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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천악 53화

무료소설 소천악: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1,162회 작성일

소설 읽기 : 소천악 53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선 그는 아무 말 없이 검을 뽑아 철심목을 내려쳤다.

 

  텅!

 

  그의 손에 찌릿찌릿한 통증이 밀려왔다. 상상외의 단단함에 검이 튕겨 나왔다. 눈이 좁혀지며 이번엔 내공을 넣어 섬전같이 베어갔다. 마치 쇳덩이를 베는 듯한 둔중함이 손끝에 느껴졌다. 철심목은 내공이 실린 검에 악착같이 버티다 결국 무너졌다. 소천악은 베어진 철심목을 잡고 한 시진 이상 씨름했다. 고생 끝에 손잡이가 얇고 몸통이 두툼한 몽둥이가 멋지게 탄생했다. 탁탁 휘둘러보니 손맛이 착착 감기는 게 마음에 쏙 들었다.

 

  "흐음, 이 정도는 돼야 패는 손맛이 짜릿하지."

 

  형제가 들었으면 까무러칠 소리를 중얼거리며 소천악이 걸음을 다시 전각으로 옮겼다. 형제는 이미 천자문 독파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그들이 본 소천악은 절대 허언을 할 위인이 아니었다. 살기 위해 죽어라 책을 파고 있었다.

 

  흐뭇한 마음으로 형제를 보다 방 안을 쓰윽 둘러보던 그의 시야에 뭔가가 잡혔다. 장식장 위에 '나 고급 술이오.' 티를 내는 술병이 여러 개 눈에 띄었다.

 

  그 다음은 열심히 공부하는 두 형제와 술타령에 빠진 사부만이 있을 뿐이다. 참다못한 이자용이 한마디를 던졌다.

 

  "사부님! 제자들이 술 냄새에 제대로 학업이 어렵습니다."

 

  "시끄러운 공자님들! 열정이 있으면 어떠한 환경에서도 하는 겁니다. 생각만 있어 보세요. 불이 나도 책을 보는 겁니다. 내가 그랬지요. 험험!"

 

  가차 없이 두 형제의 불만을 뭉개버린 채 술맛을 음미하는 소천악이다. 형제는 내심 이가 갈렸으나 당장은 어쩔 수 없었다.

 

  정신이 분산되니 가뜩이나 어려운 글공부가 제대로 될 리가 만무했다. 시간은 흘러 자정이 되었다.

 

  "동작 그만! 이제부터 숙제검사 시간입니다."

 

  조금도 에누리 없는 소천악의 말이 터져나왔다. 형제는 사색이 다 되었다. 아직 둘 다 마지막 장은 펼쳐보지도 못한 형편이다. 자세하고 엄밀한 숙제검사는 차분하게 이루어졌다.

 

  "자, 계산해 보지요. 자용 공자님은 오백 자니까 오천 대, 재룡 공자님은 육백 자니까 육천 대 맞지요?"

 

  친절하게 말해 주는 소천악을 보며 그래도 설마 하던 형제는 뜨악한 표정으로 변해갔다.

 

  "설마 그거 다 때리려고 하시는 거는 아니죠?"

 

  "남아일언 중천금!"

 

  이후 전각 내에선 북 치는 소리와 비명이 요란하게 울려 나왔다. 소천악은 전에 혈사부에게 당한 그대로를 형제에게 돌려주었다. 두들기다 보니 패는 기분을 알 것 같았다. 손끝에 착 달라붙는 몽둥이와 엉덩이의 절묘한 조화는 겪어보지 않은 자는 알 수 없는 쾌감이다.

 

  비명이 들려오는 전각 밖에는 이미 이간희 장주가 안절부절못하고 서 있는 게 보였다. 옆으로는 이가장의 수뇌부가 우르르 몰려서 눈치를 살피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거 이러다 우리 아들 둘 동시에 초상 치르는 거 아냐?"

 

  "설마 죽이기야 하겠습니까?"

 

  "아! 상대가 신의괴협이야. 방심할 수 없어."

 

  시름에 잠긴 이간희 장주의 하소연이다. 그랬다. 그는 소천악이 올 때부터 그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아무런 의심 없이 자식 교육을 맡긴 거였다. 중원에서 손꼽히는 부자가 그리 만만한 머리의 소유자는 아니다.

 

  "지금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저 두고만 볼 수밖에요."

 

  총관의 말에 머리는 수긍하면서도 마음은 영 아닌 이간희 장주였다.

 

  "휴우, 하긴 그래. 지금 말리면 저 두 놈이 더욱 기세등등해지겠지. 맞아. 설마 신의괴협이 저놈들을 죽이기야 하겠냐? 사무친 원한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은 그리해도 아차 하면 죽일 것 같은 섬뜩한 예감이 들었다.

