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천악 78화
무료소설 소천악: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10회 작성일소설 읽기 : 소천악 78화
이십 개의 검은 사전에 약속이라도 한 듯 소천악의 머리와 가슴 그리고 다리를 노리고 팽이처럼 거세게 회전하며 금방이라도 소천악을 꼬치로 만들 기세였다.
"오호! 보아하니 합격술만 한 몇 년 고련한 흔적이 보이오이다. 어쩌겠소이까? 그 노력이 오늘로 끝나게 되니 황천에서 못다 한 합격술 마저 익히시구려."
같잖다는 듯 비웃으며 손에 든 검이 서서히 움직이나 싶더니만 어느새 간결하고도 파괴적인 속도로 복면인의 검들을 마주쳐 갔다.
챙! 챙! 챙!
어지러울 정도로 검과 검이 마주치는 청량한 소리가 마치 한 번처럼 들렸다. 찰나에 소천악의 검은 이십 개의 검의 진로를 가볍게 툭툭 쳐 방향을 어긋나게 했다. 필생의 공력으로 찔러온 검은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며 슬쩍 튕겨준 소천악의 검초에 의해 목표를 잃고 우왕좌왕이다.
순간 소천악의 눈이 번뜩였다. 스치는 바람처럼 그의 신형이 표표히 복면인 사이를 유유히 헤쳐나갔다. 바로 옆을 스쳐 가는 걸 보고 복면인들이 도륙내려 검을 돌리면 어느새 이 장 밖에 보이니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분기에 막 소리치려던 복면인들은 가슴에서 올라오는 격통에 놀라 내려다보곤 비명이 절로 나왔다. 어느새 가슴이 길게 베여 피가 흘러나왔다.
"크억! 가공할 쾌검이다."
그 한마디가 살아서 내뱉은 마지막 음성이었다. 복면인들은 놀라 서둘러 검을 풍차처럼 휘둘러 검막으로 방어에 나섰지만 별무소용이다. 검막을 검끝으로 살짝 흔들며 몸을 베어가는 소천악의 살검을 막기는 역부족이다.
점점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비명이 커져만 가며 이십 명의 복면인 중 벌써 열 명 이상이 땅에 쓰러져 죽어갔다. 살아 있는 자들도 바람의 공포를 뼈저리게 느끼며 얼른 뒤로 한 걸음 물러서려 했다.
"늦었소이다. 검을 들고 공격한 이는 모조리 황천길이오."
마치 저승사자의 선고가 내려진 듯 소천악의 살검은 그칠 줄을 몰랐다. 이윽고 이십 명의 복면인이 전부 시체로 변하고 나서야 검을 거두며 제자리에 선 소천악이다.
장내는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크게 들릴 만큼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조장을 비롯한 복면인들은 물론 혈살막의 살수조차 전율에 몸을 떨어야 했다. 소문은 절대 과장이 아니었다. 오히려 소문이 훨씬 인간적인 측면이 있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자, 더 하신다면 사양하지는 않겠소이다."
차갑게 말하는 소천악의 목소리에 조장은 흠칫 몸을 떨어야 했다.
"이럴 수가!"
놀란 목소리로 말하는 조장은 이미 판단이 섰다. 저자는 자신들이 감당할 고수가 아니었다. 차륜전이 통할 인물도 아니고 더 이상 싸워봐야 남는 건 땅 위에 엎어진 자신들의 시체 더미뿐이란 걸 모를 리 없었다. 참담한 심정인 그의 귀에 소천악의 목소리가 들렸다.
"더 이상 힘없는 분들을 죽이고 싶지 않소이다. 지금 여러분들을 모조리 죽인다 해도 또다시 다른 분이 오겠지요. 그때마다 모두 죽이면 죽는 분만 억울하지요.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맹목적으로 덤비다 죽는 꼴이 나겠지요. 내가 노리는 건 당신들을 보내신 그 잘난 윗분들이지요. 가서 전해주시오. 이 은혜 나중에 꼭 이자 톡톡히 쳐서 갚아드리겠다고."
할 말을 다한 듯 돌아서는 소천악을 보며 금방이라도 갈아 마시고픈 마음이야 굴뚝이지만 실력으로 해볼 상대가 아니다.
"가자, 청산이 푸르른 이상 이 원한은 꼭 갚아… 크악!"
한 서린 목소리로 말하던 조장이 비명을 질렀다. 이미 그의 목에는 시퍼런 비도 하나가 손잡이까지 박혀 있었다. 고통에 떨며 온몸을 부르르 떠는 그를 차가운 시선으로 노려보는 소천악이다.
