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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천악 12화

무료소설 소천악: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1,078회 작성일

소설 읽기 : 소천악 12화

 

  제자의 감탄에 사부는 가소롭다는 듯 말투를 순식간에 싹 바꿨다.

 

  "당연하지. 그렇다고 너보고 강호정의를 실현하라는 건 한마디로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일 테고."

 

  "혈사부! 어떻게 수제자를 그리 평가절하한단 말입니까?"

 

  억울하다는 듯 외치는 소천악의 말에 콧방귀도 안 뀌는 혈사부의 말이었다.

 

  "수제자는 무슨 얼어 죽을! 제자라고 달랑 너 하나뿐인데. 이 사부가 널 모르냐?"

 

  "아니, 혈사부!"

 

  "그냥 무림공적이나 되지 말고 다니면 이 사부는 만족이야."

 

  "전 뭔가 꼭 이룰 겁니다. 강호무림에 빛나는 금자탑을!"

 

  "이 사부가 보기엔 넌 그냥 조용히 사는 게 강호무림을 도와주는 거로 보인다."

 

  그리고 다시 정적이 흘렀다. 중원에서도 멀리 떨어진 오지 광동성이다.

 

  거기에서도 산간벽지인 산속에서 흘러나온 노소의 대화가 어떻게 중원을 뒤흔들지는 아직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거나하게 취한 혈검신마와 그 제자 소천악이었다. 술에 곤드레만드레가 된 소천악이 평소에 정말 궁금했던 걸 물었다.

 

  "혈사부, 그런데 정말 강호제일인은 어떤 남자입니까?"

 

  "넌 아니니깐 신경 꺼라."

 

  확 술이 깨는 기분이 든 소천악이 버럭 소리쳤다.

 

  "아니, 혈사부! 내가 왜 강호제일인이 안 된단 말입니까?"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봐라. 왜 안 되는지."

 

  "좌우간 좋습니다. 강호제일인의 조건이나 말해 주세요."

 

  "커험! 강호제일인이란 사실 세상에 한 명밖에 없다. 왜냐? 최고니까."

 

  흥이 도는지 술동이를 들고 벌컥벌컥 마시던 혈검신마가 말을 이었다.

 

  "얀마, 강호제일인? 그거 별거 아니다. 일부 몰지각한 놈들이 절세무공을 가진 고수가 그거라 하는데 웃기는 개소리지. 무공만 강해봐야 나중에 남는 건 하얀 수염하고 쓸쓸한 노후뿐이니라."

 

  "맞네요. 혈사부 보니 딱이네요. 음, 이렇게 늙어가는군요."

 

  "이 새끼가 정말!"

 

  노화를 터뜨리려는 혈사부의 눈과 당당히 맞서는 소천악이었다. 이젠 나름대로 컸다는 자신감이 물씬 풍겨져 나왔다.

 

  "틀린 말 아니잖아요?"

 

  상대하기도 귀찮다는 듯 혈사부가 머리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에이, 썩을 놈! 좋다. 남자의 소망이 무엇이냐? 뻔한 거야. 강호제일인이란 강호 최고 미녀랑 사는 게 바로 누가 뭐래도 맞는 거야."

 

  곰곰이 듣다 보니 맞는 말이었다.

 

  "캬! 그렇군요. 맞아요. 듣고 보니 옳아요. 역시 혈사부는 풍류를 아시는군요."

 

  "하하, 물론이지. 이놈아! 왕년에 내가 저잣거리에 나가면 여자들이 모두 넋이 나가 혈사부만 봤느니라."

 

  "어호, 그랬군요. 그런데 그 많은 여자 다 어디 가고 혼자 이리 지지리 궁상을 떨고 있습니까?"

 

  싸늘하게 비웃는 소천악을 보며 혈사부는 혈압이 서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새꺄! 이게 다 그 썩을 놈의 정파 새끼들이 죄를 뒤집어씌워 이 꼴이지."

 

  "그럼 안 그랬으면 혈사부가 강호제일인이 될 뻔은 했어요?"

 

  "당연하지, 이놈아. 왜 못 믿겠냐?"

 

  "솔직히 머리는 믿으라 하는데 마음은 아니라는데요."

 

  비웃는 듯한 소천악의 얼굴에 열이 뻗친 혈사부가 벌떡 일어섰다.

 

  "내가 증거를 보여주마."

 

  혈사부는 방구석 깊은 곳에서 족자 하나를 꺼내 왔다.

 

  "봐라, 이놈아. 이게 거의 네 사모가 될 여자였다."

 

  엉겁결에 족자를 받아 든 소천악은 망설임 없이 족자를 펼쳤다. 순간 아찔한 충격을 온몸으로 받았다. 족자 안에 그려진 여인은 한마디로 선녀도였다. 갸름한 얼굴, 초승달을 연상시키는 아미, 그리고 형언할 수 없는 미의 극치. 한마디로 경국지색 그 말 외엔 아무 표현도 할 수 없었다.

 

  딱!

