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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형산파 269화

무료소설 아! 형산파: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1,052회 작성일

소설 읽기 : 아! 형산파 269화

269화. 재회 (2)

 

“정말 대단한 놈이군.”

회색장포를 입은 초로의 노인이 곧은 눈으로 박노엽의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 그러자 그의 옆에 있던 승려가 나직이 불호를 외며 물었다.

“아미타불.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나는 지금껏 그 어떤 불의도 그냥 보아 넘기지 않았었네. 이번에도 마찬가지일세. 그는 첩자로 있다가 들키자 친구와 상관에게 상해를 입혔네. 만약 그냥 도망쳤다면 나도 이렇게까지는 하지 않았을 걸세.”

승려는 더 이상 말해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노인은 점창파의 장로인 구화로였다. 성격이 너무 곧아서 그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점창파 내에서조차 그랬다.

사람이 살다보면 실수를 할 수도 있는 일이건만 구화로는 그런 것을 절대로 그냥 보아 넘기지 않았다. 이런 사람을 왜 백호단의 단주로 임명해서 이곳으로 보냈는지, 무림맹 수뇌부의 지시가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이해는 갔다.

이번 일에 그 이상의 적격자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뒤에서 나직이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그랑 싸울 거냐?”

“위에서 시키면 해야지 별수 있습니까?”

“넌 위에서 죽으라면 죽을래?”

“죽는 시늉은 해야죠.”

“참 나… 왜 하필 너랑 또 같이 가게 돼서 이 모양인지 모르겠다.”

“섭섭한 말씀 마십시오. 저라고 철도 안 든 사형과 다니는 것이 좋은 줄 아십니까?”

“뭐야? 이걸 그냥 콱…….”

한 명은 덩치가 크고 호탕하게 생긴 운산이었고, 한 명은 호리호리한 체격에 약간은 신경질적으로 생긴 운청이었다. 두 사람은 무림맹을 떠나 이곳까지 오는 동안 내내 저렇게 툭탁거렸다.

이에 주변사람들이 실소를 금치 못했다. 무당파의 엄한 법규 안에서 어떻게 저런 사람들이 무당십걸이 될 수 있었는지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조용히 좀 하시오.”

화산파의 매화검수 중 한 명인 현양이 하는 말에 운산이 살짝 미간을 좁혔다.

“내 입으로 내가 말도 못하나. 허 참… 세상이 어찌 이리 되었는지.”

이번에는 현양의 미간이 좁혀졌다.

“지금 해보자는 겁니까?”

“좋지. 해보자고 하면 내가 겁먹을 줄 알았나? 화산의 검이 맵다 하니 어디 한 번 맛이나 보지.”

운산이 그렇게 말하면서 당장에 검을 뽑으려고 했다. 현양도 지지 않겠다는 듯이 등 뒤에 차고 있던 검에 손을 가져갔다. 이들은 지금 잔뜩 짜증이 나있는 상태였다.

이번 임무 때문이었다. 무림대회 때 보여준 적운상의 무위는 젊은 사람들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었다. 잠깐 말을 나눠보니 예의도 알고 스스로를 낮출 줄도 아는 겸손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을 지금 죽이러 가고 있었다. 그것도 여러 명이서 떼를 지어.

여기 있는 사람들은 바보가 아니다. 위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정도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나이 들어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그들은 두려운 것이다. 그들의 입지가 좁아지고 체면이 깎이는 게 무서워서 이런 선택을 했다.

적운상은 젊다. 그런데 강하다. 앞으로 십 년 후면 적운상의 명성은 천하를 떨어 울릴 터, 명문대파와 세가들의 잘난 우두머리들은 그게 싫은 것이다.

무엇보다 적운상의 출신이 문제였다. 적운상은 그리 알려지지 않은 삼류문파 출신이다. 그런 곳에서도 그리 대단한 고수를 배출해냈는데 자신들은 하지 못했다는 것, 자존심이 상하고 체면이 상하는 일이다.

그래서 이번 일에 가장 앞장선 것이 무림대회 때 적운상에게 패했던 소림사와 무당파, 그리고 화산파였다.

“시끄럽다. 지금 도대체 뭣들 하는 게냐?”

구화로가 현양과 운산을 보고 화를 냈다. 그러자 두 사람이 찔끔하며 뒤로 한 걸음씩 물러났다.

