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천악 31화
무료소설 소천악: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43회 작성일소설 읽기 : 소천악 31화
"손님, 여기는 오시면 안 됩니다."
"아, 미안해요. 잠시 배울 게 있어서 그만. 내 후히 사례할 터이니 봐주시오."
"음, 사례까지야. 정 그러시다면 보시구려!"
은자 한 주먹을 꺼내는 소천악을 보며 헛기침을 하며 다시 도끼질에 파묻혔다. 그의 도끼질은 한마디로 한 일만 수십 년 한 자의 연륜이 그대로 배어나왔다.
적절한 힘의 조화와 탄력이 나무에 작렬할 때마다 통나무는 힘없이 장작더미로 변해갔다. 감탄이 절로 나오는 소천악이었다. 고도의 무리가 이름 없는 장작꾼의 팔놀림에서 그대로 재현되는 모습이었다.
적절한 힘 안배는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옆에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지켜보는 소천악이 말없이 앉아 있었다.
"공자님, 여기 식사 나왔습니다."
점소이의 말에 문득 상념에서 깨어난 소천악이 장작꾼을 불렀다.
"이보시오, 여기 같이 식사합시다. 내 당신 것까지 이 인분을 주문했소이다."
산해진미가 놓이자 장작꾼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아니, 손님. 어찌 저 같은 천한 장작꾼에게 이런 호의를 베푸십니까?"
"하하, 베풀 만하니 하는 거지요. 자, 어서 드십니다. 음식 식겠소!"
호탕하게 웃으며 권하는 소천악의 눈치를 보며 장작꾼은 주섬주섬 자리에 앉았다. 최고급 요리답게 요리는 입에 착착 달라붙었다. 한동안 두 사람은 요리 접시 비우기 경쟁이라도 하듯이 정신없이 빈 접시를 만들어냈다.
이윽고 접시가 말끔히 비워지고 술병마저 동나자 동시에 트림을 한 두 사람이 마주 보며 웃었다.
"으하하하!"
"껄껄, 손님, 정말 잘 먹었습니다. 이 호의를 어찌 갚아야 할지?"
시원하게 웃던 소천악이 조용히 말했다.
"별거 없소. 그저 장작 패기만 내게 보여주시면 되는 것이오."
"거참, 이해가 안 갑니다. 어찌 이런 하찮은 일에 관심을 보이시는지."
"하하, 그건 내 사정이고 내 한동안 보다가 의문나는 점이 있거든 물어볼 때 상세하게 말이나 해주시구려!"
소천악은 전낭에서 은자 오십 냥을 꺼내 넌지시 장작꾼에게 건네주었다. 그는 깜짝 놀라며 손을 휘휘 저었다. 그의 한 달 품삯이 겨우 은자 열 냥이었다. 참으로 그에겐 큰돈이었다.
"아니, 이런 큰돈을……."
"받으시오. 내가 얻는 건 이거와는 비교할 수 없는 소중한 일이오. 일단 받고 나중에 다시 셈해 주리다."
막무가내로 은자를 건네준 소천악이었다. 황송스럽다는 듯 은자를 받아 챙긴 장작꾼이 힘차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손님. 무언지는 몰라도 장작 패기를 보시겠다면 이놈 열심히 보여드리지요."
단순하게 생각한 그는 다시 힘을 내어 장작을 패기 시작했다. 그이 손놀림은 여전했고 바라보던 소천악의 눈길은 갈수록 이채를 발하고 있었다. 가끔 장작꾼을 불러 이것저것 물어보는 그의 얼굴은 무서울 정도로 진지했다.
그 장면을 멀리서 보던 점소이는 기가 막혔다. 도대체 소천악의 행각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꽤 오랜 시간이 흘러 해가 떨어지자 비로소 장작 패기를 멈추는 장작꾼을 보며 소천악이 미소지으며 말했다.
"잘 봤소이다. 내일 또 부탁하리다."
"껄껄, 언제든지 오세요! 환영합니다."
왠지 모를 친숙감이 둘 사이를 흘렀다. 안내를 받아 객실에 들어온 소천악은 느낀 걸 머릿속에서 정리하느라 바쁜 저녁시간을 보냈다.
도끼나 검이나 만류귀종이거늘 화려한 검식보다는 천 번을 휘둘러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움직일 수 있다면?
만변의 변화를 깨는 직선으로 밀고 가는 한 점의 집중이라면?
힘없이 다가가다 목표에 가면 폭발적인 탄력이 있는 검이라면?
필요한 힘만을 쓴다면?
