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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천악 104화

무료소설 소천악: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1,109회 작성일

소설 읽기 : 소천악 104화

 

  기억에 선한 거리를 걷다 보니 지난 십여 년 동안 뇌리에 뚜렷이 박힌 건물 하나가 정면으로 나타났다.

 

  이 장에 달하는 커다란 나무 대문에 승천하는 용이 조각되어진 고풍스럽고도 귀티나는 정문 뒤로 화려한 전각이 서너 개 자리한 장원이다. 소천악의 눈이 더더욱 애수에 잠겨갔다. 금방이라도 뛰어 들어가 부모님을 찾고픈 마음이었지만 애써 누르고 조용히 주변을 살펴보았다.

 

  그의 시야에 금방 이상한 낌새가 잡혔다. 기억과는 약간 차이가 난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심상치 않다는 생각에 슬쩍 신법을 전개해 일 장이 훨씬 넘는 담벽을 가볍게 뛰어넘어 정원에 살며시 내려앉았다. 인기척이 있나 살펴본 후 빠르게 나무숲 사이로 은신하여 장원 내를 날카로운 시선으로 살펴봤다.

 

  어릴 때 모습 그대로였지만 오랜 세월이 흘러서인지 왠지 낯선 기분을 지우기 힘들었다. 가만히 장원 내 중앙에 있는 큰 전각을 뚫어져라 노려봤다. 그 전각엔 아버지가 늘 업무를 보던 표국주 집무실이 있었다.

 

  한 시진을 가만히 쳐다보자 이윽고 전각의 문이 열리면서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소천악의 시선이 집중되며 다시 보는 아버지의 얼굴을 쳐다보려 했다.

 

  그러나 이게 웬일인가!

 

  표국주 사무실이 분명한 방에서 나온 이는 그의 아버지가 아니었다. 사십대의 나이 정도로 보이는 체격 건장한 무림인이 걸어나왔다. 어리둥절한 소천악은 내심 이사 갔나 하는 생각으로 서서히 몸을 돌리려 했다.

 

  "이봐! 소대영."

 

  귀에 익은 아버지의 이름을 그 사내가 불렀다. 흠칫한 소천악이 다시 시선을 집중하는 순간이다.

 

  "네, 국주님! 부르셨습니까?"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만 한 남자가 빠르게 뛰어와 고개를 굽실거렸다.

 

  "어디서 뭐 한 게야? 인생이 불쌍해서 거둬줬더니만 이리 게으름을 피우면 곤란하지."

 

  "죄송합니다. 잠시 장작을 정리하느라."

 

  쩔쩔매며 변명하는 남자였다. 소천악은 설마 설마 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아버지는 위풍당당한 표국주의 모습이 마지막이다. 저런 위인이 아버지일 리가 없다고 내심 중얼거렸다. 하지만 하늘은 항상 만인에게 공평하다는 듯이, 말하면서 고개를 든 남자의 얼굴을 본 소천악의 얼굴이 사색으로 변해갔다.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들어 보이는 얼굴이지만 틀림없는 그의 아버지 소대영이다. 전처럼 활기찬 모습이 아니고 어딘가 모르게 주눅이 들어 있는 모습이 역력했다.

 

  아찔한 그의 마음에 불을 지르는 남자의 목소리였다.

 

  "정신 차려! 네놈이 내게 빚진 은자를 갚으려면 평생을 뼈가 빠지게 일해도 부족한 거야."

 

  "죄송합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노력하지요."

 

  연신 굽실거리는 소대영을 보고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이런 모습을 보려고 찾아온 집이 아니다. 자신을 구렁텅이에 밀어 넣고 얼마나 잘 사는지 눈 부릅뜨고 바라보려고 온 길이다. 가슴속에서 알지 못할 허무감과 소리 없는 분노가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는 미묘한 느낌이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소천악의 시선은 소대영의 행적을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따라다녔다. 가면 갈수록 분노보다는 연민의 정이 치밀어 올라 견디기 힘들었다.

 

  자신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아버지였다. 12년의 지옥 같은 세월을 선사한 양반이다. 차갑게 대하며 비아냥거리려던 생각이 흔적 없이 사라져 갔다 부모였다. 아무리 미워했다 해도 초라한 모습을 보게 되자 가치관이 온통 혼란스러워졌다. 답답해지는 가슴을 주체하지 못해 중얼거렸다.

 

  "제길! 잘 살아야지 이게 뭐야!"

 

  해는 서산에 기울고 하루 종일 장원 일에 정신없이 뛰어다니던 소대영이 마침내 하루 일을 끝내고 힘없이 장원 문을 나섰다.