“서로 다툴 힘이 있거든 아껴뒀다가 그를 만나면 쓰거라. 안 그러고 계속 하겠다면 내가 상대해주마.”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어르신.”

“됐다. 둘 다 자중해라.”

“예.”

현양과 운산이 기가 팍 죽어 있는데 십팔나한 중 한 명인 무지가 약간 들뜬 목소리로 작게 소리쳤다.

“왔습니다.”

“뭐?”

“어디?”

“저자인가?”

“진짜로군.”

모두의 시선이 박노엽의 맞은편에서 천천히 걸어오고 있는 적운상에게로 향했다.

“어떻게 할까요?”

누군가가 묻자 구화로가 입가에 웃음을 띠며 말했다.

“잠시 놔둬라. 제 사제가 저 꼴이 된 걸 보면 마음의 평정을 일을 게다. 그때 친다.”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냉정한 판단력이었다.

* * *

 

적운상은 말에서 내려 고삐를 잡고 걷고 있었다. 말이 많이 지쳐 있어서 그렇게 잠시 가고 있었는데 앞에서 낯익은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처음에는 설마 아닐 거라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그의 모습이 또렷이 보이자 다급하게 경공신법을 펼쳤다.

“사제!”

비틀거리며 걷고 있던 박노엽은 적운상의 손에 쓰러지다시피 하며 안겼다.

“어떻게 된 거야? 왜 이래? 사제! 정신 차려!”

“하악… 하악…….”

박노엽은 정신이 혼미한 가운데 누군가의 외침소리를 들었다.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고 그는 소매를 움켜잡았다. 그러고는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간신히 중얼거렸다.

“사형을… 형산파에 말을… 전해… 주시오…….”

“말하지 마라. 아무 말도 하지 마.”

적운상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박노엽은 가망이 없었다. 어떻게 이런 몸으로 여기까지 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몸 상태로 봐서는 벌써 쓰러졌어야 정상이었다.

맥을 짚어보니 선천진기까지 쓴 모양이었다. 꺼지기 직전의 촛불과 같았다.

“사제. 정신 차려! 이대로는 안 돼!”

적운상은 박노엽을 눕히다가 그의 등에 박혀 있는 비수를 보고는 눈이 뒤집히는 줄 알았다. 누가 이렇게 잔혹한 짓을 했단 말인가?

비수를 잡는 손이 덜덜 떨려왔다. 뽑을 수가 없었다. 저걸 뽑으면 박노엽은 죽고 만다. 이미 너무 많은 피를 흘렸다. 여기서 더 피를 흘리면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놔두면 지혈을 할 수 없어서 피가 계속 흘러나올 터, 이래저래 죽기는 마찬가지였다.

“제길!”

적운상은 박노엽을 한 손으로 부축하고 다른 손을 단전에 댔다. 그리고 뇌기를 불어넣었다. 박노엽은 무공에 큰 재능도 없고 나이도 많아서 명옥심법을 익히지 않고 계속 금안뇌정신공만 익혔다. 그래서 적운상의 뇌기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흐으… 사형…….”

정신이 좀 드는지 박노엽이 적운상을 불렀다.

“그래. 나다. 어떻게 된 일이냐?”

“사형… 모두에게… 미안하군요.”

“쓸데없는 말 하지 마!”

“소림을… 쓰러트리고… 무당을 꺾으… 십시오. 사부님의… 원한을… 사형… 믿으… 니까…….”

그게 박노엽의 마지막 말이었다. 적운상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걱정 없다고 했잖아. 똑똑하니까 걱정 말라고 그랬으면서…….”

적운상은 고개를 푹 숙이고 들지를 못했다. 그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너희가 이랬냐?”

적운상이 감정을 가라앉히고 나직이 물었다. 그러자 구화로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가 자초한 일이었다. 너 역시 죽게 될 것이다.”

“큭큭큭.”

적운상의 입에서 자조적인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죽는다고? 그래. 날 죽일 수 있는지 어디 면상이나 보자.”

박노엽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적운상이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휘청했다. 심적 충격이 그만큼 크다는 뜻이었다.

그걸 보고 구화로는 속으로 안도를 했다. 자신의 계책이 먹혀든 것이다. 적운상의 무공이 뛰어나기는 하지만 저런 상태로 이 많은 사람들을 상대하기에는 무리였다.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는 적운상의 눈빛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 눈빛을 대하는 이들이 자신들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한 짓이 껄끄러웠고, 시선 속에 담긴 살기에 소름이 돋았기 때문이다.