 

  "아직도 비명이 나는 거 보니 소장주님들이 살아 있기는 한 거 같습니다."

 

  "지금 그걸 위로라고 던지는 말인가?"

 

  화가 머리끝까지 난 이간희 장주가 총관을 노려보았다. 찔끔한 총관이 얼른 다른 데를 보며 딴청을 피웠다.

 

  "총관! 내일 아침 식사는 무슨 일이 있어도 황제 저리 가라 할 진수성찬을 차리게."

 

  "그러지요, 장주님."

 

  총관은 그렇게나마 표현하고픈 애틋한 부정을 느끼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간희 장주가 손에 땀을 내며 지켜보는 전각에서는 여전히 비명이 들렸다.

 

  "크아악! 살려주세요. 사부님!"

 

  큰 아들 자용이의 목소리에 가슴이 미어지는 이간희 장주였다.

 

  "시끄러, 이 새끼야! 숙제도 못 한 놈이 무슨 말이 이리 많아? 똑바로 대. 아프다고 움직이면 허리 나간다."

 

  스산한 소천악의 목소리에 이를 북북 가는 장주였다.

 

  "저런 무식한 놈. 내가 미쳤지. 저런 놈인 줄 모르고……. 휴우!"

 

  뒤늦은 후회감이 이간희 장주의 머리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그 생각과 상관없이 비명은 쉬지 않고 들렸다. 밤새 장원을 공포로 몰아넣은 소천악은 새벽 해가 떠오를 무렵에야 비로소 철심목을 놓았다.

 

  두 아들의 비명이 멎자 안도의 한숨을 토한 이간희 장주가 독기 서린 눈으로 전각을 노려보았다.

 

  "이러고도 실패하면 내 네놈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죽여버리고 말겠다."

 

  한 서린 그의 말이 조용히 새벽 공기 속에 흩어졌다.

 

  이간희 장주의 저주를 한 몸에 받은 소천악이다. 그의 앞에는 형제가 해파리처럼 흐느적거리며 신음을 토하고 있었다. 혈사부의 기분을 한껏 이해한 소천악은 흐뭇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검사 시간은 자정. 벌은 오늘과 같다고 보면 됩니다."

 

  그렇게 냉정하게 말하고 그는 조용히 방에서 사라져 갔다.

 

  "으아, 이건 생지옥이야. 아버지가 미친 것도 아니고 어떻게 이럴 수가!"

 

  이자용의 통한스러운 음성이 방 안에 온통 가득 찼다. 동생 이재룡이 힘겹게 말했다.

 

  "형, 천자문 책 이리 줘봐. 촌각이 아까워. 한 자라도 더 외워야 해. 난 형보다 무려 천 대를 더 맞았어."

 

  진저리를 치며 엉금엉금 기어 천자문 책을 손에 쥔 채 바로 펼쳐낸 이재룡이다. 두 눈에 불을 켜고 한 자 한 자 죽어라 외우는 얼굴엔 사생결단의 의지가 보였다. 바라보던 이자용이 가슴이 뜨끔했다. 떠들 시간이 없었다.

 

  그날 저녁도 어김없이 전각 안에서는 비명이 요란하게 울려 나왔다. 물론 비명이 들리는 시간은 어제보다 무려 한 시진이나 짧아졌다. 매에는 장사가 없었다. 형제는 이젠 죽기 살기로 천자문을 붙들고 늘어졌다.

 

  형제가 바라보는 소천악은 인정이라곤 한 방울도 없었다. 오로지 결과로만 판단하는 냉혈한이다. 게다가 형제간의 경쟁도 불을 뿜었다. 비록 같이 얻어맞지만 한 자라도 더 외우면 한 녀석이 얻어맞는 걸 통쾌하게 바라보는 기쁨도 쏠쏠했다.

 

  한 자라도 더 외우려는 형제의 발악은 눈물겨웠다. 식사시간이나 화장실을 갈 때도 책은 손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칠 주야가 지나가자 천자문이 거의 끝나가는 형편이었다. 가공할 매질에는 이길 장사가 없었다.

 

  소천악은 형제들이 천자문을 다 외워가자 은근히 걱정거리가 생겼다. 사실 혈사부가 가르쳐준 글은 오로지 혈검신공을 배우기 위한 공부였다. 나머지는 곁다리로 배운 무공비급을 읽을 수 있을 정도의 글공부였다. 사실 그게 혈사부의 한계였다.