 

  "악! 또 왜 때려요."

 

  "자식이 해도 너무하네. 사모가 될 뻔한 여자를 보고 헬렐레하는 제자가 어디 있냐? 이런 후안무치한 놈!"

 

  "될 뻔한 거죠. 된 게 아니잖아요. 쳇, 그런데 이분은 어디 있나요, 지금?"

 

  "모르지. 내가 산에 온 지 벌써 십이 년째니 어디서 무얼 하는지. 에혀! 야야, 술이나 마시자. 사제 간에 첫 술자리에 술맛 버리겠다."

 

  "좋아요. 망가진 혈사부를 위해 건배."

 

  눈살을 살짝 찌푸린 혈사부는 애써 모른 척하고 술잔을 비웠다.

 

  "그리고 천악아, 얼마 후에 강호무림에 나가면 딱 둘을 조심해라."

 

  "조심이라뇨? 사부님은 절대고수라며요?"

 

  의아한 듯 대꾸하는 소천악의 눈가에 불신이 잔뜩 서렸다. 혈사부가 벼락같이 고함쳤다.

 

  "닥쳐라, 이놈아! 하늘 위에 하늘 있듯이 항상 조심해야 하는 게 강호이니라. 앞에서 찔러오는 칼보다 친한 척 지내다 어느 날 비수를 심장에 들이대는 데가 강호무림이니라."

 

  "음!"

 

  "일단 들어라. 강호에 나가면 만겁마황(萬劫魔皇) 매종악(梅宗岳)을 조심해라. 그자는 이 사부와 이틀 밤낮을 싸우고도 승부를 가리지 못한 대마종이니라. 절대 혈검사식을 완전히 터득하기 전에는 피해야 한다. 또 혈교(血敎)를 피해라. 아직은 기회를 노리고 숨어 있기는 하지만 그 세력이 실로 방대하고 치밀하다. 게다가 아주 독하고 사악하기가 이를 데 없는 놈들이니라. 그놈들과 시비가 걸리면 강호주유에 골치가 상당히 아프다."

 

  침중한 혈사부의 말에 덩달아 무거워진 안색으로 소천악이 대답했다.

 

  "음, 그런 놈들도 있군요. 알겠습니다. 나중에 강호에 나가면 신경 쓰죠."

 

  "그리고 강호에 가면 입조심하여라. 반말 찍찍하는 놈은 미운 털이 박혀 제명에 죽기가 힘들어."

 

  "음, 존댓말이라. 알았어요. 자! 일단은 한잔 쭉 드시죠, 혈사부님?"

 

  "그래, 기분 좋게 마시자꾸나. 나중에 네놈이 기회가 있다면 우리 혈검문의 누명이나 벗겨주면 이 사부는 만족한다."

 

  "걱정 마시고 일단 드세요."

 

  큰소리를 탕탕 치는 소천악을 미덥지 않다는 듯 쳐다보던 혈사부가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그렇게 사제는 밤새도록 두 동이의 술을 뱃속으로 털어 넣었다.

 

 

 

 

 

  제1-4장 강호 초출 - 은원(恩怨)의 시작

 

 

 

 

 

  이윽고 날이 밝을 무렵이었다. 술독에 빠져 세상모르고 곯아떨어진 혈검신마가 잠든 방에 귀를 댔다. 콧소리가 들리는 걸 확인하고 회심의 미소를 지은 소천악이었다. 고양이걸음으로 뒷걸음질친 그는 조심조심 뒤뜰로 갔다.

 

  돌무더기를 치우자 아니나 다를까, 검은 목갑이 눈에 들어왔다. 얼른 열어보자 삼백 년은 족히 넘어 보이는 산삼 세 뿌리가 들어 있었다.

 

  "내 이럴 줄 알았지. 혈사부가 어떤 분인데. 이건 13년간 날 개고생시킨 대가요. 흐흐흐!"

 

  잠시 망설이던 소천악은 아까운 표정이 역력한 채 한 뿌리를 남겨두었다. 나머지 두 뿌리를 얼른 품에 넣고 빠르게 숲으로 달려갔다. 잠시 후 등에 이미 행낭을 짊어지고 극성의 경공술로 산 밑으로 내려갔다. 한 시진을 넘어가자 서서히 힘이 딸려가는 기미가 보였다. 그제야 경공을 풀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 소천악은 산 위를 바라보며 앙천광소를 터트렸다.

 

  "으하하하, 해방이다! 지옥의 십이 년이여! 혈사부, 기다리슈. 제자가 강호제일인이 돼서 다시 찾아오리다. 물론 혼자 오지는 않을 겁니다."

 

  한참을 통쾌하게 웃던 그는 천천히 발길을 돌려 멀리 보이는 마을을 향해 걸어갔다.

 

 

 

  같은 시각.

 

  혈검신마는 방문 앞에 놓인 편지를 읽고 있었다.

