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천악 69화
무료소설 소천악: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58회 작성일소설 읽기 : 소천악 69화
대장군가는 정문부터 기세가 만만치 않은 경비 무사가 지키는 금성철벽이었다. 유조의 안내대로 빈객청에 잠시 자리잡았다. 얼마 후 유조가 달려와 말했다.
"대장군께서 뵙자고 하십니다."
"아, 그래요? 안내해 주십시오."
유조의 안내를 받아 대장군가를 걸어가던 소천악은 감탄사를 흘렸다.
"음, 정말 간결하면서도 정갈한 저택이군요."
"허허! 우리 대장군님의 성품대로지요."
고개를 끄덕이며 대장군에 대한 진한 호기심이 이는 소천악이었다. 이런 저택을 좋아하는 자의 진면목을 보고 싶어졌다. 좁다란 회랑을 지나 들어간 대장군의 집무실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한 남자가 보였다.
대명제국의 군 최고실력자인 대장군 악관필(岳串必)이었다. 부리부리한 눈매가 호랑이 같았다. 육척장신에서 풍기는 기세는 과연이었다.
"허허! 우리 천수를 도와주었다고? 정말 고맙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약자를 도우는 건 인지상정이지요."
겸손을 떠는 소천악을 본 유조는 혀를 내둘렀다. 저렇게 변할 수 있는 자라는 게 영 실감이 나지 않았다. 악관필은 웃음을 잃지 않고 말했다.
"자, 도움을 받았으니 당연히 사례를 해야 하는 법. 받고 싶은 게 무엇이 있는가?"
"아닙니다. 이미 천수와 의형제를 맺은 사이입니다. 형제끼리 도움을 주는 게 무슨 대단한 일이라고 상을 받겠습니까?"
"오, 의형제라? 허허, 우리 천수가 그랬단 말이지? 평소 아무나 어울리지도 않는 녀석인데. 자네가 마음에 쏙 든 모양이군. 이런 경사가!"
정말로 마음이 유쾌해진 악관필이 호탕하게 웃었다. 소천악은 그저 미소만 지은 채 바라보았다.
"좋네. 일단은 그럼 그런 걸로 하세나. 다음에 찾아오면 내 기꺼이 환대함세. 우리 천수의 의형 대우를 톡톡히 치러주지."
"하하, 고맙습니다. 대장군님."
악관필은 자기 앞에서 전혀 흔들림 없이 이야기하는 소천악을 보고 내심 놀라움을 느꼈다. 천하를 호령하는 자신이다. 아무도 이리 자기 면전에서 당당하게 말하는 자를 본 적이 없었다. 역시 내 아들이라는 생각에 흐뭇함을 감추기 힘들었다.
"자, 일단 쉬게나.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세."
"아닙니다. 제가 할 일이 좀 있어서 이만 가봐야 할 거 같습니다. 다음에 꼭 찾아와 다시 인사를 드리지요."
"음, 그런가? 섭섭하네만 할 수 없는 일이지. 바쁜 사람을 잡을 수는 없는 노릇인걸."
서운함이 가득한 악관필과 이야기를 마친 소천악은 악천수를 찾아가 사정 이야기를 하고 다음을 기약하자 섭섭함에 눈가에 눈물이 글썽거리는 악천수였다. 아무리 강한 척해도 어린애는 어린애였다.
"허, 남자가 눈물을 보이다니? 기다리거라. 이 형이 우환거리를 조만간에 싹 쓸어주마."
"헉! 형님, 어쩌시려고?"
이미 소천악의 성격을 아는 악천수가 기겁을 하였다. 싱긋 웃음으로 무마한 소천악이 조용히 말했다.
"두고 보면 안다. 자, 간다. 다음에 보자."
짧게 이별을 마치고 대장군가를 나선 소천악이었다. 등해린은 당대 실력자인 악관필 대장군을 덩달아 보는 영광을 누리고 감격했다.
"이거 고용인 잘 만나니 팔자가 늘어집니다. 공자."
"하하, 그건 모르는 일이지요. 오늘 늘어진 팔자가 내일 꼬일지."
"네? 그게 무슨 말인지?"
"아, 농담입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소천악은 진철에게 하오문으로 갈 것을 말했다. 진철은 마지막 여정을 아무 사고 없이 마친 채 하오문 앞에 도착했다. 소천악은 그에게 약속대로 이백 냥을 주었다. 좋아서 펄펄 뛰며 수도 없이 인사를 한 진철이 날듯이 사라졌다.