 

  천자문 다음인 소학부터는 난감했다. 더욱이 사서삼경(四書三經)을 흘낏 읽어보니 이건 이해하기도 버거웠다. 고민하던 그는 간결한 결론을 내렸다. 바로 이간희 장주를 찾아간 선택이다.

 

  "장주님, 이제 보조 글 선생이 필요합니다."

 

  당당하게 말하는 소천악을 복잡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간희 장주였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들을 매일같이 두들겨 팬 걸 생각하면 당장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았다. 하나 자식들이 글공부에 매진하여 하루가 다르게 실력이 쑥쑥 늘어간다는 보고를 이미 받았다. 애증이 눈빛에 교차하는 이간희 장주였다.

 

  "뭐 필요하시다면 쓰셔야지요. 그런데 보수는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이간희 장주의 말에는 뼈가 스며 나왔다. 못마땅한 기색을 이렇게 간접적으로라도 표현해 조여들었다.

 

  "뭐, 보수 타령을 하신다면 지금과 똑같은 교육이 되겠지요. 단 보조 글 선생이 온다면 약간 유화적으로 바꿀까 했습니다만."

 

  "헉, 들이십시오. 보수는 아무 걱정 마시고 필요한 대로 들이세요."

 

  바로 반응을 보이는 이간희 장주였다. 소천악이 내심 고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알겠소이다. 그럼 그렇게 하는 걸로 알고 이만 물러갑니다."

 

  "네, 부디 좋은 결과를 부탁합니다. 험험, 그리고 대를 이어야 하는 귀한 자식들인 만큼 조금 더 신경을 써주시면… 허허!"

 

  말하면서도 민망한 듯 이간희 장주는 얼굴을 붉혔다.

 

  "음… 최대한 배려는 하겠습니다만 아무래도 인간이 먼저 되려면 필수적인 과정은 생략하기가 어렵군요."

 

  "정히 그러시다면 할 수야 없지만……."

 

  아쉬운 듯 여운을 주는 이간희 장주를 무시한 채 소천악은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쌩하니 장주 집무실을 나가버렸다.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된 이간희 장주였다.

 

  "도대체가 말이 안 통해. 저놈도 자식을 낳아야 내 마음을 알 텐데. 휴우."

 

  머리를 부여잡고 책상 위에 엎어진 이간희 장주였다. 소천악은 그길로 하오문 지부를 찾아갔다. 이번엔 하오문 호남성 지부가 난리법석이었다. 이미 소천악이 이가장에 들어갈 때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그 행적을 조사하던 호남지부였다. 그가 하오문으로 발길을 돌리자마자 정보는 바로 들어왔다. 장수붕(張秀朋) 하오문 호남지부장은 안색이 새파래져서 소천악을 맞이했다.

 

  "최우량 고객 패의 주인을 뵙습니다. 장수붕이라고 합니다."

 

  "수고 많아요, 장 지부장. 다름이 아니고 몇 가지 정보가 필요해서 왔습니다."

 

  긴장감이 극도에 달한 장수붕이 얼른 물었다.

 

  "무슨 정보이신지. 구할 수 있다면 당연히 해드려야지요."

 

  "일단 학문이 깊은 학자 한 명을 바로 구해주시오. 보수는 한 달에 은자 이백 냥. 올 곳은 이가장 소장주 전각이오."

 

  경악할 금액에 장수붕은 놀라 물었다.

 

  "아니 은자 이백 냥이라뇨? 그런 거금을."

 

  "거, 말 많으시오. 구하라면 구하시오. 내 돈도 아닌데 뭐 그리 놀라시오. 줄 사람은 따로 있소. 그리고 천리추적향을 구해주시오."

 

  눈살을 찌푸리는 소천악을 보며 가슴이 철렁한 장수붕이 얼른 말했다.

 

  "알았습니다. 바로 해드리지요."

 

  "아, 고마워요. 또 수고스럽겠지만 강호정세에 대해 매일 서찰로 보내주시오. 내가 어디 있는지는 당연히 알 거라고 생각하오."

 

  정곡을 찌르는 말에 장수붕은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정보비는 나중에 주겠소. 지금 개털이라 줄 돈이 없소."

 

  당당하게 말하는 소천악을 보며 울며 겨자 먹기로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아차 하면 지부가 박살날 형편이다.

 

  가볍게 하오문에서 처리할 일을 마친 소천악이 이가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강호 생활이라는 게 시간이 가면 갈수록 흥미진진해져 갔다.

 

  거금을 내걸자 수십 명의 학자가 찾아왔다. 사실 공자 왈 맹자 왈 한다고 밥이 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물론 떡도 안 나왔다. 보수에 혹한 학자들이 대거 응시했다. 소천악은 아주 간단히 한 사람을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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