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형산파 193화
무료소설 아! 형산파: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47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아! 형산파 193화
193화. 천응방에서 (2)
술자리가 마련됐다. 그동안 살수들 때문에 제대로 된 음식을 먹어보지 못하다가 이렇게 진수성찬을 대하자 모두들 침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분위기가 어려워서 선뜻 달려들지 못했다.
상석에 백태정이 떡하니 버티고 앉아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잔뜩 인상을 쓰며 적운상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런데도 적운상은 느긋하게 음식을 먹으며, 옆에서 백수연이 따라주는 술을 마셨다. 백태정은 그게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요즘 호북에 살귀가 나타났다고 난리더군. 몇몇 문파들이 손을 잡고 그 살귀를 잡겠다고 나선 모양이던데.”
적운상이 오해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적운상은 아무 말도 않고 묵묵히 술만 마셨다. 그게 백태정의 속을 더 긁었다. 결국 그가 직접적으로 대놓고 물었다.
“여기는 왜 온 건가? 수연이를 보러 온 건 아닐 테고.”
“칼 사러 왔습니다.”
“다른 곳에도 칼은 팔지 않나?”
“이곳만한 곳이 없죠.”
적운상이 천응방을 인정하는 말에 백태정은 조금, 아주 조금 표정을 누그러트렸다.
“알긴 아는군. 무슨 칼을 사러 왔나?”
“도(刀)가 필요합니다.”
“널린 게 도지.”
“제가 전에 썼던 사자도 같은 칼이 필요합니다.”
“흐음…… 그런 칼이 있기는 한데 돈은 있나?”
“없습니다.”
“그런데도 칼을 사러 온 건가?”
“우선 담보를 맡기고 돈은 나중에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뭘 맡길 텐가?”
백태정이 묻는 말에 적운상이 허리에 차고 있던 백운검을 뽑았다.
챙!
백운검은 명검 중의 명검이다. 그런데다 적운상이 그동안 관리를 잘해서 날카로움이 그대로 살아 있었다.
백태정은 백운검의 가치를 단번에 알아봤다. 하지만 시큰둥하니 말했다.
“좋은 검이로군. 그 정도에 맞는 도를 내주지. 수연이는 가서 태룡도(太龍刀)를 가져오너라.”
“아버지!”
백수연이 놀라서 백태정을 봤다. 사람들은 그녀가 왜 그러는지 이유를 알지 못했다. 오로지 백묘묘만이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태룡도를 왜 적 공자에게 주려는 거지?’
“뭐하느냐? 어서 가져오지 않고!”
“하지만 그 칼은…….”
“어허! 네가 지금 이 애비의 말을 안 듣겠다는 거냐? 머리 좀 컸다고 이제 뵈는 게 없는 모양이구나.”
“아, 아니에요. 금방 가져올게요.”
백수연이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에 칼 한 자루를 가지고 돌아왔다.
“그래. 이리 가져오너라.”
백수연에게서 칼을 건네받은 백태정이 그걸 단숨에 뽑았다.
챙!
맑은 소리와 함께 순백의 도신이 드러났다. 칼의 호수가 용의 머리 모양으로 되어 있어 마치 용의 입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오오…….”
사람들이 그걸 보고 눈을 빛냈다. 칼에 대해서 잘 모르는 제갈호월조차도 한눈에 보도(寶刀)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찰칵!
백태정이 태룡도를 집어넣고 적운상에게 휙 던져줬다. 적운상이 얼결에 그걸 받았다.
“확인해보게.”
적운상이 태룡도를 잡았다. 손아귀에 착 감기는 것이 느낌이 좋았다. 칼을 천천히 뽑자 도신이 미끄러져 나왔다.
적운상은 허공에 대고 태룡도를 가볍게 한 번 휘둘러봤다.
후웅!
처음 쓰는데도 오랜 세월 써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적운상은 이렇게 좋은 칼을 얻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저 보통의 칼보다 조금 나은 정도를 생각하고 있었다.
흥이 오른 적운상은 앞에 있던 술잔을 공중으로 던졌다. 그리고 가볍게 태룡도를 휘둘렀다.
쉬익!
술이 담긴 술잔이 태룡도의 도신 위에 놓였다. 그걸 보고 사람들은 조금 실망을 했다. 적운상이 칼을 휘두르기에 뭔가 대단한 것을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저 도신으로 술잔을 받쳐 든 것이다.
하지만 사실 그것만도 대단한 일이었다. 술잔을 공중에 던져 술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그렇게 잔을 받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만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눈이 너무 높아서 그런 것이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좋군요. 백운검에 버금가는 칼입니다.”
“나도 구경 좀 하자.”
