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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천악 45화

무료소설 소천악: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1,188회 작성일

소설 읽기 : 소천악 45화

 

  조장이라는 복면인을 비롯한 모든 복면인들은 더 이상 덤빌 엄두를 내지 못했다. 굳게 닫혀진 그들의 입은 열릴 줄을 몰랐다. 소문보다 겪어본 무위가 더 섬뜩했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란 생각이 앞서 있었다. 가만히 바라보던 소천악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안 싸우실 거면 꺼지시지요!"

 

  차가운 반말이었지만 복면인들에게는 생명의 소리였다. 짧은 고민을 마친 조장이 이를 부득부득 갈며 말했다.

 

  "모두 후퇴하라! 신의괴협, 이 원한은……."

 

  말이 끝나기 전에 소천악이 툭 씹어뱉듯이 말했다.

 

  "원한은 두고두고 갚겠다, 이런 소리 하시면 다 뒈지십니다!"

 

  실천하겠다는 듯 검을 서서히 올리는 소천악을 보고 기겁한 조장이 서둘러 말했다.

 

  "가자. 모두 퇴각하라!"

 

  말이 끝나기도 전에 복면인들은 썰물 빠지듯 숲 속으로 일제히 사라져 갔다.

 

  "그래. 그게 현명한 거지요. 자존심 내세우면 바로 죽음이었는데 재수도 좋은 분들이시네."

 

  천천히 뇌까린 소천악은 죽은 복면인의 옷에 피 묻은 검을 쓱쓱 닦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철무진과 살아남은 표사들은 두려운 눈빛을 지우지 못했다. 철무진은 일개 쟁자수가 신의괴협일 줄은 정말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잠시 그에게 잘못한 게 있는지 진지하게 생각을 떠올렸다.

 

  이미 정체가 드러난 소천악은 뚜벅뚜벅 걸어가 마차 위에 편히 앉았다. 그의 시선은 얼마 전 자신을 모욕했던 표사에게로 향했다. 표사가 두려움에 몸을 떠는 순간 여지없이 소천악의 입이 열렸다.

 

  "이보시오! 건방진 표사님, 이리로 와보시오!"

 

  소천악의 부름에 표사는 겁에 질려 발도 움직이지 못했다. 감히 광동성을 위진하던 신의괴협을 건드린 자신이 눈물 나게 후회스러웠다.

 

  "얼씨구! 지금 안 오시겠소?"

 

  다시 들리는 소천악의 음성은 더욱 차가워졌다. 도움을 청하려는 듯 동료 표사를 바라봤다. 표사들은 한결같이 고개를 돌리며 딴청을 피웠다. 상대가 돼야 도움도 되는 일이었다. 아까 본 가공할 신위가 아직도 눈앞에 아롱거리는 표사들이었다.

 

  다급해진 표사가 철 표국주를 바라봤다. 하지만 역시나였다. 표국주도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버림받은 기분이 들자 아득한 절망감이 치밀어 올랐다.

 

  "야, 이 싹수없는 표사님! 당신 정말 안 오실 겁니까?"

 

  드디어 신경질적인 소천악의 말이 들리자 겁에 질린 표사가 얼른 다가갔다.

 

  "부르셨습니까? 소협!"

 

  "어라? 소협? 나 쟁자수요, 쟁자수. 아까처럼 말해 보시지요. 뭐? 팔을 자르시려다가 봐주신다고요?"

 

  "소협! 그건 제가 뭘 모르고……."

 

  "시끄럽소이다. 표사님은 내가 쟁자수였으면 바로 그럴 분이시오. 바로 꼬리 내리실 분이 왜 그딴 짓을 했소이까? 이 싹수없는 표사님!"

 

  소천악의 말투는 갈수록 거칠어져 갔다. 점점 표사의 얼굴은 사색으로 변할 뿐이었다. 가만히 노려보던 소천악이 툭하니 물 항아리를 발치에 던졌다.

 

  "가서 물 떠 오시구려!"

 

  "네, 소협! 얼른 다녀오겠습니다!"

 

  살아난 듯한 기쁨에 표사는 얼른 항아리가 넘칠 정도로 듬뿍 물을 떠 왔다. 가만히 물 항아리를 바라보던 소천악이 바로 물을 쏟아버리고 다시 말했다.

 

  "다시 떠 오시구려!"

 

  열 번이 넘게 물 항아리를 들고 물을 떠오는 표사였다. 자존심이 극도로 상했지만 내색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자기가 발끈하면 바로 목을 칠 기세인 소천악이었다. 자존심을 위해 목숨을 던질 만큼 대가 센 표사가 아니었다.

 

  마침내 스무 번째 물 항아리 배달이 끝났을 때 비로소 물 항아리를 들고 물을 마신 소천악이 사공척에게 마시라 주었다. 사공척은 난처하기 그지없었지만 할 수 없이 마셨다. 표사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일그러졌다. 소천악은 어쩔 수 없었지만 하찮은 쟁자수가 마시는 물을 자신이 배달한 꼴이었다.

