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천악 97화
무료소설 소천악: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65회 작성일소설 읽기 : 소천악 97화
"잠시 고인께 여쭐 게 있어 왔습니다. 지금 이렇게 하시는 건 몸을 강철같이 단단하게 만드는 겁니까?"
"허허! 아니외다. 보아하니 중원에서 오신 분인 듯한데 이는 정신을 갈고닦다 보면 부수적으로 얻는 경지지요. 실로 하찮은 경지입니다."
겸손하게 답하는 노인은 멀리서와는 달리 얼굴이 동안이었다. 더욱 관심이 간 소천악이 넌지시 물었다.
"조금 더 깊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요?"
"그러시구려. 도를 알려는 자를 물리치는 건 도리가 아니지요."
그 후 소천악과 대식국의 도인은 오래도록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화 도중 소천악은 머리를 범종으로 맞는 충격을 몇 번 겪어야만 했다.
그가 말하는 정신의 세계는 놀랍게도 혈천신공이 추구하는 무의 극과 일맥상통하는 구석이 있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이 뇌리 깊이 박혔다.
"신체란 정신이 이끄는 대로 갈 뿐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몸이 안 따라준다고 말하지만 그건 아닙니다. 정신이 이끈다면 신체는 아무런 저항 없이 그 의지를 따라 움직일 뿐이죠."
놀라운 말이었다.
여태껏 막혔던 하나의 벽이 뚫리는 기분이었다. 혈검오식이 추구하는 검초구결에 딱 들어맞는 이야기였다. 아직 그 정확한 실체는 손에 잡힐 듯 말 듯 했으나 길은 찾아낸 기분이다. 뛸 듯이 기뻐한 소천악은 은자를 손에 잡히는 대로 주며 사의를 표했다.
도인은 처음에 거부하다가 이내 웃음과 더불어 받아 바로 주위에 모여 있던 빈민들에게 모두 나눠줬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미 딴 세계에 들어선 소천악은 얼른 자리에서 벗어나 조용한 곳을 찾아 깊은 명상에 잠겼다. 머릿속에서 혈검구식의 구결이 흐르고 흘렀다. 돌고 돈 구결은 새로운 의미를 가지고 다시 뇌리에 잠겨갔다.
행복한 마음으로 다시 눈을 떴을 때 옆에서 지루한 표정으로 있던 심자앙이 퉁명스레 말했다.
"무슨 생각을 하루 종일 하시는 겁니까?"
"아니, 하루 종일이라뇨? 잠시 명상에 빠진 것뿐인데요."
"하하! 지금 하루가 지나고 이튿날입니다. 만 하루를 눈감고 계셨소이다. 대주님!"
"헉, 하루나요?"
놀란 소천악은 느낌상 찰나인 듯한 시간이 하루가 지났다는 말에 깜짝 놀랐다. 과연 도인이 말해 준 수련법은 엄청난 효과가 있다는 걸 느꼈다.
이번 천축행에서 정말 귀한 걸 얻은 기분에 한결 상쾌해졌다. 오랜 고생이 말끔히 씻어 내려가는 마음이었다. 쓸데없는 시간 낭비란 억울함이 말끔히 사라져 갔다.
흔쾌한 마음으로 일행 사이로 돌아오자 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먼저 진여해 장로가 찾아왔다.
"대주!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정파 무림인들은 여기에서 돌아가야 할 것 같소. 부상자들이 갈수록 상태가 악화되어 더 이상 치료를 미룰 처지가 아니오. 속히 중원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소."
입에 발린 소리를 하는 진 장로를 보며 내심 코웃음을 쳤지만 절대 내색은 하지 않는 소천악이다.
"애로사항이 많으시군요. 할 수 없죠. 강제로 모시고 갈 처지도 아니고 하니 진 장로님 뜻대로 하십시오."
"이리 이해를 해주시니 고맙소이다. 그러면 우리는 돌아가겠소이다. 황상 폐하께는 우리 사정을 잘 말해 주셔서 노여움이 없도록 부탁드립니다."
"그러지요. 모쪼록 안전하게 돌아가시길 기원합니다."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대신하자 진 장로는 붉어지는 얼굴을 얼른 돌리며 사라졌다. 사실 정파 무림인들은 수치심을 느끼면서 여기까지 어쩔 수 없이 동행했다. 정파무림에서 사활을 걸고 보낸 상단의 성공적인 거래를 위해 참을 인(忍) 자를 가슴에 새기며 온 처지였다.