운산이 그렇게 말하면서 적운상에게서 태룡도를 건네받으려고 했다. 그러자 태룡도의 도신 위에 있던 술잔이 가로로 갈라져 옆으로 떨어져 내리면서 술이 쏟아졌다. 그걸 보고 사람들이 모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이거 네가 한 거냐?”
적운상은 사실 태룡도로 그냥 술잔만 받은 것이 아니었다. 먼저 술잔을 벤 후에 태룡도를 머리 위로 한 번 돌려서 그 술잔을 받쳐 든 것이다. 그것이 한 동작이었고, 술잔이 잘리는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아서 사람들이 몰랐던 것이다.
‘저놈의 무공은 그때보다 더 대단해졌군. 확실히 탐이 나는 놈이야.’
백태정이 그런 생각을 하면서 적운상의 옆에 앉아 있는 주양악을 봤다. 듣기로는 그녀를 찾아서 호북으로 갔었다고 한다. 그만큼 적운상에게 소중한 여자라는 뜻이었다.
잠시 주양악을 보던 백태정이 백수연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주양악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예뻤다. 도대체 저 예쁜 아이 어디가 싫다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예쁘고 성격 좋고, 거기다 가문도 좋지 않은가?
‘에휴…… 호남제일미면 뭐하나? 남자 하나 못 잡는데.’
백태정이 답답한 마음에 술잔을 연거푸 세 잔이나 비웠다. 그걸 보고 백수연이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사실 태룡도는 백씨가문에 삼대째 전해져 내려오는 칼이었다.
천응방 최고의 장인이라는 백구환조차도 만들어낼 수 없는 보도였다. 그런 것을 적운상에게 내준 것이다. 이유는 하나였다. 적운상에게 빚을 지우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나중에 백수연으로 하여금 보상을 받게 할 생각이었다.
어차피 이제 신검문과의 혼사는 완전히 물 건너갔다. 장차 시아버지가 될 사람 앞에서 그렇게 적운상을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으니 이미 끝난 것이다. 이에 태룡도로 승부수를 띄운 것이다. 하지만 가문의 보도까지 이용해서 적운상을 잡아야 한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하는 걸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여기 백운검입니다.”
적운상이 백운검을 백태정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백태정이 그걸 받아서 옆에 놓았다.
“돈을 얼마나 드리면 되겠습니까?”
“얼마 동안 쓸 생각인가?”
“두 달에서 세 달 정도입니다.”
“그럼 그때 가서 계산하세나.”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죠.”
적운상은 좋은 칼을 얻었다는 생각에 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마냥 좋을 뿐이었다.
‘제대로 걸렸군.’
백태정이 그런 생각을 하며 술을 한 잔 들이켰다.
* * *
뾰로롱! 짹짹!
어디에선가 새가 우는 소리에 적운상은 잠이 깼다.
“으…….”
어제 과음을 해서 머리가 깨질 것같이 아팠다. 손으로 머리를 꾹꾹 누르던 적운상은 손에 뭔가 부드러운 것이 걸리기에 확인을 하고는 얼굴이 굳어버렸다. 거기에는 백수연이 반라로 누워 있었다.
‘뭐……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백 누이가 왜…….’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음…… 사형…… 하지 마…… 안 돼. 킥킥.”
주양악이었다. 주양악은 가릴 곳만 간신히 가린 모습으로 옆에 누워서 자고 있었다. 전에 한 번 경험했던 상황이었다. 다만 그때는 백수연과 백리난수였지만 지금은 백리난수가 아니라 주양악이라는 것이 다를 뿐이었다.
적운상은 혹시나 실수를 하지는 않았나 싶어서 어제의 일을 곰곰이 되짚어봤다. 긴장을 푼 것이 문제였다. 그동안 살수들 때문에 한시도 긴장을 늦추지 않았었는데 이곳은 안전하다는 생각에 그만 긴장이 풀려버린 것이다. 거기다 술도 약간 들어가고 태룡도까지 얻자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마침 낮에 봤던 철혈보의 진웅이 신검문의 이은성과 통천문의 혁강운과 함께 적운상을 보러 왔다. 그때부터 제대로 술판이 벌어졌다.
운산의 강요에 의해 운청까지 끼어들어 사내 여섯이 웃고 떠들며 술을 마셨다. 거기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이후로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후우…….”
숙취로 인해 머리가 아픈 것도 아픈 것이지만 지금의 상황으로 인해 머리가 더 아팠다. 예전에야 객잔에서 사건(?)이 나서 뭐라 할 사람이 없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여기는 백수연의 집이었다. 백수연이 여기서 잔 사실을 백태정이 알면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적운상이 백수연을 안았건 그러지 않았건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여기서 잤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적운상이 몸을 일으켜 탁자 위에 있는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러다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러고 잔 건가?’
