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천악 27화
무료소설 소천악: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28회 작성일소설 읽기 : 소천악 27화
주위 사람들의 질시 어린 시선에도 불구하고 소천악은 꿋꿋이 치료에 박차를 가했다. 아예 체념한 부상 무인이 이를 악물고 죽을힘을 다해 버텼다.
"잘 참네요. 수고했어요. 이제 꿰매기만 하면 끝입니다."
말과 동시에 바늘과 실이 눈에 안 보이게 번개처럼 움직였다. 섬전같이 움직이는 손길은 갈수록 더욱 탄력을 받아 쫙 벌어진 검상을 삽시간에 메워갔다.
당하는 부상 무인은 경악스런 고통에 참혹한 신음을 토해냈다.
"크아아아악!"
"시끄러워요. 다 끝났는데 웬 비명을 지르고 난리세요? 당신 무사 맞아요? 엄살은! 자, 다음 환자 데려오시오."
태연히 말하는 소천악의 말에 삼향대는 얼른 다음 환자를 끌고(?) 왔다.
"으악! 나 치료 안 받을래."
악을 쓰며 발버둥 치는 환자는 다리에 검상으로 길게 찢어진 중상을 입은 무인이었다. 가만히 쳐다보던 소천악이 신형을 일으켜 걸어갔다.
뚜벅뚜벅.
그에게 다가서는가 싶더니만 본 척도 안 하고 그 다음 환자를 살펴봤다. 부(釜)에 당한 환자의 오른팔은 참혹히 일그러져 있었다. 누가 봐도 도무지 다시 쓸 수 있을 성싶지가 않았다. 상처를 가만히 바라보던 소천악이 툭 말을 던졌다.
"이봐요! 당신 그 팔 쓰고 싶소?"
"물론입니다. 고쳐주십시오."
"조금 아프긴 할 거요. 참을 수 있소? 아까 저기 떠드는 분처럼 욕지거리하면 안 고쳐줄 생각이오."
"죽어도 안 합니다. 살려주십시오."
애걸하는 그 남자의 눈에는 이슬방울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소천악은 아무 말 없이 침대 옆에 앉았다.
"심하긴 하지만 이 정도야 고칠 수 있지요."
나지막이 중얼거리던 소천악이 손을 뻗자 어느새 삼향대 무인들이 환자의 팔다리를 거세게 잡았다.
"크으으."
이를 악문 환자에게서 죽을힘을 다하는 비명이 낮게 흘러나왔다. 소천악은 무심한 얼굴로 피투성이 팔을 이리저리 헤집으며 죽은 살을 단검으로 도려냈다. 혈도를 찔러 지혈하며 가공스런 속도로 다친 팔을 치료해 갔다.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나자 치료를 마친 소천악이 바늘로 눈 깜짝할 사이에 상처를 봉합했다. 이미 환자는 극통을 못 이겨 기절한 상태였다. 소천악은 이마에 땀이 이미 비 오듯 흘러내렸다. 그는 신형을 일으키며 조용히 말했다.
"한 이틀 정도면 팔은 움직일 수 있소이다. 잘 먹으면 한 보름이면 다시 검을 잡을 수 있게 될 게요."
믿기 힘든 말을 서슴없이 던지고 다음 환자를 향해 갔다. 환자들은 두려움에 질려가면서도 꿋꿋이 참아갔다. 잠시의 고통만 참으면 회복된다는데 이를 악물고 참아야 했지만 결국은 모조리 기절했다. 마지막 환자를 고치고 막 일어서려는 소천악의 귀에 악을 쓰는 소리가 들려왔다.
"왜 나는 치료 안 해주는 거야?"
뒤를 돌아보니 아까 안 받겠다고 악 쓰던 환자였다. 소천악은 피식 비웃으며 미련 없이 고개를 돌렸다. 반말 투에 영 기분이 상한 얼굴이 바로 느껴졌다.
"당신은 싫다고 했잖소?"
"잔말 말고 치료해 줘."
명령조의 말이 들리자 소천악이 불끈했다.
"닥치시오! 난 안 한다면 안 하오. 조금 이따가 세가 의원에게 치료받으시구려."
"못 고친다 했단 말이야!"
"그건 귀하 사정이지요. 내가 미쳤다고 나 미워하시는 분 치료하나요? 못 하겠소이다."
바라보지도 않고 전각을 나서려는 소천악을 단목기 향주가 막아섰다.
"신의님, 제발 저 사람을 치료해 주시죠."
"비키시오. 난 두 번 말하지 않소. 자꾸 강요하면 난 떠날 거요."
