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천악 106화
무료소설 소천악: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36회 작성일소설 읽기 : 소천악 106화
소천악은 말과 동시에 두 손으로 전신대혈을 찍어 분근착골의 수법을 섬전같이 전개했다. 그가 찌른 혈도에 따라 곧 길완청은 온몸이 바스러지는 격통에 시달려야 했다.
"크아악, 이런 잔인한!"
"이것 보세요. 바로 본성을 드러내시는구려. 쯧쯧."
인간으로 감내하기 힘든 고통을 선사한 자로서는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 덤덤한 표정으로 말한 소천악은 탁자 옆에 의자를 끌어당겨 길완청을 바라봤다.
"장주님은 억울할 수 있소이다.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두들겨 맞고 분근착골 수법까지 당하니 이 얼마나 분통이 터지겠소이까."
"그렇다. 도대체 이유를 말해라!"
처절한 고통 속에서 이를 갈며 길완청이 말하자 한마디로 염장 지르는 소천악의 답이 나왔다.
"말하자니 왠지 자존심이 상하오이다. 한마디만 한다면 장주님이 쓰레기 취급하는 그 누군가를 보니 가슴이 터질 듯 아프더이다."
"그…게… 누구…냐?"
격통에 시달리며 힘겹게 말하는 길완청의 마음은 다급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분근착골로 온몸이 으스러지는 고통을 더 이상 견디기 힘들었다. 태어나 이런 고통을 처음 당해본 그로서는 참기가 만만치 않았다.
"그걸 말할 거라 보십니까? 입을 열려면 진작 열었지요."
냉정하게 말을 자른 소천악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 모습에 길완청은 미치고 팔짝 뛰고픈 마음으로 신음처럼 물었다.
"말…해…다…오……."
"거참 시끄럽소이다."
짜증난다는 듯 말한 소천악의 손이 번개같이 길완청의 아혈을 짚어 말문을 아예 막아버리고 다시 명상에 들어갔다.
고통에 겨워 눈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한 길완청은 찰나마다 지옥의 겁화에 빠진 기분이다.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영원히 감긴 상태로 있을 듯한 소천악의 눈이 번쩍 뜨이면서 길완청을 노려봤다. 이미 기진맥진한 그는 힘겨운 몸짓으로 자신의 고통을 보여주려 안간힘을 쓰는 게 시야에 들어왔다.
"쯧쯧! 무림고수란 분이 이 정도에 오줌을 지리다니! 세상천지에 부끄럽소이다."
차갑게 비웃는 소리에 퍼뜩 정신이 든 길완청은 아랫도리가 뜨끈한 감촉에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픈 심정이었다. 원통하고 창피해 소리치고픈 마음이지만 말문이 막힌 그로서는 어떠한 소리도 낼 수 없는 비참한 처지였다.
부와 명예를 걸머진 그가 언제 이런 수치를 겪어봤겠는가!
죽고 싶을 정도로 참담한 기분인 그에게 목소리는 어김없이 들렸다.
"염려 마시오. 동네방네 소문은 안 낼 테니. 그저 하룻밤 꿈이려니 생각하시구려. 다만 아까 말한 경고를 잊으시면 오늘 밤 다시 방문하겠소."
차갑게 말한 소천악은 바로 아혈을 비롯한 전신대혈을 현란한 수법으로 풀어줬다. 혈도가 풀린 길완청은 극심한 고통으로 몸 하나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도대체 왜 이러시는 건가?"
기진맥진한 길완청의 얼굴은 억울감과 궁금증이 수시로 교차되는 묘한 안색이다.
"오늘 밤에 방문한다면 더욱 극심한 고통과 더불어 알게 될 게요. 뭐 굳이 겪겠다면 말릴 생각은 없소이다. 자, 그럼 시간이 늦은 관계로 가겠소이다. 아까 보니 좋은 시간 즐기시던데 다시 하시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하시구려."
퉁명하게 툭 말을 내뱉은 소천악은 온다 간다 말없이 바로 창문을 통해 훌쩍 신형을 감췄다.
멍하니 창문을 바라보는 길완청의 머릿속은 복잡하게 여러 생각이 번갈아 스쳤다.
이 굴욕을 앙갚음하고픈 마음과 복면인이 보여준 무력의 강대함에 얼어붙은 자신감 등 마음의 갈등이 극심했다.
남자로서 복수하고픈 마음이 어찌 없겠는가!
그렇게 밤을 하얗게 지새운 길완청과 객잔에 돌아가 코 골면서 깊은 잠에 빠져든 소천악이 상반된 입장을 보여준 하룻밤이었다.
