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천악 41화
무료소설 소천악: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87회 작성일소설 읽기 : 소천악 41화
"소협, 어제 정말 고마웠어요."
"고맙긴요. 남들이 들으면 양 소저 언니와 조카를 구해준 줄 압니다. 하하!"
"어머! 무슨 말씀을."
살짝 얼굴을 붉히는 양소아였다. 양자청 장로는 흐뭇한 표정으로 청춘남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도 어제 본 소천악의 협기와 놀라운 무공에 은근히 양소아와 짝이 되기를 부추기는 입장이었다. 만약 그가 소천악의 실체를 알았다면 땅을 치고 통곡할 일이었다.
"그나저나 홍수 피해가 커서 큰일입니다."
짐짓 어두운 얼굴로 소천악이 말했다. 그 말에 양소아도 안색이 굳어졌다.
"그러게요. 수많은 이재민들이 집을 잃고 거리로 나앉게 생겼어요. 비도 아직 계속 오니 더 피해가 커질 거 같아요."
걱정스런 양소아의 말에 가만히 쳐다보는 소천악이었다. 아무리 봐도 어여쁜 마음씨를 가진 여인이었다. 미모로 봐도 단목산산보다 뛰어나면 뛰어났지 떨어지지 않았다. 아쉬운 건 족자 속 미인보다 떨어진 미모였다.
소천악의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내려진 결론은 양소아는 제이 부인감으로 일 순위였다. 단 현재까지의 기준이었다. 마음이 정해지자 말과 행동이 일치되었다.
"허, 그러게 말입니다. 어려운 백성이 눈앞에 보인다는 건 괴로움이지요. 자, 이러지 말고 가서 도울 수 있는 건 도와주도록 해야지요."
"아! 역시 소협께서는 협의지사라 한 치의 소홀함도 없군요."
양소아가 감탄하듯이 말하자 우쭐거린 소천악이 대답했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어려운 사람을 보면 도우는 건 인지상정이지요."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히 듣던 양자청 장로가 유쾌한 듯 호탕한 웃음을 내던졌다.
"으하하! 내 오늘 어린 사람들에게 좋은 걸 배우네. 자, 가세나. 우리가 할 일을 찾아 무언가라도 해야지."
화기애애한 식사가 끝나고 세 사람은 급히 강 쪽으로 달려갔다. 어제 잠긴 마을 주민들이 어떻게 지내는지를 보기 위함이었다. 아침 일찍이 가본 수재민의 생활은 한마디로 한숨만 나왔다. 양소아는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인 채 넋을 잃고 바라봤다.
성에서 급히 지원해 준 건 달랑 비를 막을 군용천막뿐이었다. 식기도 식량도 없이 그저 망연자실 하늘만 바라보는 백성이 수천 명이었다.
"어떡해요, 장로님? 이 사람들 도와줄 방법이 없나요?"
안타까운 양소아의 말에 양자청 장로는 원망스러운 듯 하늘만 쳐다보았다.
"소아야! 가난 구제는 나라도 못 한단다. 이 모든 이들을 보살피려면 수많은 은자가 필요하단다. 알다시피 우리가 현재 가진 게 없잖니?"
"본가에 이야기하면 안 될까요?"
"음… 어려운 일이야. 본가도 그리 사정이 편한 편도 아니고 바로 앞의 백성도 못 도우면서 이들을 지원한다는 건… 흠."
더 이상 말하기 곤란한 듯 양자청 장로가 말끝을 흐렸다. 둘의 대화를 지켜보던 소천악은 엄청난 망설임에 빠져들었다. 확실히 도장을 찍기 위해선 써야 하는데 아까웠다. 한참을 망설인 끝에 도와주기로 결정을 내렸다. 내심 자신도 배고픔의 고통을 겪어본 자로서 하는 생각이란 위안을 가졌다.
"양 소저! 제가 얼마간의 은자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선 이걸로 어려운 백성들을 도웁시다."
"소협! 이건 한두 푼의 은자로 해결될 이야기가 아니에요. 마음은 고마운데……."
쓸쓸하게 말하는 양소아의 얼굴을 보니 왠지 마음이 아파왔다. 당연한 일이다. 이미 제이 부인감으로 점지한 여인의 아픔이 다가섰다. 아무 말 없이 소천악은 전낭 속의 전표를 죄다 꺼냈다.
점점 전표가 나오자 양소아와 양자청 장로의 얼굴은 놀라움으로 변해갔다. 양자청 장로가 급히 말했다.
"이런 거금이!"
