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천악 20화
무료소설 소천악: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93회 작성일소설 읽기 : 소천악 20화
장삼추 총관은 도대체 얼마를 줘야 할지 아득한 마음으로 밀실을 나섰다. 그러거나 말거나 소천악은 천하태평이었다. 내심 주판알을 열심히 튕기고 있는 소천악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장삼추 총관이 다시 밀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는 얼굴에 식은땀을 가득 흘리며 탁자 위에 전표 뭉치를 내려놨다.
"공자! 시간이 없어서 얼마 준비 못 했습니다."
불안한 마음으로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자연적으로 떨려나왔다. 이 액수가 맞아야 한다는 절박감이 그의 마음을 지배했다. 소천악은 힐끔 전표를 바라보면서 거두절미하고 물었다.
"얼마지요?"
"네, 일단 도박장에 있는 전표 전부입니다. 대략 천 냥 정도입니다."
가만히 쳐다보던 소천악이 주섬주섬 전표를 집어 품속에 넣으며 말했다.
"은하전장 전표라……. 이거 혹시 부도 전표 아닌가요?"
"아닙니다. 은하전장이라면 중원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튼튼한 전장입니다. 아무 염려 안 하셔도 됩니다."
장삼추 총관의 설명에 코웃음을 치는 소천악이었다.
"세상에 못 믿을 게 도박하는 놈들이지요. 가서 아진 두목님을 불러오시면 고맙겠소이다."
잠시 후 조심조심 들어온 아진에게 전표를 주며 말했다.
"이거 가서 금원보로 찾아오시면 고맙겠소이다. 들고 도망가고 싶으시면 마음대로 하시지요. 이미 두목님 몸에는 천리추적향이 발라져 있소이다."
"헉, 천리추적향! 당장 다녀오겠습니다."
사색이 된 아진이 얼른 방을 나갔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장삼추 총관이 넌지시 물었다.
"공자, 정말 천리추적향 바른 겁니까! 그거 엄청 비싸잖아요?"
"이런 한심한 총관님! 그 말을 믿소이까? 미쳤다고 그거 저분에게 바르겠소? 미녀에게 바를 것도 모자란 판이오."
물끄러미 소천악을 바라보는 장삼추 총관은 저 어린 공자가 악마로 보일 지경이었다. 심계가 보통이 넘어 보였다. 이윽고 아진이 이마에 땀방울을 주렁주렁 달고 들어왔다.
"공자, 다녀왔습니다. 여기 구백팔십 냥입니다."
액수가 틀리자 소천악이 화를 벌컥 냈다.
"뭐, 구백팔십 냥? 이십 냥은 어디 갔소이까?"
"그거 환전 수수료라는데요."
겁에 질린 아진이 더듬거리자 사나운 소천악의 눈길이 장삼추 총관으로 향했다.
"장삼추 총관님! 오늘 죽고 싶소이까?"
"아니, 공자. 전장에서 전표를 바꾸면 당연히 수수료를 물어야 합니다."
"그런 거 모르오이다. 얼른 채워주시오. 아니면 한 냥당 한대 맞으시든지. 성질 건드린 죄로 오백 냥 추가요. 항상 손해배상은 정확히 하는 것이 좋소."
말하면서 탁자를 누르는 소천악의 손가락은 끝도 모르게 탁자 안으로 파고들었다. 섬뜩한 장삼추 총관이 울며 겨자 먹기로 얼른 숨겨놓은 오백 냥을 세어 주었다. 마지막 한 냥까지 확인해 맞는 걸 확인한 소천악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오늘 총관님 운수대통한 줄 아시오! 많이 모자라지만 이 정도로 넘어가도록 하겠소. 다음엔 조심하시길 바라오."
"감사합니다, 공자!"
인사하는 장삼추 총관은 도대체 뭐가 고마운지 잠시 헷갈렸다. 돈 뺏어 가는 날강도에게 고맙다고 말해야 하는 자신의 신세가 처량하게 느껴졌다.
"그래, 당연히 고마워야지요. 그리고 전 당분간 천국제일루에 있을 거니 볼일 있으면 찾아오시구려. 단 공짜는 없다는 걸 항상 명심하시면 만수무강에 도움이 될 듯싶소."
혈사부에게 들은 풍월로 이런 도박장은 뒤에 사파의 후원을 받는다는 걸 잘 아는 소천악이 미끼를 살짝 던졌다.
"네, 살펴 가십시오."
고개들 틈도 없이 굽실거리는 장삼추 총관을 뒤로하고 소천악은 다시 기루로 향했다. 그의 모습이 천천히 사라지자 장삼추 총관의 눈이 번쩍 빛났다.
