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천악 66화
무료소설 소천악: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31회 작성일소설 읽기 : 소천악 66화
단호한 소천악의 말에 더 이상 말문이 막힌 등해린이었다. 사실 소천악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옆에서 듣다 오기가 치민 냉천상이 다시 말했다.
"그래도 강호는 명문정파가 정의를 수호하며 이끌어왔소."
가만히 냉천상을 노려보던 소천악이 대답했다.
"하나만 묻겠소. 그 잘난 명문정파에서 자란 한 인물이 어쩌다 실수해서 천인공노할 짓을 저질렀다 칩시다. 그 일이 알려지면 명예는 땅에 떨어지는데 아는 이는 한 사람뿐이라면 그들이 어쩌겠소?"
"……."
"아마도 살인멸구해 입을 막고 없던 일로 칠 겁니다. 그게 명문정파라 해도 별다른 수가 없을 겁니다. 수백 년간 쌓아온 명예를 지켜야 하니까요."
냉천상은 입을 닫았다. 사실이 그러했다. 그런 일이 비일비재한 게 현실이었다. 다만 떠들 입이 없어서 쉬쉬할 뿐이었다. 대답을 못 하는 냉천상을 바라보던 소천악이 품을 뒤졌다. 꺼낸 건 전표 몇 장이었다. 그가 의아한 시선으로 쳐다보는 냉천상의 손에 전표를 쥐어주며 말했다.
"냉 대협과 더 이상의 동행은 어려울 듯하오이다.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말다툼을 하고 싶지 않소이다. 그 잘난 강호정의는 냉 대협 혼자서 펼치시오."
"아니, 이런 일이……."
"번복은 없소이다. 약속대로 오백 냥을 넣었으니 좋게 헤어지는 걸로 합시다. 그럼 이만."
차갑게 말한 소천악은 마차에 올랐다. 등해린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그도 사사건건 정의니 뭐니 성가시게만 하던 냉천상이 고울 리가 없었다. 얼떨떨한 냉천상을 두고 마차는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천천히 출발한 마차는 등해린의 채찍질로 점차 가속을 붙여 얼마 안 가 까마득히 사라져 갔다.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된 냉천상이 한없이 마차가 간 자리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마차에선 이미 그의 존재를 지워버린 두 사람이 정겹게 이야기를 하였다.
"등 대협, 일 하나 처리했으니 이제 술 한 잔 해야지요."
"하하! 공자가 그리 말하니 어찌 사양하겠소이까."
"역시 등 대협은 화통해서 좋습니다."
"좋은 술에 기녀 싫어하는 남자가 얼마나 되겠소이까? 다 그놈의 체면 때문에 끙끙 앓는 거지요. 그래서 제가 혼인도 안 하고 혼자 떠돈다는 거 아닙니까?"
"하하! 등 대협의 인생관을 배우고 싶습니다."
죽이 맞는 두 남자는 서둘러 마차를 몰아 장사로 향하였다. 등해린은 정말 아는 게 많은 자였다. 특히 기루에 대해서는 중원에서 내로라하는 한량 못지않았다. 그 점이 소천악에게 딱 맞았다.
장사에 도착하자 대충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기루로 들어갔다. 은자로 뭉개는 소천악의 배포에 총관부터 기녀에 이르기까지 완전히 녹아내렸다. 비파 연주 기녀만 세 명이 들어오는 초호화판 술판이 벌어졌다. 남자는 둘인데 들어온 기녀만 열 명이 넘었다.
노래 한 곡 부르면 은자가 날아갔다. 춤 한 번 추면 더 많은 은자가 날아갔다. 그 무서운 행채발에 질린 등해린이 취한 목소리로 물었다.
"공자, 그렇게 마구 뿌려도 되는 것이오?"
"하하, 염려 마세요. 아직은 은자가 산처럼 쌓여 있소, 그리고 저들도 은자 벌려고 나온 거 아니오이까? 퍽퍽 줘야 저들도 신이 나서 놀 게 아니오? 이거 보고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아주 보기 좋은 일이라 하지요."
"크허허! 역시 공자는 풍류에 덕까지 갖춘 사내대장부요."
"등 대협! 여기가 마음에 드십니까?"
"훌륭하오. 이 정도면."
"그러면 아예 뽕을 뽑읍시다. 여기서 한 칠 주야 주야장천 있다 가는 걸로 하지요."
소천악의 말은 그대로 실천되었다. 딱 칠 주야 만에 기루를 나서는 두 사람이었다. 은자를 물 쓰듯 뿌려대는 소천악은 기루에서도 특급 중에 초특급 대우였다. 그가 원하는 요리와 술은 순식간에 대령되었다.
