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천악 2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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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61회 작성일소설 읽기 : 소천악 29화
단목세가의 저력도 막강했다. 연이어 본가 건물에서 수백 명의 무사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러나 흑마전은 이 기회에 아예 단목세가를 지도에서 지워버릴 속셈이었다. 정문과 담을 통해 밀려오는 흑마전의 무사들의 수는 이미 단목세가를 압도했다.
게다가 초전에 당한 정예고수의 몰살이 아프게 다가왔다. 숫자도 밀리는 데다 일류고수가 절대 부족한 단목세가는 시간이 가면 갈수록 위기에 빠져들었다. 단목휘경과 하남삼검도 흑마전 호법들에게 발이 묶여 전혀 도움을 주지 못했다.
혈우검마 장추산은 전혀 단목휘경을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노기가 치민 단목휘경이 급기야 비전절기인 의천대검식(意天大劍式)을 시전했다.
"죽어라, 이놈!"
단목휘경의 외침에 긴장을 늦추지 않던 장추산이 급히 혈우검결로 맞서갔다.
"웃기지 마라. 노인네가 먼저 관에 가야지 왜 젊디젊은 나를 보내려 하는가!"
거센 폭음이 들리며 두 사람의 신형은 눈으로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쾌속하게 전진과 후퇴를 반복했다. 단목휘경은 미칠 것 같았다.
세가의 위기를 맞아 몸을 빼지도 못한 채 발이 묶인 고통스런 시간이었다. 차츰 단목세가의 무사들이 허수아비처럼 피를 토하고 죽어갔다. 흑마전의 일류고수들은 철 만난 메뚜기처럼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세가의 무사들을 무참히 도륙했다.
"크아악!"
갈수록 비명이 늘어가고 세가의 방어벽은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분노에 찬 시선으로 쳐다보던 단목산산은 이를 악물었다. 이미 자신의 앞을 지켜주던 무인들은 없었다. 모두 힘에 부쳐 피를 토하고 죽어간 것이다.
"에잇, 이 사파의 악적들아. 내 검을 받아라!"
쨍쨍거리는 소리를 지르며 세가의 비전검식인 의천대검식을 펼쳐냈다. 단목휘경의 직접 지도를 받은 산산의 검법은 만만치가 않았다. 검끝이 날카롭게 변화하며 바로 앞을 덮쳐오던 두 명의 흑마전 고수가 검에 가슴이 베여 피를 토하고 죽어갔다.
"으윽, 계집년이."
원통한 눈빛을 던지며 피를 토하고 죽는 모습을 본 산산은 충격에 빠졌다. 처음으로 사람을 죽인 그녀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고통이 엄습했다. 순간 넋을 놓고 멍하니 서 있는 그녀를 노리고 흑마전 고수가 검을 찔러왔다. 위기일발이었다. 막 그녀의 목이 검에 베여 날아가려는 순간 어디선가 은화 두 개가 쏜살같이 날아와 검을 정통으로 튕겨냈다.
챙! 챙!
무거운 내력이 검을 타고 흘러들자 흑마전 고수는 팔이 저릿한 고통에 그만 검을 놓쳤다. 깜짝 놀란 그들은 암기가 날아온 방향을 따라 바로 나무 위를 쳐다보았다. 소천악이었다. 가만히 싸움을 지켜보던 그는 산산이 위험에 처하자 바로 손을 썼다. 나름대로 미인인 그녀가 속절없이 죽어 가는 걸 팔짱 끼고 바라보긴 왠지 켕겼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산산이 바로 검을 뿌렸다. 검은 맨손인 흑마전 고수의 가슴을 바로 잘라냈다.
"크아악! 나무 위에 적이 숨어 있다."
가슴을 부여잡고 외치는 흑마전 고수의 말에 싸우던 모든 이의 시선이 잠시 나무에 집중되었다. 귀혼탈마 음자해는 나무 위에서 가는 파공성을 들었다. 동전을 날린 소천악의 위치를 즉시 잡아냈다. 비릿한 미소와 함께 바로 그의 손에서는 수많은 고수들의 혼을 빼앗은 비도가 허공을 가르고 나무 위로 날아갔다.
섬광을 번뜩이며 날아오는 비도를 본 소천악은 낮게 코웃음을 치며 왼손으로 비도를 잡아갔다. 비도에 실린 경력이 잡아오는 손에서 발악하며 맹렬히 뚫어내려 했지만 소천악은 꿈쩍도 하지 않고 비도를 굳게 잡았다. 비도술이 실패한 걸 감지한 귀혼탈마가 외쳤다.
"웬 놈이냐? 나무 위에서 기습을 노리는 놈이?"
