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천악 134화
무료소설 소천악: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91회 작성일소설 읽기 : 소천악 134화
"이 방이옵니다. 들어가시면 잠시 후 차를 내오겠습니다."
"오, 고맙소."
가볍게 사례한 소천악은 서슴없이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방 안은 처녀 특유의 향긋한 내음이 콧속으로 밀려왔다. 마치 복숭아가 익어 풍기는 향내 같은 내음에 절로 코를 벌름거리다 실수를 깨달고 얼른 위엄을 갖추는 소천악이었다.
시선을 돌려보자 침대 옆에 있는 탁자에 한 여인이 조용히 시립해 있는 게 보였다. 천취려는 소천악을 보자 살짝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반갑사옵니다. 소녀 천취려라고 하옵니다."
"반갑소이다, 소저. 소천악이라 하외다."
"연락을 받았습니다. 이리로 앉으시지요."
"고맙소."
사례를 하며 얼른 천취려의 얼굴을 훔쳐보기 바쁜 소천악이었다. 짧은 시간에 속으로 백만 번 이상 빌고 빈 소천악이다.
제발 족자미인이 있기를 바라는 그의 간절한 소망을 담고 눈은 부지런히 그녀의 얼굴을 샅샅이 훑었다.
소리 없이 탁자에 앉는 천취려의 얼굴은 한마디로 선녀의 하강같이 고아하고 여성미가 물씬 풍겨 나왔다. 하얀 피부에 마치 붉은 석류를 연상케 하는 입술과 눈망울에 소천악이 금방이라도 잠길 것 같은 절세미녀였다.
순간 정신이 아찔했지만 곧 냉정을 되찾고 족자에 있는 여인과 비교분석에 들어갔다. 거의 육박하는 미모에 가슴은 연신 진탕되며 야릇한 희열마저 느껴졌다.
그런데 이상하긴 이상했다. 분명히 족자미인에 육박하는 미인은 분명한데 왠지 뭔가가 모자란 느낌이 뇌리를 가득 지배했다.
다시 한 번 정신을 집중하고 바라보자 역시나였다. 천년마교에 와서 고생한 보람이 순식간에 물거품으로 변하는 순간이 닥치자 절로 허탈감이 일었다.
천취려도 눈치가 보통은 넘는 여인이었다. 짧은 순간에 변해가는 소천악의 얼굴 표정에서 무언가를 느낀 듯 넌지시 말을 건넸다. 그녀는 구정학 마교주와 한 약속에 따라 변신한 모습을 유지하느라 무진 애를 써야만 했다.
천상 요조숙녀인 척 곱게 말하려 애쓰며 입을 여느라 고생이 말이 아니었다.
"소천악 대협! 무슨 생각을 하시나요?"
"아니오. 소저가 아름다워서 잠시 다른 생각을 한 것이라오."
"호호, 아름답다고요? 고마운 말씀이네요."
당차게 대꾸하는 천취려의 말에 소천악은 역시 마교인답게 호탕하기가 그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 별말씀을. 소저를 보니 중원에 떠도는 천하십대미녀란 말이 가소로워집니다."
"호오? 제가 그녀들보다 나은가요?"
"물론이오. 역시 미녀는 산중에 조용히 홀로 있다는 옛말이 하나도 틀림이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소천악은 있지도 않은 말을 끄집어내며 미사여구를 가져다 붙이기에 바빴다. 어차피 여기도 아닌 바에야 주청령에게 범한 실수를 다시 재발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강호경험상 여인에게 미녀란 말을 해 손해 볼 일이 없었다.
역시나 천취려도 여인이었다.
"이거 영광이네요. 천하의 소천악 대협에게 천하제일미녀란 소리를 듣다니!"
이상하게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천취려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얼른 대꾸하는 소천악이다.
"아직까지는 제가 실제로 본 여인 중에 으뜸이시오."
그 말에 눈빛을 반짝이며 천취려는 은근히 물었다.
"제가 듣기로는 우리 천년마교에 내자를 구하러 오셔서 저를 지목했다고요?"
"그렇소이다. 제가 아는 한 분이 천취려 소저가 가히 천하절색이라 해서 왔소이다."
"그럼 저와 혼인하실 생각이신가요?"
도발적인 천취려의 질문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소천악이다. 사실 천취려 정도면 그냥 몸을 맡기고픈 마음이 굴뚝이었다.