이제 어느 정도 이윤을 보자 안도한 정파인들은 연일 진여해 장로를 닦달했다. 돌아가자는 이야기다.
건성제와의 약속은 뒷전이었다. 이 정도 피해를 보고 막아낸 자신들의 공을 전혀 무시하지 않을 거란 판단이다.
소천악의 제거란 황명은 현실적으로 이룰 수가 없었다. 그의 무공 경지도 놀라운 터에 옆에서 지지하는 수많은 고수를 볼 때 허튼 마음은 바로 황천길이었다.
모든 걸 포기한 진여해 장로와 정파 무림인들은 바로 행동에 들어갔다. 상단을 수습한 채 모두 떠날 준비를 서둘렀다. 소천악과 일행들은 묵묵히 그들의 움직임을 바라만 보았다. 사실 더 이상 같이 행동할 마음이 들 형편은 아니었다.
막 출발하려는 순간 쑥스러운 표정을 한 진여해 장로가 다가왔다.
"소 대주! 잠시 이야기 좀 하십시다."
"그러세요."
아무도 없는 곳에 간 진여해 장로가 힘들게 말했다.
"미안하지만 포달랍궁에 전할 서신을 하나 주시구려."
바로 그 의미를 간파한 소천악이 피식 미소를 지었다. 끝까지 이용하려는 저들의 마음이 썩 내키지가 않았다. 하나 중원에 돌아가서 악소문을 퍼뜨릴 경우 피곤해지는 건 자신임을 잘 아는 소천악이다.
아직까지 정파와 척을 지고픈 마음이 없던 소천악은 흔쾌히 수락했다.
"알겠습니다. 그러지 마시고 아예 포달랍궁 고수 두 분과 동행하시지요. 그게 한결 나을 겁니다."
"오! 그래 주시면 더욱 고맙지요."
돌아온 소천악의 설득에 따라 포달랍궁 고수 두 명이 함께 정파 무림인들과 길을 떠났다.
"에이, 속이 후련하네."
옆에 있던 종천리가 크게 소리치자 대부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거기에는 소천악도 포함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한바탕 난리를 치고 난 후에 관무평 대인이 돌아왔다. 얼굴 가득 흡족한 표정이 떠오른 걸 보니 잘 풀린 모양이었다.
"하하! 관 대인! 일은 어떻게?"
"껄껄, 소 대주! 일이 아주 잘되었소이다. 가장 큰 산을 넘었으니 이젠 황상 폐하의 은혜에 티끌이라도 보답한 기분이오."
"오, 잘되었습니다. 자, 그럼 이제 출발해야지요."
"그럽시다. 이제 두 나라만 들르면 다시 중원으로 돌아가겠구려."
모처럼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대화를 마친 일행은 상인들이 모든 거래를 마치고 돌아오자 바로 길을 떠났다. 이제는 중원으로 돌아가는 여정이란 사실에 모든 이의 마음은 푸근해져만 갔다.
중간에 술만 마시자고 난리치던 구궁건 아수라마궁 육궁주도 아쉬운 눈빛을 남기고 천천히 사라졌다. 물론 가면서도 언제든지 오라는 호의를 남겼다.
여정 동안 소천악은 일행과 거리를 두고 대식국 도인과의 대화를 통해 느낀 심득을 정신없이 파고들었다. 무공이란 강하면 강할수록 좋다는 만고진리를 깨달은 그가 정신을 집중하자 하루가 다르게 혈검구식의 묘리를 새로 알아가는 기분이다.
심자앙의 조언에 따라 일행들 모두는 그런 그를 방해하는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동료가 강해진다는데 불만을 가질 이유가 전혀 없었다. 오히려 반길 형편이다.
지금도 무서우리만큼 강한 무공을 지닌 소천악이 어디까지 발전할지 기대심리마저 들었다.
제3-6장 왕자 사기 사건
무사히 여정은 계속되고 드디어 목여국 옆을 지나가게 되었다. 대식국과 함께 천축의 강대국으로 자리잡은 목여국이었다. 그러나 당나라와 적대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나라에 갈 이유가 없는 관무평 사신단은 우회하여 목여국을 피해 지나갔다.
가장 가까운 거리에 접근해 일행이 노숙할 채비를 할 무렵 한 마리의 전서구가 소천악의 손에 도착했다.
무영살막의 전서구였다.
서찰에는 목여 왕궁의 경비상황과 오는 길이 자세하게 적혀 있었다. 소천악은 이미 준비를 마친 상태로 심자앙과 마지막 의논을 할 시간임을 느꼈다.
