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천악 82화
무료소설 소천악: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95회 작성일소설 읽기 : 소천악 82화
"오! 그런 방법이."
소천악이 금방 악관필의 말뜻을 알아차리고 탄성을 질렀다. 그제야 빠져나갈 방법을 찾은 그가 희색을 띠며 좋아하자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던 악관필의 말이 이어졌다.
"이런 단순한 친구 같으니라고. 권력이란 비정한 거야. 막말로 황제의 자리를 위해 친혈육도 눈 한 번 깜짝하지 않고 죽여야 하는 게 황제란 자리야. 생각해 보게. 지금 자네 신분에 황제의 말을 거역하고 무사할 성싶은가?"
"그건 그렇죠."
시무룩하게 소천악이 대꾸하자 다시 설득은 시작됐다.
"황제의 체면에 손상이 가는 일은 애당초 시작도 하지 않는 게 나름대로 황궁의 법도일세. 황제 폐하께서 말씀하신 제안을 일단 받아들이게. 그 다음 일은 서로 상의하며 현명한 방법을 연구해 보세나."
"잠시 저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십시오."
"그러게! 너무 오래 생각하지는 말게나. 황상의 말대로 하루를 줄 테니 부디 현명한 판단을 내리게나."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아침 일찍 다시 오지요."
감사의 인사를 한 후 소천악은 얼굴에 먹구름을 드리운 채 하오문을 찾아갔다. 아무래도 정보가 밝은 곳이 유리하다는 생각이었다.
자세한 내막을 들려주자 곡소량 지부장의 얼굴은 새하얗게 변해갔다. 이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아차 잘못 조언하면 함께 역적으로 몰릴 판이다. 살 떨리는 지부장의 심정과 상관없이 소천악의 질문이 이어졌다.
"지부장, 이런 경우 좋은 방법이 있겠소?"
"하셔야 합니다. 이건 피할 길이 없다고 보입니다."
필사적으로 권유하는 곡 지부장의 가슴은 시퍼렇게 멍들어만 갔다.
"제길! 이익이 없어요. 그 먼 길을 갈 생각 하니 짜증도 나고. 확 도망가 버릴까요?"
"안 됩니다."
거의 비명처럼 외치는 곡 지부장의 목소리는 방 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아니, 왜 그리 큰 소리는 치고 난리입니까?"
의심스럽다는 듯 쳐다보는 소천악을 보며 실수를 느낀 곡 지부장이 급히 머리를 굴렸다. 소천악이 전해준 말에서 무언가를 찾아 헤매던 그의 눈빛이 번쩍였다.
"소 소협! 이건 기회입니다."
"기회는 무슨 기회입니까? 고생문이 훤히 열린 거지요."
"아닙니다. 생각해 보면 좋은 일입니다. 분명히 사신단 이외의 상단이 간다고 했잖습니까?"
"그랬죠."
떨떠름한 기분으로 대답하는 소천악을 보며 여유 있게 웃은 곡 지부장이 말했다.
"어차피 가는 상단에 호위책임을 맡은 소 소협이 따로 상단을 꾸미는 겁니다. 이거 대박나는 사업입니다."
"응! 그런 게 있나요?"
"물론이죠. 잘만 하면 이번 한 건으로 소 소협은 중원에서 내로라하는 거부대열에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음, 듣고 보니 그럴듯하네요. 좀더 깊이 있게 대화를 나눠봅시다. 이거 원, 머리 쓰는 건 딱 질색이라서요."
뻔뻔하게 말하는 소천악의 입을 확 뭉개버리고픈 곡 지부장이나 마음뿐이었다. 언감생심 꿈도 못 꾸고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톨톨 털어낼 수밖에 없었다.
이튿날.
다시 대장군가를 찾은 소천악은 일사천리로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어제 악관필 대장군의 말을 들으니 어차피 거부하기는 힘든 입장이었다. 그럴 바에는 명을 받드는 척하며 실리를 챙기는 편이 훨씬 낫다는 판단을 내렸다.
"대장군님의 말씀대로 하기로 했습니다. 일단 폐하께 가시지요."
"그래, 잘 생각했네. 진작 이리 나왔으면 편하고 좋았을 것을. 하나 남자로서 자네의 패기는 높이 사는 바일세."
전형적인 무장답게 소천악의 의기에 감탄하는 악관필이다. 하나 그가 모르는 사실이 있었으니 왕자의 나이에 민감한 소천악의 마음이다.
