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천악 17화
무료소설 소천악: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45회 작성일소설 읽기 : 소천악 17화
"잠시 소피 좀 보고 오겠소. 갔다 오면 이번에는 흥겨운 가락으로 해보시구려."
"네, 공자님. 얼른 다녀오세요. 소첩 그동안 다음 곡을 준비하겠나이다."
"오, 그래 주시오. 그럼 내 시원하게 싸고 오겠소."
소천악이 방을 나서자 방금까지 온갖 아양을 떨던 비파 기녀의 얼굴은 싹 변했다. 어느새 고양이 눈으로 변한 채 차갑게 소리쳤다.
"아 뭐 저런 개새끼가 다 있냐? 양심에 털 난 새끼!"
그럴 만했다. 군데군데 퍼렇게 멍이든 채로 쉬지 않고 비파만 탄 기녀의 손은 뻘건 핏물이 가늘게 새어나왔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기녀의 눈가였다.
"소선아, 어떡하니? 손가락은 괜찮아?"
동료 기녀가 걱정스러운 듯이 물었다.
"저 새끼 혹시 평생 동안 비파 연주 한 번도 못 들어본 새끼 아냐?"
욕지거리를 퍼부은 기녀였다. 사실 소천악은 평생 비파를 들을 일이 없었다. 산속에서 비파 연주를 들었다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사연 모르는 기녀들은 동료끼리 모여 자리를 떠난 소천악을 연신 씹어댔다. 다시 발소리가 들리자 언제 그랬냐는 듯 시치미를 떼는 기녀들이었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소천악이 방에 들어서자 다시 안면 싹 바꾼 교태로운 기녀만이 존재했다. 마침내 기녀의 손이 부르르 떨려왔다. 더 이상 비파를 탔다가는 손가락이 성치 못할 위기감마저 새록새록 고개를 들었다.
눈치를 보던 기녀는 소천악이 기녀의 술잔을 받으며 시선을 돌린 틈을 타 얼른 품속에 숨겨놓았던 작은 비수를 꺼내 비파줄 하나를 끊었다.
띠잉.
째지는 소리가 들리자 소천악이 고개를 돌렸다. 기녀는 끊어진 줄을 바라보며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 연기에 들어갔다.
"어머! 이 일을 어째? 왜 비파줄이 갑자기 끊어지는 거야!"
가만히 바라보던 소천악이 따스하게 말했다.
"할 수 없는 일이지요. 자, 그만 연주해도 좋소이다."
"아잉! 공자님. 제가 흥취를 깨트린 거 같아 정말 송구하옵니다."
"아니오이다. 됐소. 충분히 잘 들었소. 아쉬운 건 한 두 곡정도만 더 듣고 두둑이 행채를 줄까 했는데 서운하구려. 한 이십 냥 정도 줄까 했더니만. 흠……."
이십 냥이란 거액의 행채란 말에 눈이 번쩍거린 기녀였다. 보름 내내 연주해 봐야 겨우 벌까 말까 한 거금이었다. 갑자기 기녀가 억울한 듯 말했다.
"그러시면 소첩이 다른 비파를 어디에서라도 구해 올까요?"
"마차 떠났소이다. 이만 물러가시오. 자, 이건 수고비요."
은자 다섯 냥을 손에 쥐어주자 기녀는 억울해 미칠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제 와 다른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소천악은 아쉬운 듯 물러나는 기녀를 보고 내심 깨소금을 먹은 기분이었다. 이미 모든 일의 전모를 알고 있는 그였다. 날카로운 청각으로 일부러 줄을 끊은 만행을 이미 다 눈치채고도 모른 척했을 뿐이다.
가볍게 복수를 마친 소천악에게 취향이가 애교를 부리며 물었다.
"공자님, 그런데 처음에 오셨을 때 그 말씀을 왜 하셨나요? 우리를 보고 아니라고 하신 말씀?"
술에 취해 게슴츠레한 눈으로 보던 소천악이 아무 생각 없이 나오는 대로 대답했다.
"그게 말이오. 내가 명색이 강호제일의 대장부 아니겠소? 그래서 아무래도 강호제일미녀는 돼야 내 부인감이 딱이라 찾아다니는 중이라오."
듣던 기녀들의 얼굴에 질투의 빛이 번쩍 빛나는 걸 애석하게 보지 못한 소천악이었다. 기녀도 여자였다. 여자 앞에서 더한 미녀를 찾는 짓거리를 하는 그가 예쁘게 보일 리가 만무한 일이었다.
복수의 칼날을 갈던 기녀 중 취향이가 코맹맹이 소리로 애교를 부렸다.
"공자아아니임!"
