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천악 55화
무료소설 소천악: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73회 작성일소설 읽기 : 소천악 55화
"소 사부! 잘못했소이다. 제발 용서를."
"사부님이 돼서 제자의 꾐에 빠져 이따위 짓을 한다는 게 말이 되나요?"
거칠게 대꾸하는 소천악의 말에 창피함에 절로 얼굴이 후끈거렸다.
"미안하오. 나도 내 나름대로 사정이 있어서."
고개를 푹 숙이는 이병두였다. 소천악은 그를 안쓰럽다는 듯이 바라보며 툭하니 말을 꺼냈다.
"얼마 받았어요?"
은자 이야기가 나오자 뜨끔한 이병두는 손사래를 치려다가 바로 멈췄다. 슬슬 주먹을 다시 올리는 소천악의 사나운 기세에 찔끔해 얼른 대답했다.
"오백 냥이오. 잘만 되면 이천 냥을 다시 준다고 했소."
체념하고 말하는 이병두였다. 말을 마치고 소천악의 처분을 기다리는 이병두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귓가에는 어떠한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이상한 마음에 슬며시 고개를 들어보니 소천악이 손을 내밀고 있다.
처음엔 무슨 뜻인지 몰라 당황하던 이병두는 이내 그 의미를 알아차렸다. 피눈물 나는 돈이다. 정말 내주고 싶지 않았지만 법보다는 주먹이 가까웠다. 아까움에 덜덜 떨리는 손으로 전표를 건네주었다. 매가 병아리 낚아채듯 얼른 챙긴 소천악이 그렇게 미울 수가 없는 이병두였다. 품속에 이미 전표를 집어넣은 소천악이 섬뜩하게 말했다.
"이제 가봐요. 다시는 보지 말지요. 이 엉터리 학자분."
이병두는 모멸감에 치를 떨면서 후다닥 전각 밖으로 도망가다시피 내뺐다. 다시 소천악의 눈초리는 이자용과 이재룡 두 형제에게 섬뜩한 광망을 뿜어냈다.
"이천 냥 이리 내놔요."
뚱딴지같은 말이었지만 감히 반항할 엄두도 내지 못하는 두 형제였다. 이자용은 바로 전낭에서 이천 냥짜리 전표를 꺼내주었다. 그것마저 받아 챙긴 소천악이 사악하게 웃었다.
"이제 시작해야지요. 이 괘씸한 제자님들! 감히 잔머리를 굴려요?"
그날 소공자 전각에선 밤새도록 매타작 소리와 신음소리가 진동했다. 영문 모르는 이간희 장주가 역시 뜬눈으로 밤을 지새워야만 했다. 다음 날 형제를 깨운 소천악은 근엄하게 한마디 했다.
"어제 안 한 거와 오늘 할 거 모조리 다 외우세요. 이해가 아니고 암기지요. 내일 숙제 검사를 하겠소. 알았나요?"
"네, 소 사부님!"
잔뜩 주눅이 든 형제는 눈앞이 깜깜해졌다. 외우라니 말도 안 되는 지시였지만 토를 달 수가 없다.
"나는 잠시 밖에 나갔다 오지요. 알아서 해요. 숙제 검사에 편하려면요."
"네, 사부님."
절대복종을 외칠 수밖에 없는 형제의 고난은 끝날 줄을 몰랐다. 천천히 이가장을 나서 하오문을 찾은 소천악은 장수붕 지부장을 웃는 낯으로 대했다.
"좋은 학자를 소개해 줘 고맙소, 장 지부장. 또 한 분 부탁하오."
호의적인 말에 장 지부장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최소 본인은 중상, 지부는 쑥밭을 각오한 터였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인지? 제가 죄송하단 말을 드려야 할 텐데."
"죄송은 무슨. 너무 잘 골라줘서 고맙소. 여기 수고비로 오백 냥을 가져왔소."
소천악은 전장에 들러 바꾼 오백 냥짜리 전표를 냉큼 건네주었다. 엉겁결에 받기는 받은 장수붕은 도무지 영문을 알기가 힘들었다. 지부에 날아온 전서구 내용이 자꾸 눈에 밟혔다. 종잡을 수없는 인물이란 서찰대로였다.
소천악은 죄인처럼 굽실거리는 장수붕을 통해 여러 가지 정보를 얻어냈다. 만족한 결과를 받아낸 그는 호쾌하게 말했다.
"이제 천리추적향만 준비하시면 되겠소. 조만간에 부탁하오."
"아, 네. 우리도 열심히 뛰고 있으니 좋은 소식이 올 겁니다."
"자, 그럼 또 봅시다."
