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천악 125화
무료소설 소천악: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91회 작성일소설 읽기 : 소천악 125화
"감히! 개방과 적대하겠다는 건가?"
"전 누구의 위협에 굴복하는 걸 배운 적이 없습니다. 힘으로 하시겠다면 당연히 저도 힘으로 맞서지요."
불꽃이 퍼렇게 피어오르며 대화가 위험수위를 치닫고 있었다. 녹류강은 일순 밀려온 노여움에 잠시 목적을 잃고 분노를 폭발시킬 뻔했다. 그만큼 소천악의 대꾸는 노강호라고 자부하던 그의 심기마저 흐트러지게 만들었다.
뒤에 서 있던 뇌가도 집법장로가 손을 부르르 떨며 금방이라도 소천악을 향해 출수할 태세를 갖추었다. 물론 소천악은 눈 하나 깜빡이지도 않았다. 겨우 분노를 가라앉힌 녹류강이 힘겹게 말했다.
"놀라운 패기는 인정하나 세상은 결코 패기 하나만으로 살 수 있는 건 아닐세."
"아직껏 이 패기를 잠재울 분은 만나지 못했습니다. 천하의 포탈랍궁 달라이라마께서도 못 꺾은 성질입니다. 개방에서 시험하시고프면 얼마든지 하십시오. 단 수많은 제자들을 황천길로 보낼 결심을 하셔야 할 겁니다."
"이런, 감히 천하의 개방을 위협하는가?"
"후후, 위협은 대장로님이 먼저 하셨습니다."
단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소천악의 말이다. 아니 말뿐만은 아닌 게 이미 기세를 뿌려대는 그의 몸에서 아지랑이 같은 기운이 서서히 주위를 압도하려는 듯 거세게 피어났다.
기세는 멈출 기미 없이 점점 더 광폭한 기운으로 녹류강과 뇌가도를 압박해 들어갔다. 초절정고수 반열에 들어선 녹류강도 점차 힘겨울 판이니 이제 겨우 절정에 머무른 뇌가도는 거의 초죽음으로 변해갔다.
금방이라도 입에서 피를 토할 듯한 뇌가도를 보며 녹류강이 힘겹게 말했다.
"이보시게, 그만 하시게."
"사과가 없네요."
"미안하이."
치욕적이었지만 무력으로는 어렵다는 판단을 내린 녹류강이 시원시원하게 사과하자 거짓말처럼 기운은 바로 사라졌다.
죽음의 기로에서 겨우 회생한 뇌가도는 놀라운 무공의 소천악을 알고 더 이상 입 열기가 어려워졌다. 아차 하면 목이 날아갈 판이라는 걸 이제야 눈치채자 소름이 와락 밀려왔다. 겨우 숨을 돌린 녹류강이 조용히 물었다.
"혈교는 아시는가?"
짧은 질문에 소천악이 흠칫하며 놀라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일부러 모른 척하며 딴청을 피웠다.
"혈교라뇨?"
아무리 시치미를 떼도 노련한 녹류강의 시선을 피하지는 못했다. 날카로운 안광을 번뜩이며 대꾸했다.
"허허, 알고 있었구먼. 놀라워. 천하의 정보를 갖고 있는 우리 개방도 최근에야 안 사실을 벌써 아는 자가 있다니. 역시 하오문인가!"
녹류강의 말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겨우 무공이나 강한 자로 알았는데 이건 상상외로 머리도 갖춘 데에 적잖이 놀랐다.
"전 모른다고 했습니다."
"좋네. 일단 모른다고 해두고 이제 혈교가 기나긴 어둠을 뚫고 강북무림을 서서히 장악하는 걸 소문으로나마 알고 있다고 생각하네. 안 그런가?"
"그거야 당연히 소문을 들어 알고 있죠."
"혈교가 어떤 문파인지는 알겠지?"
"이백 년 전에 강호를 피로 물들였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그렇네. 그놈들이 다시 강호에 나온 건 피보라가 몰아친다는 이야기일세."
녹류강의 속셈을 짐작한 소천악은 이야기를 돌려버렸다.
"아직은 모르지요. 이백 년 세월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닙니다. 다시 그 피의 윤회를 반복하리란 보장은 없지요. 요새 하는 걸 봐서는 공존을 바라는 거 같던데요."
"그건 오산일세. 제 버릇 절대 개 안 주네. 보나마나 다시 강호를 정복하려는 흑심이 숨어 있다는 게 내 생각일세."
