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천악 34화
무료소설 소천악: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66회 작성일소설 읽기 : 소천악 34화
"네, 아버님. 걱정 끼쳐서 송구하옵니다."
눈도 뜨지 못하고 들릴까 말까 한 가는 목소리로 말하는 딸이 애처로워 차마 눈을 돌리지 못하는 장주였다. 그의 눈에는 서리서리 이슬방울이 흘러내렸다.
"자, 그럼 모두 방에서 나가주시고 어떤 소리가 난다 할지라도 방에 아무도 들어오면 안 됩니다. 자칫하면 큰일이 난다는 걸 명심하시고 어서 나가주시오."
소천악의 말에 아무 소리도 못 하고 자리를 비켜주는 장주 일행이었다. 나가면서 던지는 애절한 눈빛에 가슴 한구석이 찔러오는 소천악이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 그 눈빛의 의미를 모를 리가 없었다.
방 안에는 소천악과 누워 있는 담수란만 있었다. 가만히 바라보던 소천악의 눈이 번뜩였다.
"제길, 해보자고. 일단 진기를 넣어 뚫어보자고."
속으로 뇌까리던 소천악이 담수란에게 말했다.
"소저, 이 무례를 용서하시오."
중얼거리던 소천악이 서슴없이 담수란의 옷을 벗기고 배에 손을 댔다. 담수란은 부끄러움에 온몸이 홍당무가 되어갔다. 마치 부드러운 천을 만지는 감칠맛 나는 촉감이 느껴졌다. 남자의 본능이 막 발동되려는 순간 뜨끔한 그가 얼른 정신을 수습했다. 담수란도 그런 느낌을 모를 리 없었다. 생전 처음 부끄러운 신체에 외간 남자의 손길이 닿자 정신이 아득해져 갔다.
아차 한 소천악이 급히 중얼거렸다.
'정신 차리자. 넌 의원이다. 그런데 내가 의원이 맞나?'
머리가 어지러워지자 마음도 산란해졌다. 사람 하나 살린다는(?) 기분으로 마음을 다잡고 다시 손을 대는 소천악이었다. 혈천신공을 일으켜 기혈(氣穴)로 밀어 넣은 진기는 초장부터 꽉 막힌 혈도에 더 이상 전진하지 못했다. 무려 18년 동안 그녀의 몸 안에서 뭉친 탁기가 그리 순순히 길을 비켜줄 리가 없었다.
"아주 지랄을 하는구나. 네놈이 아무리 버텨봐야 나도 민다 이거야. 해보자 이거야."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소천악은 신공을 일으켜 거세게 기혈을 밀어갔다. 오로지 믿는 건 혈천신공이 보여준 그 가공할 치유력이었다. 담수란은 온몸을 지지는 듯한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아악! 그만! 제발 그만 해요."
"조용하시오, 소저."
조용히 나무라는 말에 담수란은 바로 쏘아붙였다.
"이건 아니야."
이를 악물고 토해내는 담수란의 얼굴은 시뻘건 채 점점 달아올랐다. 소천악은 손을 떼지도 않은 상태로 퉁명하게 말했다.
"그거 십 년 참은 사람도 있소."
"어떻게 그 말을… 아아악!"
다시금 밀어드는 온몸이 녹아내릴 듯한 고통에 비명을 요란하게 질러대는 담수란이었다.
"정말 시끄럽구려. 에이!"
화가 난 소천악이 담수란의 아혈을 점혈했다. 목구멍의 혈도가 막히자 담수란은 소리도 못 내고 끙끙거렸다.
"이제 조용하네요. 자 지금보다 조금 아프니까 잘 참아야 하오. 담 소저."
경고인지 협박인지 아리송한 말을 던지고 소천악은 본격적으로 진기를 불어넣기 시작했다. 기혈을 막고 있는 탁기와 진기의 맹렬한 승부가 벌어졌다. 담수란은 온몸이 터질 것 같은 고통이 갈수록 심해졌다.
마치 수백 개의 칼이 일시에 전신을 난도질하는 격통이 찾아왔다. 비명을 지르고 싶어도 아혈이 막혀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했다. 말도 못 하고 죽을 것 같은 공포감이 파도로 밀려왔다.
마음으로 애원하기 시작했다. 제발 이 고통에서 벗어나 죽고 싶다는, 죽으면 편할 것 같다는 막연한 절망감이 엄습했다. 막 생의 끝자락을 놓으려는 순간 귓전을 때리는 소리가 들렸다.
"정신 차리시오, 소저! 살아서 이 좋은 세상 바라봐야 하지 않겠소?"
