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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천악 72화

무료소설 소천악: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934회 작성일

소설 읽기 : 소천악 72화

 

  "그럼 헛소문?"

 

  "당연하지요. 사실 내 일도 아니고 그냥 온 김에 처리하려는 거에 불과하오. 안 해도 그만인 일이지요."

 

  "그렇군요."

 

  한풀 꺾인 곡소량의 말에 내심 쾌재를 부르는 소천악이었다. 대장군가와 의형제란 왠지 득보다 실이 많으리란 계산이었다. 뭐가 아쉽다고 그런 인연을 맺는단 말인가!

 

  그저 악천수 혼자 마음으로 내버려두고픈 생각이었다. 괜히 끼어들었다가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리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자! 이제 전 가보겠소이다. 조 문주님에게 안부나 전해주시오."

 

  "그러지요, 그럼."

 

  짜게 받은 정보비 때문에 곡소량은 마음이 꼬여 시큰둥하게 인사를 받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소천악은 성큼 걸어 하오문을 나섰다. 이제부터 밤까지 잠시 쉰 후 일을 저지를 생각이었다.

 

  며칠 내로 악천수를 괴롭히는 이부인에 관한 일을 산뜻하게 처리하고 북경을 뜰 생각이었다. 그 후 혈살막을 지워야 했다. 자신의 목숨을 노린 곳을 방치한다면 또다시 누군가가 노릴 거란 예감이었다.

 

  일벌백계(一罰百戒)의 무서움을 보여줘야 다시는 이런 일이 없으리란 판단이었다. 후환은 아예 뿌리째 뽑아야 한다는 그의 눈은 매섭게 빛났다.

 

  복잡한 심정과 상관없이 침대에 눕자마자 곤하게 잠든 소천악이다. 천성적으로 느긋한 그의 본성을 속이기는 힘들었다.

 

  늘어지게 자고 낮에 일어난 소천악은 등해린을 찾아갔다.

 

  "등 대협! 이제 가야 할 거 같습니다."

 

  "아, 공자. 그럽시다. 노는 것도 매일 하다 보니 삭신이 쑤십니다그려. 허허허."

 

  어색한 미소를 짓는 등해린의 얼굴은 풍류생활의 여파로 반쪽으로 변해 있었다. 실소를 머금은 소천악은 서둘러 기루를 나섰다. 혈살막에 대한 궁금증에 다시 하오문 북경 지부를 찾아갔다.

 

  "곡소량 지부장님! 부탁드린 정보는 어찌되었소이까?"

 

  "전부는 아니지만 약간은 입수했습니다. 여기 그 정보가 적혀 있습니다."

 

  솔개가 병아리 낚아채듯 서찰을 집어 든 소천악이었다. 눈에 불을 켜고 읽어가는 그의 얼굴은 살기로 온통 뒤덮여갔다.

 

  "이런 죽일 놈들! 감히 나를 암살하려 하고도 무사할 줄 아느냐!"

 

  서슬이 시퍼런 안광이 번뜩였다. 곡소량은 소름이 주룩 돋아왔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개구리 같은 인간이었다. 아차 하면 바로 어디 부러질지도 모른다는 총단의 경고가 새삼스레 기억났다.

 

  "고정하시지요. 소 소협, 추가 정보는 이제 곧 올 겁니다."

 

  "좋소이다. 일단 한 가지 일만 처리되면 난 그놈들을 잡으러 절강성으로 가겠소. 들어오는 정보를 바로 전해주도록 부탁하겠소."

 

  "여부가 있습니까? 오는 즉시 전해드리도록 각 지부에 연락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럼 꼭 부탁합니다. 이건 약소하지만 정보비로 쓰시지요. 천 냥입니다."

 

  "헉, 천 냥이나! 오백 냥도 아니고."

 

  곡소량 지부장은 생각보다 많은 정보비에 놀랐다. 오십 냥에서 갑자기 오른 정보비에 정신 차리기가 힘들었다.

 

  "하하, 요새 살림이 펴서 천 냥 정도는 가볍소. 자, 그럼 난 가보겠소. 그놈들이 하루라도 더 숨쉬는 꼴을 보지 못하겠소."

 

  "잘 살펴 가십시오. 소 소협!"

 

  빙긋 미소를 보이며 가려던 소천악이 고개를 돌리자 곡소량의 심장이 또다시 철렁했다.

 

  "아, 그리고 마차를 잘 보관해 주시구려. 아무래도 말로 가는 게 빠르고 안전할 듯싶소."

 

  "신줏단지처럼 잘 보살피지요. 전혀 걱정하지 마십시오."

