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천악 87화
무료소설 소천악: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73회 작성일소설 읽기 : 소천악 87화
모른 척 시선을 무시하고 소천악은 상석에 앉아 있던 무당파의 진여해 장로에게 포권하며 인사했다. 그는 이번 정파 무림인 연합의 수장을 맡고 있었다.
과연 강호 최절정고수답게 전신에서 서리서리 기세가 풍겨나오며 강한 위압감을 뿌리는 진 장로였다. 하지만 소천악이 보기엔 가소로웠다.
혈사부에 비하면 새 발의 피도 안 되는 경지를 자랑하는 그가 오히려 우스웠다. 소천악은 강호라면 대선배 대우로 읍을 해야 마땅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른 만큼 굽힐 입장이 아니다.
"인사드립니다. 이번에 천축정벌 호위사령 직을 제수받고 온 소천악이라 합니다."
비굴하지도 무례하지도 않은 적절한 예를 갖추는 그를 보며 진여해 장로는 낮은 침음성을 토하며 말했다. 은연중에 뿌린 기세를 아무렇지 않게 해소하는 소천악의 무공경지에 내심 경각심이 일어났다.
"크음! 오느라고 수고했소. 이미 황제 폐하께 연통을 받았소. 나는 이번 천축 사신단을 도우러 온 무당파 수석 장로 진여해라고 하오. 자, 이리로 앉으시오."
진여해는 소천악에게 더욱더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사실 곤란한 처지였다. 건성제로부터는 제거하라는 밀명을 받았지만 막상 겪어본 신의괴협이란 인물이 호락호락 건드릴 인물이 결코 아니란 걸 절감했다.
아직까지 아무런 명분이 없는 터였다. 게다가 악관필 대장군에게는 잘 부탁한다는 은밀한 서찰을 받아 진퇴양난이었다.
"감사합니다, 진 장로님!"
거침없이 대답하곤 손으로 가르쳐준 자리에 성큼 앉았다. 그 옆에 있는 무인들이 순간 불쾌한 기운을 풍겼지만 아예 무시하는 소천악이다.
가만히 눈치를 살피던 진여해는 내심 감탄이 일었다. 살벌한 무인들의 눈초리에 전혀 개의치 않고 움직이는 그 배포가 일단은 마음에 들었다. 황제의 밀명만 아니면 좋은 무인 하나가 옆에 온 기분이다.
씁쓸한 기운을 감추고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금위대 대주! 일단 현재 상태를 말해 주겠소. 이제 바로 천축으로 가는 길이오만 이번 일을 반대하는 여러 나라를 거쳐 가야 한다고 합니다. 비록 군사를 동원하지는 않겠지만 각 변방 문파들을 충동질해 우리를 공격하려는 조짐이 있다는 정보외다."
은연중에 진여해의 말투는 반존대로 내려갔지만 전혀 개의치 않는 소천악이다.
"어려운 일이군요."
간단명료한 대답에 빙긋 미소를 짓던 진여해가 말을 이었다.
"게다가 천축에 가까이 있는 포달랍궁이 문도를 풀어 큰 위협이 되고 있소. 전통적으로 무림인들은 국가 간의 일을 외면하는 게 관례인데 이번은 좀 특이하오."
"무림인들이요?"
"그렇소. 정보에 의하면 세외의 강파들이 잇따라 대거 우리를 공격하기 위해 모인다는 소문이요."
"올 테면 오라지요. 둘 중에 하나겠지요. 그분들이 가든지 우리가 황천길을 가든지……."
패기를 드러내는 소천악의 말에 진 장로와 정파 무림인들은 말문이 막혔다. 말은 맞는 말이다. 서로 싸우면 둘 중에 하나는 죽기 마련인 법!
"그리 쉬운 일이 아니오. 여기부터는 중원이 아니라 저들의 안방인 세외요. 저들은 많은 응원자가 있지만 우리는 여기에 모인 수가 전부요."
"일단 마주쳐 봐야지요. 그렇다고 멈출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호언장담을 하는 소천악을 보며 무인들은 비웃음 서린 미소를 지었다. 자신들이 수없이 생각했어도 밀고 가지 못하는 험난한 여정이다.
이번 황제의 제안에 솔깃해 나선 길이지만 성패 여부를 장담하기 힘든 처지였다. 이제 갓 온 하룻강아지 같은 놈이 해낼 리 없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찬 정파 무림인이다.
