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천악 10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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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66회 작성일소설 읽기 : 소천악 103화
알면서도 물어보는 소천악의 가슴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그건 저도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차마 그 의미를 말하지 못한 능 지부장이다. 소천악이라고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를 리가 없다. 얼굴이 금새 붉으락푸르락해진 그가 버럭 소리쳤다.
"아니, 어떤 분이 감히 그런 별호를 만들었단 말인가요? 혹시 하오문에서 저지른 일은 아니겠지요?"
"그 무슨 말씀을. 우리가 왜 대협에게 불리한 짓을 하겠습니까?"
기겁한 능 지부장이 극구 손사래를 쳤다.
"그럼 누구란 말이오?"
"실은 개방에서 저지른 짓입니다. 우리도 도무지 영문을 알지 못하는 일이지요. 왜 개방이 대협을 그리 만드는지……."
가만히 듣던 소천악은 그 내막을 어림짐작할 수 있었다. 전에 장안성 근처에서 만났던 나지문이란 작자의 소행이 분명했다. 아무리 봐도 그 사소한 원한이 이런 일을 만들었다 생각하니 열불이 하늘까지 뻗쳐올랐다.
"감히 개방 분들께서 나 소천악에게 시비를 건다 이거지요. 후후! 나를 너무 물컹하게 본 모양인데 어디 두고 보세요. 아주 개방이 치를 떨도록 만들어주지요."
스산한 말투에 능 지부장은 괜히 전신이 추운 느낌이었다. 놀란 그가 얼른 말을 돌렸다.
"그리고 요즘 강호에 이상한 무리들이 출몰한다는 정보입니다. 도무지 정체를 알기 힘든 그들은 강호 곳곳에서 수많은 혈겁을 자행하고 있답니다."
소천악은 듣자마자 그들이 누구인지 바로 알아챘다. 하지만 결코 말해 주고픈 기분은 아니었다. 사실 정파란 곳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이 숨어 있는 그로서는 당연한 행동이다.
"그래, 무슨 일을 저질렀다는 말인가요?"
"벌써 10여 개의 문파가 하룻밤 사이에 멸문지화를 당했습니다. 자고 일어나니 불탄 잔재만 남는 거지요."
"거야 뭐 원한이 있으니 그러겠죠. 그거 말고는 별 소식 없소?"
남의 집 불구경하듯 딴청을 피우며 말을 돌리는 소천악이다.
"그 외에야 별거 없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던 소천악은 일단 혈사부의 누명을 벗겨주기로 결심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대로 내버려두기는 영 뒷간에 갔다가 닦지 못하고 그냥 온 기분이다.
그런 말은 아무래도 초면보다야 친숙한 광동성 곤소우 지부장이 적격이란 생각에 입도 벙끗하지 않았다.
혈교가 천하를 뒤집든 말든 아직은 별 관심이 없었다. 천하무림에 이해타산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그였다. 그저 자신의 목적을 아직 잊지 않고 이룰 꿈만 꾸었다.
걸음을 재촉해 다시 광동성에 들어선 그는 서둘러 하오문을 찾았다. 아무래도 구관이 명관이라고 안면이 있는 곳이 편하다는 생각이다.
모습을 보이자마자 귀빈 대우를 받으며 곤소우 지부장실로 들어섰다. 당연히 곤 지부장의 요란스런 환영사를 받아야 했다.
"어서 오십시오. 이거 오랜만에 뵙습니다. 이제는 강호의 거목으로 발돋움하셨습니다."
"하하, 지부장님을 뵈니 이거 반가움에 감개가 무량합니다."
의례적인 인사치레를 마친 소천악은 성질대로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큰 청부 하나 할까 하오."
"말하시지요. 무엇이든지 들어주라는 총단의 지시입니다."
흔쾌하게 말하는 곤소우를 보며 내심 조난향 문주를 생각하며 웃음지었다. 아무리 성질을 부려도 은원이 확실한 그녀의 성격이 마음에 쏙 들었다.
"고맙소이다. 청부는 다름이 아니고 십여 년 전에 일어난 혈검신마가 무림공적이 된 사건의 진상을 밝혀주시오."
"헉, 그건!"
경악한 곤소우의 입은 다물어질 줄 몰랐고 바라보는 소천악은 태연하기만 했다.
"아, 그렇다고 무력으로 알아내라는 게 아니지요. 다만 그 음모를 꾸민 이들을 추적해 증거 자료가 있는 곳만 말해 주면 됩니다."