소천악의 목소리였다. 차라리 저승사자가 더 반가울 것 같은 저주의 목소리였다. 목소리는 연속해서 들려왔다.
"이렇게 외간 남자가 소저 몸을 떡 주무르듯 주물러대는데 억울하지도 않소? 고쳐서 일어나 항의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오?"
실실 비웃는 소리에 오기가 치밀었다. 저 인간을 꼭 다시 보고 악을 쓰고 싶은 욕망이 활활 불타올랐다. 수치심은 바로 독기로 이어졌다. 온몸 가득 죽을힘을 다해 용을 쓰는 담수란이었다.
소천악은 만족스런 미소를 지으며 다시 진기의 흐름에 가속도를 붙여 기혈로 불어넣었다. 진기는 다시 한 번 힘을 받아 거세게 기혈로 밀려들었다. 혈관이 일그러지는 듯하더니만 기어코 진기는 막힌 기혈을 뚫어내고 거센 파도로 돌변해 호호탕탕 밀려갔다.
이미 탄력을 받은 진기는 거침없이 신궐혈을 거쳐 거궐, 옥당혈 등을 조금도 망설임 없이 관통해 갔다. 물론 일일이 손으로 주무르는 수고를 거쳐야 했다. 담수란은 머리가 텅텅 비는 기분이었다. 이미 몸은 고통에 시달리다 못해 푸르르 끊임없이 경련을 일으켰다.
앞쪽에 있는 혈도를 모두 풀어내자 이미 치료 시간은 무려 두 시진을 넘기고 있었다. 그제야 손을 떼고 지친 몸을 추스르는 소천악이었다. 가만히 내려다보니 담수란은 치료 전보다 훨씬 좋아진 게 분명해 보였다.
소천악은 몰랐지만 혈천신공은 어쩌면 세상 최고의 치료신공이었다. 일단 신공이 전개되면 인간이면 누구나 간직하고 있는 잠재력을 촉발시키는 묘용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담수란의 병은 병명도 모르는 희귀한 불치병은 맞았다. 병마와 싸우느라 약해질 대로 약해진 그녀였다. 혈천신공은 병마에 밀려 구석에서 신음하던 그녀의 잠재력에게 놀라운 힘을 나누어 주었다. 힘을 얻은 그녀의 잠재력은 그동안 당한 수모에 앙갚음이라도 할 듯이 거세게 병마를 밀어내고 말았다.
물론 혈사부가 이를 모를 리는 없었다. 다만 모르고 개고생하란 뜻이었다.
고통에 겨워 기절한 담수란을 보고 그제야 이마에 맺힌 땀을 쓸어내리는 소천악이었다. 참으로 힘들고 조마조마한 순간이 영원처럼 지속된 기분이었다. 바라본 담수란의 얼굴과 몸은 치료 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창백하다 못해 푸르딩딩한 피부가 어느새 뽀얀 살색을 보이더니 순식간에 불그스레한 혈색이 감돌아들었다.
일단은 대충 성공한 기분이었다. 위기일발을 넘기고 나니 피로감이 몰려왔다. 소천악은 비틀거리며 일어서서 방문을 열었다.
"신의님, 어떻게……?"
뒷말을 차마 잇지 못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어오는 담대추광 은하전장주였다. 이미 그에게서 장주의 위엄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흔적도 없었다.
자식의 고통을 보면서도 어쩔 수 없었던 피눈물 나는 기억이었다. 그 아픔이 가슴에서 밀려 올라와 목이 메이는 그였다.
"일단은 고비는 넘겼습니다. 앞의 혈은 다 텄는데 아직 갈 길은 멉니다. 쉽지 않을 겁니다."
소천악은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했다. 아니, 거짓말이라고도 할 수는 없었다. 일단 고치긴 했다. 다만 정작 치료한 본인만이 모를 뿐이었다.
"아, 신의님. 감사합니다. 이보시오, 부인."
후다닥 뛰어 들어가는 유소운 대부인을 보며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장주였다.
"죄송하오이다. 저 사람이 이런 여자가 아닌데."
"괜찮소이다. 나라도 저리 안 한다는 장담을 하기는 어렵지요."
덕담을 주고받는 장주의 얼굴은 당장에라도 방 안으로 들어가고픈 심정을 억누르느라 힘든 기색이 역력했다.
"하하, 장주님, 어서 방으로 들어가시지요. 전 이만 정원에서 산책이나 해야겠습니다."
"그러시렵니까? 그럼 어서 가시지요."
장주는 애타는 마음을 애써 감추고 소천악을 정원으로 안내했다. 그 순간이었다.
"담 가가! 우리 수란이가……. 아흐흐흑."