"복수를 앞에서 다짐하시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소이다. 면전에서 날 죽이겠다고 설치는 분을 살려드릴 정도로 인정이 많은 편이 아니외다."
소천악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조장은 싸늘한 시체로 변해 땅바닥을 굴러다녔다. 바라보던 소천악이 다시 복면인들을 쏘아보며 말했다.
"어서 시체를 챙겨 물러나시지요. 이 사람 마음이 변하면 여러분들 모두 저 꼴이 될 겁니다."
복면인들은 잠깐 눈치를 보다가 얼른 동료의 시체를 짊어지고 서둘러 분분히 신형을 날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흘낏 그들을 바라본 소천악의 눈길이 다시 혈살막의 살수들을 지나 종천리에게 날카롭게 박혔다. 얼마나 눈길이 강렬한지 마주친 종천리의 눈빛이 거세게 흔들렸다.
"자, 이제 우리의 계산이 남았지요? 한마디만 합니다. 저들은 내가 보기에는 나를 죽이라 청부하고 이제는 입을 막으려 막주님과 살수 분들을 죽이려 했던 걸로 보입니다."
"흠!"
별다른 변명거리가 생각나지 않는 듯 종천리 막주가 침음성을 토했다.
"처음엔 말만 해주시면 그냥 가고 아니면 모조리 죽이려 했소이다만 이젠 그럴 필요도 없을 듯하오이다. 대신 처리해줄 분들도 계신데 일부러 손에 피를 더 묻힐 필요야 있겠습니까? 잘 생각해 보시구려."
소천악은 아픈 데를 푹 찌르고는 말없이 몸을 돌려 사라지려 했다.
"잠시만 기다려주시구려. 저와 방으로 가서 이야기를 나눠봅시다."
급하게 만류하는 종천리의 말을 듣고 회심의 미소를 짓는 소천악이다. 일종의 격장지계가 제대로 통했다는 기분이었다.
잠시 후 다시 막주의 방에 마주 앉은 두 사람은 처음엔 어색한 침묵만이 조용히 흘렀다. 몇 번이고 머뭇거리며 망설이던 종천리가 마침내 결정을 내린 듯 입을 열었다.
"죽이려는 자는 오히려 도와주고 한편인 줄 알았던 자들은 우리를 죽이려 하니 세상사가 기묘하오이다."
"그게 인생이라고 누군가가 말합디다."
인생 달관한 듯한 소천악의 대꾸에 나오는 그 누군가는 물론 혈사부였다.
"그런 거 같소. 일단 우리 혈살막을 도와주셔서 고맙소이다. 그리고 살인청부로 괴롭히게 된 점 진심으로 사과드리오이다."
"다 지난 일이지요."
너그럽게 말하는 소천악이다. 이제야 왈가왈부할 일은 아니었고 더 중요한 목적이 있는 이상 그 정도는 흔쾌히 잊어버리겠다는 의지를 보여줬다. 더욱 마음이 놓인 종천리의 다음 말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그리 생각하시면 저도 마음 편하게 넘어가지요. 자, 이제 궁금한 걸 말씀드리지요. 아까 온 자들의 정체는."
순간 말문을 닫은 종천리였다. 아무래도 그 다음 말을 하면 자신들의 생명에 위협이 된다는 걸 모를 리 없지만 어차피 제거 대상에 들어간 이상 발악하는 기분으로라도 말하고픈 충동이 들어 바로 말을 이었다.
"아무리 봐도 그들은 몇십 년 전에 강호를 피로 물들인 혈교인들이 다시 강호에 나타난 거 같습니다."
"헉! 그 말이 확실하오?"
혈교라는 말에 혈사부의 당부가 뇌리를 스치는 소천악이다. 종천리는 그런 마음을 짐작도 못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살수문들은 청부에 항상 조심을 하기 때문에 제거 대상의 무공내력 등을 유심히 살펴보고 대대로 기록하지요. 물론 그 과정에서 가능한 한 청부인의 신상이력도 알아봅니다. 그 기록에 봐도 혈교가 거의 확실합니다."
"음!"