“소림사와 무당, 거기에 화산까지… 정말 당신들이 맞나? 수행을 하고 도를 닦는 당신들이 사람에게 이런 짓을 한 것이 맞나? 내 사제가 무엇을 잘못했나? 너희에게 칼을 들이댔나? 아니면 누군가를 죽였나? 말해라. 내 사제가 어떤 잘못을 했기에 이리 참혹한 짓을 했나? 그럴 정도로 사제가 잘못을 했다면 그냥 넘어가겠다. 하지만 아니라면, 너희가 알량한 사문의 힘을 믿고 행세한 거라면 이 자리에서 살아서 돌아갈 생각을 마라. 갈기갈기 찢어 죽여 줄 테다.”

적운상이 하는 말에 그들은 얼굴을 들지 못했다. 자신들이 생각하기에도 너무한 짓이었다. 그때 뜨거운 무언가가 주위로 확 번져가며 그들의 가슴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그게 뭔지 몰라 움찔하던 그들은 곧 그게 살기라는 것을 깨닫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놈은 간악하게 숨어서 쥐새끼 짓을 했다. 도망가면서는 동료와 상관을 다치게까지 했지.”

구화로가 무표정하니 하는 말을 들으며 적운상이 무서운 눈으로 그를 노려봤다.

“그게 사제가 저렇게 당할 이유인가?”

“아니다. 결정적인 이유는 네게 있다. 네 사제이기에 저런 꼴을 당한 거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이제야 납득이 되는군.”

적운상이 실성한 사람처럼 중얼거리면서 태룡도를 뽑았다. 그러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동시에 검을 뽑았다. 그들을 한차례 쓸어보던 적운상의 눈에 운산과 운청이 보였다.

“운산!”

운산은 어떻게 이 자리에서 검을 휘두르지 않을지를 고민하고 있다가 갑자기 적운상이 부르자 화들짝 놀라며 그를 봤다.

“왜, 왜 그러시오?”

“너도 내 사제에게 손을 썼나?”

“아니오. 나는 말리려고 했소. 하지만 힘이 없어서…….”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궁색한 변명이었다.

“가라. 지금 가면 살려주겠다.”

모두가 코웃음을 쳤다. 그는 무당십걸이다. 설마 저런 말을 듣고 갈까 싶었다. 하지만 운산은 아주 찰나를 갈등하더니 옆에 있던 운청의 마혈을 짚었다. 그러고는 꼼짝도 못하는 운청을 둘러메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리기 시작했다.

운산은 알고 있었다. 적운상이 어떤 사람인지를. 한때 그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면서 천여 명의 혈마승을 베어 넘기는 걸 지켜봤었다. 적운상은 상대가 누구건 거침이 없었다.

적이라고 생각하면 손에 사정을 두지 않는다. 자신의 생각이 맞는다면 저기에 있는 사람들은 이제 볼일이 없었다. 모두 죽을 테니까.

그러니 이렇게 내빼도 소문은 나지 않을 것이다. 적운상의 성격상 이런 걸 떠들고 다닐 사람은 아니다.

“사형. 난 오늘 사형이 한 짓을 기억할 겁니다.”

그래. 이 망할 사제놈만 입 다물면 말이다.

“시끄러워! 나 아니었으면 넌 죽었어.”

“난 무당십걸입니다. 무당파를 위해서라면 목숨을 내놓아도 아깝지 않습니다.”

“입에 침이나 바르고 그런 말을 해라. 그리고 저게 무당파를 위하는 일이냐? 개죽음이지. 정말 무당파를 위하려면 저 괴물 같은 놈을 이길 정도로 강해져. 그게 진정으로 무당파를 위하는 일이다.”

“그래도 사형.”

“뭐야? 힘든데 자꾸 말 시키지 마.”

“많이 분해요.”

운청의 목소리는 울먹이고 있었다. 그는 운산에게 이렇게 매달려 도망가는 자신이 너무나 한심하고 분했다. 솔직히 아까 그는 적운상에게 겁을 먹었었다.

이에 혹시 옛정을 생각해서 좀 봐주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때 적운상이 운산을 부른 것이다.

“헉헉… 제길…….”