정말 떠날 기색인 소천악의 의지를 보고 주춤거리던 단목기 향주가 다시 한 번 말했다.
"저분은 우리 단목세가 이공자시오. 제발 제 체면을 봐서."
"비키시라고 했소. 난 안 한다면 안 하오!"
거칠게 밀치면서 전각을 떠나려는 소천악을 더 이상 잡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는 단목기 향주였다.
"이봐요! 잠깐만요."
들리는 목소리에 돌아보니 어느새 단목산산이 옆에 와 있었다.
"할 말 있소?"
무감각한 소천악의 말에 이를 악물고 그녀가 말했다.
"우리 오빠 고쳐줘요."
"싫다고 했소. 분명히 더 이상 말하지 마시오! 슬슬 짜증나려고 하오."
인상을 북 쓰며 말하는 소천악을 보며 그녀는 생전 처음 겪는 일에 적응할 수가 없었다. 모든 남자들이 자기만 바라보는걸 보고 자란 그녀였다. 가볍게 눈살 한 번 찌푸려도 안달복달하는 남자만 본 그녀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안 갔다.
"왜 안 된다는 거지요?"
"그자는 나의 치료를 거부했소이다! 내가 왜 거부하는 자를 억지로 치료해야 하오? 난 그럴 마음이 추호도 없소."
강하게 말하고 휘적휘적 걸어가는 소천악을 그저 멍하니 보던 그녀가 악을 썼다.
"저자를 당장 잡으세요. 세가를 모욕한 자예요."
말은 이미 쏟아져 나왔다. 소천악이 그 말을 듣고 그 자리에 우뚝 서 뒤돌아섰다.
"지금 뭐라고 했소이까? 나를 잡으라고, 내가 세가를 모욕했다고 말한 거요?"
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난 소천악이었다. 불끈 쥔 주먹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중간에서 세가의 고수들이 어쩔 줄 모르고 주춤거렸다.
전후 사정을 다 본 고수들로서는 단목산산의 명을 바로 받을 수가 없었다. 저 의원은 세가의 무인들을 치료해 준 은인이었다. 그 은인을 잡았다는 걸 강호에 소문이라도 나면!
한마디로 단목세가의 명예는 땅바닥에 떨어질 판이었다. 단목기 향주도 난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아가씨, 진정하시지요. 이런 경우는 없습니다. 어디 대단목세가에서 은인을 핍박합니까? 고정하시지요."
은근히 설득하는 단목기 향주의 마음은 어두워져만 갔다. 어려서부터 단목산산의 고집을 익히 봐왔던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얼굴이 갈수록 차갑게 변해갔다.
"어서 단목기 향주는 저 죄인을 포박하세요! 감히 단목세가를 능멸한 죄 엄히 물을 것이에요."
"아가씨! 이러면 안 됩니다."
"단목기 향주는 감히 세가의 율법을 어길 요량이십니까?"
얼음이 풀풀 날리는 단목산산의 말에 어쩔 수 없이 대답하는 단목기 향주였다. 세가의 율법을 들먹이는 산산의 명을 더 이상 거부할 수가 없었다.
"존명! 삼향대는 신의님을 모셔라. 절대 무례해서는 안 된다."
단목기 향주의 명에 삼향대는 차마 안 내킨다는 표정으로 어슬렁거리며 소천악을 포위해 들어갔다.
"신의님! 저희도 어쩔 수 없이 무례를 범하겠습니다."
"후후, 당신들이야 무슨 죄가 있소이까? 있다면 저 싹수없는 계집이지요."
일부러 큰 소리로 말하는 소천악의 말이 단목산산의 귀에 안 들릴 리가 없었다. 얼굴이 새파래진 그녀가 소리를 빽 질렀다.
"어서 잡아요! 저런 무례한 놈."
삼향대가 마지못해 손속을 뻗어갔다. 막 그들의 손속이 소천악의 혈도를 찌르려는 순간이었다. 난데없이 우렁찬 고성이 들려왔다.
"멈춰라! 이게 무슨 짓이냐?"
격노한 음성이 전각 앞을 온통 울렸다. 막 소천악의 혈도를 찌르려던 삼향대가 주춤거리며 뒤를 돌아봤다. 거기에는 격분한 기색으로 푸들푸들 떠는 한 노인이 서 있었다. 그 옆에는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세 사람이 심히 못마땅한 표정으로 애써 외면하는 모습이었다. 제일 먼저 노인의 정체를 알아본 단목기가 얼른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속하 단목기가 태상가주님을 뵙습니다."
