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천악 32화
무료소설 소천악: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65회 작성일소설 읽기 : 소천악 32화
"그래요? 하오문이라……."
소천악의 눈이 섬뜩하게 빛났다. 본보기를 보일 기회가 다가온 느낌이었다.
"무슨 문제라도?"
담명후는 왠지 불길한 기분에 조심스럽게 물었다. 소천악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지나가는 말처럼 말했다.
"아니오. 일단 나갑시다. 어서 진맥을 해보아야 알 거 아니겠소!"
세 사람은 객잔을 나섰다. 물론 그동안의 식대는 담명후가 말끔하게 정리했다. 소천악은 당연시하면서 객잔 밖에 나서자 입을 열었다.
"잠시 여기서 기다려주시오. 잠깐 처리할 일 하나만 급히 해결하고 바로 오겠소!"
"그러지요."
왠지 불안한 담명후였지만 흑마전주를 물리친 소천악을 강제할 힘이 있을 리 없었다. 단지 애타는 눈길만 보낼 뿐이었다.
담명후와 헤어진 소천악은 빠른 걸음으로 하오문 지부를 찾아갔다. 문을 발로 뻥 차고 들어선 그를 보고 하오문도 상방충이 반색을 했다.
"아니, 귀인께서 어인 행차를?"
"잔소리 말고 지부장 데려오시오. 차 한 잔 마실 시간 동안 안 나오면 재미없을 줄 아시오!"
살기 띤 소천악의 말에 기겁한 상방충이 서둘러 지부장실을 찾았다. 그 뒤를 몰래 따라가는 소천악이었다.
"지부장님, 지금 밖에 소천악 귀인이 오셨습니다."
"그래, 어서 모셔라."
느긋한 양원저의 말에 싸늘한 말이 등 뒤에서 들려왔다.
"모실 거 없소. 벌써 왔소이다!"
어느새 신형을 드러낸 소천악이 음산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무언가 기분이 틀어진 걸 눈치챈 양원저 지부장이 얼른 물었다.
"아니, 이 시간에 어인 행차를 하신 겁니까?"
"닥치시고 내 말에 대답이나 해주시구려. 나의 행적을 또 누구에게 말해 주었소이까?"
소천악의 질문에 가슴이 철렁한 양원저 지부장이었다.
"아니, 그게 사실은……."
"말로 안 되겠군요. 감히 겁도 없이 나를 팔아먹다니요."
번뜩이는 순간 이미 소천악의 신형은 양원저 지부장의 코앞에 다가와 복부에 주먹을 꽂았다.
"크억!"
숨이 탁 막히는 비명과 함께 양원저가 방바닥에 쓰러졌다. 차가운 눈으로 쳐다보던 소천악이 다시 손속을 놀렸다. 북 치는 음향이 들리며 멱따는 비명이 한동안 지부장실을 맴돌았다.
이윽고 어느 정도 손속을 뿌린 소천악이 나지막이 말했다.
"정보를 달라 했더니만 내 정보를 팔아먹어요? 이런 겁 없는 분들 같으니라고. 내가 웃으니 만만하게 보이더이까?"
"아닙니다. 저희가 어찌 감히! 다만 은하전장이라 별일 없을 줄 알고."
"그걸 지부장님이 어찌 아는가요? 혹시 나를 암살하려고 하는 수작이라도 부릴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지요."
"……."
"여러 말 하지 마시구려. 내 며칠 후 다시 올 것이오. 그때까지 손해배상을 준비하지 않으면 그 결과는 알아서 생각하시구려. 오늘은 가벼운 경고 하나 주고 가겠소이다."
말을 끝낸 소천악은 두리번거리다 지부장실에 놓여 있던 쇠몽둥이를 손에 들고 닥치는 대로 두들겨 부수기 시작했다. 탁자고 침대고 가릴 것 없이 모조리 때려 박살내는 모습에 양원저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갔다.
지부장실을 깨끗이 때려 엎은 소천악은 걸어가면서 보이는 모든 걸 다 두들겨 부쉈다. 한마디로 건물만 덜렁 남아 있을 뿐 안에는 성한 물건이 하나도 없었다. 더 이상 부술 게 없자 쇠몽둥이를 집어 던지며 소천악이 말했다.
"경고했소이다. 알아서 하도록 하시구려. 이미 천리추적향을 뿌려놓았으니 도망가려면 얼마든지 가시구려. 난 이제 은하전장에 있을 거니 하루라도 빨리 알아서 하시길 바라오."
