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천악 75화
무료소설 소천악: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69회 작성일소설 읽기 : 소천악 75화
"알겠다. 네 의형이니 내 신경 써서 처리하마."
부자는 의외의 사태에 앞으로의 추이가 어찌될지 아리송한 기분으로 침묵만 지켰다. 특히 나름대로 소천악을 알고 있는 악천소의 걱정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커져만 갔다.
제3-2장 죽이느니 얻는다
자신을 두고 황궁 한편이 시끄러운 줄은 꿈에도 모르는 소천악은 길을 재촉했다. 복수의 혈안을 품고 움직이는 그의 주위에는 왠지 모를 찬바람이 흘러나왔다.
한참을 걷다 보니 시장기가 돌아 잠시 관도 옆에 나무그늘에 자리를 잡고 준비한 말린 고기를 천천히 씹어 삼켰다.
오복 중에 하나인 식도락을 즐기던 그에게 불청객이 소리 없이 찾아왔다. 다가올수록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거지였다. 코를 킁킁거리며 옆에 선 그는 사십대의 중년 거지였다.
"이보게, 사해가 동도이니 말린 고기를 나눠 먹을 수 있겠나?"
한 거지가 다가와 넌지시 말하자 대번에 입 냄새가 코를 찔렀다. 소천악이 조금만 비위가 약했다면 입에 있던 고기를 토할 뻔했다.
눈살이 저절로 찌푸려진 소천악은 고개를 들어 쳐다보았다. 한눈에 보기에도 예사 거지는 아니었다. 시선을 아래로 내려다보자 아니나 다를까 개방도의 상징인 매듭이 허리춤에 네 개가 꼬여 있었다. 매듭 수를 볼 때 최소한 일 개 성의 개방지부장임이 분명했다. 예측대로 그는 황도인 장안성 지부장인 구지신개 나지문(羅志雯)이었다.
시비를 붙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는 소천악은 상한 기분을 애써 달래며 말했다.
"드릴 테니 저기 멀리 떨어져서 드시지요."
"무엇이? 지금 소협이 우리가 거지라고 능멸하는 것이냐?"
버럭 화를 내는 나지문을 보고 이미 비위가 틀린 소천악의 입에서 좋은 말이 나올 리 없었다. 같이 화를 내려다 꾹 참고 천천히 대답했다.
"이보시오, 얻어먹으려면 기본적인 예의를 지켜야 하는 게 아니겠소? 냄새 때문에 내가 먹지를 못해 양해를 구한 건데 이리 화를 내시니 난감하오이다."
"네 이놈! 불쌍한 거지를 보고 동정심은커녕 비루먹은 강아지 취급을 하다니!"
"이런, 무슨 불쌍한 거지 분이 이리 고함을 치며 겁박을 다 한답니까?"
"무엇이라고! 이놈이 이젠 말장난까지 치려는 것이냐?"
막무가내로 핍박하는 나지문을 보자 참으려던 마음이 벌써 오간 데 없이 사라진 소천악이다. 이미 심기가 상한 그의 눈빛이 서서히 묘한 빛을 밝히며 스산하게 말했다.
"지금 일부러 시비를 건다는 생각인데 제 생각이 맞습니까?"
나지문은 순간 섬뜩했다. 사실 그는 이번 개방 총 모임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이번엔 다섯결 제자로 승격되리라 철석같이 믿었건만 영문 모르게 좌절되어 기분이 상할 대로 상한 상태였다. 돌아오는 길에 소천악을 만나 고기 좀 얻어먹으려다 면박을 당하자 분기탱천하여 폭발한 터였다.
게다가 처음 보기엔 닭 잡을 힘도 없어 보인 터라 심술을 부렸다. 수그러들 줄 알았던 소천악이 의외로 강단을 보이며 감당하기 힘든 기세를 드러내자 내심 잘못 건드린 게 아닌가 하는 작은 후회도 들었다.
하지만 천하의 개방도였다. 그의 뒤에는 오만여 명의 개방도가 버틴다 생각하니 절로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시비라고 했느냐? 좋다. 시비라면 네놈이 어쩔 생각이냐?"
"좋게 말씀드릴 때 그냥 가시지요. 더 이상 반말에 욕지거리를 감당할 자신이 없소이다. 나이 들어서 젊은이에게 당하고 후회 마시고 좋은 말할 때 가던 길 편히 가십시오."
최대한 예의를 갖춰 말하는 소천악의 속은 부글부글 끓었다. 개방도와 시비가 붙어 좋을 일이 없다는 혈사부의 말대로 참을성을 발휘하는 중이다. 하지만 재수가 없는 것이 나지문의 태도가 변할 낌새가 전혀 없었다. 그런 소천악의 심정은 전혀 모른 채 나지문은 점점 목소리를 높였다.