 

 

 

  <혈사부님! 제자 소천악 청운의 뜻을 품고 강호제일인으로 우뚝 서고자 길을 떠납니다. 부디 금의환향할 때까지 만수무강하세요.>

 

 

 

  다 읽고 빙긋 웃으며 중얼거리는 혈사부였다.

 

  "도대체 몇십 년이 지나도 그 판이 그 판이군. 이놈의 혈검문 제자들은 왜 이리 개성이 없어."

 

  투덜거리며 품에서 꺼내 든 낡은 편지와 대조해 보았다. 역시 두 편지는 비슷한 내용이었다. 낡은 편지를 쓴 장본인은 다름 아닌 혈검신마 본인이었다. 육십여 년 전 그도 소천악과 똑같이 가출했었다. 그때 남긴 편지 내용과 소천악의 편지는 토 하나 틀리지 않고 같았다.

 

  "자식, 도망갔다고 좋아하겠지. 나도 그랬다. 인마."

 

  싱긋 웃으며 마당으로 내려선 그는 뒤뜰에 가서 비밀창고를 열어봤다. 역시 두 뿌리가 사라져 있었다. 묘한 웃음을 지은 그는 다시 일 장 옆의 땅을 팠다. 땅에선 또 다른 목갑이 나왔다. 열어보자 이번엔 족히 오백 년 정도 되어 보이는 산삼 두 뿌리가 살며시 들어 있었다. 바라보는 그의 얼굴은 환하게 빛났다.

 

  "이제 나도 해방이구나. 직전제자를 만들었으니 편안하게 여생을 즐겨야지. 클클! 최고의 남자라? 으하하하! 죽도록 고생 좀 해봐라."

 

  목갑을 들고 여유 있게 방으로 들어가는 그였다.

 

  "괘씸한 놈! 조용히 말하고 갔으면 이거 주려고 했는데. 네놈 복 네가 찬 거 누굴 원망하겠냐?"

 

  소천악이 들었으면 게거품을 물고 악다구니를 쓸 말이었다. 하지만 이 말이 정말 그의 본심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오로지 그만 아는 사실이었다.

 

  이런 전후사정은 까마득히 모른 채 소천악은 길을 재촉하였다. 행낭에는 어느새 살짝 훔친 족자가 담겨 있었다. 신줏단지처럼 곱게 보관되어 있었음은 당연한 일이다. 사문의 비전비약도 한 움큼 들고 왔다. 만들 줄이야 알지만 있는 거 들고 오는 게 훨씬 간편했다. 그 외에도 혈검신마가 강호를 주유하면서 느낀 점과 처세술을 기록해 놓은 서적도 슬쩍 들고 왔다. 책 제목은 거창하기 이를 데 없었다.

 

 

 

  독행강호주유기(獨行江湖周遊記).

 

 

 

  책 제목을 보는 소천악의 얼굴은 진지함 바로 그 자체였다. 혈사부의 경험을 빌려 자신만은 무림공적의 멍에를 피하고픈 마음이었다. 강호에 발을 딛자마자 공적으로 몰리고 싶은 마음은 티끌만큼도 없었다. 그 위험을 조금이라도 피하기 위한 궁여지책이다. 책은 첫 구절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내가 살아야 세상도 있다. 정의(正義) 따지다가 신세 망친 놈 숱하게 본 노부이니라.

 

  정(正)과 사(邪)는 노부가 정한다. 위험한 놈은 후환 제거차원에서 모조리 죽여왔다. 그래야 두 다리 뻗고 잘 수 있다.>

 

 

 

  소천악이 볼 때는 세상에 둘도 없는 명언이었다. 그 명확한 논리에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잠시 쉴 때마다 책을 펼쳐들고 온 신경을 집중해 하나씩 이해하고 외워나갔다. 책에는 살아 숨 쉬는 혈사부의 육십 년 경험이 고스란히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대인관계에 관한 대화법부터 권모술수를 파악하는 방법 등이 자세히 적혀 있었다. 실로 소천악에게는 중요한 내용이 즐비하게 적혀 있었다. 강호초출의 부담감을 싹 지워주는 책 내용이었다. 억만금을 주어도 바꾸지 않을 귀중한 서적이란 걸 읽을수록 실감나게 느껴갔다.

 

  "이 책 하나만큼은 좋네. 혈사부의 유일한 장점이네. 흐흐!"

 

  책을 덮고 다시 걸어가는 소천악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7살 이후 12년 만에 처음 느껴본 자유로움에 휘파람이 절로 나왔다. 하늘은 푸르고 대지는 싱그러운 나무와 꽃으로 만발하였다. 그림 같은 산하를 걷는 기분은 절로 흥취가 올라왔다. 경치가 좋을수록 울화가 치밀었다.

 

  "제길! 이렇게 좋은 세월을 산속에 처박혀 모진 고생을 했다니! 순 악질 사부 같으니라고."

 

  지옥 같았던 무공수련이 머리에 떠오르자 소름이 오싹 끼쳤다. 고개를 얼른 흔들며 악몽을 털어버렸다. 다시 하라면 차라리 혀 깨물고 죽어버릴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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