사납게 외치는 귀혼탈마의 외침에 흑마전 고수는 물론 단목세가 고수들도 흠칫했다. 더 이상 숨어서 구경하기는 날 샌 소천악이 투덜거리며 나무 밑으로 가볍게 몸을 날려 부운낙영 신법을 전개해 내려왔다. 마치 새털처럼 부드럽게 시전한 그의 신법에 모두가 놀랐다.
"아니, 부운낙영이 저리 가볍게 펼쳐지다니!"
경악한 목소리로 말하는 하남삼검 중에 이검인 음적양(陰的陽)이었다. 약간 겸연쩍은 시선으로 중인들을 둘러보던 소천악이 입을 열었다.
"아, 미안하게 됐소이다. 막 떠나려던 참에 싸움이 벌어져서 급한 김에 나무 위에 올랐소이다. 그리고 미인의 목숨을 이리 함부로 앗아 가는 건 영 마음에 들지 않아 본의 아니게 참견하게 되었소. 자, 이제 저는 갈 테니 열심히 싸우시기 바랍니다."
영 싸움 분위기에 맞지 않는 말을 한 소천악이 성큼성큼 정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멍하니 바라보던 귀혼탈마가 벼락같이 소리쳤다.
"멈춰라! 감히 지금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
"보면 모르시오! 내 갈 길을 가려는 거 안 보이오?"
"이런 괘씸한 놈. 감히 나무 위에서 기습하다가 발각되니 그냥 가겠다! 네놈이 우리 흑마전을 대체 뭐로 보고 하는 수작이냐?"
"뭐로 보긴요? 흑마전으로 보지요. 그럼 다른 이름도 있나요?"
반말 투에 기분이 상한 소천악이 대차게 대답했다. 어이가 없던 귀혼탈마가 소리쳤다.
"감히 어린놈이 나에게 하대를 해?"
"웃기고 있네요! 당신이 나보다 나이 많다는 거 외에는 영 존경받을 일이 없을 듯하오이다. 사람은 절대 겉모습으로 평가하는 게 아니지요. 까불지 말고 길을 열어주시오. 더 이상 이 싸움에 참견하고 싶지 않아요. 분명히 경고하는데 내 앞에 검을 겨누는 자는 결코 살아남지 못할 것입니다."
"네 이놈!"
광분한 탈혼귀마의 검이 번뜩이며 소천악을 핍박했다. 검에선 귀음이 들리며 환각처럼 검의 잔영이 앞을 가득 수놓아갔다. 수많은 고수를 검하의 고혼으로 만든 독문검식인 탈혼 검초였다.
"이런, 환검이군요. 애들 장난 같은 수법 하나 가지고 큰소리친 겁니까? 내 경고를 무시한 대가는 바로 죽음이지요."
차갑게 말한 소천악의 손에 들린 검이 섬광을 발하며 번쩍였다. 섬광은 탈혼귀마의 환검을 직선으로 찢으며 관통한 듯한 모습을 보였다. 연환구구탈백검이었다. 너무나 순간적인 일이어서 아무도 제대로 본 자가 없었다. 오로지 결과가 모두의 입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탈혼귀마의 안색이 고통에 일그러지며 신음이 터져나왔다.
"크으윽! 어찌 이런 가공할 쾌검이……!"
탈혼귀마는 가슴을 부여잡고 입가에 선혈을 철철 흘리고 있었다. 가슴에서도 붉은 피가 펑펑 흘러나오는 게 이미 살기는 틀린 형국이었다.
"내 경고했었지요. 나에게 검을 들이대는 자는 살기를 포기하라고 말입니다."
스산하게 말하는 소천악의 검끝에는 핏방울이 몽글몽글 떨어지고 있었다.
"네 이놈! 감히 나 탈혼귀마를!"
원독에 찬 시선을 던지던 탈혼귀마가 비틀거리다 풀썩 땅으로 무너져 내렸다. 장내에 있던 중인들은 탄성이 절로 나왔다.
"이럴 수가! 탈혼귀마가 단 일 검에 당하다니."
탈혼귀마. 만만한 고수가 아니었다. 흑사방에서 서열 십위 내에 드는 고수였다. 강호무림에서도 대명이 자자한 절정고수에 거의 근접한 고수였다. 그 고수가 일검에 목숨을 잃었다.
갑자기 나타난 소천악으로 거의 모든 싸움이 잠시 중단되었다. 단목휘경과 혈우검마조차 엉겹결에 접전을 멈추고 소천악을 지켜봤다.
짝짝.
어디선가 박수 소리가 들리며 흑사방 고수 사이를 유유히 걸어 나오는 한 사람이 있었다.
"대단한 쾌검이군. 오늘 내 눈이 호강하겠어. 우연히 강호의 숨은 고수를 보게 돼서 영광이오! 난 흑마전의 전주를 맡고 있는 혈조무적(血爪無敵) 율금무(律琴戊)라고 하오."
