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형산파 223화
무료소설 아! 형산파: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64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아! 형산파 223화
223화. 사연 (4)
잠시의 시간이 흘렀다. 현성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이겨낸 것이다.
그걸 보고 화산파를 통솔해서 왔던 적우진인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예전에 호남에 왔다가 적운상과 만난 적이 있었다. 금벽도문을 상대하면서 그의 실력도 봤었다. 그게 벌써 몇 년이나 지난 일이었다.
그 당시에 적우진인은 적운상을 현성과 같은 선상에 놓고 봤었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고 현성의 실력이 남다르게 느는 것을 보고는 적운상을 잊었었다.
그런데 오늘 이렇게 두 사람이 겨루게 된 것이다. 놀랍게도 적운상은 적우진인으로 하여금 다시 그때의 일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적우진인은 현성을 믿었으나 조금 불안한 감도 없지 않아 있었다. 그러나 현성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를 보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건 자신감의 미소였다. 충분히 이길 수 있기에 짓는 미소란 걸 적우진인은 알고 있었다.
‘그래. 그러면 되는 게다.’
적우진인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때 적운상이 움직였다.
후우우우웅!
단순한 일자베기였다. 하지만 휘둘러지는 태룡도를 따라 바람이 일었다. 거기에 놀랍게도 뇌기가 더해졌다.
파지지지직!
현성의 눈이 커다래졌다. 아까 봤던 베기가 아니었다. 그것과는 격이 달랐다. 깔끔하고 완벽했다. 그 이상의 베기는 없었다. 도(刀)로 펼칠 수 있는 최상의 베기였다.
현성은 순간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막아내면 검과 함께 베어져 나간다. 맞받아쳐도 마찬가지였다. 그에게는 저 베기를 받아칠 만한 기술이 없었다.
무작정 받아치면 검이 잘리고 몸도 잘리고 만다. 결국 피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잠깐, 아주 찰나의 시간을 망설이는 바람에 반응이 늦었다.
쐐에에에에엑!
“…….”
적운상의 태룡도는 허공을 갈랐다. 현성은 죽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혼은 싹둑 베어져 나갔다. 그동안 피를 쏟아내며 갈고닦은 실력과 그것에 대한 자존심도 같이 베어졌다.
현성은 멍하니 적운상을 봤다. 적운상은 처음과 같이 태룡도를 늘어트린 채 서 있었다.
‘깨보라 이건가?’
현성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자신이 아는 모든 초식을 머릿속에 그렸다. 할 수 있는 가장 빠른 움직임을 생각해 냈다. 거기에 쓸 수 있는 내기를 모두 실었다.
수많은 가상의 현성이 검을 휘둘렀다. 화산파의 독문절기는 이십사식의 매화검법이었다. 매화검법은 빠르기와 변화를 가득 담고 있다. 그래서 파르르 떨리는 검첨의 모습이 매화를 그린다 해서 매화검법이란 이름이 붙었다.
역대의 선배들은 그 매화검법으로 천하제일이라 불렸었다. 현성은 매화검법을 십이 성까지 완벽하게 익혔다. 그런데도 보이지가 않았다. 적운상이 방금 보여준 베기를 깰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눈앞에서 움직이던 수백, 수천 명의 현성이 하나둘씩 사라졌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하나도 남지 않게 됐다.
패배였다. 뛰는 자 위에 나는 자가 있다는 말이 있다. 현성은 지금까지 자신이 나는 자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뛰는 자였다.
“졌다.”
현성의 입에서 나직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그 말만 남겨놓고 조용히 몸을 돌려 무대를 내려갔다.
여기저기서 웅성거림이 일었다. 사람들은 현성이 왜 졌다고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들이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수준이 높은 비무였다.
“음…….”
명성이 쟁쟁한 문파와 세가의 수장들조차도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들 중 누구는 인상을 팍 찡그리고 있었고 누구는 입가에 잔잔하니 미소를 띠고 있었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누군가 참지 못하고 물었지만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유를 몰라서 웅성거리만 할 뿐이었다.
그때 운암이 무대 위로 올라왔다. 그러자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그쪽으로 향했다.
방금 전 적운상과 현성의 비무를 이해한 사람들은 운암이 올라온 것을 보고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분명 두 사람의 비무를 이해했을 텐데 저리 올라온 것을 보면 적운상의 그 베기를 감당할 자신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이기지도 못하는데 저렇게 올라올 이유가 없었다.
“다시 보는군. 일단 예의는 갖춰야겠지? 무당파의 운암이라고 하네. 한 수 배우겠네.”
운암이 반장을 하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러자 적운상이 예를 받으면서 포권을 했다.
“형산파의 적운상이오.”
“자네를 처음 봤을 때 대단하다고는 생각했었지만 솔직히 이 정도일 줄은 생각지 못했네. 정말 상상을 뛰어넘는군.”
“과찬이오.”
“아닐세. 나도 자네의 나이에 그 정도 경지에는 오르지 못했었어.”
운암이 하는 말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적운상이 이룬 경지는 나이에 비해 터무니없이 높았다. 오늘 운암마저 그에게 패한다면 앞으로 짧게는 몇 년에서 길게는 십여 년까지 적운상의 명성이 천하를 흔들 것이 분명했다.
매화검수의 최고수라는 현성을 꺾고 무당십걸의 수좌에 있는 운암까지 꺾었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꺾이면 사람들은 ‘그럼 그렇지’란 생각을 하면서 운암을 더욱이 기억할 것이다.