걸어 나가며 분이 안 풀린 그가 신형을 날려 대문 기둥을 각법으로 거세게 찼다. 보법을 시전하여 찬 각법은 거의 동시에 양쪽 기둥을 강타했다.
꾸르르릉!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들리며 두 쪽으로 갈라진 기둥이 무너지자 대문이 송두리째 무너져 내리며 폭삭 돌과 나무 더미로 변해갔다. 바라보던 양원저 지부장은 온몸의 살이 벌벌 떨려왔다.
경고치고는 살벌하기 그지없는 경고였다. 짧은 시간 내에 하오문 지부 하나를 완전히 폐허로 만들고 사라져 간 소천악이었다. 금방이라도 죽을 사람처럼 힘이 쭉 빠져 있던 양원저 지부장이 갑자기 고래고래 소리쳤다.
"어서 전서구를 날려라. 중원 땅에 있는 색마의 위치를 아는 대로 다 보내라고 해."
"아니, 지부장님! 그거 일급정보인데 그리 함부로 내주겠습니까?"
"닥쳐 방금 못 봤어? 저 인간은 다시 와서 마음에 안 들면 웃으며 우리를 도륙낼 위인이야. 어서 전서구를 날려. 이렇게 써! 안 보내면 명년 이맘때가 우리 지부 합동제삿날이라고 써 보내."
두려움에 질려 두서없이 지껄이는 지부장이었다. 그의 심정이나 지부원의 심정이나 여반장이었다. 소리치고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는 양원저 지부장은 이미 반송장이나 다름없는 비참한 꼴이었다.
하오문 지부를 발칵 뒤집어놓은 소천악은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다시 객잔으로 돌아갔다. 앞에는 초조한 기색으로 왔다 갔다 하던 담명후가 반색을 하고 달려왔다.
"오셨군요. 혹시나 무슨 일이 있을까 봐 걱정했습니다."
"난 약속하면 지키오. 자, 일을 잘 마무리했으니 어서 길을 재촉합시다."
"네, 이미 마차를 준비해 놨습니다. 어서 이쪽으로 오시죠."
마차로 안내하는 담명후를 따라간 소천악은 내심 깜짝 놀랐다. 마치 황제의 마차처럼 화려하기 그지없는 마차가 보였다. 사방이 금빛을 한 듯 번쩍거리고 말들은 하나같이 구하기 힘든 한혈마가 여섯 필이나 마차 앞에 서 있었다. 감탄한 소천악이 한마디를 던졌다.
"말이 정말 훌륭하군요."
마차 장식은 아예 관심 밖인 소천악의 말에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담명후가 말했다.
"이번 일만 잘되면 말이 문제겠습니까. 뭐든지 말씀만 하시면 됩니다."
중원에서 손꼽히는 전장의 소공자답게 시원하게 말하는 담명후였다. 소천악은 아무 말 없이 마차 안에 올랐다. 마차 안은 탁자까지 갖춰진 호화스러운 장식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눈을 지그시 감고 입을 다물자 두 남매는 소천악의 눈치를 보며 함께 입을 꼭 여몄다.
마차는 빠르게 달려 은하전장에 순식간에 도착했다. 마차에서 내린 소천악은 아무 말 없이 안내하는 대로 조용히 걸어갔다. 그의 내심은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무진 애를 써야만 했다. 후회감이 밀려들었다. 의술이라곤 가정용 서적 하나도 본 적이 없는 처지였다.
'에이, 될 대로 되라지. 모르면 그냥 가면 되지.'
조그마하게 중얼거리며 소천악은 서슴없이 걸어갔다. 담명후는 아담한 전각 안으로 들어갔다. 한 방문 앞에 선 담명후가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님! 다행히 신의님을 모셔왔습니다."
"오! 어서 안으로 뫼시어라."
활기찬 중년 여인의 목소리와 함께 문이 스르르 열렸다. 시녀들이 고개를 숙여 소공자와 소천악을 맞이했다. 방 안쪽에 있는 침대 옆에 앉아 있던 중년 부인이 일어서서 소천악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은하전장의 안주인인 유소운(劉素雲)이었다.
"이리 와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별말씀을. 의원이 당연히 환자를 찾아뵙는 건 인지상정이지요."
태연한 소천악의 답례에 소공자는 어이가 없었다. 그렇게 사정사정해서 데려왔는데 엉뚱한 소리를 내뱉는 통에 할 말을 잃었다.
"자, 이리 오셨으니 일단 피곤을 푸시고 내일 한번 진맥이라도 부탁드립니다. 저 가여운 것이……. 흐흑!"
