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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형산파 112화

무료소설 아! 형산파: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983회 작성일

소설 읽기 : 아! 형산파 112화

112화. 구사일생(九死一生) (3)

 

“으으…….”

악몽이었다. 어렸을 때의 악몽.

아버지의 차가운 눈, 어머니의 냉대, 형제들의 질시, 그래서 어렸을 때는 늘 혼자였다. 낮에는 어디든 숨어 있어야 했다. 가족을 보기가 싫었기 때문이다.

밤에는 무조건 침상에 누워 자는 척을 했다. 그래야 했다. 그것이 자신을 지키는 길이었다.

여덟 살 때까지 적운상은 그렇게 살았다. 그러다 모르는 사람의 손을 잡고 집을 떠나야 했다.

팔려간다는 것도 몰랐다. 그저 가라니까 갈 뿐이었다. 그때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들이 쳐다보던 시선이 지금까지 꿈에 한 번씩 나타났다. 십 년도 더 지났으니 이제는 잊을 만도 하건만, 절대로 잊히지가 않았다.

“헉!”

적운상이 눈을 떴다. 낯선 천장이 보였다. 끔찍한 꿈이었다. 한동안 괜찮다 싶더니 다시 그 꿈을 꾸었다.

그들은 더 이상 가족이 아니었다. 적운상의 가족은 형산파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이제는 잊어야 했다.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허름하니 나무를 걸어서 열어놓은 창문이 보였다. 거기서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했다.

‘어떻게 된 거지?’

민가인 것 같았다. 하지만 어딘지는 알 수가 없었다. 혈마승들과 싸우다가 정신을 잃었었다. 그때는 정말 마지막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랬는데 어떻게 아직도 살아 있는 걸까?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조금 움직이려고 하자 통증이 일었다.

“끄응…….”

저도 모르게 신음소리가 나왔다.

“적 공자!”

예쁜 목소리였다. 고개를 돌려보니 백수연이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서 있었다.

“어떻게 된 거요?”

적운상이 힘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직까지 말을 하기에는 기력이 모자랐다.

“다행이에요. 정말 다행이에요.”

백수연이 침상 곁으로 다가와 앉았다. 그리고 적운상을 내려다보며 눈물을 흘렸다.

혈마승들이 모두 죽자, 백수연은 쏟아지는 빗속을 뚫고 끙끙대며 적운상을 업고 이 마을까지 왔다. 당장에 누군가에게 알리고 도움을 청하고 싶었지만 두려웠다.

또 혈마승들이 쫓아오지는 않을까 마음을 졸여야 했다. 그래서 적운상이 정신을 차릴 때까지만이라도 이곳에서 지내기로 했다. 그러다 이렇게 며칠이나 지난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됐소?”

적운상이 묻는 말에 백수연은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했다. 그것을 가만히 듣고만 있던 적운상은 조용히 금안뇌정신공을 운용해 봤다. 하지만 단전이 텅 빈 느낌이 들면서 뇌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흐음… 시간이 좀 걸리겠군.’

한순간에 뇌기를 모두 쏟아내고 계속 정신을 잃고 있었다. 뇌기가 남아 있을 턱이 없었다.

“목이 좀 마르군.”

“네? 기다리세요. 금방 물을 가져올게요.”

백수연이 금방 밖으로 나가서 물을 가져왔다. 하지만 적운상은 지금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백수연이 적운상의 입에 조심스럽게 물을 조금씩 흘려 넣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적운상의 입을 보며 집중해야 했다. 그러자 냇가에서 벗어났을 때 적운상의 숨을 트이게 하기 위해 입을 맞췄던 것이 떠올랐다. 그 바람에 조금씩 흘려 넣던 물을 콸콸 붓고 있는 것도 몰랐다.

“쿨럭!”

“어머, 미안해요.”

“쿨럭! 컥!”

사레가 들린 적운상이 계속 기침을 했다. 그러자 백수연이 적운상의 입가로 흘러내린 물을 닦아주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괘, 괜찮아요?”