"이놈! 어디 두고 보자. 야! 지금 바로 흑사방에 연통을 넣어. 저 개놈의 새끼 가만 안 놔둔다. 어디서 조금 논 모양인데 여기가 어디라고! 뿌드득!"
복수의 열기가 물씬 풍기는 장삼추 총관의 의지가 돋보였다. 의지는 이미 도박장을 나선 소천악의 눈도 마찬가지였다. 무공 수련할 때의 투지가 활활 불타고 있다.
"이놈의 기녀들 두고 보자. 열 번 찍어서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더라. 누가 이기나 어디 한번 해보자고. 특히 취향이 네 이년. 뿌드득!"
도박장 밖에서는 아진 일당이 엉거주춤 서 있다가 나오는 소천악을 보고 얼른 고개를 돌렸다. 괜히 모진 놈에게 다시 한 번 고통을 당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제발 그냥 가주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만, 평소 찾지도 않는 부처 이름만 연신 되뇌었다.
"이보시오, 아진 두목님! 이리로 오시구려."
역시 부처는 없었다. 아니면 바쁘신 모양이었다. 아찔한 마음으로 더듬거리며 대답하는 아진이었다.
"네? 저 말입니까?"
"두목님! 오라면 얼른 와야지요.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뭐 하시는 겁니까? 두목님이 아직 덜 맞으신 거요?"
기겁한 아진이 번개처럼 소천악 앞에 섰다.
"저기 있는 분들은 두목님이 오면 따라오셔야지요. 뭐 하는 겁니까? 한 번 더 살풀이할까요?"
"아닙니다. 무슨 말씀을."
퍼뜩 놀란 건달패들이 얼른 소천악의 주위에 모여들었다.
"가십시다!"
"네? 어디를 가자는 말씀입니까?"
"입 다무시고 얼른 따라오시기나 하시오."
단 한 마디로 철권파의 모든 입을 일제히 다물게 했다. 뒤로 덩치 건장한 건달패를 거느리고 당당하게 천국제일루로 향했다. 건달패들은 불안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인간과 함께 가는 길이 편할 리가 없었다. 장래에 대한 막연한 예감만 들 뿐 별다른 방책이 없는 처지였다.
소천악은 그런 건달패의 심정은 처음부터 안중에도 없다. 다만 혼자 기루에서 노는 것에 질렸을 뿐이다. 천국제일루에 도착하자 멀리서부터 바라보던 군일량 총관이 얼른 반색을 하며 인사했다.
"공자, 또 오신 겁니까?"
"당연하지. 남자가 칼을 뽑았으면 끝장을 봐야 하는 거 아니겠소?"
"물론이죠. 공자님은 역시 풍류를 아시는 대장부십니다.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화색을 띠고 말하는 군일량 총관의 표정은 봉 중에 왕봉이 다시 온 것에 대한 기쁨이 넘쳐흘렀다.
"들어가자. 건달들."
소천악은 마치 비 맞은 병아리 행세를 하는 건달패를 거의 질질 끌다시피 하여 기루 안으로 들어갔다. 벌써 연락을 받고 취향이를 비롯한 기녀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아잉! 공자님. 그새를 못 참고 또 오신 겁니까? 이러시면 소첩들이 너무… 아잉!"
취향이는 마치 십 년 만에 서방님 오신 듯 온갖 교태를 부리며 소천악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오냐! 내 너를 어찌 잊을 수 있겠느냐? 나를 그리 좋아하니 이거 기분이 극락에 간 듯하구나."
입으로 그새 통달한 기루 경험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하지만 심중은 전혀 아니었다.
'이놈의 취향이 년! 어디 두고 보자. 네 입에서 떠나는 날 아쉬워 부르며 눈물을 질질 흘리는 꼴을 보고야 말겠다. 뭐, 멧돼지? 오냐, 내가 진정한 멧돼지의 진수를 보여주마!'
입은 웃고 가슴은 이를 북북 가는 소천악이었다. 취향이도 만만치는 않았다. 속마음은 감쪽같이 숨긴 채 마냥 행복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뭐 하나? 어서 특급으로 상 차리고 오늘은 손님이 많으니 거하게 기녀들도 팍팍 넣어. 아주 진을 뽑자. 오늘 문 걸어 잠궈! 전세 낸다. 기녀들 다 불러라. 시원하게 놀아보자."
소천악의 말이 떨어지자 여태껏 영문을 모르던 아진 등 건달패의 입이 쫙 찢어졌다. 유흥가를 주름잡던 그들도 감히 특실에서 놀아본 적은 없었다. 워낙 거금이 들어가는 곳이라 구경조차 변변하게 할 수가 없었다.
