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천악 151화
무료소설 소천악: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64회 작성일소설 읽기 : 소천악 151화
"와! 혈교 천세!"
군중심리에 휩싸인 혈교 고수들이 거의 광기에 가까운 함성을 지르며 눈빛을 빛냈다.
"모든 혈교도는 이제부터 중원으로 진격한다. 막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모조리 피바다 속에 묻어버려라."
"존! 명!"
전각이 떠내려갈 듯 고개를 숙이며 대답한 혈교도들이 일제히 걸음을 옮겼다. 장로들은 각 대를 책임지는 임시대주로 변해 자신이 맡은 고수들을 일사분란하게 이끌었다. 바야흐로 중원에 거센 폭풍이 밀려가는 순간이다.
두 눈에 원한을 가득 싣고 중원으로 진군하는 혈교의 위용은 산을 뭉개고 바다를 엎어버릴 무서운 속도로 닥쳐왔다. 강북무림에 겨우 명맥만 유지하던 구파일방과 사존맹 그리고 집마부의 거점이 파도에 휩쓸리는 조각배처럼 산산조각 나며 일시에 쓸려갔다.
뒤늦게 이 소식을 접한 중원무림의 정파연합은 분노하며 즉시 휘하의 고수들을 급파해 천하를 놓고 벌이는 무서운 접전이 시작됨을 알렸다.
강북에서 벌어지는 폭풍의 난세와 전혀 상관없이 평화롭던 폭풍문에 한 전령이 들어오면서 파란이 시작됐다. 급보를 접한 심자앙은 굳은 안색으로 아직 침실에서 혼자 뒹굴거리며 무료한 시간을 보내는 소천악에게 다가왔다.
"문주님, 지금 급보가 들어왔습니다."
"무슨 일인가요?"
"정파의 태두 격인 소림사를 주축으로 정파연합이 혈교와 정면충돌했다고 합니다."
"크게 붙었군요. 결과는요?"
별다른 동요 없이 말하는 소천악의 간담에 질린 심자앙이 자세하게 말했다.
"아직 그 소식은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누가 이기건 간에 결과에 따라 우리가 준비할 건 마찬가지입니다."
"이유는 뭐지요?"
"정파가 이겨도 사파연합이나 다름없는 우리를 견제할 건 뻔합니다. 물론 혈교가 이겨도 눈엣가시 격인 우리를 무너뜨리려 할 겁니다."
"도대체 편한 길이 없군요."
투덜거리는 소천악에게 힘주어 말하는 심자앙이다.
"천하의 패권을 잡는 일입니다. 소홀하다간 쥐도 새도 모르게 무너집니다."
"머리 쓰는 건 일체 심 군사님이 알아서 해요."
"이렇게 믿어주시니."
"믿어야지요. 제가 나선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라면 당연히 심 군사님을 믿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태연한 소천악의 말에 배어나오는 놀라운 배포에 심 군사는 적잖이 감탄했다. 역시 자신이 사람을 보긴 잘 봤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능력이 없으면 자인하고 능력 있는 사람에게 맡겨야 하는 게 세상 이치였다. 그 쉬운 이치를 불신의 벽에 사로잡혀 늘 수하를 의심하다 보면 자멸의 길을 가게 되는 게 결론이었다.
그 아찔한 함정을 아주 손쉽게 신뢰란 마음 하나로 비켜가는 것도 주군의 역량이었다. 그 점에서는 소천악은 최상의 문주감이었다. 비록 그게 의도된 게 아니고 단지 머리 쓰기 싫다는 단순한 이유였지만 거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심자앙 군사였다.
그날 이후 딱 두 사람만 제외하고 폭풍문 전 문도는 정파연합과 혈교의 싸움을 주시했다. 물론 그 둘은 당연히 소천악과 탁천웅이었다.
폭풍문의 시선이 머무는 정파연합과 혈교의 격전지 산동성(山東省) 제녕(濟寧)!
혜연 대사는 묵묵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소림장문인이자 정도맹주인 그는 싸움터에서 3리 정도 떨어진 곳에서 정파의 수뇌부인 구파일방의 장문인들과 오대세가의 가주들과 함께 초조히 결과를 기다렸다. 이번 싸움에서 기세가 밀리면 다시 회복하기는 어려운 처지였다.
세 번에 걸친 싸움에서 한 번도 이기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밀려온 정파인들의 안색에 짙은 먹구름이 끼여 있었다.