단목기의 인사가 시작이었다. 뒤를 이어 장내에 있던 모든 이가 고개를 숙였다. 물론 단목산산도 예외는 아니었다. 나타난 노인은 50여 년 전 단목세가의 부흥을 일으킨 단목휘경 전대 가주였다. 힘없이 몰락해 가던 세가의 가주를 맡아 철혈의 무인정신으로 50여 년 성상을 지켜온 신화적인 인물이었다.
"내 보자보자하니 뭐 하는 짓이야? 언제부터 우리 단목세가가 은인을 이리 대했는가! 네 이놈, 산산아! 네가 정녕 우리 세가의 명성에 먹칠을 하자는 것이냐?"
말하는 단목휘경의 전신에는 범접하기 힘든 기세가 서리서리 퍼져 나왔다.
"할아버지!"
놀란 단목산산이 새파랗게 질려 벌벌 떨고 있었다. 그녀를 노려보는 단목휘경의 얼굴은 전에 보던 자상한 할아버지가 결코 아니었다. 금방이라도 그녀를 잡아먹을 듯한 추상같은 눈초리에 잔뜩 겁을 집어먹었다.
"닥쳐라! 누가 네년의 할아버지라는 것이냐? 이런 쳐 죽일 년."
"할아버지, 무서워요. 흑흑."
"무서운 거 아는 년이 세가 말아먹을 짓을 한 거냐? 여봐라, 거기 단목기 향주."
"네, 태상가주님."
얼른 단목휘경 앞에 부복한 채 머리를 숙인 단목기 향주가 다음 말을 기다렸다. 단목휘경은 조금도 망설임 없이 말했다.
"저 발칙한 년을 당장 하옥시키고 절대 물이나 밥을 주지 마라. 이 명을 어기는 자는 모두 세가의 율법에 따라 참살할 것이다."
"태상가주님! 그건 너무 가혹한 처사가 아닐지?"
단호한 지시에 놀란 단목기가 조심스럽게 말하자 거센 노기 서린 단목휘경의 말이 이어져 나왔다.
"닥쳐라! 네놈이 감히 내 말을 거역하겠다는 것이냐? 어서 시행하지 못할까!"
단목휘경의 결심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전혀 변하지 않는 그의 분노였다. 눈빛에 망설임이 짙게 밴 채 단목기 향주는 신형을 일으켰다.
"존명! 속하 단목기 태상가주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삼향대는 지금 즉시 아가씨를 무례를 범하지 말고 모셔라."
"모시긴 뭘 모셔! 어서 끌고 가."
차가운 단목휘경의 질책이 잇따랐다. 사실 단목휘경도 편한 마음이 아니었다. 세가의 위기를 맞아 오랜 지기인 하남삼검이 찾아와 흔쾌한 기분으로 산책하던 길이었다.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 와보니 이 꼴이었다. 하남삼검에게 부끄러워 고성을 질렀지만 평소 눈에 넣어도 안 아픈 귀한 손녀였다.
손님 앞에서 어쩔 수 없이 광명정대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앞으로 나섰다. 내심은 하남삼검이 말려주기를 은근히 바랐으나 이 인간들이 요지부동이었다. 내친김에 강하게 밀어붙였으나 불안감이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이미 얼굴색이 하얗게 변한 단목산산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이 몸을 휘청거렸다. 그의 눈가에 안타까움이 번져갔다. 그때였다. 남취려 등 세가 수뇌진이 보고를 받고 부랴부랴 전각 앞으로 들이닥쳤다.
"태상가주님을 뵙습니다."
당혹감을 숨기지 못한 남취려가 서둘러 단목휘경에게 인사했다. 아차 하면 소중한 딸이 곤경에 빠질까 봐 달려오기는 했지만 오면서 들은 내용을 생각하니 머리가 아파왔다. 세가의 명예를 소중하게 여기는 태상가주였다.
단목산산이 한 행위로 볼 때 용서받기는 쉽지 않다는 예감이 들었다. 절로 마음이 조급해진 남취려였다. 그런 남취려를 가만히 지켜보던 단목휘경이 준엄하게 꾸짖었다.
"너는 도대체 아이들에게 뭘 가르친 게냐?"
"송구합니다. 어미 된 자로 부끄럽습니다."
할 말이 없는 남취려가 고개를 들지 못한 채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단목휘경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됐다. 잘못된 건 마땅히 징계를 받아야 하는 법. 그래야 세가의 율법이 제대로 서는 것이니라. 잘못한 이가 혈육이라 하여 소홀이 한다면 앞으로 누가 율법을 지키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