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형산파 181화
무료소설 아! 형산파: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43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아! 형산파 181화
181화. 모인 사람들 (3)
적운상은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조금 더 있고 싶었지만 제갈호월에게 그런 말을 들은 이상, 지금 떠나는 것이 좋았다. 짐이라고 해봐야 옷 몇 가지와 백운검이 다였다. 그걸 챙겨서 방을 나오자 주양악이 서성거리면서 기다리는 것이 보였다.
“사형.”
“응.”
“정말 그냥 이대로 가도 될까?”
“짐은 다 챙겼어?”
“응.”
“가자.”
적운상이 성큼성큼 앞장서자 주양악이 입을 한 번 삐죽 내밀고는 뒤를 따라 총총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객당을 벗어나기도 전에 제갈무양이 보낸 사람과 마주쳤다.
“가주님께서 두 분을 데려오라고 하셨습니다.”
적운상은 왠지 골치 아픈 일이 생길 것 같아 망설여졌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십여 일을 넘게 머물렀는데 말도 없이 가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다.
“사형.”
주양악이 어떻게 할 건지를 묻는 눈으로 적운상을 봤다.
“가보자.”
적운상이 승낙을 하자 제갈무양이 보낸 사람이 앞장섰다. 적운상과 주양악이 대청에 들어서자 사람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향했다. 그 중에는 낯익은 얼굴도 있었다. 운산과 운청이었다.
제갈호월은 생각지도 못하게 적운상과 주양악이 오자 조금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옆에서 그걸 보고 있던 구보지성은 은근히 기분이 상했다.
“다시 보는군요.”
운청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적운상이 말없이 포권을 하며 인사를 받았다.
“다친 건가?”
운산이 부목이 대어져 있는 적운상의 왼팔을 보며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이곳으로 오면서 다시 한 번 겨뤄볼 심산이었건만 저리 다쳤으니 그럴 수가 없게 된 것이다.
“반갑지 않은 얼굴이군.”
“뭐야? 내가 누구 때문에 그 고생을 하고 다녔는데…….”
“부탁한 적 없어.”
“그걸 말이라고 하냐? 후우…… 운 좋은 줄 알아. 팔만 그렇지 않았으면 한바탕 해보는 건데.”
“질 게 뻔한데 하기는 뭘 해?”
“으…….”
제갈무양은 운산이 적운상과 대화하는 것을 보면서 생각보다 두 사람의 친분이 깊다는 것이 조금 놀라웠다.
“누구야?”
주양악이 옆에서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운산이라고 운학의 사형이야.”
“아아…….”
주양악이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주양악을 보면서 운산이 눈을 빛냈다.
“호오…… 그녀가 네가 그렇게 찾아다니던 사매로군.”
적운상은 주양악을 힐끗 보고는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뭐야? 저렇게도 웃을 줄도 아는 거야?’
운산은 상당히 의외였다. 예전의 적운상은 항상 세상 다 산 표정을 하고 다녔었다. 어쩌다 웃기는 해도 저렇게 밝게 웃지는 않았었다.
“일이 잘 풀렸나 보군요. 다행입니다.”
운청은 말을 하면서 진심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적운상이 제때에 혈불을 찾아내지 못하고 계속 혈마사를 찾아다녔다면, 약속대로 무당파에서 나섰을 것이다. 그럼 양쪽 다 희생이 컸을 것이다.
그때 구보지성이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으며 마치 들으라는 듯이 목소리를 높이며 말했다.
“그가 근래 들어 소문이 자자한 살귀로군.”
적운상이 무표정하니 구보지성을 봤다. 구보지성도 적운상을 봤다. 사람을 내려다보는 눈빛이었다. 두 사람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제갈무양이 웃으면서 말을 꺼냈다.
“하하하. 살귀라니요? 소문이 와전된 것 같군요. 그는 형산일검이라고 합니다. 호남의 후기지수들 중에서는 최고지요.”
“흥! 그런 자가 왜 호북까지 와서 그 같은 살행을 저질렀단 말이오?”
“거기에는 이유가…….”
제갈무양이 사실을 말해주려는데 적운상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도 여자를 납치하는 짓은 하지 않지.”
