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형산파 88화
무료소설 아! 형산파: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22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아! 형산파 88화
88화. 밝혀지는 과거 (1)
잠시 꾸벅꾸벅 졸던 적운상이 눈을 떴다.
“흠…….”
내상을 아직 완전히 치료한 것도 아닌 상태에서 며칠째 제대로 잠을 못 자서 피곤이 쌓인 상태였다. 혁세명의 상세를 수시로 살펴야 하니 어쩔 수가 없었다.
침상에 죽은 듯이 누워 있는 혁세명의 완맥을 짚어봤다. 여전히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옆을 보니 혁무한이 앉은 채로 침상에 엎어져서 자고 있었다.
혁무한은 적운상과 함께 계속 이곳에서 자리를 지켰다. 덕분에 적운상은 무료함을 약간이나마 달랠 수가 있었다.
탕탕!
누군가가 작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적운상이 그쪽을 봤다. 잠이 들었던 혁무한도 눈을 떴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혁강운이었다.
“아버님은 좀 어떻소?”
“아직이오.”
적운상의 말에 혁강운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혁무한을 보며 말했다.
“무한아, 잠깐만 보자.”
“응? 무슨 일이야?”
“나와. 여기서 할 이야기가 아니다.”
“응.”
혁무한은 적운상을 한 번 힐끗 보고는 밖으로 나갔다. 혁강운은 혁무한이 방을 나오자 다급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뭔가 급한 일이 생겼음이 분명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시간이 없으니까 가면서 이야기하자.”
“도대체 무슨 일인데?”
“사자왕이 찾아왔다.”
“뭐?”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도대체 그가 어떻게 알고 찾아왔단 말인가?
혁무한은 사자왕과 며칠 같이 있기는 했지만 자신이 통천문 사람이라고는 한 번도 말한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적운상이 여기에 있는 것을 알고 찾아왔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나를 찾아?”
“그래.”
‘다행히 적운상은 아니로군.’
혁무한이 조금은 안심을 하며 다시 물었다.
“어디 있어?”
“객당에서 기다리라고 했는데 말이 통하지가 않아. 정말 그런 사람은 처음 봤다. 지금 이노가 상대하고 있어.”
혁무한은 안 봐도 어떤 상황인지 짐작이 됐다. 사자왕은 누구의 이야기도 듣지 않는다. 옆에서 뭐라 하건 오로지 자기 생각대로 판단하고 자기 방식대로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도대체 그와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무슨 일은? 동정호에서부터 한 번 겨루자고 어찌나 졸라대는지 간신히 떨쳐놓고 왔었는데, 설마 여기까지 찾아올 줄은 몰랐어.”
“후우… 신강에서 중원까지 이름을 떨치는 고수라더니 실력이 굉장하더구나. 이노가 고전하고 있어.”
“적운상에게는 알리지 마.”
“응?”
혁강운이 혁무한을 쳐다봤다. 그는 혁무한이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이유를 몰랐다.
“사자왕이 적운상이라면 아주 이를 갈거든.”
“아! 그러고 보니, 그가 사자도를 가지고 있었지.”
그제야 혁강운은 적운상이 사자도를 가지고 다닌다는 것이 생각났다.
“그랬어?”
“그래. 너한테 휘둘러대던 그 칼이 사자도야. 원래는 사자왕의 신물이나 다름없었지.”
혁무한은 비무가 끝나고 적운상이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사실 적운상이 그 말을 했을 때는 긴가민가했었다.
마지막에 혁무한이 먼저 쓰러진 것은 어디까지나 적운상이 익힌 금안뇌정신공의 특성 때문이었지, 그가 강해서는 아니었다. 혁무한은 지금까지 그렇게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사자왕을 이겼다면 생각을 달리할 수밖에 없었다. 사자왕이 얼마나 강한지는 겨뤄본 혁무한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 무식한 사자왕을 정말 이겼다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며 전각 앞의 공터에 도착하자 사자왕과 이노인 공충일이 겨루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주위에는 나머지 사노 일행과 통천문의 서열에 오른 이들 몇몇이 있었다.
두 사람의 싸움은 언뜻 보기에는 호각인 것처럼 보였지만 아까 혁강운이 말한 대로 공충일이 조금 밀리고 있었다.
무식하게 힘으로 밀어붙이는 사자왕의 도법에 공충일이 임기응변으로 버티고는 있었지만, 그리 오래가지는 못할 것 같았다.
그렇게 잠시 두 사람의 싸움을 지켜보던 혁무한의 눈에 그 뒤쪽에 있는 은서린과 도자명이 보였다.
“설아…….”
혁무한은 은서린이 여기에 와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더구나 사자왕과 같이 오다니, 도대체 어찌 된 일일까?
‘사자왕한테 인질로 잡힌 건가? 그래서 내가 통천문 사람이라는 걸 알고 이리로 온 거로군.’
혁무한은 은서린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도자명이 은서린의 앞을 막아섰다.
“괜찮아요. 사형. 비켜주세요.”
은서린이 그렇게 말했지만 도자명은 비켜서지 않았다. 그러자 은서린이 도자명의 앞으로 나왔다.
