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천악 64화
무료소설 소천악: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42회 작성일소설 읽기 : 소천악 64화
"그럼 당연히 사과와 함께 약간의 은자로 보상하면 되지요. 인정에 휩싸여 위험을 자초하는 건 강호에서 금기로 압니다만."
소천악의 자연스러운 대답에 등해린은 감탄이 절로 나왔다. 그 짧은 순간에 이런 판단을 내린다는 건 차가운 심장을 가진 자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자신들같이 강호 밥을 먹은 지 이십 년이 되어가는 자들도 눈치채지 못한 일이었다.
옆에서 딴청을 피우며 듣던 냉천상도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소천악의 놀라운 관찰력에 새삼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기색을 훤히 뚫어보던 소천악이 말했다.
"냉 대협, 저들을 데리고 가주십시오. 일단 의창(宜昌)에서 처리할 생각입니다."
"알겠소이다."
민망한 마음에 급히 대답한 냉천상이 기진맥진한 노부부를 말에 태워놓고 옆의 말을 타고 갔다. 마차에는 소천악과 등해린 두 명만이 타고 움직였다. 냉천상은 소천악의 말없는 대가를 치르고 있었다.
소천악은 마차에 앉아 이번 일에 대해서 분석하기 시작했다. 누가 사주한 건지 알아낼 필요가 있었다. 하오문에서 가져올 소식만을 기다리긴 너무도 분노가 컸다. 출도한 지 불과 몇 개월 만에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무리가 있다는 건 심각한 일이다.
제방에 금이 갔을 때 고쳐야 했다. 금이 깊게 가면 고칠 틈도 없이 무너져 전답이 모조리 쓸려 갈 위기가 온다.
소천악은 출도 첫날부터 되짚어 가기 시작했다. 하나씩 의문으로 올려놓고 내려놓았다. 차차 범위는 좁혀져 갔다. 결국 복면 무리와 이가장으로 압축됐다. 그중 이가장은 아무리 생각해도 동기가 애매했다.
겨우 아들 두들겨 팬 걸로 죽이려 한다는 게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다. 이자용과 이재룡 형제도 독약에 대한 해약도 없이 청부할 리가 만무했다. 더욱이 자신의 실력을 잘 아는 놈들이 이런 무모한 일을 벌일 리가 없었다.
결국 복면 무리의 소행이라는 확신이 점점 굳어져 갔다. 그의 눈빛이 시퍼런 광채를 뿜어냈다. 감히 자신을 죽이려는 무리를 용서할 생각은 절대 없었다. 상대가 아무리 강한 집단이라 할지라도 부숴버릴 결심을 정한 소천악이었다. 그들의 정체를 밝혀낼 묘안을 궁리하는 깊은 상념에 빠져들었다.
"소 공자, 전서구가 도착했소이다."
상념을 깨는 등해린의 목소리가 들렸다. 얼른 마차 문을 열고 가볍게 몸을 날린 소천악이었다. 전서구의 발에 묶인 서찰을 꺼내 들었다. 조난향 하오문주가 직접 써 보낸 서찰이었다. 피식 웃은 소천악이 내용을 쭉 읽어 내려갔다.
〈문의하신 자들의 신상입니다. 보낸 서찰의 내용을 살펴보면 혈수쌍살이 유력합니다. 그들은 혈살막의 특급살수로 수많은 고수들을 암살한 자들입니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요, 남자의 팔꿈치에 깊은 검상이 있다면 거의 확실할 겁니다.
곤륜파의 장로인 해산 진인의 검에 다친 흉터입니다. 혈살막에 대한 정보는 우리도 많지 않습니다. 다만 절강성 항주가 그들의 주 활동무대란 것만 확인됩니다. 막주의 신상내력이나 살수 숫자에 대해서는 아무도 알지를 못합니다.
청부하신다면 은혜를 생각해서 최선을 다해 알아볼 생각입니다. 참고로 그들이라면 소 소협의 목적지인 종남파의 이대제자 세 명을 죽인 자들입니다. 그자들을 종남파에 인도한다면 후한 대접을 받을 겁니다.
하오문주 조난향 배상.〉
서찰을 다 읽자마자 소천악은 바로 신형을 날려 냉천상이 끌고 가는 노부부에게 다가섰다. 놀란 냉천상이 뭐라 하기도 전에 남자의 옷을 부욱 찢었다. 드러난 팔꿈치에는 서찰 내용대로 굵은 검상이 징그럽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크하하! 드디어 두 분의 정체가 밝혀졌구려. 혈수쌍살님!"