오죽하면 자장가로 비파 연주를 밤새도록 하라는 지시에도 군말 없이 기녀들이 돌아가며 연주하는 소동도 빚었다.
틈틈이 소천악에게 기술을 전수받은 등해린이었다. 날로 발전하는 그의 기술은 바로바로 시험대에 올라 평가를 받았다.
제2-8장 가자 황궁으로
마침내 어엿한 풍류남아로 인정받은 채 기루를 나서는 등해린의 어깨는 하늘로 쭉 올라가 기고만장이다. 등해린을 보며 흐뭇하게 웃던 소천악이 며칠간 고심한 결론을 말했다.
"등 대협! 이제 북경으로 가야 할 것 같소이다."
"오호, 북경이라! 역시 기루하면 북경이지요."
이젠 아예 지명을 기루분포도로 설명하는 등해린이다.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소천악이 입을 열었다.
"일단 갑시다. 가서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요."
"그러시지요, 공자. 자, 피곤하시니 마차에 들어가 쉬시오."
"아니, 등 대협도 힘들고 하니 마차꾼 하나 구해 갑시다."
자신의 처지를 배려해 주는 따스한 마음씨에 감격한 등해린의 얼굴이 환해졌다. 낭인 무사 생활 이십 년 만에 정말 좋은 고용주를 만난 기분이었다. 인력시장에 들러 노련한 마차꾼을 구한 두 사람은 널찍한 마차 안에서 곤히 자면서 갔다.
북경 길에 은자 백 냥을 받은 마차꾼은 진철이란 자였다. 한 달간 제대로 은자 구경도 하지 못하다 봉을 잡은 그는 신이 나서 말을 몰았다. 오십 냥도 불러놓고 조마조마했다. 정말 준다면 감지덕지할 처지인데 시원하게 백 냥을 쏘는 호탕함에 기분 자체가 좋았다. 최대한 잠을 방해하지 않으면서도 속도를 늦추지 않는 노련미도 보였다. 이미 기간 내에 도착하면 백 냥을 더 준다는 언질도 받아 죽기 살기로 몰아대는 진철이었다.
여정을 가다 보니 식사 때마다 횡재하는 진철이었다. 내리기 성가신 소천악이 은자를 한 움큼 주며 배달을 시켰다. 요리대에 비해 턱없이 많은 은자였다. 부수입에 맛들린 진철은 이 여정이 한없이 계속되었으면 하는 바람마저 생겼다.
북경을 며칠 앞둔 거리에 달리던 진철은 앞에서 손짓하는 한 사람과 어린애를 보았다. 신색이 초췌한 게 다급한 기색이 역력했다. 잠시 망설이던 그는 조심스럽게 마차 안에 이야기했다.
"공자, 지금 앞에서 한 남자와 어린애가 손짓하는데요. 아무래도 마차를 세워달라는 이야기 같습니다."
"헉, 무엇이!"
깜짝 놀란 등해린이 가슴이 덜컥 내려앉아 얼른 검을 잡아갔다. 혈수쌍살에 호되게 데인 경험이 또다시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 좋은 고용주를 놓치고 싶지 않은 강렬한 욕구가 치밀어 올랐다. 그의 모습에 실소를 터뜨린 소천악이 말했다.
"어린애가 있다고 했소?"
"네, 공자님. 형색이 남루해도 옷을 보니 대갓집 자제 같은데요."
"음, 알겠소. 일단 마차를 세우시게."
"네, 공자님."
마차는 천천히 속도를 줄였다. 속도가 주는 만큼 검을 잡은 등해린의 손에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이윽고 마차가 완전히 서자 마차 문이 열리며 등해린이 얼른 밖으로 나섰다. 경계심이 잔뜩 들어간 그의 눈에 두 사람이 들어왔다. 진철의 말대로 다급한 신색이 역력했다. 등해린이 의심 서린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이오?"
"아, 죄송하오. 급한 사정이 있어서 마차를 좀 빌려 타고 갈까 해서 실례를 범했소."
대답하는 남자는 상당한 무공을 지닌 고수로 보였다. 더욱 의심이 깊어진 등해린이 난색을 표했다.
"어허! 사정은 딱하오만 어려울 듯싶소."
"한 번만 사정을 봐주시구려. 워낙 일이 급해서."
눈살을 찌푸리며 또다시 등해린이 막 거절하려는 찰나였다. 마차 안에서 어느새 나온 소천악이 말했다.