대성상단의 무사들이 구보지성의 명령으로 제갈호월을 강제로 데려가려고 했던 일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그걸 구보지성이 모를 리가 없다. 그의 얼굴에 불쾌감이 떠올랐다. 제갈무양조차도 그 사실을 알면서 입을 다물고 있건만, 제가 뭐라고 감히 나선단 말인가?
“흥! 그런 짓을 했는지 안 했는지 모르는 일이지. 죄 없는 사람들을 그리 마구 죽이는 자의 말을 어찌 믿겠나?”
“이봐요! 당신…….”
주양악이 발끈해서 나서려고 하자 적운상이 그녀를 제지했다. 그리고 구보지성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내가 마음에 들지 않나 본데 나도 마찬가지요. 계속 얼굴 보고 있어봐야 좋을 일이 없을 것 같군.”
말을 끝낸 적운상이 제갈무양을 봤다.
“그동안 신세 졌습니다. 사실 그냥 가려고 하다가 예의가 아니라 생각되어 잠시 온 것입니다.”
적운상이 포권을 취하면서 하는 말에 제갈무양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적운상을 좀 더 붙잡아두고 싶었다. 예전에야 적운상에 대해서 몰랐기 때문에 신경도 쓰지 않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게다가 구보지성이 대성상단의 단주라는 것을 알면서도 저리 대하는 배짱도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급히 갈 게 뭐 있나? 이대로 가면 내가 마음이 편치 않군. 일단 앉아서 차라도 한 잔 하게나.”
“괜찮습니다. 다음에 또 뵙죠.”
적운상이 사양하며 몸을 돌렸다. 제갈호월이 그것을 보고 몸을 움찔하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걸 못마땅하게 여긴 구보지성이 크게 소리쳤다.
“이대로 갈 텐가?”
모두가 구보지성을 봤다. 적운상도 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봤다.
“시비를 걸었으면 끝을 봐야 할 것 아닌가? 마침 이 자리에는 나를 호위하기 위해 와 있는 대성상단의 팔대고수가 있네. 자네가 한 수 배우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 같군.”
시비는 적운상이 아니라 구보지성이 걸고 있었다. 좌중에 있는 사람들은 구보지성이 왜 그러는지 이유를 몰랐다. 그저 적운상만이 막연하게나마 그 이유를 짐작할 뿐이었다.
“감당하기 힘들군요. 보다시피 부러진 팔이 아직 낫지 않았습니다.”
“호오…… 좋은 핑계로군. 그런 식으로 피해 가겠다면 그렇게 하게나.”
구보지성이 비꼬는 투로 말했다. 그러나 적운상은 못 들은 척 그냥 밖으로 향했다.
“어이, 어이! 잠깐 기다려!”
운산이 적운상을 불러 세웠다.
“왜?”
“이대로 그냥 가면 아쉽잖아. 가더라도 조금 있다가 같이 가자고. 잠시만 있어.”
그렇게 말한 운산이 한쪽에 있는 장년사내를 힐끗 봤다. 그는 어깨까지 내려오는 머리를 단정하게 묶고, 감색의 비단장포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허리에는 투박한 도 한 자루가 달려 있었다. 대성상단의 팔대고수 중 최강이라 불리는 도왕 금정신이었다.
“흐흐. 그 제의, 제가 대신 받고 싶군요.”
구보지성은 운산이 그러고 나서자 약간 의외였다. 그러다 오래전에 금정신과 운산이 한 번 겨뤘던 것을 기억해내고는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후후. 무당십걸의 명성은 이미 귀가 따갑게 듣고 있네. 그런데 어째서 저런 자와 어울리는 건가?”
“하아…… 영감님. 저 친구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하는 말입니까? 나중에 후회할지도 모릅니다.”
“흥!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듯이 말하는군. 그럼 어디 자네가 말해보게. 저자가 그리 대단한 자인가? 기껏해야 호남에서 조금 명성이 알려졌을 뿐, 사문도 삼류문파에 이번에는 호북까지 와서 양민들을 죽이지 않았던가? 그 수가 얼추 삼백 명에 달한다고 들었네. 그게 사람으로서 할 짓이란 말인가?”
제갈호월은 처음 듣는 말이었다. 적운상이 설마 그랬으랴 싶으면서도 왠지 그럴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평소 적운상에게서 느껴지는 박력이 그만큼 대단했기 때문이다.
