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천악 91화
무료소설 소천악: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21회 작성일소설 읽기 : 소천악 91화
"심 책사님! 계획대로 움직이게 해주시지요."
"알겠소이다, 대주!"
회심의 미소를 짓는 심자앙은 바로 모든 이에게 어제와 같이 움직일 것을 말했다. 당연히 긴장 속에 방어벽은 만들어지고 행렬은 전진을 멈추었다.
"모두 외곽을 봉쇄하라!"
요문탁 당주와 지공타 대주의 일갈이 떨어지자 절정고수 열 명이 오백 명의 일류고수를 지휘해 순식간에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외곽 방어막을 형성했다. 그 뒤를 이어 어제와 똑같이 방어벽이 만들어지자 상인들은 가장 안쪽에서 편안하게 사방을 둘러보았다.
무인들은 긴장했지만 정작 수뇌부는 태연했다. 이미 심자앙 수석책사 등 책사들이 모두 귀띔한 후라 소리만 지를 뿐 걱정은 별로 하지 않았다.
시시각각 보고하는 혈살막 살수의 말에 의해 정파 무림인과 포달랍궁의 혈전은 바로 수뇌부에 전달됐다.
"이거 정파 무림인 분들이 아주 힘들군요."
먼 나라 이야기하듯 말하는 소천악의 말에 요문탁 당주가 맞장구를 쳤다.
"원래 그 위인들은 명예에 죽고 사니 아주 소원대로 잘 된 겁니다."
"그런가요?"
의뭉스럽게 반문하는 소천악에게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요문탁이다.
"만고진리입니다. 불변의 법이지요.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은 걸 아직 모르니, 원!"
"그러게 말입니다."
장단이 착착 맞는 두 사람을 바라보던 심자앙은 아예 고개를 돌렸다. 철저한 자신의 계책이지만 완벽하게 호흡하는 소천악을 보니 왠지 질리는 기분이었다.
느긋하게 방어벽을 살펴보며 옆에 있던 요문탁과 파안대소를 터뜨리며 담소를 나누는 소천악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혈살막 살수 한 명이 열심히 다가왔다.
"대주님! 드디어 싸움이 끝났습니다."
"오, 그래요? 결과는요?"
"가까스로 정파 무림인들이 이겼으나 피해가 막심합니다. 팔 할 이상의 무인들이 죽거나 다쳐 이미 모든 전력이 와해된 형편입니다."
"음! 큰일이군요."
말로만 큰일이었다. 계획대로 착착 돌아가는 상황에 흐뭇함을 감추느라 애를 써야만 했다. 이제 모든 주도권은 온전히 전력을 보존한 자기에게 올 건 당연했다. 그 달콤한 결과를 즐기며 희희낙락하는 마음이다.
소천악의 예상은 그대로 적중했다.
포달랍궁과 처절한 혈전을 마친 정파 무림인들은 벼락이라도 맞은 기분이었다. 기세등등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풀이 죽어 사망자를 수습하고 부상자를 치료하느라 난리법석이었다. 뒤에서 걱정스레 바라보던 관무평 대인이 입을 열었다.
"진 장로님! 이제 어쩌지요?"
"휴우! 그러게 말입니다. 너무 피해가 큽니다."
말하는 진여해의 얼굴은 먹구름이 잔뜩 끼여 있었다. 순간의 자존심으로 포달랍궁과 정면대결한 대가치고는 너무도 컸다. 이제는 또다시 공격이 온다면 바로 전멸이란 걸 모르지는 않았다. 고민 끝에 차마 안 떨어지는 입으로 관무평에게 말했다.
"관 대인! 이제는 더 이상 버틸 여력이 없습니다. 아무래도 소 대주에게 도움을 청해야 할 듯싶습니다."
진여해의 입에서 원하는 말이 나오자 관무평은 바로 대꾸했다.
"정말 포달랍궁의 세력이 강하긴 강하군요. 그에 맞선 정파 무림인들의 저력에 놀랐소이다. 이제는 쉬셔야 할 때이군요."
체면을 세워주며 돌려서 말하긴 했어도 이게 한계 아니냐는 식의 말투에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한 진여해 장로였다. 하지만 자존심이 적을 막아주지는 않는다는 걸 모를 그가 아니다. 참담한 심정으로 말을 받았다.
"관 대인의 말이 옳소이다. 지금이라도 속히 후미에서 따라오는 소 대주에게 가야 합니다. 여기서 다시 공격을 받으면 양패구상의 비극이 나올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하십시다. 뭐 싸움에서야 진 장로님이 잘 아실 테니 저야 따르지요."