 

  터덜터덜 걸어가는 그를 보며 복잡한 시선을 지우지 못한 채 소천악이 소리 없이 따라갔다. 한참을 걸어 도착한 곳은 어릴 때 기억으로 익히 알고 있는 빈민가였다. 거기서도 한참을 걸어가니 정말 집이라고 말하기 민망한 초가집이 덩그러니 서 있었다.

 

  설마 저기는 아니겠지 하며 왠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바라보던 소천악의 바람을 사뿐히 뭉개며 소대영은 대문이라 칭하기도 부끄러운 문을 밀치고 들어서며 말했다.

 

  "내가 왔소."

 

  목소리에 방문이 와락 열리며 열 살 남짓한 소녀 하나가 댕기머리를 찰랑이며 뛰쳐나왔다

 

  "아빠!"

 

  "오냐, 내 새끼! 하루 종일 잘 놀았냐?"

 

  고생스런 장원 일을 뒤로한 그의 얼굴은 환히 빛나며 너털웃음을 흩뿌렸다.

 

  "응 아빠! 엄마랑 잘 놀았어."

 

  "잘했구나. 우리 예쁜 딸!"

 

  얼싸안는 소대영의 입가엔 행복이란 그림자가 어느새 내려앉았다.

 

  "오셨어요? 하루 종일 고생 많았어요."

 

  "허허, 고생은 무슨! 오늘은 국주님이 특별히 먹으라고 돼지고기를 주시지 않겠소."

 

  "아니, 이렇게 고마울 데가!"

 

  얼른 반색을 하며 고기를 싼 종이를 드는 여자의 얼굴에 소천악의 고개는 푹 숙여졌다. 첫눈에도 알아볼, 아니 꿈에서도 잊지 못할 분이다.

 

  어머니!

 

  그녀는 소천악의 어머니인 묘인아(苗仁雅)였다. 어릴 때 수많은 말썽을 부려 소대영이 호통을 치면 품안에 안고 변명해 주던 어머니! 바로 그분이었다.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곱디고운 얼굴에 주름이 한가득인 게 시야에 들어오자 소천악의 고개는 한없이 숙여만 졌다.

 

  안 가겠다고 울부짖는 일곱 살 꼬마를 강제로 끌고 가던 아버지의 기억과 쫓아 나오며 애절하게 자신의 이름을 부르던 어머니의 모습이 번갈아 그의 머리에 스쳐 갔다.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돌아선 소천악의 눈에는 싸늘한 섬광이 빛났다.

 

  하오문 지부에 말없이 들어서는 소천악의 모습은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말없이 최우량 고객패를 내미는 걸 받아 든 하오문도는 기겁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신의괴협을 뵙습니다."

 

  더 이상 정중할 수 없을 정도로 경의를 표하는데도 소천악의 표정은 변함없이 굳은 채 입을 열었다.

 

  "수고하십니다. 지부장님을 뵙고 싶소이다."

 

  "어서 따라오시지요."

 

  오랜 사람을 겪어본 자답게 그는 소천악의 기분이 최악임을 눈치채고 조심스럽게 지부장실로 안내했다.

 

  잠시 후 대연강(岱然剛) 지부장실은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살벌지경을 연출했다.

 

  "지부장님, 소대영 일가의 지난 행적을 지금 즉시 알아봐 주십시오. 하나도 빠짐없이 부탁합니다."

 

  "네, 그러지요. 시간을 좀 주시면……."

 

  눈치를 슬슬 보는 대연강 지부장을 보며 소천악이 차갑게 말했다.

 

  "지부장님, 지금 제 심정은 눈앞에 소림사가 있다 해도 모조리 박살내고픈 심정이오이다. 서둘러주시오."

 

  "헉!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대연강 지부장은 눈앞이 깜깜했다. 저 인간은 자기 입으로 한 말을 한 번도 어긴 적이 없다는 걸 모를 리 없었다. 무슨 연유인지는 몰라도 심기가 극도로 상했다는 걸 안 그는 나는 듯이 지부장실을 나가 죄 없는 하오문도를 족치기 시작했다.

 

  난리치는 대연강 지부장의 심정을 모를 리 없는 하오문도들은 죽을힘을 다해 수집된 정보를 찾아내 종합적인 보고서를 만드느라 파김치가 되었다.

 

  불과 한 시진도 지나지 않아 정보가 적힌 서찰을 들고 들어온 지부장이다.

 

  "여기 소가장의 몰락에 대한 상세한 이유를 적은 정보입니다."

 

  "수고하셨소."