적운상은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바닥에 옷이 있었다. 보아하니 마구 벗어놓았던 것 같았다. 거기에는 적운상의 옷뿐만이 아니라 주양악과 백수연의 옷도 있었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지금은 추운 겨울이다. 그러니 더워서 이렇게 옷을 벗었을 리는 없었다. 그렇다는 건 백수연을 안았을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적운상은 세차게 고개를 한 번 흔들고는 바지를 입었다. 그리고 주양악과 백수연의 옷을 잘 챙겨서 한쪽에 놓았다.
“후우...”
한숨을 한번 내쉰 적운상은 정신도 차릴 겸, 아침 수련을 하기 위해서 태룡도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적당히 근육이 자리 잡은 상처투성이의 몸에 찬바람을 맞자 머리가 조금 맑아지는 것 같았다. 밤사이에 눈이 와서 소복이 쌓여 있었다.
“후욱…….”
숨을 내쉬자 허연 입김이 뿜어져 나왔다. 태룡도를 뽑아들었다. 손에 착 감기는 것이 느낌이 좋았다.
쉬익! 쉭!
가볍게 몇 번 휘두르다가 풍뢰십삼식을 펼쳤다. 땀을 흘려 몸 안의 술기운을 배출해낼 생각으로 내공을 전혀 쓰지 않았다. 그러다 조사묘의 동굴에서 익힌 베기를 해봤다.
쉬익!
“…….”
백운검으로 펼칠 때와는 느낌이 달랐다. 적운상이 다시 한 번 베기를 했다.
쉬익!
마치 칼에서 바람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혈불을 상대할 때 느꼈던 바로 그 느낌이었다.
적운상이 이번에는 뇌기를 태룡도로 흘려보내며 베기를 했다.
쉬이이익! 파지지직!
적운상은 놀라서 태룡도를 휘두른 그 자세 그대로 한참이나 있었다. 그러다 자세를 풀고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랬던가? 나는 그동안 형태만을 익혔던 건가?’
적운상은 이제야 풍뢰십삼식의 풍뢰(風雷)가 의미하는 바를 알 수가 있었다. 칼에서 들려오는 바람 소리가 풍(風)이요, 거기에 뇌기가 가득 담기는 것이 바로 뢰(雷)였다.
적운상이 태룡도를 살짝 들었다가 바닥에 내리꽂았다. 그리고 맨손으로 풍뢰십삼식을 펼치기 시작했다. 풍뢰십삼식은 원래 권법이었다. 그러니 칼로도 가능하면 권으로도 가능해야 했다.
후우우웅! 파지지직!
적운상의 움직임에 따라 바람이 일었다. 주먹이 바람을 밀어내고 당겨왔다. 그때마다 뇌기가 따라다녔다. 그야말로 완벽한 풍뢰십삼식이었다.
바람과 뇌기로 인해 바닥에 쌓여 있던 눈이 사방으로 흩날리며 녹아 없어졌다. 꽁꽁 얼어 있던 작은 연못의 물이 깨지며 튀어 올랐다. 석등이 부서져 가루가 되고, 바위가 완전히 박살이 났다.
그런데도 적운상은 멈추지 않고 계속 풍뢰십삼식을 펼쳤다. 그 난리가 나자 사람들이 뭔 일인가 싶어서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적운상이 펼치는 풍뢰십삼식을 보면서 멍하니 시선을 떼지 못했다.
아름다웠다. 적운상은 마치 신들린 사람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 적운상의 몸짓 하나하나가 너무나 선명하게 사람들의 눈에 와서 박혔다.
저것을 도대체 뭐라 해야 한단 말인가?
촤아아아아악!
“후욱…….”
적운상이 마지막 초식을 펼치고 호흡을 조절했다. 무아지경(無我之境)에 빠져서 모든 것을 잊었었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이전에는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진기한 체험이었다.
심검의 경지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하아…….”
적운상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숨을 내쉬자 뜨거운 입김이 번져나갔다. 상의를 입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몸에서도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마치 뜨거운 쇠를 물에 넣어 식히는 것 같았다.
“바, 방금 그게 무슨 무공인가?”
백태정이 말까지 더듬거리면서 물었다.
“풍뢰십삼식입니다.”
“형산파의 무공인가?”
“그렇습니다.”
형산파에 그렇게 대단한 무공이 있다는 것을 백태정은 오늘 처음 알았다. 저런 무공이라면 무당파나 소림사의 무공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좋은 구경을 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