제녕에서 숭산은 빠른 걸음으로 달리면 이제 불과 오 일 거리였다. 그의 뇌리에는 불타는 소림사가 그려지자 더욱 눈썹이 찌푸려졌다. 멀리서 전령으로 보이는 백의무복을 입은 자가 쏜살같이 달려오는 게 보였다. 그자는 보이는가 싶더니만 어느새 옆으로 다가와 부복한 채 말문을 열었다.
"맹주님, 급보이옵니다. 구대문파 정예들이 막던 방어진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위태로운 상황이라고 합니다."
"아니 이제 겨우 반나절이 지났는데 벌써?"
"혈교의 공세가 실로 엄청납니다. 초절정고수들이 지휘하는 혈교의 강력한 무공에 구대문파 제자들이 분투하고 있지만 역부족입니다."
아찔한 충격이 밀려오는 혜연 맹주였지만 이내 담담하게 지시했다.
"오대세가와 정도무림인들을 총동원해 막도록 하라. 거기가 무너지면 강남을 지키는 교두보가 사라진다는 걸 주지시켜라."
"알겠습니다. 안 그래도 오대세가와 정도의 무림인들이 모두 그쪽으로 달려간다는 전언입니다."
옆에 서 있던 제갈상린 가주가 말하자 저절로 한숨이 터져나오는 혜연 맹주였다.
"휴, 어렵구나. 언제부터 이리 혈교가 강해졌다는 말인가. 우리 소림사 무인들은 어떤가?"
"그나마 백팔나한진과 십팔금강동인들이 맹활약해 방어진이 지금껏 지켜졌다는 보고입니다."
가만히 보고를 듣던 혜연 대사가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바로 본 사 장로들에게 방어진으로 가 도와주라고 해라."
"헉, 장로님들마저."
"이제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다. 속히 시행토록 하라. 무량수불."
두 손을 모아 합장하는 혜연 맹주의 손끝이 가늘게 떨려오는 게 모두에게 뚜렷이 보였다.
"존명!"
급히 복창하고 사라지는 자를 바라보던 혜연 대사의 얼굴에 그늘이 잔뜩 끼어 있었다.
"잠시 내가 어딜 다녀오겠소이다."
"아니 맹주님. 어딜 가시려고?"
"허허. 다녀와서 말해 주리다."
가만히 하늘만 쳐다보던 혜연 맹주가 급히 어디론가 사라졌다. 영문을 모르는 정파 수뇌부가 어리둥절할 무렵 이미 그는 한 여인과 만나고 있었다.
주혜미!
이십 년 전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인 자미혈성의 정기를 받고 태어난 불운의 여인이었다. 타고난 미모와 그 엄청난 업보로 인해 장차 수많은 남정네의 정기를 고갈시킬 서러운 운명이었다.
다행히 전대 소림 장로인 정심 대사가 태어나자 거두어 은밀하게 소림에서 자란 여인이었다. 색성의 후예답게 불심이 깊은 고승마저도 흔들리게 만드는 요악한 기운을 뿌렸다. 그나마 이 정도도 혜연 대사의 깊은 불심이 없었다면 고승의 체면을 벗어던지고 바로 덮쳐들 가공할 색기였다.
혜연 대사는 흔들리는 불심을 겨우 다스리면서 주혜미와 이야기를 시작했다.
"주 시주, 이제 천하의 운명이 시주에게 달렸소."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어리둥절하는 주혜미의 반문에 침중한 어조로 혜연 맹주가 입을 열었다.
"시주가 해야 할 일이 그만큼 막중하다는 이야기요. 시주는 이제 바로 폭풍문으로 가서 소천악 문주를 만나 우리 정파연합을 도와달라고 부탁을 좀 해주셔야겠소."
"장문인이 말씀하시면 저야 당연히 따라야지요. 그런데 그자가 그리 중요한 인물입니까?"
강호사정에 아예 까막눈인 주혜미는 당연히 소천악의 존재도 폭풍문의 실태도 알 재주가 없었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세상 구경을 해본 적이 없는 그녀였다. 가공할 색기가 세상에 해가 될까 우려된 소림사에서 철두철미하게 그녀를 보호한 까닭이었다.
그나마 장로급 이상의 불심이 깊은 사람이 아니면 감히 접근조차 하기 힘든 절지에 진법을 설치한 곳에 그녀가 살아왔다. 한편으로는 가여운 생을 산 그녀를 보며 혜연 맹주는 조용히 말했다.