애절하게 우는 어머니의 마음이 그대로 느껴졌다. 유소운의 말은 어려서 자신이 부린 말썽을 진땀을 흘리며 수습하던 어머니를 순간 떠올리게 했다. 불현듯 고향 집이 잠시 그리워진 마음이었다. 이내 털어버린 소천악이 겸손을 떨었다.
"아닙니다. 일단 먼저 한번 진맥을 해보고 쉬어도 쉬어야지요. 고치지도 못하면서 신세를 지는 건 의원의 도리가 아닙니다."
소천악은 자신의 입으로 한 말을 스스로도 믿기가 어려웠다. 이렇게 매끄럽고 머리를 간질이는 말을 했다는 게 뿌듯했다.
"역시 신의님이란 소문이 헛된 건 아니군요. 어미로서 감사드립니다. 그럼 결례를 무릅쓰고 일단 먼저 가보시지요."
감탄의 얼굴을 내비치며 유소운은 서둘러 가슴에 맺힌 딸의 처소로 안내했다.
들어간 방에는 침대 위에 한 여인이 신음을 토하며 누워 있었다. 주위에는 한 시녀가 부지런히 얼굴에 방울방울 흘러내리는 땀을 가볍게 닦아주는 모습이 들어왔다.
늘 유소운의 마음에 밟히던 딸인 담수란(劉秀蘭)이었다. 시녀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리곤 놀라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했다.
"대부인 마님 오셨습니까?"
"그래, 란아는 어떠냐?"
대부인의 질문에 어두운 표정으로 대답하는 시녀였다.
"점점 상태가 안 좋아지십니다. 이제는 숨쉬기도 거북한 거 같아요!"
대부인은 안색이 더욱 노래지며 안타까운 시선으로 침대 위의 딸을 바라봤다. 침대 위에 있던 담수란은 눈을 감은 채 얕은 신음을 끊임없이 토해냈다. 숨쉬기가 힘든 듯 뼈만 남은 가슴이 힘겹게 들썩였다. 하지만 그 병색이 완연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가진 미모는 여전히 빛났다. 파리한 안색에 담긴 얼굴은 병을 털고 일어나면 일거에 절세미인이란 소리가 아깝지 않을 정도였다. 미모에 순간 현혹된 소천악이 어색한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자, 이제 진맥을 해야겠소."
"아, 제가 정신이 없어서… 어서 하시지요."
호들갑을 떠는 유소운을 멍하니 바라만 봐야 했다. 잠시 후 침대 옆에 앉아 담수란의 손목을 잡고 진맥하는 자세를 잡은 소천악이었다. 두 눈을 지그시 감고 맥을 짚는 그의 모습은 여느 명의도 따라오기 힘든 위엄을 철철 풍겼다. 생전처음 하는 진맥이었지만 너무도 태연한 모습이었다.
눈을 지그시 감고 손목에서 느껴지는 맥! 이 아닌 부드러운 촉감을 즐기고 있었다.
'크, 정말 야들야들하구나. 어찌 인간의 손이 이리도 부드러울 수 있지? 이건 뭐 취향이 고거랑은 상대가 안 되는구나.'
내심 희희낙락하며 열심히 기분을 내는데 유소운의 걱정스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떤가요? 도대체 무슨 병이지요?"
뜨끔한 소천악이 고개도 안 돌린 채 낮게 목소리를 깔았다.
"어허, 잠시만 기다리시오. 그리 쉽게 알아낼 병이 아닌 듯하오."
"아, 죄송합니다."
한참을 돌부처인 양 손목을 잡고 아무 말을 하지 않는 소천악을 보고 유소운이 다시금 물어왔다. 소천악이 얼른 대답했다.
"어허! 맥에 집중하고 있는데 말을 거시면 곤란하오."
"아, 죄송합니다. 미련한 여인이 잠시 실수를. 다시는 말을 걸지 않지요."
미안한 마음에 쩔쩔매는 유소운이었다. 뜨끔한 마음으로 다시 엉터리 진맥에 들어간 소천악이었다. 아무리 맥박을 느껴봐도 알 리가 없었다. 그저 가냘프게 뛰는 박동만이 아프긴 아프다는 느낌을 주었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전에 사부가 내상 치료해 줄 때 하던 방법을 떠올렸다.
사부의 방법은 무식 그 자체였다. 진기로 밀어붙여 내상 부위를 감싸주는 호쾌한(?) 치료법이었다.
어차피 이판사판이었다. 내력을 끌어올린 소천악의 몸에서 하얀 연기가 모락모락 나기 시작했다. 어느덧 연기는 누워 있는 여인의 몸에서도 피어올랐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두 모자가 경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