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형산파 197화
무료소설 아! 형산파: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64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아! 형산파 197화
197화. 재회 (3)
이른 아침.
형산을 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삿갓을 눌러쓴 승복 차림의 장년사내였는데, 등에는 바랑을 메고 한 손에는 선장(禪杖)을 들고 있었다.
“경치가 제법이군.”
맑은 이슬을 머금고 있는 산의 경치가 그의 마음을 맑게 해주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한참을 가자 멀리에 형산파의 정문이 보였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 그 앞에 도착한 그는 조금 난감했다. 형산파의 정문이 활짝 열려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문파를 가든 이렇게 정문을 활짝 열어놓는 곳은 없다. 그럴 경우에는 항상 문을 지키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허…….”
잠시 망설이던 그는 결국 그냥 안으로 들어갔다. 형산파 안은 깔끔했다. 건물들이 낡기는 했지만 정성스레 손질하고 관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문파 사람들이 문파에 애착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걸음을 옮기고 있는데 웬 여인이 그를 보고 다가왔다. 한눈에 봐도 빼어나게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출가해서 수행을 하는 그였으나 그 여인을 보자 크게 마음이 흔들렸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그는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합장을 하며 불호를 외웠다.
“어머, 못 보던 분이네요. 어디서 오셨어요?”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이른 아침이라 사람들을 깨우기 미안해서 정문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무도 나오지를 않아서 이렇게 들어왔습니다.”
“괜찮아요. 탁발(托鉢)하러 오신 건가요? 이쪽으로 오세요.”
“아, 아닙니다. 탁발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여인이 그럼 왜 왔냐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모습이 너무나 예뻐서 그는 종잡을 수 없이 심장이 쿵쾅거렸다.
‘나는 수행을 하는 몸이다. 어허! 수행에 마가 끼려는구나.’
“아미타불. 아미타불.”
백수연은 갑자기 그가 땀을 뻘뻘 흘리면서 불호를 외자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한여름도 아니고 추운 겨울날의 아침이건만 왜 저리 땀을 흘린단 말인가?
“사실 저는 소…….”
“언니!”
그가 말을 하려는데 앞쪽에서 뾰족한 외침이 들려왔다. 거기를 보니 눈앞에 있는 여인만큼은 아니어도 미인이라 할 수 있는 여인이 서 있었다. 그녀를 보고 있자니 뭔가 기이한 매력이 느껴져 선뜻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녀는 한 발로 살짝 땅을 찍는가 싶더니 어느새 이곳에 눈앞에 와 있었다. 그 같은 신법에 그는 경악을 했다.
‘이럴 수가! 약관도 되어 보이지 않거늘…….’
“어? 스님이네? 누구예요? 탁발하러 왔나?”
“아니라는데.”
“그래요? 이봐요. 무슨 일로 왔어요?”
주양악이 갑자기 얼굴을 쑥 내밀고 물었다. 그러자 그가 당황하며 뒤로 후다닥 물러나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그걸 보고 주양악이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일찍 일어났네요?”
홍은령이 백수연과 주양악을 보고 다가왔다. 이어서 남예가 나오다가 그들을 보고 다가왔다.
그는 갑자기 그렇게 여인들에게 둘러싸이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웬 여인들이 이렇게 많단 말인가?
그러다 한 사내를 보고는 깜짝 놀랐다. 그는 단지 이쪽으로 걸어왔을 뿐이다. 그런데도 온몸의 솜털이 바짝 서며 긴장이 됐다.
“무슨 일이야?”
“모르겠어. 이른 아침에 찾아와서 저렇게 우물쭈물하고 있어.”
백수연이 하는 말에 적운상이 그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그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무슨 일로 왔소?”
“소, 소승은 그러니까…… 소림사에서 왔습니다.”
“소림사? 거기서 무슨 일로 왔소? 우리는 소림사와는 왕래가 없는데.”
“그것이…… 장문인을 만나서 이야기를 좀 하려고…….”
“흠…… 따라오시오.”
적운상이 앞장서자 그가 후다닥 그 뒤를 따라 움직였다.
탕탕!
“사부님. 저 운상입니다.”
“그래. 들어와라.”
“들어오시오.”
안으로 들어가자 수수하게 꾸민 방의 정경이 보였다. 방주인의 성격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
“응? 손님이 있구나.”
“네. 소림사에서 왔다고 합니다.”
“소림사에서?”
임옥군이 그를 봤다. 그러자 그가 삿갓을 벗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
“소승은 지공이라고 소림사의 삼대제자입니다.”
삼대제자이기는 하지만 소림사였다. 군소문파에서는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예전의 임옥군이었다면 저자세로 나갔을 테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반갑소. 임옥군이오.”
지공은 임옥군을 보면서 조금 오만하다는 생각을 했다. 근래 들어 형산파의 명성이 조금씩 알려지고는 있었지만, 그래봤자 호남에서나 통용되는 거였다. 하지만 자신은 대소림사의 제자라는 생각을 하면서 가볍게 넘겼다.
“소림사의 승려가 이 벽촌까지 무슨 일로 온 것이오?”
‘벽촌인 걸 알긴 아는 모양이군.’
“무림첩을 드리기 위해 왔습니다.”
지공이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공손하게 말했다.
“무림첩?”
“그렇습니다.”