쓸데없는 잔동작을 배제한 최단거리를 다가가는 실체는?
뇌리를 맴도는 의문이 연달아 떠올랐다. 그 실오라기 같은 끈을 부여잡고 한없는 명상에 빠져드는 소천악이었다. 파면 팔수록 의문은 깊어가고 실마리도 점점 풀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밤을 보낸 소천악은 날이 밝기가 무섭게 장작꾼에게 가 다시 그 옆에 앉아 끊임없이 바라보는 일상사를 보냈다. 지켜보다 요리를 시켜 함께 먹고 다시 한 사람은 말없이 장작을 패고 다른 이는 앉아 지켜보는 일이 하루 내내 이어지며 그 날이 점점 싸여갔다.
어느새 그는 객잔에서 유명한 명물이 되어갔다. 점소이는 물론 손님들도 그 괴이한 모습에 혀를 내두르며 바라보게 되었다.
"저게 뭐 하는 짓인지. 멀쩡한 젊은이가 정신이 나간 건지."
"그러게 말이야. 벌써 오 일째라 하더만."
식사하러 온 두 중년인이 어이없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런 풍경이 하루에도 수십 차례 반복되었다. 주위의 시선은 이미 소천악에게 관심 밖이었다. 팔 년간 그토록 파고들었던 혈검구식이 다시금 그에게 실마리를 던져준 묘한 인연에 기쁨 그 이외에는 아무것도 눈에 안 들어왔다.
날이 갈수록 머릿속에서 혈검구식이 차곡차곡 그 실체를 드러냈다. 새로운 발견에 얼굴에 희색이 만면해지는 소천악이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떠오른 생각에 김이 팍 샜다.
"이런 제길! 깨달으면 뭐 할 거야. 무림공적이 될 건데."
한숨이 푹 나오며 맥이 쫙 풀렸다. 절세무공이 애물단지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소천악은 새삼 무림공적의 길을 과감히 걸은 혈사부가 원망스러웠다. 제자의 앞길을 만장절벽으로 막아놓고 그 인간은 지금쯤 산속에서 탱자탱자거릴 걸 연상하니 열불이 터졌다.
맥이 풀리니 더 이상 바라보기도 싫어지는 도끼질이었다. 인상을 구기는 그를 보고 장작꾼이 말했다.
"손님, 왜 그러시죠! 기분이 영 아닌 거 같습니다."
멀거니 쳐다보던 소천악이 쓸쓸하게 웃었다.
"아닙니다. 다른 생각이 나서. 아, 그리고 이제 여기 오는 거 오늘이 마지막입니다. 그동안 참 좋은 공부하고 갑니다. 이거는 약소하지만 제 성의이니 받아주시오."
소천악은 은자 한 꾸러미를 건네주고 휘적휘적 객잔 안으로 사라졌다. 당혹한 눈길로 바라보던 장작꾼이 무심코 은자를 바라보곤 경악에 찬 소리를 질렀다.
"심봤다!"
우울한 기분으로 객잔 안에 들어온 소천악은 이층 창가에 앉아 술잔을 천천히 비우고 있었다. 독한 술기운이 뱃속에 들어서자 한결 나아진 느낌이었다. 느긋하게 풍경을 즐기는 소천악의 작은 행복을 깨는 목소리가 들렸다.
"저, 실례지만 소천악 소협이 아니신지?"
흠칫한 소천악이 고개를 들자 일남 일녀가 조심스럽게 옆에 서 있었다. 누가 봐도 남매인 줄 한눈에 알 정도로 많이 닮은 남녀였다. 특히 여자는 눈에 번쩍 뜨일 미녀였다.
"누구시오? 내가 소천악이란 사람이 맞긴 하오만……."
"아, 맞군요. 반갑습니다. 전 담명후(潭明厚)라고 합니다."
"반갑소이다. 그런데 초면인 듯한데 무슨 연유로 날 찾으신 게요?"
"긴히 부탁드릴 말이 있어서 여기저기 수소문했습니다. 잠깐 앉아도 되겠습니까?"
"앉으시오. 뭐, 의자야 사람 앉으라고 있는 거 아니겠소!"
자리에 앉은 남녀는 바로 본론을 꺼냈다.
"단목세가에서 들리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놀라운 의술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 어려운 청을 드릴까 합니다."
"그 문제라면 잘못 찾아오셨소! 그날부터 의원 일 때려치웠소이다. 이젠 치료 안 하오."
거두절미하고 차갑게 말하는 소천악의 말에 난처한 기색이 역력한 담명후가 급히 말했다.