“하아… 이제… 괜찮소.”

“죄송해요. 제가 딴생각을 하느라…….”

백수연이 얼굴을 살짝 붉히며 미안해했다. 적운상은 문득 그런 백수연이 귀엽게 느껴졌다. 백수연이 예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저 그럴 뿐, 적운상은 큰 호감을 느끼지 못했었다. 하지만 이렇게 보니 새삼 그녀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인식됐다.

“아니오. 괜찮소.”

“한동안은 조금 불편하더라도 참으세요. 몸을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는 제가 옆에 있을게요.”

“그러지. 폐를 끼치는군.”

“훗! 아니에요.”

백수연이 예쁘게 웃으면서 밖으로 나갔다. 주양악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는 여자였다.

* * *

 

며칠이 지났다. 적운상은 그동안 침상에서 꼼짝도 하지 못하고 누워있어야 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생각하는 것과 말하는 것뿐이었다.

적운상은 그때 혈마승들과 싸우던 일을 되새겼다. 도망치고자했다면 충분히 가능했다. 그런데 왜 그들과 끝까지 맞섰던 것일까?

중간에 이성을 잃어서였다. 어린 여자아이가 처참하게 죽어 있는 것을 보고 제정신이 아니었다.

‘수련이 부족해서 그래.’

좀 더 자신을 갈고닦아야 했다. 아직 혈마승과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그들과 싸우려면 더 강해져야만 했다.

다시 며칠이 지났다. 적운상은 몸이 좀 움직일 만해지자 금안뇌정신공을 운기(運氣)했다. 하루 밤낮을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계속 운기조식을 하자 뇌기가 조금씩 회복되기 시작했다.

‘십성(十成)인가?’

일반적으로 무공의 성취를 표현할 때 삼성(三成)이면 소성(小成)이요, 십성이면 대성(大成)을 했다고 친다. 그리고 한계치 이상까지 힘을 발휘할 수 있도록 완벽한 성취를 이룬 것을 십이성(十二成)의 경지로 친다.

십성과 십이성의 차이는 굉장히 컸다. 십성의 경지에서도 십이성의 힘을 낼 수는 있다. 하지만 무리해서 내는 힘이기 때문에 부작용이 컸다.

단전이 제 기능을 못하거나 몸이 불구가 되기도 하고, 심하면 죽기도 했다. 하지만 십이성까지 완벽하게 익히면 한계이상의 힘을 써도 그런 부작용이 없었다. 장시간 유지하지는 못하지만 언제든지 가능했다.

‘다시 벼락을 맞을 순 없으니 다른 방법을 찾아야겠군.’

적운상은 침상에서 내려와 밖으로 나갔다. 한쪽에 있는 낡아빠진 평상이 보였다. 그 뒤로는 허름한 나무로 둘러쳐진 담이 있었다.

이곳은 산골마을이라 인적이 드물었다. 집들도 드문드문 있었다. 한동안 지내기에는 아주 좋았다.

품에서 단도를 꺼낸 적운상이 천천히 휘두르기 시작했다. 풍뢰십삼식을 펼치다가 낙연검법을 펼쳤다. 혈마승들과 싸울 때는 낙연검법을 펼치지 않았었다. 익숙하지 않아서인지 풍뢰십삼식만 펼쳤었다.

단도로 낙연검법과 풍뢰십삼식을 섞어서 펼칠 수 있게 충분히 연습을 해둬야 했다. 그래야 또다시 그 같은 꼴을 당하지 않는다.

‘강해져야 해. 좀 더 강해져야 해.’

쉬쉬쉬쉿!

몸이 성치 않은데 무리하게 움직여서 그런지 금방 숨이 찼다.

“헉헉!”

“뭐하고 있는 거예요?”

백수연이 바구니에 먹을 것을 가지고 마당으로 들어서다가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괜찮소.”

“괜찮기는요! 빨리 가서 쉬어요.”

“아니 나는…….”