관무평의 말에 한 대 두들겨 패고픈 심정이 된 진여해였다.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밉다는 말이 실감났다.
더 이상 말을 섞기 싫어진 진여해가 옆에 서 있던 정파무인에게 말했다.
"지금 곧 사망자와 부상자를 수습하고 바로 후미로 간다."
"네, 장로님!"
대답하는 정파무인도 왠지 힘이 빠진 목소리였다. 중원을 활보하며 천하를 굽어보던 자신들이 이 꼴이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더불어 하늘 위에 하늘이 있다는 사실을 뼈아프게 실감했다. 말로만 듣던 포달랍궁의 실체를 보자 전율마저 일었다.
다시 공격을 받을까 두려워진 일행은 상인까지 총동원되어 현장을 수습한 후 말고삐를 돌려 다시 후퇴길에 올랐다.
이 같은 사정은 염탐하던 혈살막 살수의 시야에 그대로 잡혔다. 빠르게 소천악에게 달려간 살수가 보고했다.
"대주님! 지금 사신단이 이쪽으로 오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피해가 너무 커 더 이상 버틸 여력이 없어 보입니다."
"저런 저런! 벌써 그리 박살이 나다니!"
딱 한마디만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옆에서 보고를 들은 심자앙 등 측근들은 물론 요문탁 당주와 지공타 대주도 침중한 안색으로 변해갔다. 이제 자신들의 차례가 된 것이 온몸으로 느껴지니 슬슬 긴장감이 올라왔다.
모두가 사태의 중대성을 알고 고민할 무렵!
심자앙이 슬쩍 소천악의 옷소매를 잡고 은밀한 곳으로 이끌었다. 영문 모르고 따라간 소천악이 막 뭐라고 할 순간 선수를 친 심자앙의 말이 나왔다.
"제가 전에 포달랍궁에 대해 연구한 적이 있습니다. 물론 다른 문파에 대해서도 오랜 시간 연구했지요. 그때는 뭐 병략을 공부하다 부수적으로 연구한 겁니다."
"오, 그래요?"
"그때 느낀 점을 조용히 말씀드리고자 불렀습니다."
"어서 말을 해보시지요."
서두르는 소천악에게 심자앙은 귓속말로 한참을 이야기했다. 듣던 소천악은 그 기기묘묘한 방책에 탄성을 지르며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기나긴 말이 끝나자 소천악의 입이 열렸다.
"참으로 놀랍소이다. 역시 심 수석책사님은 하늘이 내린 두뇌를 지닌 분이시오. 가히 살아 있는 제갈량 같소이다."
"허허! 대주가 이 사람에게 금칠을 하시는구려."
"아니외다. 천하제일뇌라는 제갈세가에서도 당하지 못할 신략이시오."
슬쩍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로 반응을 살펴보자 아니나 다를까 바로 반발이 튀어나왔다.
"제갈세가란 곳은 수많은 머리가 모여 만든 곳이지요. 소생이 비록 모자란다 하나 그들과 일대일이라면 절대 지지 않을 자신이 있소이다."
"하하! 그렇지요. 감히 누가 심 책사님을 당하겠소이까? 이거 제가 천하의 석학을 모신 기분입니다. 아무쪼록 앞으로도 잘 부탁합니다."
"푸하하! 방구석에 처박혀 시절만 한탄하던 저에게 길을 열어주신 대주님의 은혜에 보답하려면 아직 멀었습니다."
두 사람이 서로에게 칭찬하며 서서히 걸어오는 동안 멀리서 먼지구름이 자욱하게 피어났다.
"심 책사님! 이제 저들이 오나 보군요."
"그런가 봅니다. 얼마나 깨졌는지 궁금하군요."
"백문이 불여일견이지요. 눈으로 확인해 봅시다. 자, 어서 가시지요."
두 사람이 서둘러 선두에 서자 이미 가까이 다가선 사신단의 모습은 처량함 그 자체였다. 선두에 서서 다가오는 정파 무림인들의 복색은 검붉은 피가 엉겨 붙어 조금 전의 혈전을 대변했다.
십여 장 앞으로 다가선 그들의 모습에 소천악은 물론 요문탁이나 지공타도 할 말을 잃었다. 만신창이가 된 정파 무림인들이다. 이미 오백 명의 일류고수 중 불과 백여 명이 무사할 뿐이다. 무려 사백여 명이 죽거나 중상을 입어 급한 대로 부상자들은 중원으로 후송되었다. 그나마 움직이는 고수들도 한 군데 이상 부상을 입어 평소와 같은 위용을 뽐내기는 무리였다.