약간 충격을 받은 소천악이다. 두렵다기보다는 강호에 오자마자 성가시다는 혈교와 은원을 맺은 게 마음에 약간 걸려 왔다. 혈사부의 충고를 정면으로 거부한 셈이다. 하나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저들이 먼저 건드린 걸 생각하니 오히려 마음이 가라앉았다. 오는 적 마다하지 않으리란 결정을 단숨에 내린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올 테면 오라 그래요. 절 건드리는 놈은 기둥뿌리가 뽑힐 각오를 하고 덤벼야 할 겁니다. 혈교고 나발이고 그냥 박살을 내버릴 겁니다."
"헉! 소 소협! 혈교가 그리 만만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들이 강호에 나오면 명문대파도 숨을 죽였습니다."
"전 명문대파가 아니고 소천악입니다. 건드리면 죽음을 드리지요. 그리고 막주님도 어서 거처를 옮겨 저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시는 게 좋을 듯싶습니다."
"소협! 이런 말이 있지요. 적의 적은 친구라고. 그리고 우리가 소협을 공격한 건 원한이 아니고 이해타산인 걸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가만히 막주를 바라보던 소천악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맞는 말이지요. 사실 막주님과 같은 하늘을 보고 못 살 철천지원한이 있는 것도 아닌데 이쯤에서 우리의 은원을 접읍시다."
"고맙소! 그리고 소협에게 미안한 의미로 조촐하게 손해배상을 하고자 하오만."
"괜찮소이다. 그 일도 뭐 제가 가진 게 없을 때 궁여지책으로 한 방법이지요. 지금은 가진 거 쓰기도 바쁩니다."
"그렇다면 제안 하나 하겠소이다. 이제 우리 둘 다 혈교와 원한을 진 사이요. 같이 공조하며 살아가는 게 어떨지?"
조심스럽게 제안하는 종천리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던 소천악은 진심을 알아채고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이다. 뭐 한 손보다 두 손이 나을 테니까요. 일단 힘을 합치고 차차 이 은원을 풀 궁리를 해봅시다. 듣자하니 혈교 분들이 아주 질기기가 고래 힘줄이라 하니 더 귀찮은 일이 생기기 전에 좋게 좋게 해결하도록 해봅시다."
간단하게 정리하는 소천악을 보며 종천리는 감탄성을 토했다.
"역시 소협은 호탕하기가 이를 데 없군요."
"호탕은요. 아무리 고민해도 안 풀릴 일은 그저 물 흐르듯이 지켜보는 게 상책이지요."
"역시! 이제 소협은 어디로 가실 겁니까?"
"팔자에 없는 황궁 나들이를 먼저 할 판입니다. 우선 황도가 있는 장안성으로 갈 예정입니다."
가만히 듣던 종천리는 아무래도 강한 무공을 지닌 소천악의 근처에 있는 편이 훨씬 유리하다는 판단이 들자 체면 불고하고 넌지시 제안했다.
"불편하지 않으시면 같이 가도록 하시죠. 우리가 가진 돈이 조금 있으니 황도에 가서 자리를 잡고 혈교와의 문제를 해결할 시간을 벌도록 하겠습니다."
내심 간절함이 가득한 종천리의 말투에 별다른 거부반응 없이 바로 대꾸하는 소천악이다.
"편한 대로 하시지요. 자, 그럼 먼저 갈 테니 따라오시려면 알아서 하시지요."
"허허! 그럼 황도에서 뵙지요. 일을 마치시면 사람을 보내 초대하지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한 소천악은 자세한 세부적인 방안에 대해 심도 깊게 이야기를 나눈 후 조용히 방을 나서서 객잔으로 돌아갔다.
제3-3장 황제와의 단판
이미 날이 거의 새려 하는 시간인데도 좌냉추는 방 안 의자에 흔들림 없이 꼿꼿하게 앉아 있었다.
"다녀왔소이다."
"일은 다 해결했소이까?"
"말미를 주신 덕분에 끝냈습니다."
"그럼 이제 바로 출발하시지요. 황녀 마마는 물론 황제 폐하께서도 기다리고 계시니 서둘러야 합니다."
어차피 잠도 안 오는 판이라 별 저항 없이 소천악이 고개를 끄덕이자 바로 행장을 꾸린 좌냉추와 함께 다시 황도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물론 암암리에 종천리를 비롯한 혈살막 살수들이 주위에서 맴돌며 따라오는 걸 느낀 건 오로지 소천악뿐이다.
떠나오자마자 다시 돌아가야 하는 그의 기분이 그다지 좋을 리 없었다. 내심 약속을 어긴 주청령에게 이가 갈렸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다시는 여자의 감언이설에 속지 않으리라 굳게 다짐하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