"글쎄요."
시큰둥한 기색으로 대꾸하는 소천악을 바라보던 녹류강이 유혹의 손길을 뻗었다.
"자네는 무림인으로서 정의를 위해 목숨 걸고 싸우고프지 않은가?"
"제가요? 제가 무슨 힘이 있어 그 일을 할까요? 어림없는 소리지요."
"바야흐로 강호무림은 난세일세. 자고로 난세에는 영웅이 태어나는 법이지. 난 자네가 그 일을 할 수 있다고 믿네."
"됐습니다. 강호에는 구파일방과 명문세가가 즐비합니다. 그들을 두고 제가 한다는 게 웃기지 않습니까?"
"자네는 할 수 있네."
"저는 못합니다."
팽팽한 줄다리기가 이어지며 두 사람은 서로의 마음을 탐색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녹류강은 더 이상 정의의 이름으로 끌어들이기가 어렵다는 생각에 얼른 말을 돌렸다.
"좋네. 그러면 개방을 한번 도와주시게나."
"제가 왜요?"
"개방은 은원이 분명한 방파일세. 도와준다면 자네의 부탁 하나 정도는 들어줄 수 있네."
녹류강의 제안에 잠시 머리를 굴리던 소천악은 판단대로 말했다.
"좋습니다. 정 그러시다면 개방에게 도움이 된다면 도와드리지요. 단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 그게 무엇인가?"
불쾌감을 여실히 드러내며 대꾸하는 녹류강을 보며 소천악이 넌지시 말했다.
"이 이야기는 여러 사람이 들어서 좋을 일이 없습니다. 잠시 저쪽으로 가시죠."
"좋네."
두 사람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경신법으로 몸을 날렸다. 초절정고수답게 전혀 기척 없이 움직이는 그들을 제대로 본 사람은 귀타신개 뇌가도뿐이었다. 그는 녹류강의 신법에 전혀 뒤짐이 없는 소천악의 몸놀림을 보고 감탄사를 토해냈다.
"소문이 와전되었군. 저자는 잠룡이 아니라 이미 승천하려는 용이군."
아무도 없는 곳에 자리한 후 소천악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 제가 하는 말은 천지신명에 걸고 비밀을 지켜줄 것을 바랍니다."
"좋네, 내 명호를 걸고 언약하지."
"조건은 하나입니다. 십여 년 전에 일어났던 혈검신마 이야기를 아시죠?"
"헉, 혈검신마!"
놀란 녹류강은 자칫하면 뒤로 자빠질 뻔한 충격에 휘말렸다.
가공할 명호였다. 석년에 강호무림을 온통 벌집으로 만든 무림공적 혈검신마!
정파의 정예들이 협공하고서도 결국 잡기는커녕 수많은 고수들이 덧없이 목숨을 잃고, 혈검신마 자신은 영원히 종적을 감춘 일세의 절대고수였다.
"그만 놀라시고 다음 이야기를 들으셔야지요."
"그… 래, 말해 보게."
가까스로 냉정을 찾은 녹류강에게 소천악은 망설임 없이 이야기를 꺼냈다.
"그 양반이 무림공적이 된 건 누명이라는 걸 압니다."
"헉."
경악성을 낸 채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는 녹류강을 향하여 담담하게 다음 말을 꺼내는 소천악이다.
"그 누명을 벗겨주십시오. 이게 제가 말하는 조건입니다."
"도대체 혈검신마와 무슨 관계인가?"
"제 사부님과 남이 아닌 사이십니다. 그런 분이 누명을 쓰고 계신 게 솔직히 못마땅합니다."
"혹시 사부님 존함이?"
"사부님은 속세와 인연이 전혀 없는 은거기인이셔서 말씀드려도 모르실 겁니다."
시치미를 뚝 따는 소천악의 무표정에 능구렁이로 소문난 녹류강도 속절없이 넘어갔다.
"어허, 그게 쉬운 일이 아니란 걸 모르지는 않겠지?"
"진실을 밝히는 게 망설여진다면 개방은 절대 정파라고 자부하지 못합니다."
"크흠!"
"어쩌시겠습니까?"
입장이 뒤바뀌어 추궁당하는 편이 되자 곤혹스러운 듯 녹류강이 한숨을 토했다. 쉽게 승낙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자칫하면 화산을 비롯한 정파무림인들의 외면을 받을지도 모르는 중대사안이다.
"거참, 힘든 조건이군."