적운상이 뭐라 하기도 전에 백수연이 억지로 팔을 잡아끌었다. 얼결에 끌려간 적운상은 그대로 침상에 눕혀졌다.

“완전히 몸이 나을 때까지는 수련 금지예요. 하고 싶으면 조용히 앉아서 내공수련이나 해요. 움직이지 말고 머릿속으로만 하란 말이에요.”

짐짓 엄한 표정으로 말하는 백수연을 보면서 적운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백수연은 안 그럴 것 같은데 은근히 사람을 쪼아대는 성격이었다.

잔소리가 심하다고나 할까?

마음에 안 들면 직설적으로 그 자리에서 하나에서 열까지 모두 이야기를 했다. 조금 차가워 보이는 평소의 그녀 모습과는 조금 어울리지 않는 성격이었다.

물론 적운상에게만 그렇게 하는 것이었지만, 다른 때의 백수연이 어떤지를 모르니 그렇다는 걸 알 리가 없다.

“이제 괜찮소.”

“괜찮지 않아 보이니까 그렇잖아요. 그리고 편하게 말해도 돼요. 나보다 나이 어리죠? 나도 편하게 부를 테니까요.”

백수연이 살짝 얼굴을 붉히면서 하는 말에 적운상이 피식 미소를 지었다.

“그럼… 백 누이라고 부르지.”

“그, 그래. 동생.”

백수연은 호칭의 변화가 조금 부끄럽기는 했지만 그만큼 친해졌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

“내일은 마을에 갔다 오자.”

“혈마승들의 눈에 뜨일 수도 있어. 아직 다 낫지 않았잖아.”

“몸이 완전히 나을 때까지 여기에 있을 수는 없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됐는지도 궁금하고, 혈마승들이 또 나타나지는 않았는지도 알아봐야지. 가능하면 본대에도 연락을 하고.”

“우리가 모두 당했다고 생각할 거야. 알아서 다른 조치를 취하겠지.”

“그래도 한 번 갔다 오는 것이 좋겠어.”

백수연은 이대로 적운상과 좀 더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하지만 적운상이 저렇게까지 말하니 어쩔 수가 없었다. 더구나 이곳에 있으면서 무작정 몸이 낫기만을 기다릴 수도 없었다.

“그럼 며칠만… 더 있다가 내려가.”

“그러지.”

“오늘은 뭘 해 먹을까? 감자를 좀 얻었는데.”

잠시 우울한 표정을 짓던 백수연이 환하게 웃으면서 묻자 적운상이 미소를 지었다.

* * *

 

“헉헉! 제길!”

어두운 골목길에서 담벼락에 기대 거친 숨을 몰아쉬는 사내가 있었다. 혁무한이었다.

밤마다 혈마승들과 쫓고 쫓기는 것이 벌써 며칠째인지 몰랐다. 객잔에서 추적대의 반 이상이 당하고 나머지는 뿔뿔이 흩어졌다. 살아남은 사람은 기껏 열 명도 안 됐다.

혁무한은 적운상을 업은 백수연을 무사히 보내기 위해서 뒤쫓아오던 혈마승들을 상대했었다. 쉽지 않았다. 하지만 세 명 정도는 충분했다.

한 명은 목을 베였고, 두 명은 심장이 뚫렸다. 혁무한도 경미한 부상을 입었다.

그런 상태에서 뒤이어 다섯 명의 혈마승들이 나타났다. 두렵지는 않았다. 다섯 명 정도야 마음먹으면 상대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다가 아니라는 것이 문제였다. 세 명과 싸우는 데 일각이 넘게 걸렸다. 다섯 명과 싸우면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몰랐다. 그 와중에 또다시 혈마승들이 온다면 상대하기가 힘들었다.

혁무한은 도망쳤다. 경공에는 자신이 좀 있었는데도 혈마승들을 쉽게 따돌리지 못했다. 그러다 진웅과 상음지를 만났다. 두 사람 다 부상을 입었지만 중상은 아니었다.

