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천악 11화
무료소설 소천악: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44회 작성일소설 읽기 : 소천악 11화
"혈사부님! 그런데 왜 검식에서 모두 혈광이 나오는 거죠?"
의아한 질문에 당연하단 듯 대답이 나왔다.
"조사께서 말씀하시길 혈검구식은 인간의 잠재력을 이용한 검식이라 했다. 잠재력이란 곧 인간의 근본인 피에서 나오는 것이니라. 당연히 구현되는 검에서 혈광이 피어나는 거란다."
이해가 되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소천악이었다. 혈사부는 물끄러미 하나뿐인 제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몇 번 초식 시연을 보고 난 후 홀로 수련에 들어가거라. 이미 수련 장소는 물색해 놓았다."
"네, 혈사부! 기필코 수련 기간 동안 혈사부를 뛰어넘는 경지를 성취하고 나오지요."
같잖다는 듯 혈사부가 냉소를 흘렸다.
"음, 거기까지는 별로 기대도 안 한다. 다만 혈검삼식까지는 연성해야 한다."
반발심이 일었지만 나중에 보여주겠다는 오기로 겨우 터지려는 불만을 참았다. 그 후 며칠 동안은 행복이란 걸 처음 느낀 시간이었다. 혈사부의 시연을 보며 구결을 생각하는 처음 맞는 한가로운 시간이었다. 하지만 잠시의 평온은 얼마 가지 않았다.
"자, 이제 볼 거 다 봤으니 수련하러 가자. 식량은 내가 벽곡단을 넣어놨다. 기억하여라. 삼식까지 연성치 못한다면 아예 나올 생각을 말아라."
"염려 마십시오. 혈사부님에게 늘 당하던 이 돌머리 제자, 날마다 돌을 깨는 기분으로 기어코 성취하고 오겠습니다. 물론 혈사부의 경지를 확 뛰어넘을 겁니다."
인사말에 뼈가 잔뜩 들어간 소천악이었다. 영 찝찝한 혈사부가 마지못해 입을 놀렸다.
"음, 미덥지 않다만 일단 믿어보마."
마지막까지 아옹다옹거리며 헤어지는 사제지간이었다. 이윽고 동굴 입구에 선 두 사람이었다. 약간 감회에 젖은 목소리가 처음으로 혈사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동굴 안은 내가 미리 손봐 놨다. 부디 높은 성취를 이루고 나오길 바란다."
"네, 혈사부님. 그럼 불초 제자 다녀오겠습니다. 꼭 살아 계셔서 이 제자의 인사를 받으셔야지요."
크게 절을 올리고 소천악은 보무당당하게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피식 웃음을 짓던 혈사부는 옆에 놓인 산더미만 한 돌을 있는 힘을 다해 옮겨 동굴 입구를 막았다. 며칠 전에 미리 준비해 놓은 돌이었다.
"녀석, 혈검삼식이 아니면 절대 이 돌을 부수고 나오지 못한다. 만사는 불여튼튼이라 했다. 클클, 이제 자유를 만끽해 볼까나. 으하하하!"
가가대소를 터트리며 혈사부는 멀어져 갔다.
세월은 흐르고 흘렀다. 어느새 팔 년이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갔다. 혈사부는 오늘도 할 일 없이 방턱에 기대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쿠르르르, 콰콰쾅!
갑자기 산을 울리는 폭음이 귓전에 들렸다. 졸다 깜짝 놀라 잠을 깬 혈사부는 예리한 시선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이게 무슨 소리야? 어디 벼락이라도 떨어졌나?"
주변에 아무 이상이 없는 걸 확인한 혈사부는 다시 눈을 스르르 감고 졸려고 자세를 잡는 순간!
"혈사부님, 으하하하! 제자 소천악입니다."
쩌렁쩌렁한 청년의 목소리에 잠을 깬 혈사부는 얼떨떨한 눈으로 낯선 청년을 바라보았다. 평생 햇빛이라곤 구경하지 못한 듯 얼굴이 백짓장처럼 하얀 청년이었다. 굵은 눈썹에 큼직한 코가 인상적이었다.
"소천악이라고? 그 말썽쟁이 소천악?"
"맞아요, 접니다. 으하하! 혈사부, 많이 쭈글쭈글해졌군요."
그때야 정신이 버쩍 든 혈사부가 벌떡 일어났다. 자세히 보니 어릴 때 윤곽이 그대로 살아 있었다.
"천악이냐?"
"네, 혈사부님! 제자 무사히 연공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오, 장하다. 훌쩍 컸구나. 의젓해, 이젠 의젓해. 으하하하."