 

  "왜, 기분 나쁘시오? 나쁘면 말씀하시구려. 바로 다리뼈를 모조리 분질러주지요!"

 

  음산한 소천악의 말이 들리자 화들짝 놀란 표사가 얼른 대답했다.

 

  "아닙니다! 그런 생각을 할 리가 있습니까?"

 

  "했잖소이까. 왜 거짓말하시는 거요?"

 

  "……."

 

  아무 말도 못 하는 표사였다. 자신의 아픈 곳을 남김없이 찌르는 소천악의 비정한 말이었다. 울고 싶었지만 두려움에 눈물이 나올 리가 없었다.

 

  "앞으로 조심하시오. 강호란 어떤 인간이 자신을 숨기고 다닐지 모르는 데라오."

 

  "명심하겠습니다!"

 

  "그거야 맘대로 하시오. 설치시다 뒈지시면 표사님만 손해지요. 가봐요. 재수 없는 표사님."

 

  거칠게 말하는 소천악이었지만 표사에게는 너무 고마운 말이었다. 살려준다는 이야기였다.

 

  "고맙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행동 조심하겠습니다."

 

  손이 발이 되도록 빈 표사가 꽁지가 빠져라 도망갔다. 소천악의 눈길이 금성표국주 철무진에게 향했다.

 

  "표국주님! 이야기 좀 합시다!"

 

  자신을 지적하는 소천악의 말에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철무진 표국주였다. 하지만 애써 담담한 얼굴로 대답했다.

 

  "허허, 소협! 무슨 일로 이 철 모를 찾는지? 조금 전에는 정말 고마웠소이다."

 

  "이보시오, 표국주님! 좋게 말로 할 때 얼른 오시지요. 조금 지나면 이 사람 어떻게 변할지 모릅니다."

 

  스산한 경고였다. 철무진은 내심 얼른 다가가고 싶었지만 표국주 체면에 빨리 갈 수가 없었다. 천천히 걸어가는 그의 심장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 거세게 박동했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은연중에 보법을 전개해 순식간에 소천악 앞으로 갔다. 가자마자 소천악의 비수 같은 말이 나왔다.

 

  "철문진 표국주님! 어떻게 그럴 수가 있소이까? 아무리 쟁자수라 하지만 억울하게 당하면 마땅히 표국주로서 말려야 하는 거 아니오?"

 

  올 게 왔다는 심정이었다. 철무진 표국주는 아무 변명을 하지 못했다. 사실 그때만 하더라도 그깟 쟁자수가 모욕을 당든 말든 아예 관심도 없었다. 평소 사람 취급도 않던 쟁자수였다.

 

  "아! 그게 표행 길이 바쁘다 보니 사소한 문제는 그냥 넘어가는 게 관례라……."

 

  "사소한 일이라 했소이까? 만약 그때 일이 잘못 풀렸다면, 내가 소천악이 아닌 쟁자수였다면 어떻겠소! 아마 이미 이 팔은 잘려 땅에 굴렀을 것이오. 물론 철 표국주는 그래도 신경도 안 썼겠지요?"

 

  "아니, 그게……."

 

  "여러 소리 하지 마시오! 손해배상은 확실해야 하오. 안 그렇소, 철무진 표국주님?"

 

  "물론이죠! 해드려야지요. 어떻게?"

 

  "거두절미하고 쟁자수 일인당 은자 오십 냥씩 추가해 주시오. 지금 당장 말입니다!"

 

  철무진은 반박할 수가 없었다. 조금 전 피도 눈물도 없이 복면괴인들을 참살하는 모습을 기억하니 소름이 끼쳤다. 얼른 말에 돌아가 은자를 챙겨 돌아왔다. 소천악은 쟁자수에게 일일이 은자를 나눠 주었다.

 

  사공척 등 쟁자수는 거금을 받으면서도 켕기는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런 눈치를 모를 소천악이 아니었다.

 

  "괜찮아요! 편하게 받으시오. 만약 나중에라도 은자를 뺏거나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면 저기 있는 금성표국은 원인 모를 일로 몰살당할 거요!"

 

  소천악의 말은 철무진 표국주만이 아니고 전 표두와 표사에게 공포감을 심어주었다. 막말로 잘못하면 다 죽이겠다는 선포나 다름없었다. 철무진이 얼른 사태 수습에 나섰다.

 

  "그런 일은 하늘이 두 쪽이 나도 없을 것이오! 나 철무진의 명예를 걸고 맹세하겠소!"

 

  "제발 그러길 바라겠소! 그리고 왜 나에겐 손해배상이 없는 거지요? 이렇게 중노동을 시켰으면 당연히 알아서 줘야 하는 거 아니오이까?"