"하하, 별거 아닙니다. 우선 이거면 저 가여운 백성들의 임시 거처와 식량이 해결될 듯합니다만."
"해결뿐인가. 이 정도 거금이면 저들이 다시 일어날 여력이 될 걸세. 이런 호생지덕을 베풀다니! 자네야말로 진정한 강호의 협사일세."
감격에 겨워 부들부들 떠는 음성을 내는 양자청 장로였다. 옆에 양소아도 새삼 소천악을 다시 보는 모습이 확연하게 시야에 잡혔다. 소천악에게 양자청 장로의 칭찬 따위가 관심 있을 리가 없었다. 다만 양소아의 표정만 관찰할 뿐이었다.
거금 육천 냥이 뿌려지자 집과 논을 잃고 상심에 빠졌던 수재민들이 환호했다. 더구나 그 사람이 어제 신화적인 전설을 만들어낸 소천악임을 곧 알았다. 수재민들은 바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칭송을 노래했다.
"오호, 활신선이시여! 복을 받으십시오."
목소리를 모아 합창하는 수재민의 인사를 소천악이 받았다. 내심은 억울해 피를 토할 심정이었지만 겉으로는 대인의 풍모를 보이려 심혈을 기울였다.
"하하, 이러지들 마십시오. 은자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법입니다. 다들 힘을 내시고 다시 일어서시길 바랍니다."
"역시 소신선이시군요."
감탄한 수재민의 눈빛에 선망이 절절히 흘러내렸다. 소천악은 그런 수재민이 귀찮았다. 사실 양소아만 아니었다면 결코 이런 일을 할 위인이 아니었다. 양소아와 함께 수재민들의 뒤처리를 하다 보니 하루해가 저물어갔다.
"소협! 고생 많이 하셨어요. 아, 정말 이런 일이."
"하하 별거 아닙니다. 자꾸 이러시면 얼굴이 부끄러워 도망가야 합니다."
"소협, 도대체 누구신지요? 이런 협의지사를 아직까지 이름도 모른다는 건… 아까 식사할 때 여쭤야 하는데 하도 서두르셔서."
부끄러운 듯 이름을 물어보는 양소아였다. 이미 그녀의 마음에는 소천악이 인세에 보기 드문 귀인으로 보였다. 가슴에 점점 박혀가는 소천악의 잔영이었다. 따사로운 미소를 교환하는 두 젊은 남녀를 뒤에서 양자청 장로가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소천악은 조용히 말했다.
"전 소천악이라고 하외다."
"헉, 소천악! 신의괴협 소천악?"
놀란 양소아가 소리쳤다. 뒤에 서 있던 양자청 장로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단목세가의 풍운을 잠재운 고수! 은하전장의 괴질병에 걸린 담수란을 고친 신의! 강호에서 이를 가는 색마들을 척살한 협의지사! 참 수많은 수식어를 단 소천악이었다.
강호초출치고 그만큼 수많은 화제를 뿌린 이도 드물었다. 그 인물이 바로 눈앞에 있다고 생각하니 양소아는 절로 가슴이 뛰었다.
"아, 몰라봐서 죄송해요. 전 양씨세가의 양소아라고 해요."
"오, 천하 십대미녀 중 한 분이신 양 소저였군요."
가증스럽게도 소천악은 전혀 몰랐다는 듯이 시치미를 뗐다. 십대미녀란 소리에 얼굴을 붉히면서도 살짝 자부심을 내비치는 양소아였다. 이후 두 사람은 아주 좋은 분위기 속에서 서로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눈만 마주쳐도 인연이라는 세상 인심에 비해 그 진행속도가 상당히 빠른 편이었다. 이는 양자청 장로의 묵인이 있었다. 그도 떠오르는 강호의 신진고수인 소천악과 양소아의 인연을 굳이 막을 필요를 못 느꼈다. 오히려 점차 쇠퇴해 가는 세가를 생각할 때 잘된 일이라는 심중을 굳혀갔다.
그때 그의 시야에 많은 사람들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 가만히 시선을 집중하니 남루한 복색이 어려운 백성이라는 게 확연히 보였다.
다가온 사람들은 서둘러 물었다.
"여기 소신선이 계시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어디 계신지요?"
"아, 소신선!"
양자청 장로는 실소를 머금으며 소천악을 지그시 바라봤다. 눈치로 살아온 백성들이 그 의미를 모를 리가 없었다. 우르르 몰려가 무릎을 꿇고 소리치기 시작했다.