“사매.”
“훗! 괜찮아요. 저기 추 대협도 있잖아.”
은서린이 도자명을 향해 생긋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혁무한을 봤다. 혁무한은 은서린과 한 걸음 정도의 거리를 두고 멈춰 섰다.
두 사람은 잠시 아무 말 없이 쳐다보기만 했다. 그러다 은서린이 먼저 환하게 미소를 짓자 혁무한도 미소를 지었다. 혁무한은 그 미소를 보면서 은서린이 잡혀온 것이 아니라 스스로 원해서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안해요. 혁 공자. 그때는 말도 없이 떠나서.”
“아니, 이렇게 다시 찾아왔으니까 됐어. 사과할 필요 없어.”
“혁 공자 덕분에 즐거웠어요.”
“아직도 그렇게 부르는구나. 한 번이라도 좋으니까… 오라버니라 불러줄 순 없을까?”
혁무한이 하는 말에 은서린이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살짝 붉혔다. 그리고 입을 열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혀, 혁… 오라버니…….”
“훗! 크크. 하하하하. 하하하하.”
혁무한이 갑자기 크게 웃음을 터트리자 모두가 놀란 눈으로 이쪽을 봤다. 그렇게 웃던 혁무한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은서린이 직접 찾아와서 이렇게 오라버니라고 하자, 그간 가슴에 담아두었던 이설아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조금이나마 씻기는 느낌이었다.
마치 이설아가 앞에 서서 오라버니라고 부르는 것 같은 착각에 이제야 그녀를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동안은 볼 수가 없고 만날 수가 없어서 더욱이 미안하고 더욱이 그리워했었다. 하지만 비록 닮은 사람일망정 이렇게 보고 나자 허탈한 마음이 들었다.
“고맙다. 서린아. 그리고 그동안 미안했다. 적운상이 안에 있어. 가서 만나봐.”
“네? 사형이요?”
“그래. 덕인.”
“네. 공자.”
혁무한의 부름에 원덕인이 다가왔다.
“두 사람을 적운상에게 안내해 줘.”
원덕인이 잠시 혁무한을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따라오시오.”
혁무한은 원덕인을 따라가는 은서린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쳐다봤다. 은서린은 원덕인을 따라가며 저도 모르게 힐끗 고개를 돌려 혁무한을 봤다. 그러자 혁무한이 미소를 지었다. 너무나 쓸쓸하고 슬픈, 그런 미소였다.
옆에서 혁무한을 지켜보던 혁강운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혁무한이 마음의 짐을 조금은 던 것 같았기 때문이다.
* * *
“흐, 흥… 음…….”
길게 뻗어 있는 전각의 길을 거닐면서 혁소소가 콧노래를 불렀다. 길을 따라 기둥이 양쪽에 줄지어 있었고, 그 위에는 지붕이 얹어져 있었다. 전각과 전각 사이를 이어주는 길인데, 비나 눈을 막기 위해 그런 구조로 되어 있었다.
그 길을 따라가면 혁세명의 처소가 있기 때문에 혁소소에게는 눈을 감고 갈 수도 있을 만큼 익숙했다. 하지만 요즘은 새롭기만 했다.
다른 이유가 없었다. 이 길을 따라가면 적운상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 그를 봤을 때는 사람을 찍어 누르는 것 같은 묘한 분위기에 겁을 먹었었다. 하지만 자주 보다 보니 은근히 그것이 매력적이었다. 그녀는 세상에 그런 사람도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적운상은 마치 날 때부터 그렇게 강한 사람 같았다. 어렸을 때의 적운상이 어땠는지를 안다면 절대로 그런 생각을 못했을 테지만, 그녀가 그런 것을 알 리가 없었다.
어쨌든 요즘 그녀는 적운상을 보러 가는 것이 하루 일과가 되어 있었다. 가서 특별히 하는 것은 없었다. 그저 몇 마디를 나누는 것이 다였다.
그래도 그녀는 그게 좋았다. 잠깐 이야기를 나누는데도 그렇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는 적운상에게 계속 호감이 느껴졌다.
그래서 오늘도 이렇게 가는 길이었다. 그러다 혁소소는 누구를 봤는지 놀라서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기겁을 하며 말을 더듬거렸다.
“다, 당신은… 어,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거야?”
몇 년 전에 죽은 여자가 왜 여기에 있는 걸까?
더구나 그때보다 오히려 더 어려졌다.
“저, 저리 가! 어떻게 그렇게 어려져서 돌아온 거야? 나, 난 아무 짓도 안 했어? 저리 가!”
“뭐야? 저 여자는?”
은서린을 보더니 미친 여자처럼 저러는 것을 보고 도자명이 기가 찬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나 은서린은 짐작되는 것이 있었다. 그녀도 자신을 이설아라는 여자로 착각한 것이다.
“나는 설아가 아니에요.”
“거짓말! 으아아악! 미안해. 그때는 내가 제정신이 아니었어. 그냥 무한이 오라버니를 너한테 빼앗기는 거 같아서 그랬어.”