지공이 바랑을 뒤적거리더니 거기서 서찰을 하나 꺼내서 내밀었다. 임옥군이 그걸 펼쳐보고 만면에 웃음이 가득해졌다.
‘이런 삼류문파가 소림사의 부름을 받았으니 기쁘기도 하겠지.’
지공의 생각대로였다. 서찰에는 소림사에서 무림대회가 열리니 참가를 하라는 것이었다. 무림에서는 여러 가지 이유로 이렇게 대회가 열리곤 한다.
그때는 모이는 이유와 주최 측이 어디냐에 따라 참가 여부가 결정된다. 이번에는 소림사에서 주최하는 만큼 천하에 산재해 있는 쟁쟁한 문파들이 대거 참가할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그 안에 형산파가 낀 것이다.
그러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무슨 내용입니까?”
적운상이 묻자 임옥군이 대답 대신 서찰을 건네줬다. 그걸 받아서 읽어본 적운상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무슨 일로 모이는 겁니까? 본문까지 참가하라는 걸 보면 단순히 친목도모는 아닌 것 같군요.”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하지만 지공은 그런 것보다 소림사 같은 대문파에서 부르면 그냥 올 것이지 이유를 묻는 적운상의 태도가 영 못마땅했다. 이곳으로 오면서 무림첩을 건네받은 다른 문파들은 그런 것을 한 번도 묻지 않았었다.
“소승은 그저 무림첩을 배달하는 일만 맡아서 세세한 사정을 잘 모릅니다.”
“날짜를 보니 아직 석 달 정도 남았군요. 혹시 무림 전역에 무림첩을 돌리는 겁니까?”
“그것 역시 소승은 잘 모릅니다. 제가 맡은 곳은 여기 호남의 남방지역입니다.”
“먼 길 오셨을 테니 급하지 않으면 며칠 쉬었다 가십시오.”
“아직 전할 곳이 남아 있어서 며칠은 무리고 하루만 쉬었다가 가겠습니다.”
“그렇게 하십시오. 운상이 네가 객방으로 안내를 해드리거라.”
“네. 사부님. 이쪽으로 오시오.”
적운상이 밖으로 나가자 지공이 뒤를 따랐다. 그렇게 잠시 가자 연무장에서 사람들이 아침수련을 하는 것이 보였다.
“모두들 열심이군요. 보기 좋습니다.”
보통 이렇게 말을 건네면 뭐라고 대꾸가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적운상은 아무 말도 않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정말 건방진 놈이로군.’
지공이 그런 생각을 했으나 내색하지 않고 만면에는 계속 웃음을 머금었다.
“여기서 쉬십시오.”
적운상이 방을 안내하고 가려는데, 밖에 나와 있던 혁무한이 알은체를 했다.
“여어! 뭐야? 또 식객이냐?”
“손님이야.”
“그래? 나중에 술이나 한잔하자.”
“나도 끼지!”
대뜸 끼어드는 사람이 있었다. 운산이었다. 지공이 그를 보고 눈을 빛냈다. 태극무늬가 그려진 도복을 입고 송문고검을 등에 비껴 매고 다니는 자들은 무당파밖에 없다. 그런데 나이가 젊다. 그렇다는 건 무당십걸일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무당파에서는 나이 젊은 도사들을 혼자서 내보내지 않기 때문이다.
‘설마…… 일행이 있겠지.’
지공이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웬 호리호리한 체구의 젊은 도사가 투덜거리면서 다가왔다. 운청이었다.
“사형, 또 술 먹을 생각만 하는 겁니까?”
“뭐야? 또 잔소리하는 거냐?”
“사형이 그러니까 그러는 거 아닙니까?”
“시끄러워.”
“어디 가서 무당십걸이라고 하지 마십시오. 사문에 먹칠 하는 일입니다.”
“뭐야? 도사가 술 좀 마시는 게 어때서?”
“당연히 안 되죠.”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는 말을 듣고 지공은 깜짝 놀랐다. 설마 했는데 정말로 무당십걸일 줄이야…….
저들이 왜 이런 조그만 문파에 와 있단 말인가?
그뿐이 아니었다. 아침 운동을 끝내고 우르르 몰려오는 사람들을 보니까 모두 제법 명성이 있는 자들이었다.
‘저들이 모두 형산파의 식객이란 말인가?’
식객으로 있다는 건, 그 문파에 신세를 지고 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그 문파가 가진 인맥이나 다름없었다.
‘이거 그냥 그저 그런 삼류문파가 아니로구나.’
뒤늦게 그러한 것을 깨달은 지공은 그제야 아까 임옥군의 태도가 이해가 갔다. 건방지고 오만한 것은 임옥군이 아니었다. 바로 지공 자신이었다.
옆에 있는 적운상만 해도 그렇다. 존재감이 대단해서 가만히 있어도 사람을 찍어 누르는 박력이 느껴진다. 저런 사람이 칼을 든다면 그 기세가 엄청날 것이다.
소림사에 과연 그런 기세를 감당할 사람이 누가 있을지 생각해보니 적어도 일대제자 이상은 되어야 할 것 같았다. 자신 같은 삼대제자는 눈만 마주쳐도 몸을 사릴 것이다.
‘이곳이 호랑이 굴이었구나. 그것도 모르고 난…….’
지공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스스로를 책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