운암이 천천히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검을 늘어트렸다. 그 순간 그의 옷자락이 크게 한 번 펄럭였다. 내기를 극한까지 끌어올린 것이다.
그는 처음부터 전력을 다할 생각이었다. 적운상이 현성에게 보인 베기를 받아내려는 것이다.
“오게.”
적운상은 선공을 양보해 준 답례로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리고 태룡도를 잡고 금안뇌정신공을 끌어올렸다. 그러자 눈에 황금색의 기운이 일렁거렸다.
두 사람이 그렇게 팽팽하게 대치하자 주위에 긴장감이 확 번져갔다.
“일 초 승부인가?”
운산이 중얼거렸다. 적운상과 운암이 풍기는 기세가 그랬다. 예전에 운산도 적운상과 저렇게 일 초 승부를 벌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와는 격이 완전히 달랐다.
운산이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도 저 자리에 서고 싶었다. 저 자리에서 서서 저렇게 피가 마르고 모골이 송연해지는 긴장감을 느끼며 검을 휘두르고 싶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아직도 먼 경지였다.
그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아까 현성과 적운상의 비무를 이해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같은 충동을 느꼈다.
겨루고 싶다. 붙어보고 싶다. 깨질 때 깨지더라도 저 거대하고 높은 벽에 부딪쳐보고 싶다.
마음속에서 그 같은 메아리가 계속 울리는 바람에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어떤 사람은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기도 했다.
그때 적운상이 움직였다. 그는 앞으로 달려가면서 잡고 있던 태룡도를 어깨 뒤로 넘겼다. 그리고 굳건하게 한 발을 디디면서 사선으로 내리그었다.
후우우우웅! 파지지지직!
군더더기가 없는 깔끔하면서도 완벽한 베기였다. 매화검수들 중 최고수라는 현성을 검 한 번 휘두르지 못하게 하고 물러나게 만든 베기였다.
운암은 과연 그것을 어떻게 받아낼 것인가?
치링!
“헛!”
무당파의 장문인인 일영진인이 눈을 부릅떴다.
* * *
운암은 봤다. 적운상의 칼이 사선으로 베어오는 것을.
아니 봤다기보다는 느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었다. 그건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보는 순간 끝나기 때문이다. 그러니 느낀 것이다. 느끼고 거기에 검을 댔다.
무당파의 무공은 감각을 극한까지 키워서 상대의 힘을 무(無)로 돌리는 것이 극의(極意)다. 그래서 예전에 운학이나 운산은 단지 검을 대는 것만으로도 빠르게 날아오는 화살의 방향을 틀 수가 있었다.
운암은 운학이나 운산보다 그 경지가 더 높았다. 어떤 힘이든 그는 완벽하게 무로 돌릴 수가 있었다. 아무리 빨라도, 아무리 거대해도, 아무리 변화가 극심해도 그에게는 소용이 없었다. 검이 닿는다면 그의 의지대로 하는 것이 가능했다.
치링!
검이 닿았다. 운암은 적운상이 하는 완벽한 베기를 이끌었다. 그것은 무당파를 세운 장삼봉진인이 봤다 해도 감탄을 할 만한 일검이었다.
적운상의 태룡도는 운암의 검에 이끌려 옆으로 흘렀다. 운암은 이겼다는 생각을 했다. 완벽한 만큼 흔들리면 그만큼 틈이 크게 생긴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적운상이 그대로 칼을 놓아버린 것이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운암은 당황했다. 만약 그가 초사영이 언가 사내와 싸우는 것을 봤다면 이런 것을 짐작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들의 싸움을 보지 않았었다.
실력 차이가 너무 난다고 여겨 그 자리에 참석하지 않은 것이다. 그와 비슷한 명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그랬었다. 그래서 그도 그것을 당연하게 여겼었다. 그게 실수였다.
태룡도를 놓은 적운상은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그런 적운상의 주먹에서 뇌기가 새어 나오며 파지직 거렸다.
바람이 일었다. 거기에 뇌기가 더해졌다. 풍뢰십삼식이었다. 적운상이 천응방의 후원에서 태룡도를 땅에 꽂아두고 맨손으로 풍뢰십삼식을 펼쳤을 때 그걸 보고 놀라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지금도 그랬다.
적운상은 겨우 삼 초식을 펼쳤다. 그러나 회오리가 이는 것처럼 폭발적인 움직임과 거기에 벼락이 떨어지는 강맹한 위력이 터져 나오자 사람들은 완전히 넋을 빼앗겼다.
운암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는 그대로 서 있다가 적운상의 주먹이 그의 코앞으로 스치고 지나가 땅에 박히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콰아아아아앙! 파지지지지지직!
굉장한 소리에 비해 바닥은 별 이상이 없었다. 모두들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적운상이 몸을 일으키는 순간 바닥에 금이 쫘자작 거리면서 가더니 급기야는 풀썩 가라앉아 버렸다. 아까 주양악의 주먹에 의해 부서지던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주양악은 단순히 내공의 힘만으로 그렇게 만든 것에 비해 적운상은 완벽한 기술에 의해 그렇게 만든 것이다.
“음…….”
운암이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곧 미소를 지으면서 적운상을 향해 반장을 하며 고개를 깊숙하게 숙였다.
“제대로 배웠네. 언제고 다시 한 번 가르침을 주기 바라네.”
“언제든 그러겠습니다.”
오만한 말이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오만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당연하다고 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