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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천악 70화

무료소설 소천악: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1,053회 작성일

소설 읽기 : 소천악 70화

 

  "아무리 소리쳐도 못 듣소. 내가 이미 다 막아놨소. 의심나면 더 빽빽 소리치시오."

 

  태연한 불청객의 말에 화가 난 주청령이 버럭 소리쳤다.

 

  "여봐라! 아무도 없느냐? 어서 이놈을 잡아라!"

 

  방 안이 떠나가도록 소리쳤건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 소천악은 귀를 후비며 시큰둥하게 말했다.

 

  "거참, 목소리도 크시오. 귀가 다 따갑네."

 

  "네 이놈!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이런 무례한 짓을 하느냐? 황실이 무섭지도 않느냐?"

 

  "하하, 황실이야 무섭지요. 하지만 주 황녀님은 무섭기는커녕 아리따우시기만 하시네요."

 

  "이런 무례한! 감히 나를 희롱해?"

 

  격노한 주청령이 침대보를 들추고 일어서려 했다.

 

  "어? 잠옷 차림이 아주 죽입니다."

 

  실실 웃으며 말하는 소천악이었다. 그제야 속이 훤히 비치는 잠옷 차림인 걸 깨달은 주청령이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뭐 하느냐! 어서 고개를 돌리지 못할까?"

 

  수치심에 고개를 숙이고 고래고래 고함을 치는 주청령이었다. 보통 성질이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평생 부리고만 산 고귀한 황녀였다. 이런 수모를 당한 기억이 없는 터였다. 황당한 일이었다. 감히 황궁 내 깊숙한 곳에 자리한 자신의 처소에 침입할 간 큰 사람이 있으리라곤 꿈에도 상상하지 못 했다.

 

  소천악은 소리를 지르는 주청령의 얼굴과 몸매를 유심히 바라봤다. 족자 미인을 머릿속에 그리며 하나씩 대입해 갔다. 모든 비교가 끝나자 아쉬운 탄성이 입에서 흘러나왔다.

 

  "제길! 일 푼이 모자라."

 

  부끄러워 고개도 들지 못하던 주청령이 의아한 말에 불쑥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

 

  "하아, 내가 바라는 여인상에 황녀님이 모자란다는 이야기요."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에 아차 한 소천악이었다. 색마에게 배운 이야기 중 가장 중요시되는 금기를 어긴 일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금방까지도 수치심에 몸을 떨던 주청령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시퍼렇게 독기 서린 눈으로 당당하게 소천악을 쏘아보았다.

 

  "네 이놈! 감히 나를 희롱까지 하다니! 내 무슨 일이 있어도 네놈을 잡아 능지처참시키리라."

 

  여인의 한이 오뉴월 서리로 내리는 순간이었다. 소천악은 경솔한 자신의 입을 두들겨 패고픈 마음이었다. 바라본 그녀의 모습은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한 얼굴이었다.

 

  그럴 만했다. 내심 누가 뭐래도 중원제일미녀란 자부심을 가진 그녀였다. 난데없이 나타난 소천악의 말이 비수처럼 가슴에 박힌 순간이다. 소천악은 주청령이 꼭 복수할 거란 기분이 들었다. 황녀의 복수라… 생각만 해도 섬뜩했다.

 

  펄펄 뛰는 황제의 모습을 상상하니 끔찍했다. 아차 하면 혈사부보다 더한 꼴이 날 판이었다. 그래도 혈사부는 무림공적이었으나 자신은 황실공적이 될 위기였다.

 

  "허이구! 골 아프네."

 

  머리가 아파온 소천악이 끙끙거리자 주청령은 더욱 독기를 뿜어냈다.

 

  "네 이놈! 어디 두고 보자. 네놈이 하루라도 편하게 사는지."

 

  갈수록 태산이었다. 이젠 아예 잡아먹으려는 기세를 부리는 주청령이었다. 확 죽여버리고픈 마음이 불쑥 들었다. 하지만 혹시나 걸리면 온 세상이 추적하는 신세가 될 건 뻔했다. 그렇다고 사문의 비전인 독약을 먹여봐야, 하는 꼴을 봐서는 너 죽고 나 죽자 식으로 나올 것 같았다.

 

  고심은 점점 깊어가는데 문득 떠오른 미혼색마의 말이 구원의 말이었다.

 

  "여자가 독을 품으면 골치 아프죠. 그런 여자는 꼭 복수를 합니다. 그럴 때는 말이 필요 없습니다. 가만히 눌러주세요. 그게 최고입니다."

 

  얼굴이 확 핀 소천악이었다. 생각해 보니 그럴듯했다. 현재로선 그 방법이 최선이란 마음이 들었다.