"어, 밤공기가 차시오? 감기 들린 거 같소이다."
영 분위기 조성이 안 되는 소천악을 향해 내심 이를 갈며 취향은 다시 말했다.
"호호, 여자란 말이죠. 아무리 멋진 남자가 나타나도 하나를 못하면 얼마 가지 못한답니다."
취향의 말에 단박 관심을 내비치는 소천악이 물었다.
"오호, 그런 거요? 도대체 그게 무엇이오?"
"낮에는 천하를 굽어보는 대장부요, 밤에는 여인을 극락으로 인도하는 절묘한 기술이지요."
"오호! 그런 깊은 뜻이 있소이까?"
감탄하는 소천악을 보며 기녀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호호, 그걸 못하면 여자가 며칠 내로 바로 도망간답니다."
"음, 큰일이구려. 어서 그걸 터득해야 할 거 같소."
"호호! 소첩이 알려드릴 수도 있지만."
말꼬리를 흐리는 기녀를 보니 더욱 애간장이 탄 소천악이 급히 말했다.
"알려주시오. 내 후히 사례하겠소."
"아잉! 공자님이 그리 말씀하시니 어찌 소첩이 아니 들어드릴 수가 있겠나요. 오늘 밤부터 맹훈련을 쌓으셔야지요."
귀가 솔깃한 소천악이 호탕하게 소리쳤다.
"자! 놀면 뭐 하겠소? 쇠뿔도 단김에 빼야 하는 거지요. 가십니다."
취향이의 팔을 끌면서 나가는 그의 발길은 보무당당하였다.
그렇게 첫 기방 출입이 시작된 일이었다. 이후 낮에는 자고 밤에는 술판과 훈련(?) 속에 삼 일이 바람같이 지나갔다.
한낮에 잠자리에서 일어난 소천악은 뻐근한 몸을 느끼고 곧바로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불과 삼 일 사이에 몸이 많이 축난 게 여실히 느껴졌다. 걱정스런 얼굴로 진기 한번 돌린 후 산책을 나선 그가 저쪽 전각에서 들려오는 귀에 익은 가느다란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취향이의 목소리였다.
"아이, 그 새끼! 좌우간 웃기는 놈이야. 강호제일 대장부? 지나가던 개새끼가 멍멍거릴 소리를 더럭더럭 하는데 아주 토할 뻔했어."
취향이의 말에 다른 기녀가 궁금한 듯 얼른 물었다.
"아이, 계집애. 얼른 이야기해 봐. 어땠는데?"
"말도 마. 이건 처음은 멧돼지, 끝은 항상 토끼야. 자기 혼자 씩씩거리다 나가떨어지더라. 요새 방중술은 완전히 번갯불에 콩 볶아 먹기인가 봐."
"어머 어머! 그래서 가르쳐주긴 한 거야?"
"도대체 말을 안 들어먹어. 하도 화대를 세게 줘서 양심상 아무리 열심히 방중술을 이야기하면 뭐 하냐고? 저 혼자 좋다고 껄떡대다 자빠져 코 골며 자는데."
"호호호! 완전히 쑥맥이구나."
"그놈의 돈이 뭔지, 앞에서는 애교부리려니 구역질 나더라. 쳇! 병아리 하나 키우는 기분이야."
말을 엿듣던 소천악은 땅속에 숨고 싶을 정도로 부끄러웠다. 한편으로는 기녀에게 농락당한 사나이의 분노가 울컥 치밀어 달려가 한 대 치고픈 마음이었다. 간신히 분노를 삭여내고 힘없이 방으로 들어가 행장을 꾸렸다. 정나미가 똑 떨어진 기분이었다. 한편으로는 사나이의 비애가 느껴졌다.
그렇게 삼 일 밤낮을 기루에서 주야장천 세월아 네월아 하던 소천악이 텅텅 빈 주머니를 들고 나섰다. 인사도 없이 그저 도망치듯 나왔다. 취향이를 다시 볼 면목이 들지 않았다. 주머니가 허전하니 왠지 마음도 훵한 느낌이었다.
"제길, 다 썼네. 남은 산삼이나 마저 팔아야지. 구관이 명관이라고 그놈에게 가야지."
아까운 듯 산삼이 든 행낭을 만지작거리며 순사기 의원 댁으로 향했다. 대문에 서 있다 소천악을 본 눈에 익은 장정들이 보였다. 천천히 다가서자 그들은 눈이 커지더니만 이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오늘은 안 패겠소. 말로 합시다. 어서 전갈을 보내주시구려."