다시 건성제 앞에 선 소천악은 한결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황제 폐하의 뜻을 따라 명하신 일을 최선을 다해 수행하겠습니다."
"오, 장하다. 진작 이랬으면 얼마나 보기 좋았느냐!"
얼굴 가득 흐뭇한 기색을 드러낸 건성제였다. 눈으로 본 소천악의 무공은 자신의 상상을 초월한 놀라운 경지였다. 이제 저자가 자신의 명에 따라 움직인다 하니 벌써 모든 일이 풀린 듯한 기분이다.
그런 건성제의 마음을 어느 정도 눈치챈 소천악은 미리 생각한 대로 자신의 요구사항을 말했다. 간이 부어도 엄청나게 부어 있는 행동이지만 꼭 필요하다는 판단에 서슴없이 입을 열었다.
"먼저 아뢸 건 과연 저와 함께 갈 병사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요?"
"일단은 이천 명의 정예병이 따라갈 것이다. 길이 멀고 험해 특별히 많은 병사를 선발할 생각이니라. 더불어 무당파를 비롯한 정파 무림인들도 짐의 뜻에 따라 나중에 변경 지역에서 호위대열에 합류한다는 연락을 받았느리라."
"정파 무림인들이 합류하면 더 편하지요."
건성제의 대꾸에 바로 말을 잇는 소천악이다. 정파 무림인이 오든지 말든지 별 관심사는 아니었다.
"잘해야 한다. 우리 대당제국의 위신이 걸린 일이니라."
"그러기 위해선 우선적으로 필요한 게 있습니다. 천축 여행에 필요한 말 사천 필과 충분한 여유 자금이 필요합니다. 때문에 기본 자금을 일단 충분히 주시어 사신단과 상단 호송에 여유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주겠노라."
"그리고 한 가지 더 있사옵니다. 어차피 국가에서 움직이는 상단의 수입은 황제 폐하께 바쳐야 하오니 개인적으로 상단을 데려가게 윤허하시옵소서."
가만히 듣던 건성제는 별 생각 없이 대답했다. 내심 데려가면 얼마나 데려가겠냐는 가소로운 생각이다.
"그러거라. 이번 사신행에 상단을 데려가는 걸 허락한다. 그리고 무슨 말이 사천 필이나 필요하단 말이냐?"
"워낙 장거리 여행이기 때문에 도보로 움직이면 어렵습니다. 여분으로 한 필씩은 가져야 합니다. 자금은 일단 충분해야 필요할 일이 있을 때마다 적절히 사용할 수 있사옵니다."
맹랑하다면 맹랑한 요구에 절로 울화가 치미는 건성제였지만 나중을 생각해서 일단 꾹 참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윤허한다. 말을 주고 은자 오십만 냥을 여행경비로 주겠노라. 더불어 그대에게 황제를 지키는 금위대 대주의 지위를 내리노라. 직위가 있어야 통솔도 되는 법이니 여러 소리 하지 말거라."
"감사하옵니다. 그럼 그걸 글로 적어주시옵소서. 아무래도 그 일을 하려면 황제 폐하의 친서가 있어야 대신들이 별말 없이 따를 것이옵니다."
"오, 그런가? 하긴 그렇지. 알겠노라. 짐이 바로 적어주겠노라."
말에 일리가 있다고 본 건성제는 지필묵을 가져오라 한 후 종이에 일필휘지로 소천악의 바람대로 적어주었다.
<짐은 이번 천축 원정에 있어서 소천악 금위대 대주가 호위에 대한 모든 지휘권을 가지고 있다는 걸 증명하노라. 이 명을 어기는 자 모두 역적으로 간주하고 구족을 멸하리라.
건성제 서(書)>
칙서를 공손히 받은 소천악은 다시 입을 열었다.
"또 하나의 청이 있사옵니다. 소인의 나이 이제 약관입니다. 이 나이에 아무리 고강한 무공이 있다 한들 병사들이 저를 충심으로 따를 리가 만무합니다. 소신의 나이 어린 걸 빌미로 혹여 반발이라도 일어난다면 자중지란의 어려움이 따를 것이옵니다."
"흠, 그런 문제가!"
예리한 지적에 건성제가 수긍하는 모습을 보이자 빠르게 말을 이어가는 소천악이다.
"그래서 제가 생각한 것이 있사옵니다. 앞으로 저의 나이를 25살로 올려 모든 대신에게 말해 주십시오. 적어도 그 정도라면 조금 빠르게 출세한 자로서 시기심은 일지언정 자중지란은 어느 정도 막을 수 있다고 사료됩니다."
