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천악 94화
무료소설 소천악: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39회 작성일소설 읽기 : 소천악 94화
막 그의 입에서 단호한 일성이 터져나오려는 순간 한발 앞서 소리가 들렸다.
"모두 긴장을 푸십시오. 저 금위대 대주 소천악입니다. 이분들은 싸우러 온 게 아니라 대화를 나누러 오신 겁니다."
엉뚱한 말에 정파 무림인들이 어리둥절해 영문을 모른 채 우왕좌왕할 때 소천악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들 검을 내려놓으세요. 이제 포달랍궁 고수분들은 우리의 적이 아닙니다. 서로 협조하여 이번 천축행을 도와주실 동반자입니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요? 아까까지만 해도 목숨을 걸고 싸운 작자들과 함께하라니 그게 말이 되오?"
화를 벌컥 내는 이는 점창파 장로인 교단생(喬端生)이었다. 화를 내는 것이 무리도 아니다. 포달랍궁과의 접전으로 이미 문파에서 차출한 삼십 명의 고수 중 이십오 명이 죽거나 심한 부상을 당한 터라 사실상 궤멸 상태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가 갈리는 원한을 품고 사생결단을 내려는 찰나에 황당한 말을 듣자 노기충천했다. 펄펄 뛰는 그를 바라본 소천악이 무심히 말했다.
"그럼 점창파는 다시 포달랍궁과 싸우겠다는 겁니까? 정히 그렇다면 그러시지요."
"무엇이? 감히 네놈이 점창파를 우습게 안다는 거냐?"
"그러는 장로님은 감히 황제 폐하의 칙령을 우습게 아는 겁니까? 점창파가 정녕 황실과 척을 지고 해보겠다는 겁니까?"
"이이……."
노기가 머리끝까지 치민 교단생 장로는 차마 뒷말을 잇지못하고 입술만 부르르 떨었다.
"다들 들으십시오. 비록 오해로 시작된 싸움이지만 여기서 더 확대되면 물론 포달랍궁도 타격을 입겠지만 우리도 만만치 않은 타격을 입어야 합니다. 이제 천축행의 초입인데 벌써부터 전력이 상하면 우리의 목적은 물 건너갑니다. 서로 자중자애(自重自愛)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안 그렇습니까, 진 장로님?"
마치 약을 올리는 듯한 기분을 느낀 진 장로는 더 이상 반발하기 힘들었다. 사실 다시 싸움이 붙는다면 그나마 남아 있던 정파 무림인들의 생사를 전혀 장담하기 힘든 것이 작금의 현실이라는 걸 부인하기 힘들었다.
"틀린 말은 아니오. 하지만 우리 정파 무림인들의 피해가 워낙 커 바로 마음을 열기에는 힘이 드오."
"그 점 잘 압니다. 그래서 일단 말씀만 전하러 온 것이고 이분들은 우리와 함께 이제부턴 선봉에 서서 천축행을 할 터이니 정파 무림인들과 사신단은 후미를 지켜주십시오."
혀에 꿀을 바른 듯 청산유수로 터져나오는 소천악의 말에 더 이상 트집거리를 잡지 못한 진 장로가 엉거주춤 대답했다.
"정히 그렇다면야 일단 대의를 위해 대주의 의견을 존중하겠소."
"그리 이해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럼 전 돌아가서 선봉에 설 준비를 서두르고 바로 앞장서겠습니다."
"그러시구려."
시큰둥한 답을 들으며 소천악은 바로 심자앙 책사가 기다리는 본진으로 돌아갔다. 본진도 갑자기 나타난 포달랍궁의 고수들을 보고 경악했으나 소천악의 설명을 듣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전화위복이 된 현실에 온 대인을 비롯한 상인들이 제일 기뻐했다. 사실 포달랍궁과의 시비가 붙자 늘 노심초사하는 기분으로 안절부절못했던 그들이다. 이제 그 막강문파가 동료가 되자 기쁨은 말로 하기 힘든 처지였다.
가만히 사태의 추이를 돌아보던 관무평이다. 아무리 보아도 선봉에 따라가는 편이 훨씬 안전하리라는 판단을 지울 수 없었다.
옆에 있던 부사신인 구자강(丘自剛)이 넌지시 귀띔을 했다.
"대인! 아무래도 소 대주와 동행하는 편이 좋을 듯합니다. 이제 갈 길이 아직 먼데 더 이상 사이가 틀어지면 어려울 성싶습니다."