등해린을 밖에서 기다리게 하고 들어선 소천악이었다. 이미 기다리던 지부장과 오랜 밀담을 마치고 나온 소천악의 얼굴은 환히 밝아졌다.
"자, 등 대협! 이제 일도 마쳤으니 술이나 한잔합시다."
"하하! 그 말을 기다렸소이다. 공자, 어서 갑시다. 안 그래도 여긴 제가 손바닥 보듯이 아는 동네입니다. 좋은 데로 안내하죠."
"이런 경사가. 자, 그럼 등 대협만 믿겠습니다."
두 사람은 희희낙락하며 기루로 직행했다. 여행의 피로를 술로 풀어내는 아주 상투적인 일상이 되었다. 갈수록 소천악의 기루에서의 품행은 절대 풍류남아를 닮아갔다. 과거의 숙맥 모습은 도무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껄떡이는 등해린과 정반대였다. 옆에 앉은 기녀와 일체의 신체접촉도 없이 그저 술과 비파 연주만을 느긋하게 감상했다. 등해린이 방에 들어가도 여전히 홀로 술을 마시다 묵묵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기녀들이 아무리 유혹해도 눈 하나 깜짝도 하지 않았다. 대신 행채로 은자를 두둑이 집어 주는 여유는 잊지 않았다. 그렇게 이틀이 지나가자 이미 소천악은 모든 기녀의 우상이 되어갔다. 멋진 풍류공자의 풍모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이 모든 게 만들어진 모습이었다. 단계가 올라가자 소천악의 행동도 서서히 변해갔다. 이게 다 원통하게(?) 죽은 색마로부터 전수받은 비법이었다. 기녀들의 소문은 상상외로 빠르다는 걸 아는 이는 드물었다. 소천악이 자칭 천하의 명기를 만나기 위해 수작을 부린 일이었다.
한편 북경의 한 저택에서 두 복면인이 다시 만나고 있었다.
"이봐,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그게 묘하게 얽혀서!"
"자세하게 이야기해 봐."
"이번에도 소천악이라는 놈이 개입되었습니다. 그놈이 길을 가다 대장군부 장손인 악천수를 우연히 만난 거 같습니다, 각주님."
"그래서?"
"사연은 정확히 모르지만 마차에 태운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그 이후는 아시는 대로입니다. 송구합니다."
"흐이구! 도대체 그놈은 우리와 무슨 원한이 이리 깊은 거야? 어떻게 가는 데마다 그놈 때문에 일이 실패하냔 말이다!"
새삼 노화가 치민 듯 각주의 목소리에 한기가 스며나왔다.
"저도 하도 이상해서 정보를 모조리 규합해 봤습니다. 아무리 살펴봐도 연관이 되는 정보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 정도면 정말 가공할 우연입니다."
"이건 뭐! 아주 천적이야, 천적."
고개를 저으며 학을 떼는 각주였다. 이에 조심스럽게 대답하는 조장이었다.
"게다가 혈살막에 의뢰한 청부도 실패했습니다. 혈수쌍살이 힘도 못 쓰고 잡혀 종남파에 넘겨졌다고 혈살막주가 난리입니다."
거듭되는 안 좋은 소식에 머리를 부여잡은 각주의 침통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고 머리야. 소천악! 이름만 들어도 골치가 아프다."
"어떻게 할까요?"
"뭘 어떻게 해! 혈살막에 청부해도 안 되는데 어쩌라고?"
대책 없다는 듯 말하는 각주의 귀에 조심스러운 음성이 들려왔다.
"본단에 연락해 고수들을 보내달라고 하면 어떨까요?"
"흠, 본단이라! 그 방법밖에는 없어 보이나?"
"아무래도 사고뭉치는 미리 제거하는 게 옳은 일인 듯싶습니다만……."
"그건 맞는 말인데 이건 일부러도 아니고… 거참!"
난색을 표하는 각주였다.
"각주님이 그러시면 이번까지는 참는 거로 할까요?"
"그렇게 하지. 아무래도 켕겨. 무공수준을 짐작하기도 어려운 놈을 적으로 돌리는 건 위험해. 게다가 혹시나 그놈 사문이 숨어 있는 은자문이라면 그 떼거리가 오면 어쩌겠나?"
"그렇군요. 제가 미처 그 점을! 알겠습니다. 일단 지켜보는 걸로 하겠습니다."
"육시랄 놈! 별게 다 강호에 나타나서 신경 쓰이게 하네. 됐어, 가서 일 봐."