"크억! 아니다. 나는 혈수쌍살이 아니다."
신음을 토하며 부인하는 혈수쌍살 중 남자인 혈수양살의 눈빛이 심하게 흔들렸다.
"부인해 봐야 소용없어요. 이미 두 분들이 혈살막의 특급살수임이 밝혀졌소이다. 감히 혈살막에서 내 목숨을 노려요?"
"으윽! 우리는 혈수쌍살이 아니다."
악착같이 부인하는 혈수양살이었다. 자신들의 신분이 밝혀지면 그나마 살아남을 확률이 아예 없었다.
"그거야 차차 확인하면 되는 거지요. 조금만 가면 의창인데 거기서 확인이 가능할 겁니다."
단칼에 일축한 소천악이 다시 마차로 향했다. 초상비의 신법은 완벽하게 구현되었다. 풀을 밟아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경지였다.
"등 대협, 어서 의창으로 갑시다. 저놈들 던져주고 얼른 다른 일 해야지요."
의미가 담긴 말을 들은 등해린의 입이 함지박만 하게 벌어졌다.
"그러죠. 속도를 높이도록 하지요."
등해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채찍을 휘둘렀다. 채찍이 감긴 말의 피부는 뻘건 자국을 남기며 걸음을 빨리했다. 미친 듯이 말을 몰아대는 통에 얼마 안 가 의창이 보였다. 아깝다는 듯 소천악이 등해린에게 입맛을 다시면서 말했다.
"허, 의창도 한풍류하는 동네라는데 이번엔 저놈들 때문에 그냥 스쳐 가야 하는군요."
여유 있는 소천악의 말에 등해린도 내심 안타까움이 들었다. 다시 한 번 즐거움을 느낄 술자리를 강탈당한 느낌이었다.
"그러게요. 뭐 할 수 없죠. 일단은 일이 급하니 어서 가시죠."
소천악은 뒤를 보며 아쉬움에 젖었다. 별 쓰레기 같은 혈수쌍살 때문에 겪는 아픔이라 생각하니 또다시 열불이 솟아 몇 대 두들겨 패고야 속이 풀렸다.
마차는 폭풍의 질주를 거듭했다. 등해린은 잠을 아껴가며 달리고 또 달렸다. 하루라도 빨리 가야 즐거움이 기다린다는 희망이 그의 힘을 솟구치게 만들었다.
뒤에서는 풀이 죽어 심심하면 혈수쌍살을 검집으로 두들겨 패는 가여운 냉천상이 있었다. 마차는 얼마 후 드디어 의창에 들어섰다.
"등 대협, 이제 서둘러 종남파에 갑시다. 저놈들을 얼른 넘겨줘야지요."
"물론이오, 공자. 자, 갑시다."
죽이 착착 맞는 두 사람은 희희낙락하며 마차 위에서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며칠간의 강행군으로 어느새 마차는 종남파가 있는 산 어귀까지 도착했다.
벌써 소천악은 종남파 근처에서 들리는 소리를 감지했다.
"휴우, 공자! 이제 다 왔소이다."
영문 모르는 등해린이 이마에 흘린 땀을 훔치며 말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그런데 영 저 동네가 시끄러운 듯하군요."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시큰둥하게 말하는 소천악이었다. 등해린은 내심 뜨끔했다. 아직 자신은 전혀 들리지 않는 거리의 소리를 들은 소천악이었다. 다시 한 번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대단하시오, 공자. 그 나이에 이런 성취라니."
"하하, 등 대협도 저 같은 수련과정을 거치면 당연히 될 겁니다. 아주 치가 떨리죠."
의아한 등해린의 시선을 무시한 채 말을 이었다.
"등 대협, 아무래도 우리가 직접 올라가 봐야겠어요. 저 두 놈을 하나씩 들고 갑시다."
"그러시지요, 공자."
두 사람은 바로 혈수쌍살을 하나씩 나눠 들고 산으로 올라갔다. 물론 개밥에 도토리 신세인 냉천상은 마차를 지키란 말에 말뚝이 되고 말았다. 소천악의 응징은 철저하고도 아주 피를 말려갔다. 냉천상은 벙어리 냉가슴을 앓으면서도 아무 소리도 하지 못했다.
두 사람은 고수답게 나무를 슬쩍슬쩍 차며 경신법을 전개해 금방 종남파 입구가 보이는 곳까지 달려갔다. 입구에는 벌써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등 대협, 아무래도 잠깐 상황을 보고 행동해야 할 듯합니다."