 

  용건을 마친 소천악은 미련 없이 방을 나서 기다리던 등해린과 함께 떠날 차비를 서둘렀다. 마차를 끌던 말 중 제일 좋은 녀석을 두 마리 골라 안장을 얹고 올라탔다. 가만히 말 위에 타고 가던 그가 무심히 말을 꺼냈다.

 

  "등 대협! 이제 난 한 가지 일만 처리하고 곧바로 절강성으로 돌아가 그 망할 놈의 혈살막을 아예 지워버릴 것이오."

 

  "헉, 혈살막을 공격하시려는 게요?"

 

  느긋하게 있다가 벼락 맞은 이처럼 기겁한 등해린의 말이다. 살수집단과 싸운다는 건 아무래도 쉬운 일이 아니다. 언제 기습할지 모르는 놈들과의 은원은 피하고픈 마음이 드는 건 인지상정이다.

 

  "당연하지요. 빚은 갚아야지요."

 

  살기 띤 소천악의 말에 할 말을 잊은 등해린이다. 비록 소천악이 좋은 고용주이긴 해도 혈살막과 싸운다는 건 부담스러웠다. 차라리 정정당당하게 싸우는 거라면 해볼 만했다. 하지만 온갖 치사한 수단으로 암습하는 혈살막은 영 껄끄러웠다. 소천악은 그런 등해린의 심정을 훤히 꿰뚫어 보았다.

 

  "등 대협! 함께 싸우자는 게 아닙니다. 아무래도 상대가 살수집단이다 보니 등 대협이 걸머져야 할 위험부담이 클 겁니다. 일단 항주에 가면 헤어지는 걸로 합시다."

 

  "허엄! 이런 난감할 데가."

 

  어색한 얼굴을 지우지 못한 채 난색을 표하는 등해린이다. 그동안 신세진 걸로 보면 당연히 도와야 하지만 목숨은 하나라는 게 문제였다. 여벌의 목숨만 있다면 당장 동행하고픈 심정이다. 소천악은 미소를 지으며 전표를 건네줬다.

 

  "이거 얼마 안 됩니다. 천 냥입니다. 조금 더 넣었소이다."

 

  "어허, 이런! 도와드리지도 못하는데 이렇게까지 하시면 부담스럽소이다."

 

  "어서 받으시오. 팔 떨어지겠소이다."

 

  미안함에 손사래를 치며 사양하는 등해린에게 억지로 전표를 쥐어주는 소천악이다.

 

  "허참! 정히 이러신다면야."

 

  등해린은 한 번 거절하고 두 번째는 마지못한 듯 얼른 받아 챙겼다.

 

  "자, 다시 생각해 보니 지금부터 동행하면 괜히 등 대협에게도 우환이 올 수 있소이다. 여기서 그냥 헤어집시다. 말은 절강성에 가시면 하오문 지부에 놔두시오."

 

  "하하, 말도 빌려주시니 이런 고마울 데가. 알겠소. 그럼 다음에 다시 보기를 바라겠소."

 

  사양을 생략한 채 후다닥 길을 떠나는 등해린이다. 뒤도 안 돌아보고 사라지는 그를 바라보던 소천악은 작은 배신감이 솔솔 들었다. 그렇게 잘해줬는데 막상 어려움이 닥치자 꼬리를 내리는 그가 괘씸했다. 혈사부의 말대로 강호란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땅이었다. 씁쓸함을 뒤로하니 인생에 대해 하나씩 깨달아가는 재미도 쏠쏠했다.

 

 

 

  한편 아침이 되자 황궁에 있던 주청령은 고심에 빠져들었다. 생각해 보면 어젯밤의 일이 꿈만 같았다. 생각만 꿈일 뿐 분명히 일어난 현실이었다. 제국의 황녀가 이런 봉변을 당하리라곤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미움과 증오가 일어나는데 희한한 건 봉변을 당한 것보다 다른 무언가가 더 마음에 상처를 준 듯한 느낌이었다. 도무지 자신의 마음이 무엇인지 집어내지를 못해 갈팡질팡이었다. 머리를 싸매고 생각하다 갑자기 떠오른 그놈의 말이 생각났다.

 

  "제길! 일 푼이 모자라."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말이 의미하는 뜻이 무언지는 더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평소 재녀로 이름난 그녀의 머리가 정신없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방 안을 왔다 갔다 하며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던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거기 황궁밀위 있느냐?"

 

  허공에 대고 그녀가 말하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은잠하고 있던 밀위 한 명이 연기 피어나듯 그녀 앞에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부복했다.

 

  "황녀 마마! 불러 계시오니까?"

 

  "그래. 지금부터 내가 명하는 걸 바로 수행하도록 하라. 일전에 내가 뿌린 만리추적향을 풍기는 자를 추적해 그 신상에 대한 걸 낱낱이 파악해서 가져와라. 시간은 이틀 준다."