기쁨에 겨워 맨발로 뛰쳐나가 소천악의 손을 잡고 흥겨워 하는 혈사부였다. 그때 감격의 상봉에 북풍한설을 몰아치는 한마디가 들렸다.
"혈사부, 제자를 감금시켜 연공시키고 팔자가 좋았던 모양입니다. 살이 피둥피둥 찌시고 혈색도 아주 좋아지셨습니다."
음산한 소천악의 목소리가 들렸다. 잠시 당황한 혈사부는 버럭 소리쳤다.
"네 이놈! 감히 사부에게 살이 피둥피둥?"
"지금 저 열 받을 대로 받았습니다. 세상에 동굴에 넣어놓고 바위로 막아버리면 어쩌란 겁니까? 설마 제가 연공하다가 도망갈까 봐 그런 건 아니지요?"
"허험! 아무래도 입구가 있으면 연공에 방해가 될까 우려해 그리한 것이니라."
답변이 궁색한 혈사부가 말꼬리를 흐렸다. 바로 소천악의 고함이 쩌렁쩌렁 울렸다.
"혈사부! 제가 어떤 고통을 당해야 했는지 알기나 합니까? 매일 입구에서 고래고래 소리쳤습니다."
"왜 소리는 쳤느냐? 그런데 이게 도대체 무슨 냄새냐?"
코를 팍 찌르는 고약한 냄새에 혈사부가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 바로 소천악의 시퍼런 독기 실린 말이 이어졌다.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리 벽곡단이라 하나 사람인데 똥도 눠야 하고 오줌도 눠야 합니다. 그거 어디다 눕니까? 입구가 막혀 할 수 없이 구석에 쌌는데 아, 흙이 있어야 덮죠! 그 냄새 으흐흐! 솔직히 질식해 죽을 뻔한 게 한두 번이 아닙니다."
아차 한 혈사부였다. 그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자신이 당한 일은 하도 오래돼 깜빡했다. 자신의 사부는 동굴 안에 화장실까지 마련해 준 배려를 기억했다. 영 민망한 혈사부가 먼 산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음! 그거는 사부의 실책이니라. 대충 넘어가자."
"이게 어디 대충 넘어갈 일입니까? 지금 제 몸에 아주 똥 냄새 오줌 냄새가 진을 쳤습니다. 혈사부님이 나중에 크면 입으라고 넣어준 이 옷도 냄새가 지독합니다."
그제야 냄새를 맡아본 혈사부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얼른 뒤로 물러섰다. 손으로 코를 잡고 소리쳤다.
"야, 어서 개울에 가서 씻고 와라. 토하겠다. 제길!"
"으아아! 이 원한을 어찌!"
광소를 지르며 소천악은 개울가로 번개같이 날아갔다.
그날 저녁 방 안에는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서먹하고 썰렁한 분위기였다. 연신 째려보는 소천악을 보며 헛기침을 하던 혈사부가 입을 열었다.
"허, 세월 빠르구나. 어느새 또 팔 년이 지났구나."
"빠르긴 뭐가 빨라요. 저에겐 일각이 여삼추였어요. 제길! 생각해 보니 열 받네. 이 피 같은 청춘을 수련으로 다 보내고 다 늙었어요."
"이놈이? 네가 늙었으면 난 관에 들어가라는 이야기냐?"
"쳇, 지금도 팔 년 전을 생각하면 아주 이가 갈려요."
"그래도 그 개고생한 대가로 이만큼 무공이 성취된 거 아니냐?"
"아휴, 그만둬요. 노인네만 아니면 아주 내가……."
"아쭈! 해보겠다는 거냐?"
사제는 만나자마자 여전히 아옹다옹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그날 이후 삼 일 동안 소천악은 팔 년간 수련했던 무공에 대한 검사를 받았다. 특히 혈검구식의 심사가 까다로웠다. 삼식을 무사히 펼치자 혈사부가 싱긋 웃으며 방을 나섰다. 잠시 후 돌아온 그의 손에는 술동이와 대접이 들려 있었다.
"자! 이제 무공수련이 끝난 기념으로 한잔하자. 이제 네놈도 나이가 약관이 코앞이니 한잔해도 된다. 하하하!"
호탕하게 웃으며 술동이를 연 혈사부의 인상이 확 구겨졌다. 그가 매서운 눈초리로 쏘아보자 소천악은 시선을 하늘에 돌리고 딴청을 피웠다.
"네 이놈! 이젠 술 도둑질까지 하는 거야? 도대체 언제부터 시작한 짓이냐?"
혈사부의 광포한 말에 소천악은 뉘 집 개가 짖나 식으로 귀를 후비고 있었다.