 

  음흉한 눈빛으로 주청령을 쳐다보았다. 서슬이 퍼렇게 소리치던 주청령은 갑자기 변한 소천악의 눈에 비로소 현실을 깨달았다.

 

  아무리 황녀라지만 지금은 힘없는 여인 신세였다. 그 생각이 들자 와락 겁이 났다. 소천악이 천천히 다가왔다.

 

  "무엇 하려느냐? 저리 가지 못할까?"

 

  "용서하시오, 황녀. 그대는 지금까지 내가 본 여인 중에 제일 아름다운 여인이오. 내 어찌 그냥 돌아갈 수 있겠소?"

 

  "꺄악! 안 돼! 저리 가!"

 

  주청령의 마지막 비명이었다.

 

 

 

 

 

  제3-1장 황녀와의 꼬인 인연

 

 

 

 

 

  생전 처음 겪는 당혹스런 상황에 말문을 잇기도 힘든 주청령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와 달리 소천악은 고지식하게 색마에게 배운 수법을 그대로 써먹을 기회를 잡은 것에만 온 정신이 팔려 뒷일 걱정은 이미 십 리 밖으로 날아간 상태였다.

 

  이대로라면 큰 봉변을 면할 길이 없는 주청령은 놀란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고 침착성을 찾으려 노력했다. 생각하는 사이 콧속으로 사내의 텁텁한 체취가 풍기며 거친 손이 아직 남자를 모르는 몸을 더듬어오자 절로 다급해져 급히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잠시 내 말 좀 들어봐라, 제발!"

 

  "지금은 바쁜 관계로 조금 이따 듣겠소이다. 황녀 마마!"

 

  막무가내로 답하는 소천악의 말에 점점 조급해진 주청령은 방법을 바꿔 살살 달래기 시작했다.

 

  "네가 한번 생각해 봐라! 이 판국에 힘없는 내가 어떻게 더 반항하겠느냐? 제발 한마디만 들어다오. 정말 소원이니라."

 

  고귀한 황녀의 입에서 차마 내뱉기 힘든 사정조의 말이 튀어나왔다. 수치심이 머리끝까지 치밀었지만 별다른 대책 없이 하소연만 해야 할 서글픈 상황이다. 그 말에 마구잡이로 겁탈하려던 기색의 소천악이 흠칫하더니 잠시 생각해 본 후 입을 열었다. 이미 주청령의 몸에서는 떨어진 상태였다.

 

  "많은 시간은 드리지 못하지만 말씀하시지요."

 

  주청령이 보기엔 소천악의 눈은 차갑고 냉정하게 보였다. 아직까지는 이성이란 놈을 붙들고 있는 게 여실히 보였다. 툭하니 던진 말투에는 욕정에 눈이 뒤집힌 기색이라곤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다. 희망을 찾은 그녀는 마치 어린아이 달래듯 다소곳하게 설득을 시작했다.

 

  "제발 이러면 안 되느니라. 난 얼마 안 있으면 몽고족 대칸과 정략결혼을 할 몸이니라. 혹여 내가 정조를 잃고 결혼하게 된다면 어찌되겠느냐? 자신을 능멸했다고 분노한 대칸에 의해 내가 죽는 건 아무것도 아니니라. 또다시 이 나라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릴지도 모르느니라. 일단 전쟁이 나면 수많은 백성들이 억울하게 죽을지도 모른다."

 

  차분히 설명하는 주청령은 금방이라도 울고 싶었다. 불한당 같은 놈에게 이런 세세한 내막까지 설명해야 하는 자신의 신세가 한심하고도 초라하게 느껴졌다. 더구나 이 처지에서도 오라버니가 다스리는 나라를 걱정해야 하는 자신의 신세가 처량하고도 처량했다. 저절로 눈가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이야기를 열심히 경청하던 소천악도 나름 판단이 설 만한 명쾌한 주청령의 설득이다. 곰곰이 생각하던 소천악이 말했다.

 

  "황녀 마마의 심중은 잘 알겠습니다. 사실 입이 비뚤어져도 말은 바로 하라 했습니다. 제가 미친놈이 아니고서야 진심으로 이러고 싶겠습니까? 다만 이대로 헤어진다면 황녀 마마께서 소인을 죽이려 온갖 수단을 동원할까 봐 그 점이 심이 저어되어 이런 것이지요. 저도 명색이 사나이 대장부입니다. 아무리 황녀라 하나 연약한 여인을 힘으로 겁탈하는 건 정말 못할 짓이라는 걸 잘 압니다."

 

  진솔한 소천악의 마음이 거침없이 입으로 튀어나왔다. 사실 황녀를 건드리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바보가 아닌 이상 왜 모르겠는가!