“네? 그게 무슨 말이죠? 당신은 누구죠?”
“진정하십시오. 아가씨!”
길을 안내하던 원덕인이 혁소소를 부축했다. 그러자 혁소소가 그를 꽉 붙잡고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아가씨!”
“흐윽… 으아아아앙… 미안해… 허엉…….”
끝내 혁소소는 크게 울음을 터트렸다. 원덕인은 이런 혁소소를 처음 봤다. 원인이 은서린이 아닌 이설아에게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말하는 의미를 알 수가 없어서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더 묻고 싶었지만 은서린과 도자명이 옆에 있었다.
“이분은 혁 공자의 누이동생이오.”
“아! 그랬군요. 그런데 아까 한 말은…….”
원덕인이 고개를 저었다. 그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일은 통천문의 치부나 마찬가지였다. 외부인이 알아봐야 좋을 일이 하나도 없었다.
원덕인은 혁소소에게 더 이상 충격을 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은서린을 보며 말했다.
“나중에 이야기합시다.”
그렇게 원덕인이 혁소소를 달래고 있을 때였다. 무슨 급한 일이 생겼는지 통천문의 무사 하나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그는 혁세명의 방을 지키던 무사들 중 한 명이었다.
“여기 계셨군요. 큰일 났습니다. 문주님께서… 문주님께서…….”
무사가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하는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원덕인은 바로 경공을 펼쳤다. 그리고 문주인 혁세명의 방에 도착하자 벌컥 문을 열었다.
“음…….”
원덕인은 저도 모르게 신음소리를 냈다. 적운상이 한 손으로는 혁세명의 완맥을 잡고 다른 손은 단전에 댄 채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독이 발작한 건가?’
단번에 상황을 알아차린 원덕인은 곧바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혁강운과 혁무한에게 이 일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가는 도중 은서린과 도자명, 그리고 혁소소와 다시 마주쳤지만 상황을 설명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원덕인은 그들을 그대로 지나쳐 혁무한이 있는 곳으로 갔다.
거기서는 사자왕과 혁무한이 서로 무기를 휘두르며 한창 싸움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이노 공충일이 패하자 혁무한이 나선 것이다.
원덕인은 혁강운에게 다가가 혁세명의 독이 발작한 사실을 작게 말했다.
“잠시 싸움을 멈춰주시오!”
혁강운이 사자왕에게 소리쳤지만 그는 못 들은 척 무시하며 계속 칼을 휘둘렀다. 혁무한은 사자왕과 싸우는 와중에도 혁강운의 표정이 평소와 다른 것을 보고는 무기를 거두며 급히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싸움을 멈출 생각이 없는 사자왕은 그 뒤를 따라오며 칼을 휘둘러왔다.
따당! 땅!
“흠…….”
사자왕이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그의 칼은 혁무한의 바로 앞에서 멈춰 있었다. 혁강운은 물론이고 주위에 있던 일노 장노한과 서열에 오른 사내들 두 명이 동시에 무기를 뽑아 들고 그의 칼을 막은 것이다.
‘통천문이 호남제일이라더니 제법이로군.’
사자왕은 생각보다 강자가 많다는 것을 알고는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잠시 이대로 물러나주시오. 본 문에 일이 생겼소. 비무는 나중에 합시다.”
혁강운이 검을 거두면서 하는 말에 사자왕이 혁무한을 봤다.
“걱정 마시오. 어디로 도망가거나 하지는 않을 테니.”
“좋다. 그럼.”
사자왕이 그제야 칼을 집어넣었다.
“가자. 무한아.”
“무슨 일입니까? 설마 아버님의 독이 발작한 겁니까?”
혁무한이 혁강운을 따라가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혁무한이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적운상이 독을 태워 혁세명을 치료하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한다면 그것이 혁세명의 마지막일 수도 있었다. 자식 된 도리로서 자리를 지켜야 했다. 그래서 억지로 싸움을 멈추게 한 것이다.
모두가 혁세명의 방으로 가보니 먼저 온 은서린과 도자명, 그리고 혁소소가 방문 앞에서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세 사람은 뭘 보고 있는지 상당히 놀란 얼굴들이었다.
“왜 그러고 있는 거냐?”
혁강운이 묻는 말에 혁소소는 말없이 손으로 방 안을 가리켰다.
“음…….”
방 안의 풍경을 본 혁강운도 그들과 똑같이 놀란 눈을 했다. 혁세명을 치료하고 있는 적운상의 몸에서 쉬지 않고 뇌기가 흘러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영향으로 혁세명의 밑에 깔려 있는 이불은 이미 새까맣게 타버린 상태였다.
파지직! 파직!
적운상은 눈을 감은 상태에서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그런 그의 이마에서 땀이 흘러내리다가 뇌기로 인해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증발해 버렸다.
“도대체…….”
혁무한이 뭔가를 말하려고 하자 일노 장노한이 그의 말을 막았다.
“쉿! 조용히. 지금 그의 신경을 분산시키면 돌이키지 못할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
혁무한이 그제야 실수했음을 깨닫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