"천하정세를 좌우할 인물이지요. 제가 듣기론 그 시주에게 다른 조건은 전혀 필요가 없소이다. 단지 절세미녀에게 약하다는 풍문이 있기에 그를 믿고 시주에게 어려운 청을 드리는 겁니다."
"아니 그럼 지금 장문인께서는 저보고 미인계를 쓰라는 겁니까?"
"아미타불. 제가 지옥에 가지 않으면 누가 가리까. 부탁드리오이다."
혜연 소림장문인은 즉답을 피하며 선문선답으로 말했다. 가만히 듣던 주혜미가 입술을 악물고 깊은 생각에 잠겨들었다. 아차 하면 자신의 몸으로 때우라는 말이 서럽게 들려온 터였다.
하지만 정심 대사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이미 세상 남자들의 노리개로 전락해 처참한 생을 살았어야 할 운명을 생각하니 덮어놓고 거절하기는 어려운 처지였다.
오히려 자신이 희생해 천하를 구한다면 그 또한 보람이라는 생각에 미치자 결심은 한결 수월해졌다. 하지만 여자로서 마지막 앙탈을 부리는 그녀였다.
"도대체 처녀에게 몸을 던지라는 말을 하는 스님이 어디 있어요?"
"아미타불. 제가 아니면 누가 지옥에 가겠습니까?"
조용히 대답하는 혜연 대사를 바라보던 주혜미의 입술이 꼭 다물렸다.
"좋아요. 어차피 은혜를 입었으면 갚아야 하는 게 세상 이치이거늘 제가 어찌 장문인의 부탁을 거절하겠습니까. 기꺼이 가겠습니다."
왠지 가시 돋친 주혜미의 말에 미안함을 가슴 가득 담고 혜연 맹주가 얼른 품속에서 서찰을 꺼내 들었다.
"미안하오이다. 이걸 소 문주에게 전해주시구려."
"아녜요. 지금까지 재워주고 먹여준 소림사의 은혜를 이렇게라도 갚게 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하네요."
왠지 가시가 돋친 그녀의 말을 애써 무시하고 혜연 맹주는 자기 할 말을 꿋꿋하게 꺼내들었다.
"주 시주, 이리 말하는 소승의 마음도 아프다오. 아미타불!"
"무슨 서찰이지요?"
"도움을 요청하는 글이오. 우리 정파연합의 위기를 도와달라는 서찰이지요."
"아니 대사님. 우리 정파가 그렇게 위태롭습니까?"
"어렵소이다. 며칠을 버틸지도 장담하기 힘든 처지입니다."
"그런……."
진솔한 혜연 대사의 말에 할 말을 잊은 주혜미가 멍하니 서 있자 혜연 대사가 서둘렀다.
"여러 말 마시고 속히 말을 타고 가서 소천악 문주에게 사정 이야길 하고 무슨 일이 있어도 원군을 얻어 오시오. 정파의 사활이 걸린 중대한 일임을 명심하시고."
다급한 표정의 혜연 대사를 보니 더 이상 질문이 무의미하다는 걸 느낀 주혜미가 묵묵히 고개를 숙여 인사를 마치고 찬바람이 일도록 쌩하니 시선에서 순식간에 멀어졌다.
"휴, 정도무림의 흥망이 이제 소천악 그자에게 달렸구나. 부디 부처님의 가호가 있기를. 나무아미타불."
천천히 중얼거리는 혜연 대사가 급히 선장을 집어 들고 몸을 돌려 다시 정파연합 쪽으로 갔다. 이미 수뇌진은 어수선하게 움직이며 전세가 급박함을 단적으로 보여줬다.
한숨을 푹 내쉰 혜연 대사가 천천히 발길을 싸움터로 옮기자 바로 맹주수호대의 진일추가 앞에 나서며 물었다.
"맹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방어진으로 가야지요. 한손이라도 도움이 되야 그나마 희망이 있습니다."
"안 됩니다. 지금 거기는 극도로 위험합니다. 자칫 잘못해 맹주님이 다치시기라도 하면 정파 무림인들의 사기는 형편없이 떨어지고 말 겁니다."
"그래도 가야지요. 다들 목숨을 걸고 싸우는데 노인네가 뒤에서 숨어 있다면 나중에 정파 무림인들이 뭐라고 비웃겠소이까?"
고집을 부리는 혜연 맹주를 바라보던 맹주수호대는 아무런 말도 꺼낼 수 없었다. 혜연 대사가 걸음을 옮기자 묵묵히 따르는 수밖에 별도리가 없었다. 아직은 정도맹주의 명을 어길 맹주수호대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