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천악 144화
무료소설 소천악: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29회 작성일소설 읽기 : 소천악 144화
가만히 지켜보던 소천악의 시선이 잠시 유염독과 유옥여 낭자에게 멈췄다. 잠깐 생각해 봐도 어차피 이 대목에서는 탁천웅의 신위를 보여주는 게 급선무란 마음이 들자 지체 없이 소리쳤다.
"천웅아, 아주 요절을 내버려라."
"네, 형님. 묵사발로 만들지요."
힘차게 대답한 탁천웅은 전과 다른 몸놀림을 보였다. 한층 빨라진 그의 신형은 번쩍거리며 적호방도 사이를 거세게 파고들었다.
"막아라! 모두 협공하라."
임가빈의 목소리가 점차 높아지며 다급함을 단적으로 드러냈다. 적호방도들은 숫자의 우세를 믿고 거세게 탁천웅을 공격해 들어왔다. 검날이 시퍼런 광채를 발하며 탁천웅의 가슴을 베었다.
쨍!
자연의 법칙을 무시하고 검날은 마치 유리처럼 깨져나갔다.
"헉! 이건 도무지 검이 안 들어가는 신체라니."
"자식아, 어디서 쇳덩어리를 휘두르고 지랄이야."
분노한 탁천웅의 쇠몽둥이가 그 자의 이마를 정통으로 때렸다. 바로 수박 하나 터지듯 이마가 깨져나가며 끽소리도 못하고 숨을 거뒀다.
그게 시작이었다. 마치 호랑이가 양떼를 덮친 것처럼 탁천웅은 거칠게 적호방도들의 치명적인 부위를 여지없이 강타했다.
처음엔 불굴의 의지로 검날을 죽기 살기로 들이밀던 적호방도들은 씨도 안 먹히는 결과에 점차 공포감이 얼굴을 덮었다. 그들의 두려움은 아랑곳없이 탁천웅은 앞에 알짱거리는 적호방도들을 한 사람도 남김없이 쇠몽둥이로 패 죽였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이미 전의를 상실한 적호방도들이 고양이에게 쫓기는 쥐처럼 이리저리 도망다니기에 바빴다.
임가빈은 거의 혼이 반쯤 빠져나간 채로 멍하니 탁천웅의 놀라운 실력에 입을 하 벌린 채 서 있었다. 소천악이 그를 힐끗 바라보더니 얼른 몸을 날렸다.
번개같이 임가빈에게 다가오는 소천악을 그제야 보고 급히 검을 뽑아 대항하려던 의도는 스르르 미끄러지듯 덮쳐온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바로 임가빈의 전신혈도를 제압한 소천악이 크게 부르짖었다.
"모두 멈추시오. 당신들의 대장인 임가빈이 이미 내 손에 잡혔소이다. 더 이상 저항하는 분들은 살기 싫다는 걸로 간주하고 빠르게 저승길로 보내드리겠소이다."
적호방도들은 말을 듣자마자 바로 상황을 판단했다. 이미 승산은 없어도 전혀 없다는 걸 모를 리 없는 그들은 목숨이라도 부지하기 위해 얼른 제자리에 멈췄다. 탁천웅은 그런 그들에게 쇠몽둥이를 들고 슬슬 다가섰다.
"천웅아, 이제 그만."
"네, 형님."
금방이라도 적호방도를 쳐죽일 기세를 보이던 탁천웅이 소천악의 한마디에 거짓말처럼 딱 제자리에 섰다.
소천악은 그들을 슬쩍 보고는 혈도가 제압되어 땅에 쓰러진 채 온몸이 굳은 임가빈에게 다가서서 혈도를 풀어줬다. 온몸이 자유스럽게 변한 임가빈은 순간 이마를 찌푸렸지만 감히 반항할 엄두를 내지는 않았다.
자신 정도는 언제든지 해치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없다면 이리 순순히 풀어줄 리가 없단 생각이 들자 곧 마음을 바꿔 조용히 처분을 기다렸다. 소천악은 그에게 싸늘한 첫마디를 날렸다.
"인생 똑바로 살아야 합니다. 땅을 백날 파보십시오. 구리 닢 한 푼 안 나옵니다. 열심히 땀 흘려 일하고 벌어야 하는 겁니다."
"……."
"무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검 좀 쓴다고 이리 막무가내 식으로 남의 은자를 탐내면 언젠가 저 같은 무서운 고인을 만나 뒈지게 맞거나 죽습니다. 알겠습니까?"
"……."
"역시 무인이군요. 자존심 상해 대답 못 하겠다는 이야기죠? 천웅아, 손 좀 봐드려라."