 

  짤막한 치사와 함께 서찰을 받아 든 소천악은 한 자라도 놓칠세라 정신없이 읽어 내려갔다. 읽는 동안 그의 얼굴색은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애달픈 표정이 대다수였다. 꼼꼼히 두 번을 본 후에야 서찰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깊은 상념에 잠겨들었다.

 

  서찰의 내용은 그의 모든 가치관을 무너뜨릴 만큼 충격적이다. 여태껏 소대영과 묘인아를 부모로 생각했으나 아니었다. 소대영의 친구 아들이 자신이었다.

 

  죽마고우였던 둘은 소천악의 부모가 몹쓸 전염병에 걸려 죽자 이제 갓 돌이 지난 자신을 데려다 키운 것이다. 혹시나 자신들이 자식을 낳으면 홀대할까 봐 자식도 안 가지고 지내온 세월이었다.

 

  자신을 무도관에 데려다 준 것도 가업이 완전히 기울어지자 마지막 남은 은자를 털어 보낸 사실을 십오 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서야 안 소천악이다.

 

  눈가에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누가 친구의 아들을 위해 저토록 희생할 수 있겠는가!

 

 

 

  옆에 앉아 있는 대연강 지부장은 좌불안석이다. 엉덩이를 들고 얼른 나가고픈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자칫 비위를 건드릴까 봐 그저 눈치만 살필 뿐이다.

 

  그가 들은 신의괴협은 한마디로 무섭다 못해 두려운 인물이었다. 강호에서의 행적은 약과고 천축에서 자행한 일을 들을 때마다 등골이 서늘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 두려운 인물과 같은 방에서 함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오금이 저려왔다.

 

  숨도 제대로 못 쉬는 그에게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대 지부장님! 여기 적힌 사실이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실이겠죠?"

 

  "물론입니다. 표면상으로는 위장되어 있지만 그 정확한 내막은 서찰에 적힌 대로입니다."

 

  "음, 정말 수고하셨소. 소가장의 몰락에 대해 이렇게 자세하게 알고 계셔서 정말 고맙소이다."

 

  소천악은 의자에서 일어나 깊게 읍을 하며 예를 갖췄다. 순간적인 장면에 뜨악한 얼굴로 멍하니 있다 얼른 일어서서 마주 읍을 하며 지부장이 말했다.

 

  "별말씀을! 우리가 하는 일이지요."

 

  "그래도 고맙소. 이런 정보가 없었다면 원통할 뻔했소. 이건 정보비요."

 

  전낭에서 망설임 없이 꺼내준 전표를 무심코 살펴본 지부장은 숨이 멎을 듯한 충격을 받았다. 전표에 적힌 액수는 은자 일만 냥이다.

 

  가공할 은자를 서슴없이 주는 소천악의 배포가 차라리 무서운 대연강 지부장이다.

 

  "이제 전 가보겠소이다. 그리고 왜 소가장이 이리 몰락했는지 그 자세한 내막을 알아봐 주시오. 또 필요한 게 있으면 찾아오리다."

 

  "그러시지요. 안녕히 가십시오."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소천악은 서둘러 하오문을 벗어나 객잔으로 향했다. 그날 밤 방 안에 있던 그는 무서울 정도로 술을 퍼마시기 시작했다.

 

  벌써 죽엽청주 두 동이를 거덜낸 후 다시 새 통을 따 통째로 벌컥벌컥 들이부었다. 얼굴이 붉어지다 못해 온몸이 달아오른 그의 입에서 취기 서린 말이 나왔다

 

  "제길 잘 살아야 할 거 아냐! 왜 이 꼴이 되어 마음을 아프게 만들고 난리야!"

 

  술김에 터져나온 진심이 아리게 소천악의 머리를 후벼 팠다. 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원망과 저주를 퍼부으면서 살아왔다. 자기가 이런 고생을 하는 동안 잘 먹고 잘 살 부모를 생각할 때마다 이를 갈았다.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천축행을 통해 느낀 바가 있어 어렵게 어렵게 찾아온 귀향길이었다. 느닷없이 다가온 진실에 머리를 쥐어뜯으며 술 속에 파묻혀 하룻밤을 꼬박 새웠다.

 

 

 

  창가로 아침 햇살이 눈부시게 비춰오자 눈이 부신 그가 멍하니 떠오르는 해를 한없이 바라보았다.

 

  어지러운 상념의 틀이 밝아오는 아침에 밀려 조용히 정리됐다. 입가에 미소가 살며시 감돈 그는 이내 마음을 추스르고 내공을 끌어올려 술기운을 일제히 배출했다. 삽시간에 방 안은 안개가 낀 듯 자욱한 술기운이 가득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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