"심 책사! 이제 때가 된 거 아니오?"
눈빛이 묘하게 빛나는 소천악의 말에 심자앙은 미소를 가득 베어물었다.
"맞습니다. 드디어 마지막 모험을 할 때가 온 거 같습니다. 이제 마지막 일만 성공적으로 처리하면 우리는 자유로운 몸이 되지요."
"아니, 자유로운 몸이라뇨? 심 책사님은 벼슬길에 오를 생각이 아닙니까?"
의아한 얼굴로 소천악이 묻자 심자앙은 피식 웃음을 보내며 말했다.
"후후, 아무런 배경은커녕 황제의 미움만 사는 소 대주의 사람이 벼슬길에 오른다면 언제 목이 잘릴지도 모르는데 그 길을 갈 리가 있습니까? 미우나 고우나 이제 저는 소 대주와 함께 살아갈 생각입니다."
"헉! 심 책사님. 전 아직 아무런 야망이 없소이다."
얼른 손사래를 치는 소천악이었으나 심자앙은 이미 막무가내였다.
"사람이 항상 자기 뜻대로 사는 건 아니지요. 두고 보면 제 말이 무슨 말인지 알 겁니다. 이제 중원무림은 보나마나 커다란 소용돌이에 휩싸일 거고 대주님은 거기서 한자리를 차지한 채 천하를 호령할 신세가 될 겁니다."
"머리 아픕니다. 그런 이야기는 나중에 하시지요."
고개를 흔드는 소천악을 보며 미소를 짓던 심자앙이 말했다.
"알겠소이다. 그건 나중 문제고 일단은 이 일을 잘 처리해야지요."
"후후! 난 심자앙 책사님만 믿소이다."
굳은 신뢰를 보이는 소천악을 보며 심자앙은 벅찬 감회를 느꼈다. 세월을 한탄하며 은인자중하던 이십 년 세월의 피로가 한순간에 녹아내리는 기분이다.
"허허,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대주님 같은 분만 있다면야 무엇이 두렵겠소이까? 이 심자앙 오늘에서야 태어난 보람을 느낍니다."
"그리 생각하시면 저야 과분하지요. 자자! 이제 왕궁을 엎어버릴 책략을 주시구려."
"알겠소이다."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심자앙의 입에서 그동안 고심 끝에 생각해 낸 기상천외한 계략이 줄지어 쏟아져 나왔다. 소천악이 하는 일이라곤 감탄성을 던지며 무릎을 때리는 일뿐이었다. 그렇게 한 시진이 소리 없이 스쳐 지나갔다.
심자앙의 계책을 낱낱이 듣고 뇌리에 새긴 소천악은 은밀히 종천리 혈살막주를 불렀다.
"종 막주님! 오늘 저와 함께 일 좀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황제가 부탁한 일인데 이거 잘못하면 천하의 부랑아로 찍힐 판입니다. 잘 처리하고 중원으로 돌아갈까 합니다."
"폐하께서요? 그럼 당연히 가야지요. 수하들도 데려갈까요?"
긴장한 채 묻는 종천리의 말에 바로 대꾸하는 소천악이다.
"아닙니다. 이 일은 은밀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고 소문나서 득 될 게 하나도 없습니다. 둘이서만 다녀오지요. 아마 별일 없으면 밤사이로 끝날 겁니다."
"그러시지요."
더 이상 캐묻지도 않고 종천리는 순순히 승낙했다. 둘은 흑의무복으로 갈아입고 아무도 모르게 야영지를 벗어났다. 일단 움직이기 시작하자 빠르게 신법을 전개해 달려가는 그들의 옆으로 나무가 휙휙 스쳐 지나갔다.
얼마나 달렸을까. 마침내 시선에 들어온 건 목여국의 왕궁이었다. 유심히 왕궁을 관찰하는 소천악을 보며 의아한 마음이 든 종천리가 물었다.
"왕궁에 볼일이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종 막주님은 저와 함께 가셔서 할 일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경험이 많으시니 조금 도와주셔야겠습니다."
"음! 이거 크게 노십니다. 주로 움직였다 하면 황궁 아니면 왕궁이군요."
어이없다는 듯 말하는 종천리였다. 소천악은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팔자가 이런 걸 어쩝니까! 저도 이번이 마지막으로 다시는 이런 일에 개입되지 않을 생각입니다. 아주 황궁이나 왕궁이란 말만 들어도 지긋지긋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