이튿날.
개운하게 수면을 취한 소천악은 바로 장원 안 으슥한 나무위에 자리를 잡고 관찰에 들어갔다. 물론 길완청의 집무실이 훤히 보이는 명당자리를 차지한 건 당연했다.
길완청은 오전 내내 코빼기도 보이지 않다가 정오가 지나서야 어슬렁거리며 나타났다. 그의 몸은 평소에 비해 뚱뚱한 듯했고 얼굴은 면사로 가린 채 집무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자세히 보면 평소와 다른 그의 체형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소천악의 입가에 짓궂은 미소가 걸리는 순간 바로 소대영의 모습이 나타났다.
"장주님! 나오셨습니까?"
"그래. 하루 종일 뭐 했느냐?"
"네. 집무실 청소를 말끔히 하고 전각 주변을 청소했습니다."
굽신거리며 말하는 소대영을 노려보던 길완청은 고개를 돌려 스윽 전각을 살폈다. 사실 혼자 아무리 열심히 청소를 했다 해도 전각은 컸고 먼지는 찾으면 보였다.
자신의 성에 안 찬 길완청이 막 욕을 뱉어내려다 무언가를 느끼고 흠칫했다. 어제 찾아온 복면인의 경고가 기억에 퍼뜩 떠올랐다. 설마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덮어놓고 경고를 무시하긴 아무래도 뭔가 개운치 않았다.
밤새 생각해 봐도 분명히 그자는 자신의 가까운 곳에 있는 그 누군가와 친분이 있던 것 같았다. 한 명씩 추리하다 보니 제일 먼저 떠오른 이가 소대영이었다.
추측이 맞을지 틀릴지는 몰라도 모험을 하고픈 마음은 추호도 들지 않았다. 어제 본 자는 절정고수 이상으로 보였다. 아니라면 일류의 상급에 달한 자신을 길 가던 개 패듯 그리 손쉽게 제압하기는 어려웠다.
결심을 내리자 그는 소대영에게 생전 처음으로 부드럽게 말했다.
"수고했소. 피곤할 테니 가서 쉬시오."
"네?"
백팔십도로 달라진 길완청의 말에 적응을 못 한 소대영이 당혹감에 휩싸일 무렵 다음 말이 들려왔다.
"허! 쉬라고요. 이제 연세도 있으신데 무리하다 다치기라도 하면 큰일나오. 자, 가서 쉬시오."
"아니 아직 시간이!"
"잔소리 말고 가서 쉬다 나중에 일하시오."
"네, 장주님. 감사합니다."
고개를 꾸벅 숙인 후 소대영은 머리를 갸우뚱거리며 발걸음을 돌렸다. 길완청은 빠진 이가 있던 곳에 밀려오는 통증에 인상을 북북 쓰며 집무실로 들어갔다.
나무 위에서 가만히 내려다보던 소천악의 두 눈이 한없이 깊어만 가며 소대영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그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걸 본 것은 오로지 바람에 일렁이는 나뭇잎뿐이다. 꼬박 하루를 나무 위에서 소대영의 행적을 지켜볼 작정이었다. 소천악은 마음의 동요가 큰 듯 가늘게 한숨을 힘겨운 듯 몰아쉬었다.
다시 길완청을 노려보는 소천악의 입이 가늘게 꿈틀거렸다. 그러자 장주실에 있던 길완청의 귀에 작지만 또렷한 낯익은 전음이 들렸다.
[아직까지는 내 비위를 건들지 않는구려.]
"헉!"
놀란 길완청이 느긋하게 의자 뒤로 기댔던 몸을 바짝 일으켰다.
[내가 말하면 가늘게 중얼거려도 내 귀에는 다 들리오. 이건 상승전음이라 내 위치를 알 수 없으니 쓸데없는 짓일랑 삼가고 지내시구려.]
"알겠소."
누가 들을세라 가늘게 말하는 길완청은 다음 목소리에 간이 철렁했다.
[알면 되었소이다. 내 하루 종일 지켜볼 테니 알아서 하시구려.]
"걱정 마시오. 내 최선을 다하겠소이다."
[그거야 장주님 마음이죠. 물론 두들겨 패는 것도 내 맘이외다.]
"제발 그런 말 하지 마시오."
어젯밤의 악몽이 새삼 떠오르자 온몸을 부르르 떨며 사정하는 길완청이다. 물론 소천악의 대답은 쌀쌀맞기가 그지없었다.
