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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형산파 12화

무료소설 아! 형산파: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1,146회 작성일

소설 읽기 : 아! 형산파 12화

12화. 분노 (4)

 

“허! 어찌 이런 일이…….”

정 순검(巡檢)이 눈살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원래 관(官)은 무림인들의 일에 웬만해서는 관여를 하지 않는다. 괜히 관여했다가 세력이 강한 문파나 세가와 관련이 있거나, 아니면 무공이 대단한 이가 얽혀 있으면, 중간에 손을 털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은 사안이 제법 컸다. 아무리 흑도문파라지만 백여 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이 하루 만에 모두 죽었다.

사실 이 정도로 큰 사건이라면 순검이 아니라, 그 이상의 관리가 나와야 정상이었다. 그러나 무림인이 관계가 있다고 여겨 순검이 나온 것이다.

“손속이 잔인하군요. 절대로 명문정파의 사람들이 한 짓은 아닐 겁니다.”

정 순검을 따라온 박 포쾌가 시체들을 살펴보며 말했다.

“운학진인이 보기에는 어떻습니까?”

정 순검이 옆에 있는 젊은 도사에게 물었다. 나이 오십이 넘은 정 순검이, 관직이 낮은 것도 아닌데 왜 젊은 도사에게 존대를 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젊은 도사가 등 뒤에 태극이 그려진 도복(道服)을 입고, 송문고검(松紋古劒)을 비껴 메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차림의 도사는, 오로지 무당파밖에 없었다.

정 순검은 처음에 운학이 찾아왔을 때, 코웃음을 치며 무시를 했었다. 그러나 그가 무당파라고 스스로를 밝히자 조금 태도를 달리했다. 이어서 옆에 있던 박 포쾌가 귓속말로 ‘무당십걸’이라고 알려주자 지금과 같이 저자세가 된 것이다.

무당십걸(武當十杰)!

모든 문파가 그러하듯이 무당파도 무공과 인품이 어느 정도 되지 않으면 하산을 허락하지 않는다. 하산한 제자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사문의 명예가 좌지우지되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산을 내려가야 할 경우는 꼭 사문의 어른들이 함께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로 무당십걸이다.

그들은 소위 말하는 천재들이다. 어렸을 때부터 무당파를 받칠 기둥으로 키워진다. 무공이 뛰어남은 말할 필요도 없고, 지닌 성품이나 인격, 거기에 더해 상황을 판단하고 대처하는 능력까지, 어디 하나 흠잡을 데가 없는 자들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독자적으로 행동한다. 무당파 밖에서 무당파와 관계된 모든 일들을, 철저하게 협(俠)에 의거해서 처리한다. 그러다 보니 그들에게 주어진 권력이 막강했다.

일단 무당파를 벗어나면 장문인과 장로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그들의 지시를 따른다. 그리고 그들이 뭘 하든 간에 무당파에서 전적으로 책임을 진다. 그만큼 그들을 신뢰한다는 뜻이었다.

운학은 그런 무당십걸의 말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무당파를 나서면 그가 무당이고, 무당이 곧 그였다. 그것이 그가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순검에게 존대를 받으며 진인이라 불리는 이유였다.

“글쎄요.”

정 순검의 물음에 운학이 무뚝뚝하게 대답하며 시체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정 순검과 박 포쾌는 그런 운학이 못마땅했다. 생각해서 의견을 물어봤던 건데 저런 반응을 보이니 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

“왜 그러십니까?”

시체를 살피던 운학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는 것을 보고 정 순검이 물었다.

운학은 대답은 않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시체들이 쓰러져 있는 모습과 몸에 나 있는 상처의 각도와 방향, 깊이 등을 토대로, 그의 머릿속에는 이들이 당할 때의 상황이 그려지고 있었다.

‘이럴 수가. 혼자서 이렇게 만들었단 말인가?’

운학이 눈을 떴다. 그는 검을 뽑아서 방금 머릿속에서 그렸던 범인의 움직임을 재현하기 시작했다.

정 순검과 박 포쾌는 운학이 갑자기 검을 뽑아 들고 이리저리 휘두르자 의아해했다. 그러나 그가 워낙에 심각한 얼굴이라 말조차 건네지 못했다.

‘빠르다. 강하고, 망설임이 없어. 그리고…….’

운학은 속으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들이 비록 흑도문파라고는 하나 서안에서는 제법 세력이 강한 곳이었다. 어중이떠중이도 많지만, 무공이 뛰어난 자들도 많았다.