 

  "드려야지요, 당연히! 그런데 얼마나?"

 

  "알아서 주시오!"

 

  말하는 소천악은 갑자기 검을 벼락같이 뽑아 옆에 있던 아름드리나무를 향해 경신법을 전개했다. 발끝으로 살짝 찬 그의 신형은 서늘한 기세로 순식간에 이십여 장을 날아 나무 옆으로 다가섰다.

 

  슬쩍 움직이는 검에 실린 검광이 번뜩이는 모습은 차라리 아름다웠다. 얼마나 쾌검인지 미처 움직이는 검의 흔적을 따라갈 시선이 아무도 없었다. 검무를 마치고 천천히 걸어 돌아온 소천악이었다.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아름드리나무가 수십 조각으로 베어져 넘어갔다. 그 장면은 나름대로 검을 익혔다고 자부하던 철무진 표국주의 얼굴을 똥색으로 변하게 만들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검으로 나무를 베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아름드리나무였다. 검에 실린 내력이 약하다면 나무에 박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닌 수십 차례 벤다는 건 절정고수라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멍하니 바라보던 그의 손이 중풍 환자처럼 떨려왔다. 분명히 경고였다. 알아서 주란 말이 이처럼 공포스런 적은 단연코 그의 평생에 없었다.

 

  놀란 철무진 표국주는 얼른 말에 가서 전표 주머니를 들고 왔다.

 

  "소협! 이거 얼마 안 됩니다!"

 

  "얼마요?"

 

  "대충 칠백 냥은 될 겁니다!"

 

  떨리는 철무진의 목소리를 들으며 아무 말 없이 전표 주머니를 받아 든 소천악이었다. 그는 주머니를 열어 전표를 둘로 나누기 시작했다. 반이 담긴 전표 주머니를 다시 철무진에게 돌려주었다.

 

  "자, 이 정도면 나는 만족하오! 내가 녹림 인물도 아니고 어찌 다 받을 수가 있겠소?"

 

  "그러시군요, 소협! 뜻대로 하시지요."

 

  "자, 이제 우리가 헤어질 시간이군요! 내가 동행해 봐야 불편할 듯하니 이만 떠나겠소!"

 

  철무진 표국주는 내심 쾌재를 부르면서도 아쉬운 듯 말했다.

 

  "아쉽군요! 하지만 정히 소협의 뜻이 그렇다면 그러시지요!"

 

  철 표국주의 내심을 이미 간파한 소천악이었다. 피식 웃음을 지으며 사공척에게 포권했다. 놀란 사공척이 얼른 읍으로 맞이했다.

 

  "사공 형! 그동안 신세 많이 지고 떠나오!"

 

  "아니 신세는 제가 많이 졌지요. 이 보잘것없는 목숨도 구해주시고!"

 

  "하하, 아니오. 인간적으로 돌본 건 사공 형이었소. 이거 얼마 안 되지만 살림에 보태시고요."

 

  살짝 건네주는 전표는 일백 냥짜리였다. 놀라 소리치려는 사공척의 입을 손으로 살며시 막고 말했다.

 

  "그냥 넣어두세요. 덕분에 재미있는 경험도 하고 용돈도 벌었으니까요. 즐거움은 나눠야 배로 기쁘지요. 이제 갑니다. 하하하!"

 

  기분 좋게 웃으며 소천악은 신형을 날렸다. 일부러 위세를 보이기 위해 숲의 나뭇가지를 살짝 밟으며 삽시간에 종적을 감췄다. 가만히 바라보던 철무진 표국주가 전표 주머니를 열어봤다.

 

  "이런 망할 놈!"

 

  거친 말이 저절로 튀어나오는 철무진 표국주였다. 옆에 서 있던 표두 한 명이 급히 다가왔다.

 

  "무슨 일입니까? 표국주님!"

 

  "아, 저 자식이 맨 열 냥짜리 전표만 주고 갔어! 이거 다 합쳐야 백 냥이 될까 말까 해 칠백 냥에서 백 냥이라? 차라리 다 가져가지. 누구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쳐 죽일 놈."

 

  서슬이 시퍼레져 소리치는 철무진 표국주였다. 살아남은 표두와 표사들은 그저 먼 산만 바라보았다. 괜히 말했다 덤터기 쓰기는 모두 싫었다. 그랬다. 소천악은 전표를 딱 반으로 나누었다. 단 장수로만!

 

 

 

  머리로 펄펄 뛰는 철무진 표국주를 상상하며 실소를 웃던 소천악은 발걸음을 빨리 옮겨 호남성으로 들어섰다. 나름대로 고생했다는 느낌이 들자 당연히 풀어야 했다. 객잔에 들러 배를 채운 그는 점소이에게 들은 대로 호남성에서 유명한 기루에 바로 들어섰다. 몇 번의 경험으로 이젠 아주 틀이 잡힌 풍류공자로 변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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