"음! 내 생각도 그러하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가보세나."
권력에 익숙한 관무평은 어제까지만 해도 함께 희희낙락하던 진여해 장로를 헌신짝처럼 버렸다. 실리를 찾아 헤매는 벼슬아치답게 얼굴에 철판을 깔고 소천악의 옆으로 말을 몰아갔다. 같잖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던 소천악이 곱게 볼 리가 없었다.
"아니, 왜 오신 겝니까?"
퉁명스런 소천악의 말에 어색한 미소를 짓던 관무평이 노기를 드러냈다.
"아니, 감히 내게 큰소리를 치는 게냐?"
"이거 왜 이러십니까? 다 아는 처지에! 저야 이번 천축행만 끝나면 야인으로 돌아갈 몸입니다. 출세에 관심도 없는 거 다 아시잖습니까? 여기서는 호위책임자가 전데도 불구하고 얼마 전까지 정파 무림인 옆에 찰싹 달라붙은 이가 누굽니까?"
"네 이놈! 난 황제 폐하의 명을 수행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느니라. 감히 폐하가 임명한 내게 불복하겠다는 거냐?"
직위를 이용해 계속 큰소리를 치는 관무평을 보며 칼날 같은 소천악의 일갈이 터져나왔다.
"정말 이렇게 나오실 겁니까? 내가 바보인 줄 아십니까? 황제 폐하께서 날 제거하란 명을 내린 거 다 압니다. 이따위로 나오면 정말 확 뒤집어버립니다."
"헉! 그게 무슨 가당치도 않은 소리냐?"
심장이 덜컹한 관무평이 급히 부인했지만 소천악은 요지부동이었다.
"시치미 떼어봐야 소용없습니다.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다만 이번 일만 무사히 끝내면 더 이상 황실과 상관 안 해도 된다는 말만 믿을 뿐입니다. 더 이상 감언이설로 날 속이시려 드신다면 다 집어치우고 그냥 가는 수가 있습니다."
거칠게 나오는 소천악의 말에 관무평은 눈앞이 깜깜해졌다. 황제도 두려워하지 않는 저자를 막을 방법이란 없었다.
"그래서 어쩌겠다는 게냐?"
할 수 없이 한풀 꺾여 들어가는 관무평의 속은 갈갈이 찢어지는 기분이다. 이제 와 저자가 그냥 간다면 자신의 임무 완수는커녕 목숨을 부지하기도 갑갑한 실정이다.
"앞으로 사신단이나 상단의 이동은 전적으로 내 관할입니다. 설사 대인이라 할지라도 말을 거역하시면 안 됩니다."
"이런 무례한!"
"무례라고요? 이거 도대체 대화가 안 되네요. 어서 정파 무림인들이 계신 곳으로 가시지요."
"어디 두고 보자. 감히 나를 능멸해?"
"살아 가신 다음에 능멸 타령하시지요. 어차피 좋은 게 좋은 거라 이러는데 이렇게 비협조적으로 나오시면 저도 관심 없습니다."
차갑게 말한 소천악은 뉘 집 개가 짖냐 식으로 돌아보지도 않고 사라졌다. 모멸감에 몸부림치던 관무평이 천천히 발길을 옮기려 하자 다급해진 건 부사신인 구자강이었다.
"대인! 이렇게 가시면 안 됩니다. 정파 무림인들은 큰 타격을 받아 이제 또 다른 습격이 있다면 우리의 목숨을 부지하기 힘든 처지입니다."
"그렇다고 나보고 저런 작자에게 고개를 숙이라는 거냐? 내 나이 마흔에 이십대 새파란 애송이에게 어쩌라는 거야?"
"대인! 황제의 명입니다. 이루지 못한다면 삼족이 멸할 대죄를 물을 걸 왜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커험!"
홧김에 잊어버린 일을 상기시켜 주자 관무평의 얼굴이 경련을 일으켰다. 사실 건성제의 성정으로 볼 때 실패란 바로 멸문이란 걸 모르는 바가 아니다. 고민을 거듭하던 관무평이 어쩔 수 없이 다시 소천악을 찾아갔다.
"이보시게, 대주! 알겠네. 내 자네 말을 항상 각골명심(刻骨銘心)하고 듣겠네. 부디 노여움을 풀고 잘 지내보시게나."
가만히 관무평을 쳐다보던 소천악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동행해야 할 신세인데 생각대로 기선 제압했으니 더 이상 얼굴을 붉힐 필요는 없었다.