"무슨 사정인지는 몰라도 쫓기고 있구려. 복잡한 일에 얽히고 싶지 않소이다. 미안하오."
"아니! 그러지 마시고……."
남자는 다급하게 말했다. 그도 무공의 고수였다. 강호에서 일류고수급인 그였다. 하지만 보아하니 등해린만 해도 자신이 상대하기 어려운 일류를 훌쩍 뛰어넘은 고수로 보였다. 게다가 뒤늦게 나온 소천악을 보니 그 또한 만만하게 보이질 않았다.
무공으로 누르자니 어려울 게 분명했다. 절로 난감해진 그가 망설이자 소천악이 다시 말했다.
"등 대협, 어서 마차에 오르시오. 잠시 후면 저들을 쫓는 무리가 올 것이오. 귀찮은 일에 말려들기 전에 갑시다."
"헉, 그걸 어떻게?"
등해린이 미처 대답하기 전에 그가 놀라 소리쳤다. 소천악은 무심한 얼굴로 그를 보며 말했다.
"어서 피하시오. 따라오는 무리들이 쉬운 상대는 아닐 성싶소. 하나같이 일류고수뿐이오."
그는 직감적으로 소천악을 잡아야겠다는 마음이었다. 그가 아직 알지 못하는 추격의 손길도 감지하는 걸 봐서는 실력을 숨긴 고수가 분명했다.
"공자, 그러지 마시고 사정을 봐주시오."
"이보시오, 당신이라면 길 가다 시빗거리를 보고 바로 도와주겠소? 무슨 사연인지도 모르고 말이오?"
기분이 상한 소천악이 한마디를 쏘자 말문이 막힌 그였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날 수는 없었다.
"사해가 동도라고 어려운 이를 도와주는 게 협사의 도리라 들었소."
"미안하오. 난 동도도 아니고 협사도 아니오."
차갑게 말하며 마차로 돌아서는 소천악이었다. 가만히 지켜보던 꼬마가 입술을 꽉 물었다.
"가늘게 오래 살다 뒈져라!"
벼락같이 들려오는 소리에 소천악이 흠칫했다. 얼른 고개를 돌려보니 어린놈이 인상을 쓰며 노려보고 있었다. 어이가 없어 소천악이 물었다.
"방금 그 말 나에게 한 말인가요?"
"그래, 이 겁쟁이야! 사내대장부가 어린애가 도움을 청하면 도와줘야 할 거 아냐?"
당당한 모습에 호기심이 동한 소천악이 얼른 물었다.
"하하, 어린애가 도와달라면 다 도와줘야 하는 건가요?"
"물론이야."
맹랑한 소년의 말에 다시 호기심이란 지병이 발동한 소천악이었다. 바라본 소년은 십이 세 정도의 어린 소년이었다. 굳게 뻗은 눈썹이 한성질하는 걸 유감없이 보여줬다. 나름대로 준수해 조금 더 자라면 여인네의 마음을 흔들어놓을 듯한 인상이었다. 장난기가 발동한 소천악이 다시 물었다. 마음을 알아보기 위해 안광을 번뜩이는 그의 눈은 매섭게 소년을 노려보았다.
"어린 공자의 말대로 한다면 어린애가 부탁하면 다 도와주다 칼 맞아 죽어야겠네요. 안 그렇소?"
살벌한 기세에 힘겨워하면서도 소년은 이를 악물고 대답하는 간담을 보여줬다.
"그래도 도와주어야지."
"왜요?"
"왜냐하면 난 약하니까. 조금 센 당신이 도와주는 게 맞는 거야."
순진하다면 순진한 말에 소천악이 흔들렸다. 문득 산에서 고생하던 어린 시절이 생각나기도 했다. 당당한 녀석의 얼굴이 자신의 어린 시절과 대비되기도 했다. 문득 궁금증이 치민 소천악이 불쑥 물었다.
"만약, 오늘 위기를 벗어나면 앞으로 어떻게 살 건가요?"
뜬금없는 질문에 잠시 주춤하던 소년이 당차게 대답했다. 희망이 보이자 어느새 존댓말로 바꾸는 영악함도 보였다.
"난 내 뜻대로 살 겁니다."
당찬 대답에 소천악의 입이 싱긋 미소를 머금었다.
"으하하, 멋진 대답이네요. 자기 뜻대로 산다라. 으하하하하!"
통쾌한 듯 웃음을 거두지 않는 소천악이었다. 왠지 자기와 비슷한 녀석이라는 생각이 들자 호감이 점점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