"음, 옳은 판단이오. 저기 큰 나무 위에 올라가 지켜봅시다."
의견이 일치한 두 사람은 높이가 삼십여 장이 넘는 나무를 비호같이 치고 올라갔다. 굵은 나뭇가지를 찾아내고 자리를 턱하니 잡고 싸움터를 바라보았다.
현판이 걸린 종남파의 입구는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검광이 여러 군데서 난무했다. 벌써 땅에는 수십 명이 피를 흘리고 죽어 있었다.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이들도 오래지 않아 죽음을 맞이할 중상을 입었다. 회색 도복을 입은 종남파의 무인들은 사력을 다해 막아갔다. 하지만 검은 무복 차림과 청색 무복 차림의 고수들도 만만치 않았다. 신형이 어지럽게 교차하면 어김없이 비명이 들리고 한 명이 쓰러졌다.
가만히 바라보던 소천악이 혀를 찼다.
"어허, 미치겠네. 도무지 이놈의 미인들은 왜 이리 사고가 많은 곳에서만 사는 건지, 원!"
소천악의 푸념에 등해린이 맞장구를 쳤다.
"거참, 평소에 조용하다가 하필이면 우리가 오는 날이 이리 시끄러운지."
소천악은 정말 푸닥거리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미녀 한 번 보려고 싸운 게 몇 번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이처럼 고생스러운 길인 줄 상상도 못 했다. 얼굴 한 번 보려면 꼭 개고생을 치러야만 했다.
"등 대협! 도대체 왜 싸우는지 영문을 알 수 있겠소이까?"
가만히 생각하던 등해린이 말했다.
"제 생각으로는 세력싸움 같습니다. 전에 들리는 소리로는 섬서성의 패권을 놓고 항상 아웅다웅했다는 소문이 있었지요."
"도대체 무슨 세력싸움인지?"
"뭐, 성세싸움이기도 하지요. 섬서성 내의 상권이나 표국 운영권 등을 놓고 수없이 갈등을 일으켰다는 이야기가 있었지요."
머리를 굴리며 듣던 소천악이 툭하니 비아냥거렸다.
"결국 돈 때문에 싸우는 거네요?"
"그렇죠. 명문대파라고 해도 돈이 없으면 손가락이나 빠는 처지지요. 힘이 있어야 제자도 들어오고, 제자가 많아야 힘이 커지지요."
"아, 골치 아픈 강호무림이네요. 다 관두고 싸움구경이나 하죠. 세상에서 불구경하고 싸움구경이 제일 재미있는 볼거리 아닌가요?"
엉뚱한 소천악의 말에 등해린은 내심 놀랐다. 이 청년은 도무지 그 사고방식을 이해하기 힘든 인물이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편하게 자리잡고 본격적으로 구경할 태세를 갖춘 소천악이었다.
종남파와 구유마방(九幽魔幇)과 흑살방(黑煞幇)의 연합세력 간의 혈전은 갈수록 점입가경이었다. 일류고수 수십 명이 혈투를 벌이고 있었다. 일반고수는 그들끼리 서로의 목을 노리고 피 튀기는 혈전을 벌였다.
점점 땅에 쓰러지는 양쪽 고수의 숫자가 늘어갔다. 척 봐도 종남파가 조금씩 밀리는 기색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아무리 구대문파란 종남파였지만 사파의 거파인 구유마방과 흑살방의 합공에 밀려갔다. 사실 종남파는 말이 구파에 들어가지 그 성세가 한참 떨어지는 문파였다. 하지만 아주 약간의 열세라 전세가 기울어지려면 중천에 걸린 해가 떨어져야 할 판이었다. 참을성을 가지고 기다리던 소천악이 마침내 인상을 찌푸렸다.
"등 대협! 대협께서는 잠시 여기에 계시오."
"아니 어쩌시려고?"
"그냥 두고 보시면 압니다. 아주 하루 종일 난리칠 거 같아서 안 되겠소이다."
말을 마친 소천악은 양쪽 허리에 혈수쌍살을 끼고 훌쩍 싸움판으로 신법을 전개했다.
"잠깐 멈추시오!"
내공을 실어 외친 소천악의 음성은 모든 이의 귓가에 충격파를 던지며 들렸다. 생사를 걸고 싸우던 수백여 명의 고수들이 귓가에 천둥처럼 울리는 목소리에 놀라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그들이 바라본 곳엔 한 젊은이가 양쪽에 두 사람을 끼고 바람인 양 다가서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소천악은 중인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유유히 신법을 전개해 싸움판 가운데로 뛰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