그런 눈치를 못 챌 소천악이 아니다. 기분이 얼굴에 드러난 소천악을 보고 진여해 장로가 어색한 표정으로 의견을 꺼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아무래도 병사들은 큰 도움이 되지 못하니 사신 일행과 일부 상단은 우리가 호위하겠소. 대신 소 대주는 나머지 상단을 병사들과 함께 호위하시기를 바라오."
속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말이다. 막말로 공은 자기들이 챙기겠다는 의도였다. 더불어 자기네 상단만 보호하겠다는 욕심마저 슬쩍 내보였다. 속으로 비웃음을 흘리며 소천악이 답했다.
"그렇게 하세요. 아무래도 병사들보다야 정파 무림인들의 실력이 월등하니 사신단 호위를 맡는 게 좋을 듯합니다. 저와 병사들은 나머지 상단을 호위하는 걸로 하지요."
대놓고 쏘아대는 소천악을 무시하며 진여해 장로는 자기 할 말만 계속 이어갔다. 옆에서는 정파 무림인들이 못마땅한 시선을 감추지 않았다.
"음, 그리고 말인데요. 아무래도 사신단과 상단이 함께 움직이면 어려움이 많으니 최소한 십여 리 간격을 두고 움직이도록 합시다. 안전 문제도 있고 하니."
본인이 말하면서도 겸연쩍음을 감추지 못하는 진 장로를 보며 소천악은 서슴없이 말했다. 어차피 겪을 일이라면 당당하게 맞서자는 생각이다.
"물론 그래야지요. 우리까지 보호하시려면 정파의 고귀하신 무림인들의 일이 많아지니 우리는 떨어져서 가지요."
슬쩍 비꼬는 말투를 구사하는 소천악을 외면하며 가슴속에 진심을 드러내는 진 장로였다.
"그건 그렇다 하고 대주에게 물을 게 있소이다."
"말씀하시지요."
"대주는 금위대 대주이기 전에 강호인으로 알고 있소. 그냥 강호인도 아니고 신의괴협이라는 명예로운 별호도 가진 분이신데 어찌 사존맹이나 집마부 같은 사마외도와 함께 횡보하는 것인지 참으로 우려가 되오."
돌려 말하지만 사마외도와 어울리는 소천악이 못마땅하다는 걸 내비치는 그를 보며 소천악은 가소롭기 그지없었다. 당연히 그의 준비된 답변이 일목요연하게 터져나왔다.
"사람은 있는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야 하는 법이라 배웠습니다. 이번 천축행에서는 보다 많은 고수가 있을수록 유리하다는 걸 모르시지는 않겠지요? 대사를 함에 있어 사사로운 일은 미뤄야 할 거로 압니다만……."
"크흠!"
마음이 불편한 듯 헛기침만 연발하는 진 장로를 보며 소천악은 말을 이었다.
"일단 전 사신단과 상단을 호위하는 총책임을 맡은 위치에서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명리에 사로잡혀 대업을 실패하는 우는 범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사마외도는 전통적으로 믿을 수 없소이다. 그 점을 항상 신경 써야 할 것이외다."
"진 장로님의 말씀은 폐부에 새기고 늘 조심하겠습니다."
소천악은 마지막까지 강호 선배로서 깍듯하게 진 장로를 대함을 잊지 않았다. 그 점이 나름 만족스런 진 장로는 더 이상 추궁하지는 않았다. 더 해봐야 이미 시작된 일을 멈추기도 어렵다는 걸 모를 정도로 강호경험이 적은 그가 아니다.
"그렇게 이해해주시니 고맙소. 그럼 나머지 문제에 대해 토론하도록 합시다."
"그러시지요."
하지만 소천악은 이어지는 회의에 그저 딴생각만 하면서 건성으로 듣는 척만 했다. 어차피 그는 이 회의에서 철저한 이방인이자 따돌림의 대상이었다. 정파 무림인들의 구미에 맞춰 결정은 진행되었고 누구 하나 소천악의 의견을 묻는 이도 없었다.
소천악은 편협한 정파인의 시각을 피부로 절실히 느끼는 걸로만 만족했다. 그들은 자기 식구가 아니면 무리에 끼여주는 것조차 거부하는 철저히 배타적인 속성을 지닌 이들임을 직감했다.
지루한 회의가 끝나자 바로 돌아온 소천악은 책사들과 혈살막주를 불렀다. 바로 정파 무림인들의 결정 사항을 아주 불만스럽게 설명했다.