웃음을 보이며 소천악이 사라지자 장수붕은 부산을 떨며 어제 이가장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나머지 정보를 듣고는 실소하고 말았다. 결국 소천악이 준 오백 냥은 반타작인 셈이다.
"으하하! 정말 유쾌한 인물이야. 강호에 물건 하나 나타났군."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로 장수붕은 원 없이 웃었다.
소천악은 모처럼 하루를 푹 쉬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숙제야 내준 거니 내일 가서 두들겨 패기만 하면 되는 일이다. 발걸음은 가볍게 장사제일루로 향했다.
하루 저녁을 걸판지게 논 소천악은 이튿날 아침 개운한 마음으로 이가장으로 향했다. 이제는 풍류계 노류장화들도 소천악을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하룻밤 정이 쌓인 기녀가 곱게 적은 연락처를 적어주었다. 뿌듯한 만족감이 온몸을 지배하는 순간이다.
이가장의 정문을 들어서는 순간 소천악의 표정은 삽시간에 변했다. 풍류남아의 모습은 오간 데 없고 근엄한 학자로 변신했다. 마주치는 하인들마다 두려움에 떨며 고개를 팍팍 숙였다. 괜히 불똥 튀길까 봐 염려하는 모습이다.
소공자 전각에 들어서자 이미 새로 온 글 선생과 형제가 책을 놓고 씨름 중이다. 양청천(梁靑天)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소문에 듣기엔 개망나니란 형제가 이리도 학문에 열의가 있는지는 꿈에도 몰랐다. 불끈 제자를 키우고픈 욕구에 전력을 다해 형제를 지도했다.
"아, 새로운 글 선생이시구려. 앞으로 잘 지내봅시다."
다소 불량스런 말투에 기분이 상한 양청천이 막 무어라 하려다 바로 입을 다물었다. 형제가 필사적으로 손짓하는 걸 봤다. 눈치코치로 금방 알아차린 양청천은 아무 말 없이 글공부에 전념했다. 거기에는 이간희 장주가 만났을 때 넌지시 건넨 말이 결정적이었다. 이전 글 선생이 얻어맞아 골병이 들었다는!
소천악은 피식 웃으며 창가에 가 글공부를 곁눈질로 훔쳐 배웠다. 한나절의 시간이 흐르자 밤새 진을 뺀 피로감이 몰려와 탁자에 발을 턱하니 걸치고 잠에 빠져들었다. 피로감에 그의 코는 심하게 시끄러웠다.
"드르렁, 쿨쿨."
글을 설명하다 자꾸 코 고는 소리에 흐름이 끊어져 곤혹스러웠던 양청천은 몇 번이나 깨우려 하다가 꾹 참았다. 형제가 귓속말로 한 소리 때문만은 아니라고 자신에게 되뇌고 있었다. 세 사람의 욕설을 받으며 꿋꿋하게 잠을 잔 소천악은 정확히 저녁나절에 일어나 식사 후 다시 잠에 푹 잠겼다.
형제는 양청천과 더불어 죽을힘을 다해 이틀분을 암기하려 온갖 애를 썼다. 졸리는 두 눈을 부릅뜨며 버티고 버텼다. 저녁이 깊어지자 양청천은 숙소로 돌아가고 형제만이 주경야독의 열정에 빠져들었다. 시간은 흘러 자정을 가리키고 있다. 형제는 제발 저 악귀 같은 소악천이 밤새도록 자기만을 바랐다.
하늘은? 무심했다.
자정에서 일각이 지나자 어김없이 소천악은 눈을 떴다. 형제는 저승사자의 방문을 맞이하는 기분이다. 살기 위한 아부를 시작하는 이자용이다.
"소 사부님, 편히 주무셨습니까?"
눈을 비비던 소천악은 바로 물었다.
"지금 몇 시지요?"
"자정에서 일각 정도 지난 시각이옵니다."
가만히 형제를 쳐다보던 소천악이다. 형제는 조마조마한 심정이다. 발악하듯 공부했으나 이틀분을 이해도 아니고 암기는 불가능했다. 채 반도 못 외운 채 처분만을 바라는 신세로 전락했다.
"그래, 자정이 넘었군요. 음… 할 수 없지요. 가서 주무시도록 하시오."
"네! 아니 그럼 숙제검사는?"
의외의 말에 어리둥절한 이자용이 급히 묻자 태연하게 대답하는 소천악이었다.
"남아일언 중천금! 자정이 넘었으니 오늘 숙제검사는 없소이다. 왜, 할까요?"
"무슨 말씀을! 소 사부님, 편안한 잠자리 되십시오."