포권을 하며 인사하는 그는 육 척이 넘는 키에 부리부리한 눈을 가진 전형적인 무인이었다. 그의 전신에서 풍겨 나오는 기도는 주위를 찰나에 압도해 갔다.
"반갑소이다. 전 아직 변변한 명호도 없는 강호의 무명소졸이오. 소천악이라 하오이다."
무인다운 기상을 보여주는 율금무를 보니 절로 호감이 일어난 소천악이 답례의 포권을 얼른 했다. 그 모습에 미소를 지은 율금무가 다시 말했다.
"소 소협이었구려. 다른 데서 만났다면 술 한 잔 하고픈 마음이지만 애석하게 이미 은원을 맺었으니 무인답게 풀어봅시다."
시원시원한 율금무의 말에 더욱 흔쾌해진 소천악이 쾌히 승낙했다.
"하하, 그러시죠."
"껄껄. 역시 단목세가의 쥐새끼들이랑은 차원이 다른 분이시구려. 난 여태껏 강호에서 이 주먹 하나로 도산검림(刀山劍林)을 헤쳐 왔소이다. 소 소협은 검이 성명절초인 듯하니 검을 드시오."
갈수록 율금무 전주가 마음에 쏙 들어만 갔다.
"전주는 무인의 낭만을 아시는 분이시군요. 좋소이다. 저도 권(券)으로 상대해 드리죠. 자, 여러 사람 피 흘리게 하지 말고 전주와 내 승부로 결판을 봅시다."
"무슨 소리요?"
의아한 듯이 율금무 전주가 묻자 묘한 미소를 지으며 소천악이 대답했다.
"내가 이기면 전주가 이쯤에서 물러나고 전주께서 이기면 마음대로 하는 걸로 합시다. 자, 이 의견에 단목세가의 태상가주님의 허락이 필요한데?"
소천악은 바로 단목휘경에게 전음을 보냈다.
[태상가주님! 혹시나 제가 이겨도 이 흑마전 고수들을 보니 천상 무인들입니다. 더 싸워봐야 잘해도 단목세가의 원기가 크게 상할 겁니다. 이쯤에서 마무리하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가만히 듣던 단목휘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더 싸워봐야 승산이 없기는 매한가지였다. 불감청일지언정 고소원이었다. 쾌히 응낙하는 그였다.
"좋소! 노부가 이름을 걸고 약속하리다."
율금무의 눈빛이 이채를 발했다. 모처럼 만난 무인다운 기상을 뿌리는 소천악이 갈수록 마음에 들었다.
"크하하! 흑마전도들은 들어라. 오늘 내가 죽더라도 절대 복수의 칼을 들지 마라. 이건 사나이이자 무인의 승부이니라."
이미 율금무도 범상치 않은 소천악의 기도를 간파했다. 신중하게 보법을 전개해 소천악의 우측으로 파고들었다. 장삼자락이 펄럭이며 그의 오른손이 무시무시한 경력을 동반하고 소천악의 가슴을 노렸다.
안색을 굳힌 소천악이 바로 양팔을 교차시키며 세차게 떨쳤다. 두개의 권풍이 다가오는 율금무의 손과 마주쳐 갔다.
퍼퍼펑!
권풍과 권풍이 충돌하며 거센 폭음이 들려왔다. 차마 주먹끼리의 격돌이라기엔 가공할 위력이었다. 두 사람은 똑같이 뒤로 한 걸음씩 물러섰다.
"역시 소 소협은 날 실망시키지 않는구려!"
율금무는 물러설 때보다 더욱 쾌속하게 다가서며 양손을 세차게 흔들었다. 수십 겹의 장영이 어지럽게 시야를 흔들며 다가섰다. 중첩되는 장영은 사방의 모든 방위를 차단하고 쏘아져 왔다.
"좋소이다. 역시 훌륭한 권법이요."
한소리 크게 외치며 소천악의 두 손이 둥글게 원을 그리며 차츰 넓혀갔다. 율금무의 권과 소천악의 권이 찰나를 두고 수십 차례 붙었다 떨어졌다. 손이 균형을 이루자 다리가 섬전같이 움직이며 공격과 수비를 번갈아 가며 조화를 이루었다. 찰나의 순간에 두 사람의 손발은 사방 모든 방위를 차단하고 빈틈을 노렸다. 권은 권으로 각은 각으로 막고 치며 치열한 접전이 펼쳐졌다. 벼락같이 율금무의 권이 가슴을 노리자 소천악이 물 흐르듯 보법으로 흘리며 팔목을 찔러갔다. 찔끔한 율금무가 권을 돌려 마주쳐 갔다. 폭음과 함께 마주친 두 사람은 한 걸음씩 물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