고함과 함께 요란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아! 신의님. 아무래도……."
"하하, 어서 가보십시오. 이럴 때는 모두 모여야 기쁨이 더 커지지요."
장주는 체면 불고하고 바로 뒤돌아서서 달렸다. 그 뒷모습을 실웃음으로 지켜보던 소천악이 정원을 한가로이 거닐었다. 엉터리 의술로 고친 기분이 정말 하늘을 나는 느낌이었다. 조금 전에 고생한 기억은 이미 머릿속에서 말끔히 사라진 터였다.
넓게 펼쳐진 연못 위 정자에 앉아 피로감을 조금씩 날려 가는 소천악이었다. 편안히 눈을 감고 쉬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깜빡 잠이 들었다.
적잖은 시간이 지나 눈을 뜬 그는 기지개를 펴면서 흠칫했다. 정자 안에는 장주를 비롯한 소공자 등 가족들이 모두 모여 그를 지켜보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일어나셨습니까, 신의님? 이렇게까지 힘드신데 도움이 되지 못해 송구스럽습니다."
담대추광 장주는 고개를 깊이 숙였다. 중원 오대전장의 주인으로 만금을 휘두르는 지고한 신분이었다. 그의 절을 받을 자는 천하를 통틀어서 몇 명 되지 않았다.
"아니, 장주님. 이러시면 소생이 거북하오이다."
당황한 소천악이 손사래를 치며 말해도 담대추광 장주는 요지부동이었다.
"무슨 말씀을. 생각 같아서는 무릎이라도 꿇고 감사의 인사를 올리고 싶습니다. 정말 이 은혜 어찌 갚아야 할지."
말하는 그의 눈에는 지나간 시절의 회한이 절절히 흘러나왔다. 자식이 죽어가는 걸 두 눈으로 보면서도 아무 일도 못 한다는 무력감으로 지내온 세월이었다. 그동안 가슴에 맺힌 한으로 잠 못 잔 날이 부지기수였다.
"이러지 마시오! 장주님. 의원이라면 마땅히 해야 할 도리를 했을 뿐이오이다."
"그 의원이 신의님 한 분이라는 거 아십니까? 아무리 겸양하셔도 그 노고야 어찌 모르겠습니까?"
"아직 치료가 끝나지 않았소이다. 갈 길이 먼데 이러시면 부담이 됩니다."
"여기까지라도 전 만족합니다. 이렇게 딸이 고통 없이 웃기만 하는 걸 보기만 해도 행복하오이다. 하하하하."
크게 웃는 장주의 목에서 한이 하나씩 둘씩 떨어져 나갔다. 그 뒤를 이어 분분히 대부인과 남매의 진심 어린 인사가 이어졌다. 소천악은 아주 인간성 좋은 의원으로 변신해 화사한 미소와 더불어 대화를 이어갔다.
"앞으로도 최소한 일주일의 치료 기간이 남았습니다. 전 그저 열심히 치료에만 전념할 생각이오. 다음 일을 생각하는 건 의원의 도리가 아니오."
"오오, 역시!"
장주의 감탄사는 쉬지 않고 나왔다.
이후 소천악에 대한 대우는 백팔십 도로 달라졌다. 장주의 엄명에 따라 은하전장 최고극빈 대우로 바뀌었다.
매끼마다 산해진미가 올라와 상다리를 휘게 만들었다. 심지어 산삼이 간식거리로 전락한 꼴이었다. 연일 호의호식을 하며 소천악은 매일매일 담수란의 막힌 혈을 열어주었다.
물론 담수란은 날이 갈수록 소천악에게 고마움과 증오심을 함께 가져야만 했다. 몸이 나아지는 건 고마웠다. 하나 치료 때의 그 참혹한 고통을 생각하면 이가 갈렸다. 의원과 환자 사이에 커다란 마음의 벽은 갈수록 커져만 갔다.
물론 장주를 비롯한 식구들은 거의 부처님 보듯 그를 대했다. 소천악의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믿을 지경이었다.
드디어 담수란의 마지막 혈도를 터주는 날이 다가왔다. 과연 고치고 있는지 아리송한 기분으로 소천악은 여전히 무표정하게 담수란의 방으로 들어섰다. 담수란은 몸이 많이 회복돼 침대에서 나와 의자에 앉아 창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 독기가 채 안 빠져 눈은 감은 채였지만 초여름의 신록을 느끼며 싱그러운 바람의 내음을 마음껏 들이쉬었다. 인기척에 고개 돌린 담수란은 바로 아미가 잔뜩 찌푸려졌다. 발걸음 소리만으로도 당사자를 훤히 아는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