그런데 모두 똑같은 방법으로 당했다. 운학은 자신이 과연 이렇게 할 수 있을지를 생각해 봤다. 그냥 죽인다면 어려울 것이 없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죽이려면 자신이 없었다.

물론 마음먹고 하면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디 한 군데쯤은 베일 각오를 해야 했다. 무당파의 무공은 살검(殺劒)보다 활검(活劍)에 의의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범인이 다친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한마디로 범인의 무공이 그와 비슷하거나 그 이상이라는 뜻이었다.

‘무공이 뛰어난데도 단번에 죽이지 않고 고통을 당하다 죽게 만들었어. 원한인가?’

“험! 뭔가 알아낸 것이 있으십니까?”

정 순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운학이 그를 봤다. 정 순검은 대답은 안 하고 자신을 뚫어져라 보는 운학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아니 뭐, 그냥, 중요한 것이 아니면 말하지 않아도 됩니다. 험!”

“아까 박 포쾌님이 말한 대로, 명문정파의 짓은 아닌 것 같군요. 이들은 모두 한 사람한테 당했습니다.”

“그, 그것이 정말입니까?”

백여 명이나 되는 사람이, 그것도 서안에서 알아주는 흑도문파가 단 한 사람에게 이리됐단 말인가?

정 순검과 박 포쾌는 쉽게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렇습니다. 범인은 단 한 명입니다. 그는 빠르고, 과감하고, 강합니다. 그리고 싸움을 할 줄 아는 자입니다.”

운학의 말대로 혼자서 이들을 모두 죽였다면 보통은 아닐 터였다. 그러니 빠르고, 과감하고, 강하다는 말은 충분히 이해가 갔다. 하지만 싸움을 할 줄 안다는 말은 무슨 뜻인지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싸움을 할 줄 안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박 포쾌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박 포쾌님, 만약 혼자서 다수를 상대로 싸운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음……. 글쎄요.”

갑작스러운 물음에 박 포쾌가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혼자서 다수를 상대로 싸울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적을 모두 시야에 두는 겁니다. 그러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벽을 등지고 싸우는 거죠. 그럼 보이지 않는 등 뒤로부터의 공격을 염려하지 않아도 되고, 적들을 모두 시야에 둘 수가 있습니다.”

일리가 있다고 여겼는지 듣고 있던 정 순검과 박 포쾌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렇게 사방이 뚫린 곳에서는 등을 막아줄 벽이 없습니다. 이런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간단합니다. 적을 잡아서 벽 대신에 사용하면 됩니다.”

정 순검과 박 포쾌가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을 했다. 그러자 운학이 한쪽을 가리키며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이쪽을 한 번 보십시오. 범인은 이자를 제압해서 계속 끌고 다녔습니다. 적들은 같은 편이 다칠까 봐 함부로 공격을 하지 못했을 겁니다. 게다가 범인은 이들을 모두 시야에 두기 위해 한쪽으로 몰아갔습니다.”

“음…….”

“거기에 하나 더! 범인은 붙잡은 자를 수시로 칼로 찔러서 비명을 지르게 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도 같은 꼴을 당할까 봐 자연히 겁을 먹었을 겁니다. 서너 사람만 그렇게 겁을 먹어도 금방 모두에게 전염이 되죠. 일단 겁을 먹으면 몸이 둔해져서 평소 실력의 반도 내지 못합니다. 다른 자들보다 상처가 많은 자들은 모두 그에게 붙잡혔던 자들입니다. 제가 싸울 줄 안다고 말한 이유가 이런 것 때문입니다.”

“허!”

정 순검과 박 포쾌는 속으로 크게 감탄을 했다. 굉장한 통찰력이었다.

“혹시 그 외에 또 알아낸 것은 없습니까?”

정 순검의 물음에 운학이 미소를 지었다.

“범인이 사용한 것은 아마도 단검일 겁니다. 그가 사용한 초식은 몇 개 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단순합니다. 단순한 초식을 계속 반복해서 사용했는데도 이들이 모두 당했습니다. 그만큼 고수라는 뜻입니다. 가장 많이 사용한 초식은 손목과 팔, 어깨를 연이어 공격하는 겁니다.”

운학의 말에 박 포쾌가 앞에 있는 시체를 살펴봤다. 정말이었다. 그도 손목과 팔, 어깨에 자상이 있었다.

“박 포쾌님이 보기에 이들의 사인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여기저기 난자당하기는 했지만, 출혈과다가 원인인 것 같습니다.”