 

  "존명!"

 

  바로 대답한 밀위는 다시 빛을 피해 어둠으로 스며들었다. 주청령의 입가에는 묘한 미소가 섬뜩하게 만들어졌다.

 

  "흥! 네놈이 아무리 머리를 써도 내 손아귀를 벗어나기는 어려울 것이야. 감히 나를 모욕하고 무사하기를 바라지는 말아라. 호호!"

 

  기분 좋은 웃음을 던지는 주청령이다. 사실 그녀로서는 아닌 밤중에 날벼락을 맞아 수치를 당한 기억이 영 뇌리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녀는 황녀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정략결혼의 희생물이 되어 머지않은 시일 내에 몽고족 대칸에게 시집가야 하는 불운의 여인이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벗어나지 못할 숙명처럼 보이던 일에 마음에 상처를 입은 터에 화풀이 대상이 결정되자 놀랍도록 그 일에 집착하고야 말았다. 소천악으로선 불행 중에 큰 불행인 셈이다.

 

 

 

  자신을 향한 거미줄이 슬며시 조여오는 줄은 아직까지 까마득히 눈치채지 못한 소천악이다. 그는 북경을 떠나기 전에 악천수의 문제를 해결해 주기로 했다. 인간성 좋은 형이 되고픈 마음이야 별로 없었다. 다만 미래를 위한 하나의 포석이라는 점을 중시했다.

 

  혹시나 모를 위험에 대비해 대장군가의 힘을 뒤에다 감춰둘 요량이다.

 

  객잔에 머물며 밤을 기다린 그는 어둠이 내리자 서서히 몸을 움직였다. 이미 복면을 준비하고 객잔을 나서 소리 없이 대장군가로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태연한 걸음걸이와는 달리 그의 안색은 영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다. 애써 귀여운 동생 녀석 하나 구해준다는 의미로 마음을 달랬다.

 

  대장군가 으슥한 담벼락에 도착한 후 인기척을 면밀히 살폈다. 아무런 기척이 없는 걸 몇 번이나 확인한 후 번개같이 담을 넘어 정원에 들어섰다. 그가 넘은 곳은 금사란이 살고 있는 후원의 전각 앞이었다. 전각은 아직 불이 켜진 채로 적막감이 감돌았다.

 

  구구연환탈백보를 전개한 소천악의 신법은 마치 연기가 흐르듯 부드럽게 거리를 좁혀갔다. 아무런 흔적 없이 전각 내로 들어선 그는 이미 천리지청술로 주위의 모든 소리를 듣고 있었다. 시녀들이 깊은 잠에 빠져 뒤척이며 내는 속옷 스치는 소리까지 낱낱이 귀에 들렸다.

 

  그의 귀는 한곳으로 집중되어 갔다. 전각 삼층에 있는 대장군가의 이부인인 금사란의 침실이었다. 밤이 깊었는데도 불구하고 난데없이 이상야릇한 비음이 들려왔다.

 

  황당하던 소천악은 이내 상황을 눈치채고 날을 잘 잡았다는 기쁨이 눈가를 스쳤다. 번쩍이며 움직이는 그의 신형은 설사 절정고수라 해도 쉽게 알아채기 어려울 정도로 쾌속하게 움직였다.

 

  방 앞에 선 그는 문을 살며시 건드려 보았다. 내공을 불어넣자 문은 소리 없이 스르르 열리며 방 안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침대는 다행히 문가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문이 열리는 걸 보기는 어려운 위치였다.

 

  슬쩍 들어선 소천악은 빠르게 은신할 곳을 찾아 몸을 움직였다. 천장에 장식용 조각이 많이 달려 있어 은신처를 찾기는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자리를 잡고 침대를 내려다본 그는 속으로 혀를 찼다 침대에는 초상화로 익히 본 대장군가의 이부인 금사란이 절대 악관필이 아닌 다른 남자와 누워 달뜬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가가! 정말 행복해요."

 

  "란매! 나도 이런 순간이 너무 좋아."

 

  둘은 불륜의 장을 펼치면서 낯뜨거운 대화를 서로 나누었다. 기가 막혀 지켜보던 소천악이 기회를 노리기 시작했다. 남녀상열지사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눈꼴시다는 기색이 확 드러날 정도였다. 마침내 기회를 포착한 눈빛이 번뜩이며 번개같이 신형을 날려 순식간에 두 남녀의 전신대혈을 점혈했다.

 

  "헉! 누구냐?"

 

  좋은 분위기에서 갑자기 당한 봉변에 악관필 대장군의 이부인 금사란이 기겁하며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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