"그건 정말 힘들고도 위험한 일입니다. 자칫하면 정파무림에 공적으로 몰릴 위험이 커서……."
"그래서 못 해주겠다는 말씀이신가요?"
이미 기분이 상한 신호가 얼굴 가득 번져나오며 대뜸 소천악의 말투가 시비조로 변해갔다.
"그게 아니고 어려움이 많은 일이라……."
"청부금은 달라는 대로 주겠소. 일단 승낙하신 걸로 알고 기한은 앞으로 일 년을 드리겠소. 아무래도 쉬운 일이 아니니 충분한 날짜를 드리는 겁니다."
단호한 소천악의 태도에 곤소우는 더 이상 거절했다가는 바로 지부가 요절날 것 같은 위기감이 번뜩 뇌리를 스치자 앞뒤 생각 없이 바로 대답했다.
"알겠소이다. 일 년 내로 알아내도록 최선을 다하지요."
"그렇게 해주시오. 이건 정보를 수집하는 데 드는 돈을 미리 당겨 준다는 기분으로 드리는 것이니 받으시죠."
내미는 전표를 무심코 받아든 곤소우는 질겁할 수밖에 없었다. 전표는 무려 이만 냥이란 거금이다.
"아니, 소 대협! 이건 너무 많소이다."
"받아두세요. 어차피 눈먼 돈 주워 온 겁니다. 후후!"
야릇한 웃음을 지으며 손사래를 치는 소천악이다. 눈먼 돈은 맞는 말이었다. 건성제에게 뜯고 목여국 아타수 왕에게 뜯은 돈 중에 극히 일부분이다. 이제는 아무도 소천악이 가진 돈을 짐작하기도 힘들었다.
최소한 엄청난 금액이란 건 분명했다. 자식을 살리기 위해 퍼부은 돈이 결코 만만할 리가 없었다. 인심 쓰는 척 실리는 다 챙긴 셈이다.
"그래도 이건 너무 많은 듯합니다."
"그냥 넣어두시죠. 뭐 정 그러시면 나중에 청부할 거 미리 예약금으로 받았다 생각하세요."
"음, 그렇다면야. 일단 청부한 건에 대해 열심히 하지요."
"알겠소이다. 좋은 정보 감사하고 혈검신마에 대한 일을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에 부탁합니다."
"최선을 다하지만 어려운 일이란 걸 생각해 주시지요."
"물론이외다."
좋게 일을 마무리한 소천악은 하오문을 떠나 갈 길을 재촉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새로이 아수라협이라는 별호를 얻은 소천악의 기분은 최악이다.
"이런 빌어먹을 분들을 봤나! 음, 빌어먹는 분들 맞군. 후후!"
실소를 머금던 그는 복수의 칼날을 갈았다. 감히 자신의 명호를 엉뚱하게 바꾼 개방이라는 방파를 용서하고픈 마음은 티끌만큼도 생겨나지 않았다. 그 복수를 어떻게 해야 하느냐가 지금의 그로서는 최대의 과제였다.
혈교가 발호하여 강호무림에 먹구름을 짙게 드리우는 건 그와는 아무런 상관 없는 일이다. 비록 본의 아니게 혈교 고수들을 여러 번 물 먹였지만 이미 그 일은 머릿속에서 지워진 지 오래였다. 먼저 건드리지 않으면 무림의 정의를 위해 초개와 같이 몸을 던지는 불상사는 절대 저지를 이유가 없는 터였다.
가만히 하늘을 쳐다보던 소천악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강호에 나와 지내다 보니 본의든 아니든 수많은 지인을 알고 사람의 정이 무언가를 조금씩 느껴갔다.
가족 생각이 수도 없이 났지만 어릴 때의 분함이 떠올라 지웠던 기억도 떠올랐다. 아무리 기억하지 않으려 해도 시도 때도 없이 다가오는 추억에 머리가 깨질 듯 아파왔다.
한참을 고민하던 소천악은 간단하게 결론을 냈다. 일단 찾아가서 왜 그랬는지를 알아보고 행동을 결정하기로 했다.
마음이 정해지자 가벼운 발걸음으로 호남성을 향해 일직선으로 북상했다.
한편.
혈교에서는 난리가 났다. 중원을 암약하는 전 혈교인들을 지휘하는 직책인 영주인 파면수라(破面修羅) 두수종(杜秀宗)이 노기충천해 고함쳤다.