말하면서 얼핏 보이는 고운 목선의 도드라짐이 더욱 강하게 유혹했다. 하지만 족자미인과 비교해 왠지 처지는 느낌이 오는 이유를 정말 몰랐다. 미모로는 분명히 엇비슷해 보이는데 알지 못할 무언가가 부족했다.
끓어오르는 유혹을 죽을힘을 다해 참아내며 힘겹게 입을 놀렸다.
"천취려 소저! 혼인은 장난이 아니외다. 서로를 깊이 알고 평생을 함께할 남녀관계로 알고 있소이다. 조금 더 알아보고 해야 서로에게 후회가 없을 것이외다."
"소 대협은 참 복잡하게 인생을 사시는군요. 인생 거 별거 아닙니다. 서로 살다 보면 정도 들고 그렇게 늙어가는 거지요."
"허! 소저의 말을 들으면 인생 다 산 노인네 같소이다."
어이없어 툭하니 말하는 소천악에게 연속적으로 또랑또랑 말하는 천취려였다.
"이게 다 간접경험이라는 거지요. 책에 보면 다 나와 있답니다. 소 대협은 책을 별로 즐겨하지 않는가 봅니다."
"험, 소싯적엔 조금 읽었소만 강호의 어려운 세파를 겪다 보니 책이란 게 한참 멀어지는 게 현실이오."
"걱정하지 마시와요. 소녀가 먼저 다 읽고 설명해 드리지요."
"천 소저! 제가 마음에 드시오? 보시다시피 전 미남이라고 하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뒷배경이 요란하지도 않소이다."
"대협이나 저나 강호의 칼밥을 먹고 살 운명이지요. 강호의 율법이란 지극히 간단하다고 들었습니다. 약육강식! 힘 있는 자가 우선이지요. 그런 면에선 저희 아버님과 팽팽히 겨루신 대협과 함께라면 안심할 수 있지요."
말로는 이기기 힘들다는 생각에 얼른 화제를 돌리려 애쓰는 소천악이다.
"허, 소저의 마음이 요상하구려."
"현실적이죠. 막말로 약한 남자를 부군으로 모신다면 저의 미모를 탐내는 자들이 언제 부군을 해하고 저를 능욕할지 모르죠."
"그러니까 소저의 꿈은?"
"당연히 강한 부군이지요. 소 대협이 그런 저의 꿈을 이뤄줄 분이시고요."
왠지 늪에 빠지는 묘한 기분이 든 소천악이다. 처음 대면에 당당하게 혼인을 이야기하는 천취려의 말에 알지 못할 거부감이 들었다.
"소저! 아직은 제가 혼인할 생각이 없소이다. 사문의 피맺힌 원한도 갚아야 하고 할 일이 태산이오이다."
"그런데 왜 그 바쁘신 분이 저를 만나러 이 먼 천산까지 오신 거지요?"
"그거야 천산에 볼일이 있는 김에 왜 그런 말 있잖습니까?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아니 그 말은 곧 제가 제일 중요해 온 게 아니란 말인가요?"
"아니 그 말이 아니라……."
"관두세요. 이건 정말 자존심이 상하네요."
딱 잘라 더 이상 말 섞기를 거절하는 천취려를 바라보며 소천악은 내심 희희낙락이었다. 여기도 아닌 바엔 이렇게 헤어지는 것도 좋은 수순이었다. 자칫하면 그 성질 더러운 천일평 마존각주와 원수가 될 판이었다.
자기 딸 한 번 보겠다는데도 죽인다고 길길이 날뛰는 그가 이번에 무시했다는 소리를 들으면 아마 전 마존각 고수를 총동원해 자신을 죽이려고 덤빌 건 뻔했다.
무서운 게 아니고 사실은 귀찮았다.
잘 풀려가는 일에 절로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그게 실수였다. 천취려는 그냥 한번 튕겨봤는데 바로 수긍하는 소천악을 보며 돌아가는 형세를 다 눈치챈 후였다. 거기에 미소를 보자 더욱 확신이 들었다.
입술을 질끈 깨물며 결심을 굳힌 천취려가 조용히 탁자에서 일어섰다.
"소 대협! 잠시만 기다려주시지요. 기왕 오신 손님이니 제가 차라도 한 잔 직접 타서 대접해 드리지요."
"아니 뭐 그렇게까지야."
약간 마음에 걸려 사양하려는 소천악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천취려는 방을 쑥 나가버렸다.
"거참, 성질도 급한 소저로고."
혀를 차며 중얼거린 소천악은 그제야 방 안을 둘러보았다.
"헉, 이게 뭐야? 이거 정말 처녀의 침실 맞아?"