운이 좋았다. 이제는 삼 대 오였다. 충분히 해볼 만했다. 한바탕 싸움이 벌어졌다.

이번에는 혈마승들이 도망가기 시작했다. 세 사람이 그들을 뒤쫓았다. 하지만 십여 명의 혈마승들이 모습을 보이자 다시 도망가야 했다.

세 사람은 끈질기게 혈마승들을 쫓아다녔다. 그러면서 틈틈이 살아남은 추적대를 수소문했다. 혈마승들이 틈을 보이면 기습도 했다.

결국 참다못한 혈마승들이 그들을 상대할 고수들을 풀었다. 그 바람에 세 사람은 다시 흩어지고 말았다.

후우웅!

“헛!”

갑자기 머리 위에서 칼바람이 일자 혁무한이 급히 몸을 틀었다. 그러자 혈도가 혁무한의 코앞을 스쳐 지나갔다.

“흐앗!”

혁무한이 내공을 끌어올려 손바닥에 실으며 힘껏 올려쳤다. 하지만 혈마승은 몸을 파라락 돌려서 그걸 흘림과 동시에 혈도를 세로로 그어 올렸다.

혁무한이 기겁을 하며 뒤로 후다닥 물러섰지만 가슴 앞섶을 베였다. 피하는 것이 조금만 늦었어도 가슴을 베였을 것이다.

삐쩍 마른 체구에 인상도 날카로운 혈마승이었다. 그는 지금까지 상대하던 혈마승들과는 달랐다.

혁무한은 그와 싸우면서 거대한 벽을 느껴야 했다. 그는 빠르면서도 강했다. 거기다 망설임이 없었다. 팔 하나를 주더라도 목을 베겠다는 각오였다.

진웅과 상음지가 걱정됐다. 그들을 쫓아간 혈마승들도 보통이 아니었다. 빨리 그들을 도와주러 가야 하건만 눈앞에 있는 혈마승을 상대하기에도 벅차니 마음이 급했다.

혁무한은 내공을 극한까지 끌어올려서 진천무상검법(振天無像劒法)의 절기를 펼쳤다. 더 이상 몸을 사리면서 시간을 끌다가는 되레 당할 것만 같았다.

“흐아아앗!”

혁무한의 검이 수많은 검영(劒影)을 남기며 혈마승의 상체를 파고들었다. 하지만 혈마승은 놀랍게도 혁무한의 절기를 모두 쳐냈다.

따당! 땅! 땅!

“치잇!”

여기서 물러서면 오히려 당한다. 다시 한 번 절기를 펼쳐서 밀어붙여야 했다. 하지만 혈마승이 그럴 틈을 주지 않았다. 혈마승의 혈도가 혁무한의 어깨를 베어내리면서 횡으로 움직였다.

따앙!

검으로 막아내는 순간 힘에서 밀리자 혈마승의 혈도가 배를 긋고 지나갔다.

“크윽!”

깊게 베이지는 않았지만 피가 확 튀면서 아찔한 고통이 전신을 치고 지나갔다. 혁무한이 배를 움켜잡고 그 자리에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혈마승이 혁무한의 목을 날리려고 했다.

피할 길이 없었다. 막기에도 이미 늦었다. 하지만 이대로 당할 수는 없었다. 혁무한은 목이 날아가도 혈마승을 베어버릴 생각으로 검을 횡으로 휘둘렀다.

그때 혈도를 휘두르던 혈마승이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혁무한 때문이 아니었다. 옆에서 갑자기 뭔가가 날아왔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혁무한의 검은 허공을 갈랐다.

텅!

담벼락에 뭔가가 꽂혀서 부르르 떨렸다. 혈마승과 혁무한의 시선이 동시에 그리로 향했다. 한 자루의 도(刀)였다. 칼자루에 정교하게 사자머리가 조각되어 있었다.

“후우…….”

혁무한이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저런 칼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은 딱 한 사람밖에 없었다. 고개를 돌리자 적운상이 백수연과 함께 서 있는 것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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