이자용과 이재룡은 얼른 정중하게 읍을 한 후 바람같이 사라졌다. 방에서 한참 멀어진 후 둘은 정원에 앉아 서로 부둥켜안으며 감격했다.
"살았다, 아우야!"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있네요. 저 악귀 사부가 오늘은 왠지 멋져 보입니다."
말하는 이재룡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달려 있었다.
"그러게. 오늘처럼만 한다면 청부 같은 거 하지 않았을 텐데."
소천악이 온 후 처음으로 구타의 공포에서 벗어난 해방감에 한없이 들뜬 형제였다. 그러나 이 모든 건 소천악의 계략이다. 한없이 조이기만 하면 안 된다는 건 이미 몸으로 절실히 느낀 그였다. 가끔은 이런 행사도 치러야 사기가 오른다는 걸 알았다.
일부러 자정이 넘도록 자는 척을 한 소천악이었다. 피곤한 하루를 보낸 소천악은 늘어지게 하품을 한 후 바로 잠에 빠져들었다.
이날의 계략이 힘이 되었는지 형제는 정말 피눈물 나게 글공부에 매진했다. 그 모습에 이간희 장주는 춤출 듯이 기뻐했다. 날로 소천악을 신뢰하는 장주의 신임은 커져만 갔다. 그렇게 칠 주야가 흘러갔다.
소천악과는 달리 열과 성을 다하는 양청천의 지도에 형제는 처음과는 완연히 다른 모습으로 학업에 정진했다.
이미 소천악의 모습은 옆에 없었다. 어느 정도 말발이 설 지식을 습득한 그로서는 더 이상의 공부는 필요 없었다. 막말로 과거 볼 일도 없는 터였다. 그는 정원을 한가로이 거닐면서 장래를 생각했다. 이윽고 몸을 움직이며 나지막이 뇌까렸다.
"대붕이 멀리 날기 위해선 움츠려야 하는 법이지."
짧은 강호 경험에도 그는 깨달았다. 머리가 안 따라주면 다만 무공 강한 질시의 대상이 된다는 걸 말이다. 아마도 혈사부도 이 함정에 걸려 무림공적으로 몰린 게 분명했다. 억울하지만 그 누명을 벗겨주어야 했다. 자신을 위해서 필요한 일이다.
쉬운 일은 아니다. 상대는 명문대파 모두라 해도 과언이 아닌 데다가 설상가상으로 머리 좋기로 유명한 제갈세가마저 넘어서야 했다. 소천악은 왜 혈사부를 제갈세가가 앞장서서 공적으로 만들었는지 잘 알고 있다. 하오문을 통해 들은 정보를 기초로 내린 판단이었다. 마음이 딴 데 가 있자 아무래도 형제를 교육하는 데에는 소홀해졌다. 그 점이 오히려 형제들에게는 구원의 손길이다.
구타의 강도도 떨어지고 타이를 때가 많았다. 힘이 센 자가 말하는 훈계는 그 효과가 만점이다. 절대복종하는 형제는 어느새 글공부에 약간의 매력을 느꼈다. 글을 배우다 보니 품위가 생겨나게 되는 걸 안 형제였다. 좀더 나은 풍류생활에 글공부는 필수라는 마음이 들었다. 맞기 싫어 배우는 걸 자신도 모르게 탈피해 갔다.
소천악은 형제의 변화를 알고 이제는 떠날 때가 된 걸 느꼈다. 마지막으로 힘을 실어준 후 갈 길을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날 밤 가벼운 훈계로 형제를 기절시킨 소천악은 개운한 마음으로 잠자리를 청했다. 하루 종일 빈둥거린 탓에 조금 뒤척이다 잠에 잠겨갔다. 잠든 귀에 미묘한 소리가 걸렸다. 아무래도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임을 느낀 소천악이다. 계속 코를 골면서 주변의 변화를 주시하기 시작했다.
고양이가 움직이는 듯 소리를 죽인 발걸음이 두 군데서 들려왔다. 얼굴에 검은 복면을 한 두 명의 살수는 눈빛을 빛내면서 손으로 의사를 전달했다. 소천악이 방에 오기 전부터 귀식대법으로 숨소리를 숨기고 숨어 있던 특급살수들이다.
참을성을 가지고 소천악이 빈틈을 보일 때까지 절대 정숙을 유지하다 본색을 드러냈다. 그들의 손에는 작은 비수가 잡혀 있다. 비수 끝이 거무튀튀한 게 극독을 바른 게 분명했다.
살수들은 숨을 죽이며 서서히 소천악이 누워 있는 침대로 다가섰다. 일각이 지나도록 겨우 일 장을 다가설 만큼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살수였다. 순간 누워 있던 소천악이 용수철이 튕겨지듯 번뜩이며 신형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