각주의 축객령에 공손히 머리를 숙이고 사라지는 조장이었다. 앉아 있는 각주의 눈초리가 갈수록 사나워지는 밤이었다. 그날 소천악은 유난히 가려운 귀를 신경질적으로 후비는 괴로움을 느꼈다.
제2-9장 황녀 습격사건
삼 일째 밤이 되는 날 여전히 홀로 방에 있던 소천악이었다. 책을 건성으로 보던 그의 눈이 번쩍였다. 드디어 움직일 시간이 된 걸 알았다. 스르르 의자에서 일어난 소천악은 창문을 열고 주위를 살폈다.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후 가볍게 신법을 전개했다.
건물 지붕을 타고 바람같이 날아가는 그의 신법은 밤그림자에 가려 아무도 보지 못했다. 한 번의 도약으로 건물과 건물 사이를 소리 없이 이동했다. 마침내 건물이 끝나고 거대한 황궁이 전면에 드러났다.
땅 위에 내려선 소천악은 스르르 이동하며 주위의 인기척을 면밀히 살폈다. 이윽고 인기척이 없는 걸 확인한 후 높이가 삼 장이 넘는 황궁 담을 훌쩍 뛰어넘었다. 황궁에 들어서자마자 주위를 살피며 빠르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어두운 밤 그의 눈빛은 유난히 빛을 발했다. 군데군데 경비 도는 황궁 무사의 귀를 피해 소리 없이 이동하였다. 마침내 목적지인 전각이 눈앞에 보였다. 전각 입구는 횃불이 밝혀진 채 황궁 무사들이 빈틈없이 지키고 있었다.
"이런 제길.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들어가기 힘드네."
낮게 탄식을 뱉던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들은 대로 커다란 나무 하나가 눈에 띄었다. 어둠을 틈타 나무를 타고 올라간 그는 십여 장 밖에 보이는 전각을 노려보았다. 다행히 창문 하나가 반쯤 열려 있었다.
내력을 운기하며 슬쩍 몸을 날렸다. 바람을 타고 둥실 떠나듯 아무 소리 없이 창문 앞에 찰싹 달라붙었다. 밑을 보니 황궁 무사들은 아직 아무런 낌새도 채지 못한 눈치였다.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창문 안을 슬쩍 둘러보았다. 침대에는 한 여인이 자는 듯 이불이 봉긋 솟아 올라 있었다.
소리 없이 창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선 소천악이었다. 그가 들어선 방은 황제의 세 번째 딸인 삼황녀 주청령(朱淸靈)의 침실이었다. 그녀는 타고난 미색으로 암암리에 천하 십대미녀에서도 제일이라는 소문이 나도는 여인이었다.
그랬다.
소천악이 북경에 온 건 그녀의 얼굴을 보기 위함이었다. 하도 비슷비슷한 미모를 보이는 천하 십대미녀라 아예 으뜸으로 치는 황녀를 볼 작정이었다. 간담이 커도 엄청나게 큰 소천악이었다. 발소리를 죽여 다가선 그는 안력을 높여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무리 밤이라 해도 내력을 담은 눈에 그녀의 얼굴이 그대로 담겨왔다. 살포시 눈을 감고 새근거리며 자는 그녀의 미모는 과연 소문대로였다. 백설보다 하얀 피부에 이목구비가 딱 맞춘 듯 있을 자리에 가지런히 있었다.
눈부신 미모에 잠시 정신이 아찔했던 소천악이었다. 자기도 모르게 탄성이 나오고 말았다.
"흠! 정말 미인이네. 보고도 믿기지 않을 정도야."
넋을 잃고 바라보던 소천악이 한 가지 고민에 빠졌다. 혹시나 담수란처럼 사팔뜨기면 어쩌나 하는 고민이 생겼다. 고민 끝에 결정을 내린 소천악은 가볍게 주청령을 흔들어 깨우며 말했다. 이미 내력으로 방에서 나는 소리를 모조리 차단한 후였다.
"이보시오, 일어나 보시오."
조그마하게 말했지만 잠귀가 빠른 주청령은 인기척을 느끼고 눈을 떴다. 잠결이지만 감히 자기의 침실에 들어온 불청객에 놀라 벌떡 일어났다.
"꺄악! 누구냐?"
날카로운 그녀의 교성이 방 안에 울려퍼졌다. 황녀의 비명이었다. 당연히 황궁 무사들이 달려와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뛰어오는 인기척이 들리지 않았다. 주청령이 슬슬 당황할 무렵 소천악의 말이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