"듣자하니 아주 가관이오. 사신단과 자기네 상단만 호위하겠다는 의지가 아주 철철 넘치더이다. 이번 일은 조금 어려운 듯하오. 이례적으로 이번 사신단을 천축 무림인들이 공격한다 하오. 뭐, 포달랍궁이 가장 먼저 공격해 올 모양입니다."
"헉! 포달랍궁!"
기겁을 한 혈살막주의 외침이 들려 돌아보자 이미 그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갔다.
"아니, 왜 그리 놀라시오?"
"대주님! 포달랍궁은 절대 만만한 방파가 아닙니다. 천축제일문이라 일컬음을 받는 세외에서도 알아주는 거대문파지요. 게다가 그들이 쓰는 각종 무공은 그 위력이 뛰어나 중원에서도 두려움의 대상입니다."
"골치 아프군요. 제길, 도대체가 쉬운 일이 없네요."
눈살을 찌푸리며 짜증난 말투를 뱉어내는 소천악을 보며 수석책사 심자앙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너무 심려 마시지요. 이미 우리 책사들이 머리를 짜내 모든 정황을 파악해 그에 걸맞는 전략을 수립해 놓았습니다."
"오호, 그래요?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입니다. 그래, 어떤 병법을 연구하셨는지요?"
얼굴 가득 반색을 한 소천악의 질문에 심자앙이 밤새 연구한 전략을 하나하나 설명했다. 설명이 끝나자 소천악의 얼굴이 환히 밝아졌다.
"그런 묘수가! 역시 책사님들의 지혜는 놀랍습니다."
과찬을 거듭하자 심자앙 등 책사들의 얼굴이 쑥스러움과 자부심으로 빛났다. 그렇게 회의가 끝나자 혈살막주와 함께 자리한 소천악이 넌지시 물었다.
"종 막주님! 천축에서 가장 신성시하는 곳이나 사람이 누굽니까?"
"음, 제가 알기론 천축인들은 불교를 믿어 불상을 소중하게 여긴다고 합니다. 그들이 존경하는 사람은 승려 중에 이름난 자지요. 아마 그중 으뜸은 생불이라 일컬음을 받는 포달랍궁의 궁주인 달라이라마일 겁니다. 그런데 그건 왜 물으시죠?"
"아! 아닙니다. 그저 궁금해서요."
얼른 얼버무리는 소천악을 보며 의심스런 시선을 보내던 종 막주는 이내 관심을 거두었다. 별다른 일이야 있겠냐는 기분이었다.
모든 인물들이 군막을 떠나 각자의 숙소로 돌아가자 소천악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눈빛을 번쩍였다. 그 흉중에 든 마음은 아직까지는 아무도 몰랐다. 손에 든 검을 빼어 들어 예리하게 살펴보던 그는 곤한 잠에 빠져들었다.
소천악은 다시 종천리 막주에게 다가왔다.
"막주님! 지금 낭인무사들과 흑마전 고수들은 모두 얼마나 됩니까?"
"낭인무사가 삼백인데요, 점점 합류하는 이가 늘고 있소이다. 대부분 일류를 상회하는 무공을 지녔습니다. 아무래도 이번 원정의 위험성을 알고 이류고수들은 회피한 듯합니다. 흑마전에서는 일류고수 이십여 명을 비롯한 총 이백여 명이 왔소이다."
"그러면 모두 오백이군요. 뭐 그 정도면 지원 역할은 충분히 할 듯합니다. 이제 혈살막 살수분들께서 할 일이 많습니다. 어제 말한 대로 움직여주시길 바랍니다."
"이미 어젯밤부터 모두 앞에 나가 적의 동태를 살피고 있습니다. 적의 매복을 암호로 알리라고 했소이다."
"오! 그런 수고를. 역시 혈살막이 최선봉이군요. 수고가 많아요. 살수들에게 그들 뒤에는 암암리에 보호하는 사존맹과 집마부의 고수들이 있다는 걸 인식시켜 주세요. 한결 마음 편하게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을 겁니다."
진심으로 격려하는 말에 막주의 어깨가 절로 들썩였다.
"하하! 이렇게 할 수 있다니 기분이 좋습니다."
"살수님들의 인명 피해가 적어야 할 텐데요. 걱정이 됩니다."
"어차피 청부에 나가면 죽을 각오로 가는 겁니다. 벌써 선금으로 청부금을 주셔서 각자 필요한 곳에 쓰고 왔으니 미련 없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