"제발 한 번만 사정을 봐주십시오! 제 손위 누이가 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있는데 용하다는 의원조차 병명을 모른다고 고개를 젓습니다."
애절한 담명후의 말에 더욱더 결심이 굳어진 소천악이었다.
"미안하오! 의원 일을 다시 할 생각이 없소. 워낙 돌팔이라 도움도 되지 못할 것이오! 더 이상 그런 일로 말한다면 축객할 수밖에 없소."
단호한 어조로 말하는 소천악이었다. 담명후는 난처한 얼굴로 옆에 있는 담문경을 쳐다보았다. 담명후는 갑자기 무릎을 꿇고 애걸하기 시작했다.
"제발, 소 소협. 우리 누이를 구해주세요. 어려서부터 단 한 번도 침대에서 벗어나지 못한 가여운 누이입니다."
난처한 소천악의 입장이었다. 정통의술을 배웠다면 당연히 길을 따라나설 처지였다. 그러나 의술이라곤 상처난 외상 고치는 재주밖에 없는 신세였다. 사연을 모르는 두 남매는 신의를 대하듯 정중하기 이를 데 없으니 진퇴양난의 위기였다.
"허참, 이러지 마시구려. 본인도 도와주고야 싶소만 이미 의술을 버리기로 굳게 맹세한 처지라 어쩔 수가 없구려!"
"소 소협! 어찌 한 인명이 세상보다 덜 귀하겠습니까! 혹여 우리 남매가 못 미더워 이러신다면 제가 도착하자마자 이미 준비한 사례를 미리 드리겠습니다."
"아니, 사례라니요? 그게 무슨 말인지."
어리둥절해하는 소천악에게 미소를 지으며 담명후가 대답했다.
"단목세가에서 들었습니다. 신의께서 많은 양민을 구하시려면 약재비가 많이 드셔서 약간의 사례를 받는다는 이야기를 이미 알고 있습니다."
"아니, 누가 그런 소리를?"
"단목산산 소저가 말씀하셨지요."
"이런. 쳐 죽일……!"
졸지에 돈 밝히는 신의로 둔갑시킨 단목산산에 대한 분노가 하늘을 찔렀다. 소천악의 안면은 열이 올라 금방이라도 불꽃이 튈 정도였다.
갑작스런 소천악의 노여움에 내심 당혹감을 느낀 담명후가 급히 변명했다.
"신의께서는 절대 염려하지 마십시오. 저희는 이 일에 대해 입도 벙긋하지 않을 것입니다."
"글쎄, 다시는 의원 노릇을 안 하……."
소천악이 말도 채 끝내기 전에 갑자기 옆에 있던 여인이 고개를 숙이며 울먹였다.
"신의님, 제발 가여운 우리 언니를 도와주세요! 다만 한 번만이라도 진맥이라도 해주시면 신의께서 원하는 모든 걸 들어드리겠습니다. 이건 은하전장의 소공녀로서 약속드립니다."
다른 말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단지 은하전장이라는 말이 귓전을 거세게 때렸다. 전에 도박장에서 들은 전장의 이름이 나오자 바로 뇌리에 다음 일이 주르르 연결됐다.
강호여정에서 금전의 중요성을 이미 깨달은 소천악으로선 물리치기 힘든 유혹이었다. 단지 의술을 모른다는 게 결정을 망설이게 했다. 진맥만 해도 은자를 준다는 유혹은 뿌리치기 힘든 제의였다.
영문을 모르는 담명후 남매는 초조한 마음으로 소천악의 입을 주시했다. 그의 무공실력에 대해 익히 들은 터라 강제로 어찌하겠다는 마음은 언감생심이었다.
소천악은 머리가 지끈거리고 아파왔다. 하지만 유혹은 너무 강했다. 그의 머리에 가혹한 수련시절이 떠올랐다. 심한 내상도 혈천신공 한 번 운기에 바로 회복되었다는 게 생각났다. 혹시나 하는 기대감을 안고 영 켕겼지만 눈 질끈 감고 말했다.
"음, 이리 청하니 내 결심을 한번 꺾고 진맥이라도 해보리다. 대신 너무 기대는 하지 마시오!"
"감사합니다. 신의님!"
마치 누이가 이미 완치된 것처럼 기뻐하는 남매를 보니 더욱 마음 한구석이 찝찝해 오는 소천악이었다.
"그런데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소?"
"저희가 백방으로 수소문하는데 마침 하오문에서 소재를 알고 있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