놀라운 일이었다. 육십 년 전 강호를 온통 피바다로 만들고 흔적 없이 사라진 그가 혈교에 몸을 담고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무엇이라! 소천악 그놈이 다시 중원으로 돌아왔다고."
"네, 영주님. 유감스럽지만 사실이라 합니다."
휘하에서 실무를 관장하던 각주인 혈인귀(血人鬼) 막광(莫光)이 고개도 못 들고 조아렸다. 그 또한 삼십 년 전 강남무림을 주름잡던 최절정고수였다.
실로 가공할 인물들이 혈교에 가담해 서서히 암운을 드리웠다.
"아니, 도대체 천축 무림인들은 다 허수아비라더냐? 우리가 전해준 정보를 가지고도 그놈을 못 죽이다니."
"그게! 우리 예상보다 소천악 그놈의 무공실력이 엄청난 듯합니다. 천축에서 보여준 그 진신무공은 절대 우리가 아는 그놈이 아니었습니다."
"아이고, 골치야! 어디서 떨어진 혹덩어리 하나가 영 애를 먹이는구나. 그놈이 우리의 정체를 알았을 공산은 있나?"
머리를 싸매고 말하는 두수종이었다.
"아무래도 눈치가 어느 정도는 알아차린 듯합니다. 워낙 우리와 많은 싸움을 해서 그런지 대충 정체를 파악한 인상입니다."
"큰일이야. 그놈이 혹시라도 정파에게 우리 이야기를 한다면 원대한 우리 계획에 차질이 생길 수도 있어."
어두운 얼굴로 고민하는 두수종을 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는 막광이었다. 옆에 있기도 두려운 대마종이었다.
"아직까지는 그런 낌새가 안 느껴집니다. 말하려면 벌써 할 기회가 여러 번 있었는데도 전혀 움직일 생각이 없는 듯합니다."
"요샌 그놈이 죽었다는 소식만 기다리는 기분이야. 살수에게 청부해 봐야 실패할 확률이 많고 이번에 다시 움직이면 그놈도 더 이상 침묵하지 않을 거 같고 말이야."
"제 생각도 같습니다. 일단은 더 이상은 그놈을 건드리는 건 타초경사의 우를 범할 우려가 있다고 보여집니다."
고심에 빠진 두 사람의 상념을 방해하는 소리가 들렸다.
"영주님, 지금 신의괴협 소천악이 보낸 서찰이 도착했습니다."
"무어라? 서찰이라니?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잡혔다가 풀어준 고수에게 전해준 거라 합니다. 여기 서찰이 있습니다."
잡아채듯 서찰을 받아 펼친 두수종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와락 서찰을 구기는 그가 버럭 소리쳤다.
"이런 건방진 놈!"
"무슨 내용입니까? 영주님!"
막광이 묻자 신경질적으로 서찰을 던지며 씹어뱉었다.
"읽어봐라. 나참, 기가 막혀서."
퉁명스레 말하는 두수종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구겨진 서찰을 집어 조심스레 펼쳐 읽었다.
<조용히 살고 싶소. 조금 협조해 주시오.
신의괴협 소천악 서(書)>
짤막하지만 다분히 경고조의 서신에 기가 막혀 말도 안 나오는 막광이었다.
"이거 우리를 완전히 무시하는군요."
"음! 보면 볼수록 어려운 인물임은 분명하오. 제 놈이 우리와 얽히기를 싫어한다는데 그게 어디 뜻대로 되나 봐라. 우리 교도가 얼마나 희생되었는데."
"맞습니다. 꼭 저놈의 사지를 갈갈이 찢어야 이 분이 풀릴 겁니다."
"천천히 저놈을 죽일 방안을 연구해 봐."
"네, 영주님."
대답하는 막광이나 지시하는 두수종이나 소천악을 생각할 때 이가 갈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아직 눈에 선한 거리 풍경이 시야 가득 들어오자 소천악의 표정이 묘하게 변해갔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차곡히 머릿속에 살아 오자 아련한 향수가 온몸으로 느껴졌다. 생각나는 기억은 여섯 살까지 밀려 내려갔다.
희한하게 지나고 나니 즐거운 기억이 압도적으로 많았다는 사실이 새삼 느껴지자 아리송한 기분이 들었다. 막연히 생각하긴 나쁜 기억만 있었는데 정작 뚜껑을 열어보자 의외의 결과에 잠시 당황감마저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