"네, 소협!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장정들은 나름대로 머리를 굴려 한 명이 죽어라 먼저 뛰어가고 나머지 한 명이 느릿느릿 걸어가며 안내했다. 먼저 뛰어간 장한이 넘어질 듯이 순사기 의원의 방문을 열었다.
"의원님! 큰일났습니다."
"왜 이리 호들갑이냐? 설마 그 골치 아픈 놈이 다시 찾아왔기라도 한 거냐?"
"바로 그겁니다."
"헉."
짧은 숨소리와 함께 느긋한 자세에서 벌떡 일어선 순사기 의원이었다. 미처 정신을 챙기기도 전에 소천악은 들이닥쳤다.
"어이, 질 나쁜 의원님 오랜만입니다!"
"아, 소협! 어인 일로 이리 다시 행차를?"
말하면서 의원은 초조함에 심장이 타들어가는 심정이었다.
"어, 별거 아니오이다. 산삼 하나 팔려고 왔소이다. 이번엔 좀 후하게 쳐주시면 고맙겠소. 영 주머니가 아쉬워서 말이오."
주섬주섬 행낭에서 무언가를 꺼내는 소천악을 보며 의원은 생애 최대의 도박판에 선 기분이었다. 과연 도라지를 꺼낼 것인가? 산삼을 꺼낼 것인가? 무엇을 꺼내도 이백오십 냥은 줘야 하는 참담한 기분을 느꼈다.
'제길! 확 의원 문 닫고 이사 갈까?'
속으로 고심하는 의원 눈에 불쑥 내밀어진 건 산삼이었다. 눈이 번쩍 뜨이며 급히 말하는 의원이었다.
"이 산삼만 파실 겁니까? 혹여 곁들여 다른 산삼을 파실 건 아니지요?"
순사기 의원의 물음에 노기인 흉내를 내느라 대뜸 반말 투로 말하는 소천악이었다.
"도둑 의원님, 이게 마지막이오. 얼른 산삼 값이나 내놓으시오."
"아니, 그런데 며칠 전에 가져가신 산삼 값은 어쩌시고 다시?"
"그 푼돈을 어디다 쓰겠소이까? 에잉!"
세상에 평민 가족 하나가 이 년을 넉넉히 살 수 있는 거금을 불과 며칠 만에 다 털어 넣은 그 배포에 의원은 질려갔다.
"이보시오, 도둑 의원님! 혹시 이 돈으로 좀더 많이 늘릴 수 있는 데가 없소이까?"
뇌리를 부지런히 굴리던 의원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태연하게 말했다.
"소협! 아무래도 일확천금하면 도박이 최고입니다. 저기 골목에 가시면 성내에서 유명한 도박장이 있습니다. 거기서 한 번 당기시면 이백오십 냥이 새끼치는 건 순간입니다."
"오호, 그래요? 그런 데가 있다고요? 허허, 내가 한번 가야지요. 흠! 돈이 기다린다 이거네요."
이미 자신의 돈인 양 자신만만한 소천악을 보며 의원은 속으로 비웃었다.
'웃기지 마라 이 자식아! 거기 가면 넌 바로 깡통이야. 그걸 봐야 하는데 으하하하!'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의원은 아주 친절하게(?) 소천악에게 도박장으로 가는 길을 안내해 줬다.
"음, 도둑 의원님! 고맙소이다. 내 많이 따면 조금 갖다가 주지요. 정보제공비로. 하하하!"
"아니, 뭐 그러실 필요까지야 있겠습니까? 소인은 그저 소협의 정의로운 발길에 약간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그걸로 만족합니다."
"알았소이다. 그럼 그걸로 만족하면서 사시구려. 이만 가볼까 합니다."
찬바람이 쌩 불도록 차갑게 뒤로 돌아서서 가는 소천악이었다. 의원은 갑자기 조금 걱정이 됐다. 저 괴팍한 젊은 놈이 혹시 다 잃으면 자기에게 화풀이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자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봐! 지금 바로 소향이네로 가자. 아무래도 예감이 안 좋아. 한동안 의원 문 닫고 쉬어야겠다."
의원은 숨겨둔 첩실네로 가서 며칠 푹 쉬다 올 요량이었다.
한편 소천악은 벌써 도박장 문을 들어서서 여기저기서 노름에 정신이 팔린 사람들을 보았다. 아무래도 큰판에 끼어들 속셈이었다.
"손님, 무엇을 찾으십니까?"
도박장의 총관인 장삼추는 눈치 빠르게 소천악의 옆으로 다가서서 정중하게 말했다. 오랜 경험으로 돈 많은 호구가 찾아온 걸 바로 알아차린 그였다.
"어, 여기 큰판은 어디요? 시원하게 해보려 하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