"소신선이여, 우리를 가엽게 여겨주십시오. 저희는 저 밑 마을에 사는 백성들입니다요. 이번 물난리에 모든 것을 잃고 이렇게 염치 불고하고 도움을 청하러 찾아왔습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였다. 분위기 좋게 이야기하다 외치는 소리에 놀라 고개를 돌린 소천악이었다. 그는 또다시 찾아온 채권자를 만난 기분이었다. 슬쩍 곁눈으로 보니 양소아의 자비심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벌써 눈물이 글썽거리는 게 금방이라도 울 기세였다. 소천악은 아무도 듣지 못할 정도로 나지막이 뇌까렸다.
'제길! 이거 부인 하나 구하려다가 개털 되겠다.'
"소 소협! 저분들을 어떻게 하죠? 흑흑!"
드디어 울음보가 터졌다. 소천악은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이미 수중에는 땡전 한 푼 남아 있지 않았다. 여기서 멈추자니 왠지 일 보고 뒤처리 안 한 기분이었다. 달려온 백성들이 아귀로 보였다. 자신의 피 같은 은자를 뺏으러 온 놈들 같았다.
결국 포기하기로 했다. 어차피 남의 돈이었다는 마음을 먹고 눈을 질끈 감았다. 소천악은 말없이 전낭 깊숙이 감춰진 황금패를 꺼내 양소아에게 건네주었다.
"이 패를 들고 은하전장에 가서 오천 냥어치 식량을 구해 오시오. 그리고 제 말이 좋은 말이니 팔아서 보태십시오."
"이게 무슨 패인지요?"
"가면 알게 될 것이오. 어서 서두르시오. 자칫하면 추위와 배고픔으로 수많은 사람이 위험하오. 어서 가시오."
다급한 표정의 소천악을 보고 고개를 끄덕이던 양소아와 양자청 장로는 급히 말을 타고 성내로 향했다. 그들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진 후에야 좀 전의 얼굴 표정을 싹 바꾸는 소천악이다. 한마디로 김샌 얼굴로 작게 중얼거렸다.
"제길, 인정 많은 부인을 구하려면 떼돈을 벌어야겠군."
불량스러운 말투가 확 드러날 정도였다. 방금 전까지 보였던 협의지사의 모습은 아무리 눈을 비비고 봐도 찾을 수가 없었다. 가만히 서 있는 그에게 달려온 다른 수재민들이 수없이 절을 하며 인사했다.
"소신선이여, 하늘의 복을 받으실 겁니다."
소천악은 차마 대꾸하고 싶지 않았지만 이름 관리를 위해 할 수 없이 답례했다.
"하하, 별거 아닙니다. 아무쪼록 열심히 사셔서 좋은 세상을 보시기 바랍니다."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면서도 내색하지 않고 웃은 소천악이다. 잠시 쓰린 속을 달래기 위해 혼자 으슥한 곳으로 들어갔다. 부지런히 번 돈이 죄다 엄한 놈 입으로 들어가 버렸다 생각하니 화병이 날 지경인데도 표정 관리를 하려니 고통이 말이 아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양소아와 양자청 장로가 돌아왔다. 그들의 입은 귀에 걸려 있었다.
"소 소협! 그런 금패인 줄 몰랐어요. 지금 은하전장에서 오천 냥을 뿌려 식량과 생필품을 모아 온다고 합니다. 그리고 한혈마도 삼천 냥에 팔아 보탰습니다. 정말 무어라 말해야 할지."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한 양소아가 말하자 손을 휘휘 저으며 대답하는 소천악이었다.
"아닙니다. 필요한 사람이 쓰면 되지요."
말은 이렇게 해도 소천악은 나불거리는 양소아를 곱게 볼 리가 없었다. 다시 한 번 부인감으로 삼을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마음이 불편한 소천악은 급히 말했다.
"아, 아무래도 잠시 쉬어야 할 거 같습니다. 어제 너무 무리해서."
"아, 어서 들어가 쉬세요. 제가 너무 힘든 분을 고생시켰군요. 나머지 일은 우리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요."
"그럼, 부탁합니다. 양 소저."
존경스러운 눈길을 받으며 소천악은 객잔으로 홀로 돌아갔다. 그 존경에 쏟아 부은 돈이 무려 만 냥이 넘었다. 차마 억울해서 그 돈이 백성들에게 풀리는 걸 두 눈 뜨고 볼 기분이 아니었다. 방에 처박힌 소천악은 마음을 정리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양소아와 더 있는 건 위험했다. 그 자비심을 채우려면 현재로서는 어림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