놀라 소리치는 소천악의 시선에 잡히는 건 전혀 의외의 물건들이었다. 자수나 그림 등 여성 특유의 장식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단 하나도 보이질 않았다. 오히려 벽에 걸린 건 수많은 검과 도뿐이었다.
어리둥절해하는 소천악에게 다시 천취려가 찻잔을 들고 나타났다.
"자, 어서 드세요. 소녀가 직접 탄 차이니 흉하지 마시고 기꺼이 마셔주시면 고맙겠어요."
"오! 향기가 참 좋구려."
입에 발린 칭찬을 늘어놓으며 소천악은 찻잔을 입에 가져갔다. 용정차는 그 맛이 깊고도 그윽한 향이 어우러져 목으로부터 만족한 신호를 보내게 했다.
몇 모금 마시자 천취려가 조용히 물었다.
"차 맛이 어떤가요?"
"천하일미요. 역시 소저는 다도에도 깊은 조예가 있구려. 진심으로 감탄했소이다."
"호호! 어디 맛만 좋을까요? 더한 풍취도 있는 차랍니다."
무언가 깊은 속뜻이 있는 말에 찔끔한 소천악이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묘한 말의 의미가 느껴진 소천악이 반문하자 바로 천취려의 싸늘한 대꾸가 나왔다.
"차 맛이란 처음과 나중이 다른 차가 진정한 천하일미라 할 수 있죠. 이제 곧 또 다른 맛을 느낄 것이니 잘 음미하시죠."
심상치 않은 예감에 급히 운기해 본 소천악은 갑자기 내부에 독기가 거세게 꿈틀거리는 기운을 알고 냉소를 머금었다. 바로 잠재력을 폭발시켜 독기를 팔을 통해 손가락으로 빠르게 압박해 밀었다.
독기는 거칠게 반항하며 빠져나가려 했으나 잠재력의 웅혼한 기운에 꼼짝없이 잡혀 손가락으로 몰렸다. 아무런 기척 없이 독기를 제압한 후 소천악은 천취려를 바라보며 조용히 물었다.
"왜 이러신 게요?"
천취려는 돌연 말투마저 바꾸며 거칠게 입을 열었다.
"몰라서 묻느냐? 감히 나를 능멸하고 무사할 줄 알았느냐? 이제 네놈은 내가 주는 해독약이 아니면 바로 피 토하고 죽을 걸 각오해야 해."
"아니 오늘 본 사이인데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 이러시는 게요?"
"호호! 네놈이 먹은 차 속에 내가 독약을 풀었어. 들어봤나 몰라. 칠보추혼산이야. 말 그대로 해독약이 없으면 일곱 걸음을 걷기 전에 황천길로 가는 거지. 억하심정이라고 했나?"
"그렇소. 칠보추혼산이고 일보즉사산이고 간에 이유나 압시다. 그리고 왜 갑자기 반말로 찍찍 말하는 게요?"
"일단 존댓말은 내 체질이 아냐. 조금 전에 예쁜 척하느라고 죽을 뻔했어. 교주님하고 한 약속 때문에 성질 죽이느라고 죽는 줄 알았다. 그리고 감정은 당연히 있지. 네놈이 순순히 내 생각대로 움직였으면 이런 방법은 쓰지 않았어."
"소저의 생각이 도대체 뭐요?"
참을성을 발휘하며 묻는 소천악의 내심을 전혀 짐작하지 못한 채 천취려는 순순히 대답했다.
"당연히 이 지옥 같은 곳에서 벗어나는 거지."
"지옥이라뇨? 제가 보기엔 부친께서 정말 사랑하시는 거 같던데."
천취려는 천장을 바라보며 뇌까리듯 말했다.
"사랑? 그게 사랑이라면 사랑이지. 너 혹시 아냐? 새장에 갇혀 모이와 물만 먹고 먼 하늘을 바라보는 독수리의 비애를?"
그제야 자세히는 몰라도 대충 돌아가는 상황과 천취려의 내심을 짐작한 소천악이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잘은 몰라도 알 거 같소이다. 나 또한 악질 사부를 만나 산속에 갇혀 십여 년을 지낸 아픈 과거가 있소이다. 그리 힘드오이까?"
"말도 마라. 아버지란 작자는 사랑한다는 핑계로 완전히 가둬놓고 지내지. 홧김에 서방질한다고, 검술에 빠져 보내는 눈물 어린 세월이 이십 년이다, 이십 년!"
"두들겨 패지는 않았을 거 아니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