"흐음, 그렇게 하라. 그대의 말대로 해주겠노라."
시원시원하게 대답하는 듯한 건성제였지만 내심 깜짝 놀란 터였다. 말하는 그의 안색이 가볍게 변했다. 천둥벌거숭이로만 알았던 저놈이 나름대로 머리를 쓰는 걸 보고 다시 한 번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건성제였다.
그 후 세부적인 사안에 대해서 한동안 건성제와 소천악 간의 깊은 대화가 오고 갔다. 황제는 물론 옆에서 듣던 악관필대장군마저 깜짝 놀랄 비책이 쏟아져 나오자 당혹감을 감추기 힘들었다.
무(武)만 아는 무식한 놈이 아니란 걸 뼈저리게 느낀 건성제와 악관필이다. 그 모든 것이 다 혈사부의 명저인 독행강호주유기에 실린 조언이란 걸 알지는 못했다. 독행강호주유기는 머리 쓰는 걸 별로 즐기지 않는 소천악으로선 천군만마 같은 책이었다.
이야기가 대충 정리되자 나름대로 만족한 건성제가 미소를 지으며 명했다.
"이제 소 대주는 속히 떠날 준비를 갖추는 데 만전을 기하라. 정확히 삼십 일 후에 사신으로 임명된 관무평과 함께 출발해야 한다."
"명에 따르겠습니다. 이번 한 번으로 황궁에서의 일을 마무리하는 걸로 백성의 소임을 다했다는 폐하의 말씀을 믿겠사옵니다. 다시는 미천한 평민이 황궁의 일에 관여하는 어려움이 없기를 바라옵니다."
태도를 바꿔 공손하게 대답하는 소천악의 자세는 황제를 대함에 한 치의 소홀함도 없어 언제 대들었을까 하는 의구심마저 일 정도였다. 그 완벽한 변신에 건성제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커험! 알겠노라."
"그럼 물러가겠나이다."
절하고 방을 나서는 소천악의 기감에 밀위들의 적의 어린 기세가 밀려왔으나 싹 무시하고 황궁을 천천히 걸어 빠져나왔다. 뒤통수가 따금거렸지만 그들이 쉽게 발작할 입장이 아니란 걸 모를 정도는 아니다.
귀찮은 일에 얽힌 아쉬움이 남았지만 나름대로 수확이 있는지라 엷은 미소를 지으며 부지런히 걸음을 재촉했다.
소천악과 악관필이 떠난 후 건성제는 조용히 밀위를 불렀다.
"너는 지금 가서 무당파의 진여해(眞餘海) 장로를 만나 짐의 의중을 전하거라. 이번에 호위대장으로 임명된 소천악이라는 자를 이용할 대로 이용한 후 틈을 봐서 소리 소문 없이 제거하라고 지시하거라."
"네, 폐하!"
밀위는 동료의 죽음으로 격분한 상태였으나 건성제가 이리 명하자 내심 기쁨이 차올랐다. 복수의 칼을 들이대는 짜릿한 기분에 만족스런 미소가 절로 피어났다. 오랫동안 생사고락을 함께한 밀위의 죽음은 그의 눈에 독기를 서리게 만들었다.
"짐은 정파 무림인의 힘을 믿노라고 꼭 전하거라."
"존명! 황상의 명은 죽음으로!"
낮은 복명 소리와 더불어 밀위가 사라지자 건성제는 앞에 놓인 용정찻잔을 바라보며 광기에 찬 눈빛을 번뜩였다.
"황제를 능멸하는 자는 그 재주와 상관없이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걸 보여주마."
태도가 돌변한 황제의 얼굴에는 짙은 살기마저 감돌았다.
황제의 분노를 한몸에 받는 영광(?)을 누린 소천악은 다시 하오문을 찾아가 곡소량 지부장과 단독면담에 들어갔다. 정보에 둔한 그로서는 하오문의 존재가 참으로 귀중했지만 당하는 곡소량은 죽을 맛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 괴롭히는 통에 통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물론 그 혁혁한 악명에 오금이 저려와 내치지도 못한 채 고통스런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곡 지부장님! 부탁 좀 하겠소이다."
"말씀만 하십시오. 제 능력, 아니 우리 하오문이 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지 다 들어드리지요."
어쩔 수 없이 호쾌하게 나오는 곡 지부장을 보며 그 내막을 어느 정도 짐작한 소천악이 느긋하게 부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