그 특실에서 하루를 보내게 된 건달패는 아까 얻어터진 원한은 이미 까마득히 잊어버릴 지경이었다.
"누구의 명이라고 거절하겠습니까? 아무 염려 마시고 일단 방으로 들어가시지요!"
군일량 총관은 얼른 앞장서서 특실로 안내했다. 머릿속은 주판알이 핑핑 돌아갔다. 얼마 후 특실에는 기녀들이 득실거리는 가운데 질퍽한 술판이 벌어졌다.
딱 한 사람 안 보이는 기녀가 있었다. 비파 연주하던 기녀였다. 그녀는 손가락이 퉁퉁 부어 방구들 신세만 지며 이를 부득부득 갈아댔다. 술이 거나하게 취한 소천악이 소리쳤다.
"이봐, 왜 비파 연주가 없는 거야?"
기녀들의 머릿속이 싸해졌다. 사실 기녀들은 기본적으로 비파 연주를 배웠다. 하지만 모든 기녀는 시치미를 뚝 따고 소천악의 말을 씹었다.
"호호, 공자님, 오늘 비파 연주는 넘어가시지요. 소선이가 글쎄 몸살이 나서 누워 있답니다."
"무슨 소리야, 그게 진국인데. 군일량 총관 오라 그래."
빽 소리치는 소천악의 기세에 군일량 총관이 허겁지겁 들어왔다. 오자마자 박살나게 깨지고 여러 기루를 물색해 어렵게 구한 비파 연주 기녀가 들어왔다. 비파가 튕겨지고 선율이 흐르자 다시 소천악의 입이 함지박만 하게 벌어졌다.
"이거야! 바로 이거! 이 맛이 있어야 술도 술술 들어가는 거야. 안 그래, 아진아?"
술을 마시다 부르는 소리에 목에 턱 걸린 아진이 정신없이 대답했다.
"커억! 캑캑. 맞습니다, 공자님 역시 비파가 있어야 술맛이 확 살죠!"
"으하하! 네놈이 풍류를 아는구나! 자자, 마시자. 오늘 마시고 죽는 거야."
소천악은 어느새 비파 타는 기녀 바로 옆에 갔고 역시나 술상 하나가 다시 부랴부랴 차려졌다. 이제는 아주 연례행사가 된 술자리 풍경이었다.
듬뿍듬뿍 집어 주는 행채에 신이 난 기녀는 흥이 겨워 열심히 비파를 탔다. 기분이 좋은 건 거기까지였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비파를 타는 손이 후들후들 떨려왔다. 아무리 잠시 쉴 틈을 찾아도 도무지 이놈의 인간이 멈추란 말을 하질 않았다.
"아! 좋구나. 이거야말로 극락 세상이야. 입으론 술이 가고 귀로 풍류가 가니. 으하하하, 또 해봐라!"
연신 채근하는 소천악의 성화가 이젠 악귀의 유혹으로 들리는 기녀였다.
'이런 개새끼가!'
속으로 욕을 퍼부었지만 겉으로는 웃어야 하는 기녀의 심정은 미칠 지경이었다. 그제야 특실에 들어올 때 군일량 총관이 한 말이 기억난 기녀였다.
"이보게, 행채는 많이 받을 거야. 그러니 힘들긴 해도 어찌 참아보게."
후회가 물밀듯이 밀려왔다. 당장에라도 도망가고 싶었지만 자리에 있는 놈들 보니 성안에서 무뢰배로 유명한 놈들이 절절매는 꼴이 영 뒤끝이 좋을 성싶지는 않았다. 불끈 오기가 치민 기녀가 속으로 중얼거리며 비파를 튕겼다.
'오냐, 이 새끼야! 오늘 아주 끝장을 보자. 네놈 귀가 아작나든지 내 손이 아작나든지.'
성질이 난 기녀는 여태껏 조용한 탄주를 급히 바꿔 귀가 찡할 정도의 고음으로 연주를 시작했다.
"오오, 이런 시원한 소리가! 푸하하! 오늘 술맛 나네!"
소천악은 아무것도 모르는 양 연신 술잔을 비웠다. 한동안 오기를 부리던 기녀의 손가락이 터져 피가 스멀스멀 흘러나왔다. 피는 곧 비파줄을 타고 흘러 얼마 후 비파는 피가 흥건해졌다. 이미 독기가 오를 대로 오른 기녀는 손가락의 아픔을 꾹 잡고 열심히 비파줄을 튕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