이제는 소천악이 이끄는 호위단이 유일한 희망줄이 된 관무평 대인 일행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여야만 했다.
건성제로부터 받은 밀지는 이미 관무평의 안중에도 없었다. 자존심 때문에 먼 하늘만 쳐다보는 진여해 장로와는 달리 얼른 소천악의 앞에 다가선 관무평 대인이다. 일단 자신들이 살고 봐야 한다는 절박감에 소천악에게 매달렸다.
"면목 없소이다, 소 대주! 이제 믿을 건 대주밖에 없소이다."
"후후, 이거 왜 이러십니까? 언제는 버린 아들 취급하시더니 이제 와 이러시면 심히 민망합니다."
기회는 이때다 식으로 슬슬 비아냥거리는 소천악의 말투정도는 감내해야 했다. 저자는 황제와도 대립각을 세운 인물이란 걸 모르지는 않았다. 수틀리면 자기도 버릴 배포를 지닌 인물이란 걸 가슴 저리게 실감했다.
"음, 미안하외다. 하지만 대국적으로 생각하시면 이런 사소한 일이야 눈감아야 할 거 아니겠소."
가만히 관무평 대인을 쳐다보던 소천악이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시비를 거는 일은 유리하지 않다는 판단이었다.
"좋습니다. 이제 우리가 사신단과 모든 상단을 보호하겠습니다. 대신 제가 지시하는 대로 잘 따르셔야 합니다. 이 점은 진여해 장로님을 비롯한 정파 무림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이라도 거부하시면 떠나셔도 됩니다. 물론 황제 폐하께는 잘 해명해 드리겠습니다."
진여해 장로 등 살아남은 정파 무림인들은 심한 굴욕감이 들었다. 새파랗게 어린놈의 명령을 들어야 한다면 치욕 중에 치욕이다. 바로 반발하는 진여해 장로였다.
"그건 말도 안 되오. 여태껏 우리 덕에 편안하게 온 길 아니오. 우리의 피로 여기까지 무사히 온 소 대주가 그런 말을 하다니 섭섭하오이다."
"제가 원해서 이리된 건 아니지요. 그리고 앞으로 갈 길이 더 멉니다. 여기서 사공이 둘이면 지휘에 큰 문제가 생깁니다. 그 점을 모르시진 않겠지요?"
"커험."
궁지에 몰린 진여해 장로는 말문이 막혀왔다. 성질 같아서는 당장 자리를 박차고 중원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두 가지 난제가 골치를 썩였다.
첫째는 건성제에게 뭐라 변명하기 힘든 고민이다. 큰소리 땅땅 친 원정길이었다.
둘째는 자신들을 믿고 따라나선 상단의 처리였다. 아무래도 자기가 떠나면 상단의 홀대는 불을 보듯 뻔했다. 만약 그들이 잘못되면 정파에서 야심차게 투자한 은자가 송두리째 날아갈 판이다.
아무리 정파 재정이 탄탄하다 해도 이 일이 잘못되면 심대한 타격을 받을 건 당연했다.
이 점이 진여해 장로의 결정을 망설이게 했다. 지휘를 받자니 망신이고 돌아가자니 뒤통수가 뭔가 켕겼다. 갈수록 고민이 깊어만 가는데 소천악이 슬쩍 대안을 제시했다.
"사실 제가 이런 말을 하지만 어찌 선배 고인을 함부로 부리겠습니까? 다만 급한 일에만 협조해 주시고 평소에는 진 장로님 뜻대로 정파 무림인 지휘는 전혀 관여하지 않겠습니다."
마른 논에 단비 내리는 소리를 하는 소천악이 고맙게 느껴지는 진여해 장로다. 자신과 정파의 입장을 고려해 주는 제안에 거절할 일이 전혀 없었다.
"허허! 역시 소 대주님이 이 늙은이의 얼굴을 세워주시는구려."
졸지에 어둡던 분위기가 햇살 내리쪼이는 화기애애한 모습으로 급변했다.
"진 장로님, 그리고 정파 고인님들! 이제 힘으로 맞서나가면 피해는 더욱 가중될 겁니다. 우리의 목적이 정벌이 아니잖습니까?"
"그야 그렇지만 저들이 마구잡이로 공격하니 도대체 대화가 안 되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