"하하! 대인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제가 어찌 거절하겠소이까? 환영합니다."
"음, 고맙네."
속으로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도 겉으로는 웃어야 하는 관무평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갔다. 그렇게 관무평 일행이 따라붙자 눈치를 보던 다른 상단들도 슬금슬금 옆으로 곁다리를 끼고 들어왔다. 이윤에 밝은 그들이 위험부담을 안고 정파 무림인들과 동행할 리는 없었다. 말 그대로 정파 무림인들은 중원을 떠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찬밥 신세로 전락했다.
그들만이 움직이는 건 아무 의미도 없었고 그나마 남아 있는 상단은 정파무림에서 탈탈 털어 보낸 상단이 전부였다. 이제는 다른 상단으로부터 보호비 명목으로 수익 일부분을 받는다는 속셈은 아예 물 건너간 처지였다.
진 장로는 깊은 고심에 안 빠질 수가 없었다. 정파인 특유의 자존심이라면 그들끼리 가야 옳았다. 하나 머나먼 여정에 불과 백여 명의 고수로 헤쳐나가기엔 가시밭길이 바로 느껴졌다. 마음을 정한 그는 정파의 원로들과 깊은 상의를 거쳤다.
반대의 소리가 컸지만 현실적인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자 더 이상 반대하기는 어려운 그들이었다. 참담한 기분으로 어쩔 수 없이 찬성표를 던지는 원로들의 얼굴은 점점 수치심으로 물들어갔다.
진여해 장로를 위시한 정파 무림인들이 도살장에 끌려들어가는 소걸음으로 소천악을 찾아갔다. 차마 안 떨어지는 입으로 말하는 진여해 장로의 얼굴은 붉게 타올랐다.
"대주! 아무래도 이제는 전력 향상을 위해 서로 협조하여 가는 게 좋을 듯하오."
"그러세요. 반가운 소리네요. 아무쪼록 사존맹과 집마부고수들과 잘 융화되어 가기를 희망합니다."
"알겠소. 최선을 다해보겠소."
마지못해 웃으며 답하는 진여해 장로였다. 옆에서 지켜보던 사존맹의 요문탁과 집마부의 지공타는 옅은 비웃음마저 머금었다. 여기서는 정파라고 설칠 분위기가 아니었다. 고수의 수가 세력에서 일방적으로 밀리는 형국이다.
그 눈치를 모를 리 없는 소천악이 주변정리를 시작했다.
"자자! 이제 모두 한마음으로 가야 합니다. 이번 일에서는 정사파의 불협화음 같은 건 절대 용서할 수 없습니다. 혹시나 이런 마음을 품고 있는 분이 계시면 누구를 막론하고 단연코 추방할 겁니다. 이 말은 절대 빈말이 아닙니다. 시험하고픈 분은 얼마든지 해보십시오. 그 대가는 결코 작지 않을 겁니다."
위풍당당한 소천악의 말에 사존맹이나 집마부 고수들도 아무 대꾸를 할 수 없었다. 이미 소천악의 뒤에는 포달랍궁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함부로 하긴 어려운 실정이었다.
별수 없이 영원히 견원지간인 정사 무림인들이 어색한 표정으로 함께 동행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어느 정도 주변이 정리되자 소천악은 심자앙 수석책사와 밀담을 나눴다.
"심 책사님! 이제 남은 건 소뢰음사와 대뢰음사의 동의를 받는 일입니다."
"허, 이거 참! 대주님을 보면 하도 쉽게 일을 풀어서 저도 뭐라 하기가 마땅치 않네요."
포달랍궁의 포섭으로 심자앙 수석책사의 마음은 혼란스러웠다. 어렵디어려운 일을 술술 풀어내는 소천악의 재주에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하하! 그건 무인만의 대화란 게 있습니다."
"음! 무인의 대화라!"
아리송한 표정을 짓는 심자앙을 바라보며 웃던 소천악이 다시 입을 열었다.
"책사님! 이제 전 마라십존자와 함께 소뇌음사와 대뇌음사를 방문할 예정입니다. 그들마저 합류한다면 정말 안전한 천축행이 될 거 같습니다."
"되기만 한다면야 금상첨화지만 그게 쉬울까요?"
"일단 부딪쳐 보는 거지요. 까짓것 안 되면 관두지요. 설마 달라이라마의 친서도 있는데 무시야 하겠습니까? 서로 잘되자는 일이니 별 어려움 없을 겁니다."
천하태평으로 말하는 소천악의 말투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심자앙은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