[하는 거 봐서 결정한다고 했소. 나라고 사람 두들겨 패는 게 좋을 리 있겠소? 아무쪼록 오늘 안 가게 해주시오. 만약 간다면 오늘부로 장주님의 남자 역할은 사라질 것이오.]
"헉, 믿어주시오. 혹시나 제가 실수할 거 같으면 한 번이라도 경고해 주시지요."
[시끄럽소이다. 알아서 하시오.]
단칼에 거절하는 소천악의 말에 길완청은 눈앞이 깜깜해졌다. 무슨 건수를 잡아 트집을 잡을지 두려움이 밀려왔다. 어제 본 무공실력을 보아하니 자기가 아무리 지인을 부른다 해도 이길 자신이 전혀 없었다.
고심 끝에 그가 결정한 것!
길완청은 밖에 있던 총관을 불러 지시했다.
"오늘 모든 장원의 식솔들에게 은자 다섯 냥씩을 주고 이제부터 비록 하인이라 해도 함부로 다루지 말거라. 만일 이 지시를 어기는 놈은 내 가만두지 않겠다."
"네, 장주님!"
"그리고 난 오늘부터 당분간 집무실에 나오지 않고 침실에서 머물 것이니 그리 알고 아무도 날 찾지 말거라."
영 평소와 다른 후덕함에 의아한 총관이 질문했다.
"아니 왜 갑자기? 그리고 얼굴은 왜 면사로 가린 건지요?"
"감히 총관 자네가 나에게 질문하는 건가?"
"아닙니다. 다만 저는 걱정이 돼서 드리는 말입니다."
"됐다. 그렇게 알고 난 갈 테니 한 치의 소홀함이 없도록 총관 자네가 직접 나서게."
"그러지요."
총관의 대답이 나오자 길완청은 뒤도 안 돌아보고 얼른 침실로 도망가다시피 사라졌다. 이게 그가 생각한 최선이었다.
멀리서 엿듣던 소천악이 피식 실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딴은 묘안이네. 안 부딪치면 사고도 안 나니. 참 머리 쓰느라 고생하는군."
그 후 소천악의 시선은 끝없이 소대영의 행적을 따라 움직였다. 안쓰러움과 분노가 어우러진 그의 눈을 만약 누가 봤다면 기절할 정도로 시퍼런 독기가 새어나왔다. 특히 길완청이 봤다면 두려움에 절어 바로 주저앉을 정도의 눈빛이었다.
"제길! 이게 뭐야."
소천악의 탄식처럼 소대영의 하루는 고달프기 그지없었다. 단지 길완청의 마수에서만 벗어났을 뿐 어디서도 힘없는 중늙은이로 무시당했다.
부지런히 다니던 그를 보고 새파란 젊은 놈이 대뜸 반말을 찍찍 뱉었다.
"어이, 소씨! 주방에서 부르더구먼."
"왜 나를?"
"뭐, 음식 재료 사 오라는 말을 하려는 거겠지."
"알았네."
소대영은 장작을 패다 말고 서둘러 손을 닦고 주방 쪽으로 정신없이 달려갔다. 그 모습을 차마 더 보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가 기억하는 소대영은 절대 저런 모습이 아니었다. 위풍당당하게 표두나 표사에게 지시를 내리는 음성이 생생하게 귀에 울렸다.
비록 가진 무공은 없었으나 풍부한 재력으로 표국을 건립해 나름대로 건실하게 운영해 온 터였다. 힘이 없는 그가 은자마저 없자 바로 무너져 내렸다는 걸 모를 소천악이 아니다.
십 년이 훨씬 넘는 세월의 단절에다가 친부모가 아니란 사실이 상당한 충격으로 소천악을 강타했다. 원망의 대상이 무너지자 순간적으로 가치혼돈이 찾아오며 그를 괴롭히고 유혹했다.
눈을 번쩍 든 그는 싸가지 없는 젊은 놈을 주시했다. 잠깐의 기다림 끝에 그자가 마침 으슥한 곳으로 걸어가자 쏜살같이 움직여 혈을 제압했다. 영문을 모른 채 두려움에 떨던 그에게 마치 얼음 같은 살벌한 소리가 들렸다.
"당신은 얻어맞아도 되는 인간성을 가지고 있소이다."
말과 동시에 손과 발을 이용한 가차 없는 뭇매질이 이어졌다. 이미 소리를 내력으로 차단한 후라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으악! 왜 이러시는 거요?"
"몰라서 물으십니까? 이 싸가지라곤 티끌만큼도 없는 양반아. 차라리 죽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