시체가 쓰러져 있는 곳마다 이상하게 피가 많이 고여 있었다. 조금만 생각하면 그 정도는 충분히 유추해 낼 수가 있었다. 그러나 운학은 미소를 지으면서 그를 치켜세웠다.

“역시 박 포쾌님이군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박 포쾌는 운학의 칭찬에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아까까지만 해도 무당을 등에 업고 행세하는 건방진 도사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것 같지가 않았다.

정황만으로 마치 현장에 있었던 것처럼 모든 것을 유추하는 통찰력이나 저런 겸손한 모습을 보니, 역시나 무당파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이들의 결정적인 사인은 손목의 동맥을 베인 겁니다. 아마 제때에 지혈을 했다면 모두 살 수 있었을 겁니다. 허나 지혈을 하지 못하게 다른 쪽 팔을 못 쓰게 만들었습니다.”

“그, 그럼…….”

박 포쾌가 놀란 눈을 했다.

“왜 그러십니까?”

“그런 방법은 이들 흑도의 무리들이 자주 쓰는 방법입니다. 한 손을 기둥에 매달아 묶고, 손목을 칼로 벱니다. 그리고 지혈을 못 하게 하면서 겁을 주는 겁니다. 뭔가 얻을 것이 있을 때 쓰는 더러운 방법입니다만…….”

“흐음……. 역시나 원한 때문이군요.”

“짐작을 하고 있었습니까?”

“그렇습니다. 범인은 무공이 상당히 강합니다. 그런데도 이들을 단번에 죽이지 않고 고통스럽게 죽였습니다.”

“그래서 원한이 있다고 생각한 거군요.”

“그렇습니다.”

“아마 그 추측이 맞을 겁니다. 누군가 놈들에게 그렇게 당해서 똑같이 복수를 한 걸 겁니다.”

“박 포쾌님 덕분에 중요한 단서를 잡았군요. 그들에게 당한 사람들을 추적하다 보면 범인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운학이 슬쩍 띄워주는 말을 하자, 박 포쾌가 신이 나서 입을 열었다.

“그럼 상관보하고는 상관이 없겠군요. 안 그렇습니까?”

“상관보라니요?”

운학의 물음에 박 포쾌가 어깨에 힘을 주며 말했다. 그 모습이 마치 난 이런 것도 알고 있다고 잘난 체를 하는 것 같았다.

“험! 실은 사건이 났던 당시에 상관보에서 이곳을 방문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뭔가 연관이 있을까 했는데, 그건 아닌 것 같군요. 상관보에서 대놓고 이런 짓을 할 리가 없지요.”

“상관보의 누가 왔었다고 합니까?”

“상관보주의 손녀딸이라고 하더군요.”

“으음…….”

운학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사실 그가 이번 일에 관심을 보인 이유는, 삼 년 가까이 행적을 쫓고 있는 자들 때문이었다.

그동안 운학이 그들에 대해서 알아낸 거라고는 금마도라는 이름 석 자뿐이었다. 그것이 사람 이름인지, 단체 이름인지, 아니면 정말 섬을 지칭하는지조차도 몰랐다.

그래도 운학은 끈질기게 그 이름을 쫓았다. 그러다 정말 우연찮게 도락방과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러나 그가 이곳에 달려왔을 때는 도락방이 이 꼴이 된 후였다.

때마침 정 순검과 박 포쾌가 사건을 조사하러 나오자 그들에게 정보를 얻을 생각으로 함께 온 것이다.

‘상관보라……. 일단 그들을 쫓아야겠군. 그럼 호남까지 가야 하나?’

“운학진인.”

“말씀하십시오, 정 순검님.”

“그… 범인은 얼마나 강한 겁니까? 혼자서 이들을 다 죽였다니 대단한 건 알겠는데…….”

대충이라도 알아야 잡는 시늉이라도 할 것인지, 아니면 완전히 손을 뗄 것인지를 정할 수가 있었다. 괜히 잡으려고 설치다가 나중에 손을 털어야 하면, 시간과 돈 낭비에 책임추궁까지 당할 수도 있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도 과연 이길 수 있을지 장담을 할 수가 없습니다.”

“헉! 그, 그게 정말입니까?”

정 순검이 깜짝 놀라며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운학은 쓴웃음을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허…….”

정 순검이 낮게 혀를 찼다. 이번 일은 그의 손을 떠났다. 아니 그의 손이 아니라, 관이 아예 개입할 일이 아니었다. 무당십걸과 견줄 정도라면 잡기도 힘들고, 잡아도 문제였다.

‘이번에는 뭔가 단서를 잡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운학이 그런 생각을 하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더없이 맑은 가을 하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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