"이놈이, 감히 선배를 핍박해?"
"나참! 어디로 붙은 선배이오니까? 내 사문에 귀하 같은 사백이나 사숙은 없소이다만."
더 이상 참기를 포기한 소천악의 입에서 슬슬 시비조의 말투가 나왔다.
"이런 못 배워먹은 놈!"
"풋! 더 이상은 참기가 어렵군요."
섬뜩한 안광을 뿜어내며 소천악이 서서히 몸을 일으켜 걸음을 옮겼다. 사실 이 정도면 많이 참은 편이다. 주청령 사건이후 인내심으로 버티다 둑이 무너지듯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네놈이 안 참으면 어쩌겠다는 것이냐? 내 오늘 하늘 높은 줄 알려주마. 네놈에게는 죽장도 아깝다. 아주 주먹으로 짓이겨주마."
한차례 싸움을 피할 길이 없다는 걸 느낀 나지문이 서서히 쌍장을 들어올렸다. 이미 그의 다리는 개방의 절기인 취선보를 시전해 비틀비틀거리며 움직였다. 느릿느릿 다가오는 듯했지만 어느새 코앞에 다가와 두 손을 휘저으며 소천악의 팔과 다리를 순식간에 때려왔다. 철천지 원수도 아닌 다음에야 대뜸 살수를 쓸 나지문은 아니었다. 실은 그게 행운이었다.
"오호! 한가락 하시는군요. 하지만 그 정도론 아니 되오이다."
옅은 냉소를 뿌리며 소천악의 신형이 보법으로 슬쩍슬쩍 이동해 헛손질을 유도했다.
"엉! 이놈이 제법 한수 하는구나."
탄성과 함께 경각심을 높인 나지문이 슬쩍 몸을 날려 현란하게 발을 놀렸다. 연환퇴수법이었다. 그의 발은 정신없이 뻗었다 오므리며 소천악의 전신대혈을 핍박했다. 가만히 바라보던 소천악은 빙긋 미소를 지으며 벼락같이 손을 뻗었다.
가공할 경력을 실은 그의 손은 마주치는 나지문의 연환퇴를 산산이 부수면서 바로 가슴을 격타했다.
퍽!
"크어억!"
정통으로 가슴을 맞은 나지문은 하늘이 노래지는 고통을 느끼면서 이 장여를 날아가 땅에 쓰러졌다. 그나마 마지막 순간에 내력을 거둔 탓에 심한 내상은 피했지만 이미 저항할 능력은 상실한 터였다.
주위에 서 있던 개방 제자들이 놀라며 급히 타구봉을 들었다. 막 그들이 움직이려는 순간이었다.
"저분이 무기를 안 써 목숨은 거두지 않았소이다. 검사권생!"
담담하게 말하는 소천악을 바라보던 개방 제자들의 안색이 급변한 채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인상착의나 말투를 보면서 한 인물이 떠오른 개방 제자들이다.
"혹시 신의괴협이시오?"
"맞소이다. 소천악이라 하외다. 더 이상 시비를 피하고 싶으나 굳이 덤비시면 말리지는 않겠소이다. 단 무기는 버리고 오시길 바라오. 손에 든 이상한 막대기를 들고 오면 목숨을 보장할 수 없소이다."
"헉!"
놀란 개방 제자들은 얼른 타구봉을 뒤로 감췄다. 제아무리 개방이라 할지라도 현재로선 자신들의 저항은 바로 패배란 걸 모를 리 없었다. 지부장도 일 초에 쓰러진 판에 하물며 이결제자들인 자신들이 덤벼봐야 결과는 뻔했다.
"거기 누워 있는 양반은 별 내상은 없을 거외다. 다만 충격으로 기절한 것이니 어서 모시고 가시오."
그 말에 반색을 한 개방도들이 얼른 나지문을 들러업었다. 슬금슬금 물러서는 가운데 그 중 용기 있는 자가 외쳤다.
"개방은 결코 은원을 잊지 않는다."
"후후! 먼저 시비를 건 후에도 그런 말씀을 하신다면 할 말 없소이다. 단 다시 온다면 결코 자비를 구하지 마시오."
차갑게 대꾸하고 사라져가는 소천악을 보며 개방 제자들은 이를 갈았다. 자신들의 지부장인 나지문이 먼저 시비를 건 건 아예 안중에도 없었다. 감히 개방을 건드린 자의 최후를 보여주고픈 마음이었다. 이런 사소한 원한이 때로는 심각한 결과를 낳기도 하는 게 강호무림이다.