"어려우시면 안 하셔도 됩니다. 그 대신 아까 말한 비밀은 꼭 지켜주십시오."
"알겠네. 입이 근질근질하기야 하겠지만 남아일언 중천금이니 꼭 지킴세."
"그럼 이야기가 끝났으니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인사를 꾸벅 정중하게 하고 사라지는 소천악을 망연자실한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녹류강이다. 아깝지만 너무 위험한 인물이라는 데 마음이 가자 미련을 깨끗하게 버렸다.
녹류강과 헤어진 후 객잔에서 잠시 피로를 풀며 쉬던 소천악이다. 더 이상 골치 아픈 강호의 일엔 얽혀들고픈 마음이 하나도 없었다.
강호야 부서지든 말든 관심이 없는 이유는 간단했다. 힘든 싸움이 귀찮기도 했지만 결국 아직은 자신은 무림공적의 수제자라는 낙인을 벗기가 어려운 게 현실이다.
열심히 싸울수록 적은 강해지고 그러면 어쩔 수 없이 사문의 독문무공인 혈검구식을 쓰다 보면 손가락질을 받을 게 뻔했다.
바보가 아닌 이상 결과가 뻔한 일에 심력을 낭비할 마음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는 복수극을 마치자 이젠 강북무림을 떠나고 싶었다. 괜히 혈교와 다시 얽혀들어 성가신 일을 만들 미래를 겪고 싶지 않았다.
"천웅아!"
"네, 형님."
"아무래도 이 동네는 먹을 게 시원치 않다. 형이 죽이는 음식을 만드는 곳으로 데려가마."
"으하하! 역시 내가 형님은 잘 골랐다요."
"여러 소리 말고 어서 떠나자. 이 동네 공기가 요새 영 불길하다."
탁천웅과 함께 주섬주섬 행장을 꾸리고 움직이려는 순간 방문이 요란스레 열렸다.
쾅!
문이 벽에 부딪쳐 소음을 내자 불쾌감이 극에 달한 소천악의 입에서 거친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누구시오!"
"소 대협! 개방 삼결제자 주서곤입니다. 헉헉."
숨을 가쁘게 쉬며 겨우 말하는 주서곤을 보는 소천악의 눈초리는 여전히 사나웠다.
"그런데요? 개방 제자라서 무례하게 예의도 없이 남의 방을 거칠게 들어온다는 걸 이야기하고픈가요?"
"아닙니다. 우선 결례에 대해 사과드립니다. 워낙 사안이 급한지라……."
더듬거리며 고개를 숙이는 주서곤을 보며 약간 마음이 풀린 소천악이 다소 누그러진 말투를 뱉어냈다.
"괜찮소이다. 그런데 무슨 일로?"
"우리 개방의 대장로이신 녹류강 님께서 지금 급히 소 대협을 찾으십시다. 어서 가시지요."
"싫소이다. 녹류강 대장로님에겐 제가 전에 분명히 말씀드렸다고 전해주시지요."
가차 없이 고개를 돌리며 행장을 정리하는 소천악을 보며 주서곤이 말을 이었다.
"이 말을 전해드리라 하셨습니다. 전에 말한 조건을 지키겠다고요."
"무엇이? 그 말이 사실이오?"
"네.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으셨지만 조건을 수락한다는 말은 하셨습니다."
"허, 갑자기 이게… 음, 좋소이다. 어서 가십시다."
내심 하늘을 올라갈 듯 기분이 좋아진 소천악이 얼른 발길을 서둘렀다. 갑자기 돌변한 그의 모습이 당혹스러웠지만 무사히 임무를 수행하게 된 주서곤이 얼른 방을 나서서 안내했다. 돌변한 상황에 탁천웅이 볼멘소리로 하소연했다.
"형님! 맛난 요리 먹으러 가자며요?"
"자식아! 그 양반들이 맛난 음식 만들 시간은 줘야지. 잔소리 말고 따라와."
"제길! 먹고 싶은데."
투덜거리는 탁천웅을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한참을 가 들어선 사당에는 녹류강 대장로가 심각한 안색으로 앉아 있다가 얼른 일어서며 말했다.
"어서 오시구려, 소천악 대협!"
"또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녹류강 대장로님!"
"오, 어서 오시오. 소 대협!"
"대협이라뇨!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그저 편하게 말씀하시지요."
"허허! 대협이 그리 말하니 편하게 말하지. 자, 일단 여기 앉게나."
아무 말 없이 소천악이 앉자 바로 녹류강의 입에서 놀라운 사실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