“하아…… 이것 참…… 뭐라 할 말이 없군. 그가 죽인 자들은 모두 잔악무도한 짓을 일삼는 혈마승들이었습니다. 호북에 숨어 있던 혈마승들을 혼자서 뿌리 뽑아버렸단 말입니다. 혈마승들이 어떤 자들인지, 얼마나 강한 놈들인지는 말 안 해도 아실 겁니다. 그리고 그가 죽인 놈들의 수는 삼백 명이 아니라 그 이상입니다. 못 돼도 천 명 정도는 될 걸요. 제가 뒤쫓아 다니면서 직접 확인한 일이니 확실합니다.”
“…….”
구보지성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었다. 다른 사람들은 놀라서 입이 다물어지지가 않았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호북출신이었지만 혈마사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호남의 수많은 세가와 문파들이 대항을 해도 어떻게 하지 못했던 혈마사였다. 그런데 혼자서 그들을 상대했다니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것도 천여 명 가까이 죽였다니…….
“그러니 영감님이 아무리 대단해도 저 친구는 적으로 돌리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저기 저 아저씨가 나선다고 해도 무리라고요.”
운산이 금정신을 가리키며 말하자 그의 눈썹이 꿈틀했다.
“사형. 왜 또 일을 크게 만드는 겁니까?”
운청이 곤란한 듯이 운산의 소맷자락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운산이 그의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
“왜? 내가 틀린 말 했냐? 너도 그때 그랬잖아. 우리 둘이 덤벼도 승산이 없다고.”
“사형! 지금 그런 말을 왜 하는 겁니까?”
“저 영감님이 자꾸 깔보잖아. 저 친구를 깔보면 그한테 진 나는 뭐가 되냐?”
“하아…….”
운청은 더 이상 말릴 수 없다는 생각에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적운상에게 패한 게 뭐 자랑이라고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이렇게 떠든단 말인가?
“그게 정말인가?”
금정신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뭘 말입니까?”
“정말 그대가 졌나?”
“그렇습니다.”
“몇 초식이었지?”
“별거 다 묻네. 궁금하면 직접 겨뤄보든가? 아, 지금 다쳤으니까 안 되겠구나. 일단 나하고 먼저 겨뤄봅시다.”
운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대청 중앙으로 나갔다. 그러자 금정신이 구보지성을 봤다. 겨뤄도 괜찮은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구보지성이 허락의 뜻으로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하지만 예전처럼 봐주지는 않을 걸세.”
금정신이 운산 앞으로 다가가 허리에 차고 있던 투박한 도를 뽑아들며 말했다. 그걸 보고 운산이 씨익 미소를 지으면서 검을 뽑아 겨눴다.
“나도 봐주지 않을 겁니다. 예전 같지는 않을 테니 조심하는 게 좋을 겁니다.”
두 사람이 그렇게 서로 무기를 겨누자 대청 안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잘 봐둬. 배울 게 많을 거야.”
적운상이 주양악에게 소곤거리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흐랴앗!”
선공은 운산이 먼저였다. 그는 처음부터 양의검법을 극한까지 펼쳤다. 검의 변화가 너무나 복잡해서 전혀 파악이 되지 않았다. 이에 금정신이 크게 감탄한 듯,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챙!
금정신이 칼을 들어 운산의 검을 막아냈다. 그 순간 운산이 검을 비틀어 금정신의 칼을 타고 찔러 넣었다.
카가가가각!
“헛!”
금정신이 기겁을 하며 급히 상체를 틀어서 피하자 운산의 검이 아슬아슬하게 그의 얼굴 앞을 지나갔다.
운산은 검이 부딪칠 때마다 매번 그렇게 미끄러트리며 베거나 찌르기를 했다. 검과 도가 부딪치는 그 짧은 찰나에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지 신기에 가까웠다.
‘늘었군.’
예전에 겨뤘을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운산의 실력은 부쩍 늘어 있었다. 그러나 그동안 금정신도 놀고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하앗!”
금정신의 입에서 기합이 터져 나왔다. 그가 익힌 건 무상만월도(無想滿月刀)라는 도법이다. 어렸을 때 운이 좋아 은거기인을 만난 덕에 전수를 받은 도법으로 쉬지 않고 원을 그리는 것이 특징이었다. 그런 만큼 위력과 변화가 좋았다. 속도가 조금 부족하기는 했지만, 그건 그의 오랜 실전경험으로 충분히 메우고도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