로 방향을 잡아 얼른 몸을 날렸다. 소리가 들린 곳은 세가 정문 쪽이었다. 지나는 사람을 피해 천천히 걷던 그는 정문에서 오십여 장 떨어진 곳에 있는 높은 나무로 번개처럼 신법을 전개해 올라갔다.

 

  초여름이라 나뭇잎이 울창해 나무 안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유심히 쳐다보지 않는 한 그를 발견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급박한 싸움으로 경황없는 처지에 나무나 바라볼 한가한 이가 있을 리 없었다. 나뭇가지 중에 편안한 곳에 자리잡고 앉았다.

 

  "자, 일등석이네. 이제 피 튀기는 장면을 여유 있게 관람해 볼까?"

 

  나무 아래는 이미 피비린내 나는 혈전이 시작되었다. 정문을 지키던 세가 경비무사 두 명은 길게 땅에 누워 숨이 끊어져 있었다.

 

  정문을 통해 들어온 흑마전의 고수들은 연이어 담과 문으로 속속 들어오는 고수들로 숫자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모두 태양혈이 불쑥 튀어나온 일류고수급이었다.

 

  "모두 죽여라! 오늘이 단목세가의 마지막 날일 것이야. 으하하!"

 

  사십대의 흑색 무복 중년인이 검을 든 채 흑마전 고수들을 독려하고 있었다. 맞은편에서는 수십 명의 단목세가 고수들이 신형을 번뜩이며 날아들었다.

 

  "막아라! 적은 흑마전이다."

 

  기습을 당한 단목세가 고수들은 잠시 당황했으나 곧 명문세가의 일원답게 진을 정비하고 반격에 나섰다. 바로 양쪽 다 수십 명의 태양혈이 불쑥 솟은 일류고수들이 정면으로 격돌했다. 사방에서 번뜩이는 칼날이 사정없이 상대의 목을 노리고 날아갔다.

 

  "크악."

 

  "죽어라. 세가의 벌레들아!"

 

  여기저기서 비명과 검끼리 충돌하는 청아한 음향이 어지럽게 들려왔다. 어지러운 난전이 차 한 잔 마실 시간 동안 벌어졌다. 삽시간에 양쪽 고수들이 부지기수로 죽어나갔다.

 

  뒤늦게 달려온 단목휘경과 하남삼검이 위급함을 깨달아 급히 싸움터에 끼어들려 하였다. 하나 흑마전이 그를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었다. 흑마전 호법들인 혈우검마(血雨劍魔)를 비롯한 5명의 호법이 그들의 발길을 막았다.

 

  "비켜라. 흑마전의 주구들아!"

 

  세가고수의 죽음에 격분한 단목휘경이 노성을 지르며 검을 뿌렸다. 그 검을 막아선 이는 혈우검마 장추산(張秋山)이었다.

 

  "흐흐, 노인네가 죽지도 않고 오래 살아서 주접을 떠는구나. 내 오늘 기꺼이 관 속에 넣어주마."

 

  호쾌한 목소리로 받아치며 일대 혈전을 벌여가는 두 사람이었다. 팽팽한 실력 탓에 그 누구도 단시간에 우위를 차지하지 못한 채 검광을 흩뿌리며 치열하게 싸웠다. 하남삼검도 네 명의 호법에 막혀 사 대 삼의 접전을 펼치고 있었다.

 

  가만히 형세를 바라보던 흑마전 외당 총당주 귀혼탈마(鬼奪魂奪) 음자해가 크게 외쳤다.

 

  "흑마필살대는 흑마대진을 펼쳐라."

 

  흑마전의 고수들이 지시에 따라 바로 움직이며 팔괘의 진을 점했다. 부챗살처럼 퍼져나간 흑마전 고수들이 전면을 막아서자 잠시 주춤하던 단목세가 고수들이 바로 대응 태세를 갖추었다.

 

  "건곤오행진(乾坤五行陣)을 펼쳐라."

 

  어느새 다가선 단목장청 총관이 외쳤다. 그 지시에 따라 세가의 고수들도 진법을 펼쳐 전면으로 밀고 들어갔다. 세가고수의 움직임을 유심히 살펴보던 귀혼탈마 음자해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버럭 소리쳤다.

 

  "이때다. 모두 무영탈혼침(無影奪魂針)을 쏴라!"

 

  그의 지시가 떨어지자 기다렸다는 듯이 흑마전 고수들은 일제히 무영탈혼침통을 꺼내들고 암기를 쏘아댔다. 빗발치듯 단목세가의 고수들을 향해 쇠털같이 가는 암기가 수도 없이 날아갔다. 단목장청은 안색이 급변했다.

 

  "막아라. 암기다!"

 

  검을 급히 회전시켜 검막을 만들며 소리치는 단목장청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너무 거리가 가까운 걸 뒤늦게 느낀 그였다. 아니나 다를까 쏘아진 암기들은 세가의 고수들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모두 막아라! 검막을 만들어라."

 

  세가의 고수들은 놀라 급히 검으로 막을 형성했다. 그러나 쏘아진 암기 수가 너무 많았고 지나치게 작았다. 검막의 숲을 헤치고 하나둘씩 암기가 세가고수의 몸으로 격중됐다.

 

  "으억!"

 

  "크윽!"

 

  짧은 비명이 어지럽게 들리며 진을 만들었던 고수 오십여 명 중 삼십여 명이 순식간에 암기에 맞았다. 독이 발린 암기는 바로 고수들의 얼굴을 까맣게 만들었다. 칠보단혼독이 묻혀진 무영탈혼침은 가공스러웠다. 쓰러진 고수들은 금세 검은 피를 토하며 제대로 비명도 못 지르고 시체로 변해갔다.

 

  진을 이루던 고수들의 죽음으로 건곤오행진이 삽시간에 무너졌다. 기회를 포착한 흑마대진 내의 흑마전의 고수들이 파죽지세로 남아 있는 세가 고수들을 도륙했다.

 

  "크아악! 이런 비겁한 암기를 쓰다니!"

 

  쓰러져 가는 세가고수들이 원통함에 절규했다. 흑마전 고수들은 숫자의 우위와 진의 효용으로 일방적으로 세가고수를 밀어붙였다. 오십여 명에 달했던 세가의 일류고수가 불과 반시진도 버티지 못하고 대부분 고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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