"어, 왜 이리 귀가 가려워. 지나가던 늑대 새끼가 내 말을 하나?"
혈사부는 장탄식을 했다.
"야, 이놈의 새끼야. 넌 정말 우리 혈검문이 낳은 최대의 문제아다. 나도 네놈 나이 때 이런 짓은 안 했다."
"그럼 언제 했어요?"
곰곰이 생각하던 혈사부가 입을 열었다.
"적어도 난 약관이 되는 해 정월 초이튿날 했어. 도대체 네놈은 무슨 생각을 하고 사냐?"
"아이고, 장하십니다, 혈사부. 기껏해야 일 년 차이 가지고 뭘 그러세요? 일 년 먼저 깨달은 제자를 칭찬하는 게 사부의 도리입니다."
사사건건 시비조인 소천악을 애써 외면하며 참는 혈사부였다. 자신의 실수로 제자가 팔 년간 고통 속에 살았던 걸 생각하니 그럭저럭 괘씸함도 참을 수 있었다.
"자자! 기분 풀고 술이나 마시자. 내가 그래도 그동안 네놈 생각해서 산을 헤매고 다니면서 산삼을 자그마치 세 뿌리나 캤다."
"오, 산삼을요?"
눈이 번쩍한 소천악이었다.
"그래, 산삼! 그것도 백 년이 넘은 산삼이니라."
"그거 먹으면 효과가 있나요?"
"효과? 기껏해야 조금 더 살고 내공 한 모기 눈물 정도 늘어날 거다. 영약이라면 뭐 최소 오백 년은 묵어야 효과가 좋지. 이건 뭐 그렇다. 그리고 술 안에 내가 먹었던 네 말로 독약, 내말로는 영약인 것에 대한 해독약도 함께 넣었다."
"음, 그건 고마워요 그리고 산삼은……. 에이, 좋다가 말았네요. 그래도 혈사부님 정성이고 백 년이 어딥니까? 자, 혈사부님, 술 한 잔 받으세요."
"오냐, 장하게 컸구나. 연공이야 당연히 바위를 깼으니 성공일 테고. 축하한다. 망나니 제자야."
"네, 고맙습니다. 악질 혈사부님."
불꽃 튀는 신경전이 벌어지며 술잔은 연신 비워졌다. 숨도 안 쉬고 마시며 산삼을 안주 삼아 먹다 보니 시간이 유수처럼 흘러갔다. 드디어 술기운을 빌어 소천악의 하소연이 터져나왔다.
"혈사부! 왜 전 이리 고통스럽게 무공을 배워야 합니까?"
"제자야! 네가 보기엔 우리 사문이 돈이 있어 보이냐?"
"절대~ 아니죠."
어림없다는 듯 강하게 부정하는 소천악을 보며 혈사부가 말을 이었다.
"맞았다. 그럼 어쩔래? 그렇다고 우리 혈검문에 소림사 대환단 같은 영약이 있냐? 아님 만년교룡의 내단이 있냐?"
"구경도 못 해봤지요. 쌀값도 모자란 판에 웬 영약이요?"
"잘 아는구나! 있는 거라곤 오로지 튼튼한 몸과 하면 된다는 독기뿐이잖아?"
"한숨만 나오네요."
"그러니까 죽기 살기로 수련이라도 해야 영약 먹는 놈 눈아래로 깔아 볼 거 아냐? 영약 먹는 놈이 하루 수련하면 너는 악으로 삼 일 동안 수련했던 거야."
"제길! 말은 쉽습니다. 정작 하는 사람에겐 지옥이지요."
가시 돋친 소천악의 말에 혈사부는 태연했다.
"팔자려니 하여라. 이 사부도 그 수련을 거쳐 왔느니라."
한동안 침묵이 흐른 후 다시 말소리가 들렸다.
"혈사부! 이 생고생을 하고 강호무림에 나가야 하는 이유가 뭡니까?"
"세상사는 어려움이 있으면 그 보답이 마땅히 있어야 하는 법! 너 하고픈 대로 해라."
"그 말이 진심이십니까?"
비로소 희망을 본 듯 소천악의 말에는 생기가 넘쳐흘렀다.
"그래. 사실 사람이란 실수하면서 성장하는 것이니라. 처음부터 완벽하게 살려고 노력하지 말아라. 그저 네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지내다 보면 하나둘씩 깨달음이 오는 거란다. 자신의 행동에 자부심을 가지고 지내야 한다."
"그러다 미움이라도 사면?"
"그러니까 네가 이리 가혹하게 수련하는 게 아니냐? 강호무림이란 힘이 있어야 말이 통하는 약육강식의 초원이니라."
"아! 그런 깊은 뜻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