다소 반항적인 임가빈의 모습을 보고 바로 비위가 상한 소천악의 일갈에 번개같이 다가온 탁천웅이 솥뚜껑 같은 두 손을 휩쓸어왔다. 놀란 임가빈이 얼른 내공을 실어 다가오는 손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빠각!
"으악! 내 손이!"
결과는 참담했다. 슬쩍 휘두른 탁천웅의 손 앞에 섰던 임가빈의 팔목이 바로 부러져 나가며 비명이 터져 나왔다. 연이어 탁천웅의 주먹이 그의 배를 강타하자 움츠린 개구리처럼 몸이 휘어들었다.
이후 살벌한 구타가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훨씬 지나도록 자행되었다. 거의 기진맥진한 임가빈이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힘없이 두들기는 대로 굴러다니자 그제야 소천악의 입이 열렸다.
"천웅아, 그만 됐다."
"네, 형님. 이놈 맷집이 쓸 만한데요."
"그게 다 무공 수련하느라 열심히 몸을 가꾼 탓이지."
임가빈이 들으며 열불이 터지는 소리를 지껄이던 소천악이 슬며시 다가서며 말했다.
"자, 다시 묻죠? 열심히 살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잔뜩 공포에 얼어붙은 임가빈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가 보기엔 소천악은 웃으면서 자기를 죽일 독심을 지닌 인물이란 걸 안 후에야 감히 반말로 떠들 용기도 없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소천악이 경고했다.
"좋습니다. 뭐 사실 열심히 사시든지 말든지 알 바 아닙니다. 전처럼 살면 언젠가 뒈지겠지요."
"노력하겠소."
"노력을 하든지 이를 갈든지 마음대로 하시고 다시 떼거리로 오셔도 됩니다. 단 다음에 다시 오면 유서 쓰고 오세요. 절대로 단 한 명도 걸어서 돌아가지 못합니다."
"다시 오는 일은 없을 것이오."
"아, 한 번은 와야지요. 적호방의 방주와 함께 오시오. 와서 정중하게 사과하는 말이 없다면 모레 날짜로 적호방은 개미 새끼 한 마리 살 수 없다는 걸 유념해 주시오."
"헉!"
"헉은 무슨 헉입니까! 그럼 이대로 끝날 줄 알았습니까? 턱도 없는 소리 마시고 내일 방주님이랑 함께 오시지요."
"알겠소이다. 방주님과 상의해 보겠소이다."
"오든지 말든지 그건 방주님 마음이고 적호방을 멸문시키는 것도 내 마음이라는 걸 전해주시오."
심드렁한 소천악의 대답에 아무런 말도 못 한 채 눈치만 살피던 임가빈이었다. 시간이 지나도 아무런 말이 들리지 않자 임가빈이 서둘러 만신창이로 변한 적호방의 고수들을 이끌고 시야에서 순식간에 사라져 갔다. 임가빈도 더 이상 소천악과 마주 이야기하고픈 마음이 있을 리가 없었다.
꽁무니가 빠지게 도주하는 그들을 힐끗 본 소천악이 유염독에게 말을 건넸다.
"장주님, 이제 다 끝났습니다."
"소 대협! 역시 대협은 강호에서 알아줄 만한 협의지사시군요."
"협의지사라. 전 그런 거 모릅니다. 다만 내 비위에 거슬리는 자를 용서한 일은 없었지요."
"우리 유가장의 위기를 모면케 해주신 대협에게 어떤 감사를 드려야 할지."
"일단 식사나 주십시오. 간만에 몸을 조금 움직였더니 시장기가 오는군요."
"아, 이런 결례가. 조금만 기다리시면 음식을 준비해 드리지요. 뭐 하느냐. 어서 소 대협과 탁 대협의 식사 준비를 서둘러라."
희색이 만면해 소리치는 유염독의 얼굴 어디에서도 조금 전의 두려운 표정은 보이질 않았다. 역시 음식에는 용감한 탁천웅이 산해진미를 무서운 속도로 비워나갔다. 소천악은 미리 짐작하고 가볍게 독상을 받아 여유롭게 먹고 마시며 약간의 피로를 풀었다.
장원 내에서 제일 좋은 방을 내준 유염독의 성의에 따라 편하게 단잠을 즐긴 두 사람은 날이 밝은 지 한참이나 지난 후 꿈나라에서 손님을 맞이해야 했다. 유가장의 총관을 맡고 있는 유시명이었다.
"소 대협, 적호방에서 형가위 방주님과 수뇌부가 지금 뵙자고 합니다."