"두고 보자. 개방의 무서움을 곧 알게 될 거다."
"후후! 오시오. 먼저 잘못을 하고도 이리 나온다면 내 손속이 매섭다고 원망일랑 마시지요."
차갑게 말하자 개방 제자들은 소름이 돋는 기분에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좋게 식사하다 불쾌한 꼴을 당한 소천악은 식욕이 뚝 떨어졌다.
여정에 더 이상의 사소한 시비도 만들고 싶은 마음이 없던 소천악은 사람의 종적을 극도로 회피하면서 남하했다. 달포 남짓한 여로를 거쳐 드디어 절강성에 들어섰다.
하오문 지부를 찾은 그는 서둘러 혈살막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 갔다. 은밀한 살수집단답게 모든 건 철저히 비밀 속에 가려져 있었다. 하다못해 청부를 빙자해 만나려고 노력했지만 전혀 그 방법을 찾기도 어려웠다.
"빌어먹을 분들입니다. 두더지 님도 아니고 이리 숨는 데 도가 튼 분들도 드물 듯합니다."
"아무래도 비밀을 중요시하는 살수조직이라 숨는 데는 능할 겁니다."
투덜거리는 소천악을 보며 하오문 지부장인 남치우는 전전긍긍했다. 이미 하오문도 사이에서는 예의 바른 척하면서도 성질 더러운 소천악의 실체를 모르는 이가 없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우리 하오문에서 전력으로 그들을 찾고 있으니 곧 좋은 소식이 올 겁니다."
"남 지부장님! 지금 그 말 앵무새처럼 들은 지가 오 일이 지났습니다. 조금 미안한 생각이 없습니까?"
노화를 애써 누르며 침착하게 말하는 소천악의 말에 오금이 저려오는 남 지부장이다. 여차하면 지부를 때려 부수는 그 성질머리를 감당할 자신이 전혀 없었다.
"죄송합니다. 참는 김에 이틀만 기다려주십시오. 어떤 수를 쓰든 알아내지요."
"좋소이다. 딱 이틀입니다. 이틀이 지나면 제가 어떻게 변할지 모릅니다."
드디어 듣고 싶지 않은 협박이 나오자 절로 다급해진 남 지부장의 목소리가 떨려나왔다.
"하루만 더 주시지요? 아무래도 시간이 좀더."
"닥치시지요. 지부장님이라면 죽이려는 자를 두고 편하게 잠을 이루시겠소? 여러 소리 마시구려."
단칼에 잘라버리는 소천악의 말에 더 이상 할 말을 잊은 지부장의 얼굴은 시간이 갈수록 창백해져 갔다.
남치우 지부장을 공포에 몰아넣은 소천악은 여유 있게 객잔에 머물며 시간만 가기를 기다렸다. 사실 하오문을 아무리 핍박해도 안 나올 정보라면 포기하고 이번에는 개방을 들쑤셔놓을 생각이다. 다만 움직이는 말에 채찍을 때려 탄력을 붙이라는 독려 수준이다. 이런 소천악의 내심을 지부장이 알면 땅을 칠 일이다.
살수집단과 싸움을 눈앞에 둔 그는 명경지수(明鏡止水) 같은 평정심과 냉정함을 수련했다. 암습이 전문인 그들을 상대하려면 자신이 가진 장점을 최대화시키는 게 급선무였다. 객잔 방 안에서 무공수련 당시의 혹독함을 머릿속에서 연상하며 끊임없이 가상의 적들과 대결하는 상상을 펼쳐냈다.
가장 단순하고 위력적인 검법을 중점적으로 수련했다. 이미 경지에 이른 검술은 수련을 거듭할수록 몸에 느끼는 숙달감이 남달랐다.
이윽고 모든 수련을 마친 그는 벌써 삼 일이란 시간이 흐른 걸 알았다. 아직까지 하오문에서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아무래도 그들의 정보망에 혈살막이 걸려들지 않은 것 같아 영 기분이 개운치 않았다.
그때 방문을 두드리며 들어서는 남 지부장이 보였다. 녹초가 된 그는 흐느적거리는 얼굴이 누가 봐도 삼 일 내내 밤을 지새운 티가 역력했다
"남 지부장님! 보아하니 얼굴이 말이 아닙니다. 무슨 고민이라도?"
시치미를 뚝 떼며 말하는 소천악을 바라보는 지부장의 내심은 당장에라도 달려들어 속 시원하게 두들겨 패고픈 심정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무공에서 상대가 되지 않는 괴물에게 허튼수작은 바로 관 속으로 직행이라는 걸 모를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