 

  아무리 천방지축으로 날뛰던 소천악이라도 꺼려지는 건 사실이다. 기회를 잡은 주청령이 눈빛을 빛내며 얼른 물었다.

 

  "그럼 네놈은 내가 이 일에 대해 입을 다물면 이대로 순순히 물러갈 생각이냐?"

 

  "물론입니다. 저도 자칫하면 황궁의 공적이 되어 천하를 유랑하게 될 일을 만들고픈 마음은 절대 없습니다."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소천악은 이미 평상심을 찾은 채 침대 위에서 물러난 지 오래다. 주청령과 이 장여를 떨어져 말하는 그의 표정에서 조금 전의 광폭한 인상은 어디에도 찾을 수 없었다. 그 모습에 적잖이 안심이 된 주청령이 조용하게 말했다.

 

  "네놈 말이 정녕 사실이냐? 혹여 이 자리를 피하려 수를 쓰는 것이 아니냐?"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입니다. 막말로 이 일이 알려져서 제게 좋을 일이 뭐 있다고 떠들겠습니까? 저는 공적이 되어 쫓기고 황녀 마마는 수치심을 이고 평생을 살아야 하는데 둘 다에게 안 좋은 일을 제가 바보라서 하겠나이까?"

 

  가만히 쏘아보며 듣던 주청령이 마음을 정한 듯 대답했다.

 

  "좋다. 그러면 내 약속하마! 오늘 일은 내가 죽기 전에는 절대 발설하지 않겠노라. 이 맹세는 황녀 주청령의 명예와 목숨을 걸고 하겠노라."

 

  말하는 황녀의 얼굴 표정을 유심히 바라본 소천악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황녀의 약속에 진심이 담긴 걸 이내 눈치챈 후였다.

 

  "황녀 마마께서 그리 말씀하시는데 소인이 어찌 그 뜻을 따르지 않겠습니까! 송구한 일을 저지른 저를 용서하십시오. 오늘 불측한 일은 기억에서 지워버리시고 행복한 인생이 되시길 진심으로 바라옵니다."

 

  큰 짐을 벗어던진 듯 소천악의 말은 힘차게 입으로 터져나왔다. 주청령은 내심 약이 오를 대로 올랐지만 이 상황에서 더 이상 일이 확대되면 자신은 물론 오라버니인 황제에게도 망신살이 뻗친다는 걸 모를 정도로 어리석지 않았다.

 

  하지만 억울한 마음에 하나를 안 물어볼 수가 없었다.

 

  "도대체 네놈이 이 밤에 나에게 온 진정한 이유가 뭐냐?"

 

  가시 돋친 주청령의 질문에 잠시 주춤하던 소천악이 진실을 털어놓았다.

 

  "소인은 천하제일미인을 찾아 중원을 방랑하는 몸입니다. 일부 호사가들이 황녀님이 천하제일미인이라 하여 그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이리 무례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하."

 

  어이가 없는 주청령이다. 이건 도무지 상상하기 힘든 답변이 귀에 들리자 혹시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들었다. 멍한 기분에 빠진 그녀를 바라보던 소천악은 얼른 이 자리를 피하고픈 마음뿐이었다.

 

  "그럼 소인은 이만 물러갈까 하옵니다. 부디 옥체를 보존하십시오."

 

  금방이라도 떠날 듯한 기세를 풍기는 소천악을 보며 주청령이 다급히 물었다.

 

  "네 말이 맞다고 치자! 그래, 나를 본 결과 네가 찾아다니던 천하제일미인이 나더냐?"

 

  "네? 그게……."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이 들이닥치자 소천악은 순간 당황하여 바로 답변을 하지 못하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아주 찰나의 순간이지만 평소 명석하다고 소문난 주청령이 그 낌새를 모를 리가 없었다.

 

  "절대 거짓을 말하지 마라! 만약 내가 듣기에 거짓을 토설한다면 내 절대 너를 용서하지 않으리라!"

 

  아예 못을 박는 주청령의 말에 소천악의 심기가 살짝 뒤틀렸다.

 

  "정 그러시다면 솔직하게 말씀드리지요. 제가 보기엔 아직까지 한 사람을 제외하곤 황녀 마마가 제일 미인인 것은 확실합니다. 물론 아직 못 본 중원십대미녀(中原十大美女)가 다수라 섣불리 무어라 판단하기는 이르다는 게 제 소견입니다."

 

  소천악의 말이 계속되면 될수록 주청령의 안색이 붉으락푸르락 변해만 갔다. 가만히 듣자하니 왠지 능멸당하는 기분이다. 아직까지 본 중에 제일 미인이라는 말은 여자인 자신이 듣기에 좋았지만 자기보다 아름다운 여인이 존재한다는 말을 면전에 던지는 저놈을 당장에라도 토막내 강물에 던지고픈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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