"제길! 그 양반들은 잠도 없나."
"지금 해가 중천입니다."
"그거야 여러분들 시간이고 저야 아직 한밤중인데. 좌우간 알았어요. 금방 간다고 전해줘요."
투덜거리며 일어난 소천악은 옆에서 코를 드르렁 고는 탁천웅을 발로 차 깨웠다.
"천웅아, 일어나라. 손님이 기다린단다."
"음냐. 형님 혼자 갔다 오세요."
"이 자식이."
음산한 소천악의 목소리에 단잠을 자던 탁천웅이 기겁을 하며 눈을 떴다. 하도 얻어맞아 거의 강박관념에 가까운 피해의식이 있던 그로서는 당연한 결과였다.
두 사람은 느긋하게 세안을 마치고 밖에서 기다리던 유시명 총관과 함께 장주실로 갔다. 탁자에는 이미 적호방의 방주인 형가위를 비롯한 수뇌부가 공손하게 앉아 있었다.
그들은 소천악을 보자마자 일어서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대표로 말하는 형가위의 안색은 어젯밤 한숨도 못 잔 티가 역력했다. 천하의 소천악을 건드린 결과가 어떻게 나왔는지를 너무도 잘 아는 그가 편히 잠을 이룬다는 건 불가능이었다.
"소 대협, 천하에 위명이 쟁쟁하신 분을 만나게 돼서 영광입니다."
"영광은요. 자자, 앉으세요."
겸손을 떨며 자리를 권하자 형가위 적호방주와 수뇌부는 모두 몸가짐을 바로 하며 다소곳하게 앉았다. 다시 한 번 사과의 말을 건네는 형가위였다.
"어제 우리가 불미스러운 일을 저질러 소 대협의 심기를 거슬리게 한 점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하하. 이렇게 나오시니 제가 뭐라 하겠습니까."
"아무쪼록 이 일로 인해 우리 적호방과 은원이 없었으면 하는 소박한 바람입니다."
쩔쩔매며 말하는 형가위 적호방주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기절할 듯이 굳어 있는 얼굴을 풀지 못했다.
소천악!
실로 무서운 이름이었다.
천하의 고수들을 모조리 잠재우고 세외강파의 고수들도 단번에 물리친 천하의 고수였다. 변방에서 힘깨나 쓴다고 설치는 자신들의 힘으로는 도무지 어쩔 수가 없는 초절정고수였다.
만약 소천악이 심기가 상해 자신들을 공격한다면 몰살마저도 각오해야 할 판이었다. 형가위는 유가장원과 시비를 붙은 실수를 수없이 자책하며 하룻밤을 뜬눈으로 지새운 후라 눈이 시뻘건 채 충혈되어 있었다.
소천악은 그런 그들의 심정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뭐 아직까지야 원한이랄 거 있겠습니까! 사람이 죽은 것도 아니고 다 지난 일로 치고 넘어가도록 하지요."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무어로 갚아야 할지."
일이 잘 풀릴 듯하자 안도의 한숨을 내쉰 형가위 방주의 말이 끝나자마자 아리송한 소천악이 말이 이어졌다.
"하하. 정 그런 생각이시면 앞으로 유가장원의 일을 잘 좀 돌봐주세요. 뭐 힘들다면야 할 수 없지만 나중에 일이 잘못되면 이 사람 심히 섭섭할 듯하군요."
말 속에 뼈가 실린 소천악의 말에 놀라 얼른 대답하는 형가위였다.
"헉! 그런 걱정일랑 아예 접어두시지요. 앞으로 유가장원의 일은 우리 적호방 일처럼 두 손 걷어붙이고 도와드릴 것을 약속합니다."
소천악의 말처럼 일은 술술 풀려 혹 떼려다 하나 더 붙인 꼴이 된 적호방은 본의 아니게 유가장원의 보호자 역할까지 감수하기로 약속되었다.
땅에 고개가 닿을 정도로 인사를 한 형가위 적호방주와 수뇌부가 물러가자 유염독의 얼굴은 봄날 햇빛처럼 밝게 피어났다.
"소 대협! 정말 고맙소이다. 이 위기를 모면케 해주시고 다시 이런 도움마저 주다니요."
"신경 쓰지 마십시오. 아주 사소한 일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말이야 바른말이지 싸운 건 제가 아니고 저기 있는 제 아우 천웅이가 다 한 건데요, 뭐."
소천악의 눈길이 간 곳을 따라간 곳에서는 탁천웅과 유옥여 낭자가 서로 웃으며 이야기꽃을 피우느라 여념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