운산의 입에서 거친 말이 튀어나왔다. 그도 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 * *

 

“네 이놈!”

구화로가 황당해하며 크게 소리쳤지만 이미 운산의 모습은 저만치 가있었다. 세상에, 무당십걸씩이나 돼서 어떻게 가란다고 정말 저리 가버린단 말인가?

그 여파는 생각보다 컸다. 모두 적운상을 보며 두려워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들은 무당십걸이 저리 내빼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무당십걸이 누구던가? 무당이 곧 그들이요, 그들이 곧 무당이었다. 그런 자부심으로 살아가는 그들이 도망이라니?

차라리 죽었으면 죽었지 그런 방법은 절대로 택하지 않을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도망갔다. 단 한마디에.

“뭣들 하느냐? 어서 저놈을…….”

구화로의 목소리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믿을 수 없게도 적운상이 그의 등 뒤에 일 장 정도 떨어진 곳에 가있었다. 도대체 언제 어떻게 움직였단 말인가?

그들 중에는 소림사의 기둥이라는 십팔나한도 있었고, 화산파의 자랑이라는 매화검수도 있었다. 하지만 단 한 명도 적운상이 어떻게 움직였는지 보지 못했다.

그때 구화로가 크게 비명을 질렀다. 그의 오른쪽 팔이 깔끔하게 잘려나갔기 때문이다. 방금 적운상이 무극의 영역에 들어갔다가 자르고 나온 것이다.

“으…….”

공포가 전염됐다. 무당십걸이 도망가고 점창파의 노고수인 구화로가 손 한 번 써보지 못한 채 일 초식에 팔이 날아갔다. 적운상은 자신들이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때였다.

“뭣들 하느냐? 저놈을 죽여라! 사문의 명예를 걸고 응징을 해야 하지 않느냐? 저놈을… 크아아아악!”

구화로는 지금 해야 할 일을 일깨워서 단원들의 공포를 없애주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역효과를 냈다. 어느새 그의 옆에 나타난 적운상이 태룡도로 그의 배를 뚫었다.

“끄윽… 네놈…….”

“오늘 일을 죽어서도 후회하게 될 거다. 네 사문의 씨를 말려버릴 테니까.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줄 때는 자신이 당할 것도 생각하며 그만큼의 각오를 해야 하는 법이다. 네가 오늘 무슨 짓을 했는지, 누구를 적으로 돌린 건지, 죽어서 지켜봐라. 네 가족과 사문이 너 때문에 죽어가는 것을 보며 피눈물을 흘려라.”

적운상이 태룡도를 뽑아내자 피가 확 뿜어져 나오면서 그의 몸이 천천히 무너져 내렸다. 그러면서 그는 보았다. 적운상의 칼에 그와 함께 온 자들이 피를 뿌리는 것을.

차가운 눈 위에 머리를 대고 앞으로 꼬꾸라진 모습으로 구화로는 계속 봤다. 그를 믿고 따라온 단원들이었다. 그들이 하나둘씩 쓰러지고 있었다. 결과가 이리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무엇이 잘못되었단 말인가?

일평생을 올곧게만 살아왔다. 악은 절대로 용서하지 않았었다. 청렴한 생활을 하며 한 번도 욕심을 부려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왜 마지막이 이렇게 된 것일까?

구화로는 십팔나한 중 한 명이 피를 뿌리며 쓰러지는 것을 보며 눈을 질끈 감았다. 더 이상 볼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사람들이 수없이 그에게 했던 이야기가 있었다. 사부와 사형제들이 정말 귀가 따갑도록 이야기했지만 그는 항상 그걸 흘려들었었다.

‘너무 올곧으면 부러진다. 유할 때도 있어야지.’

사부가 해줬던 말이었다. 그걸 이제야 깨닫다니, 정말 바보 같은 삶을 살았다.

휘이이이이이잉!

뼈를 에이는 세찬 바람이 불어왔다. 새하얀 눈이 새빨갛게 염색이 되어 있었다. 서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로지 적운상뿐이었다.

풀어헤쳐진 머리가 바람에 날렸다. 그래서인가? 냉정하니 이성이 돌아왔다. 꼭 이 방법밖에 없었던가?

아니었다. 분명 다른 방법도 있었다. 그들에게 물었었다. 사제가 그렇게 당할 정도로 무엇을 잘못했냐고. 저들도 적운상에게 물을 것이다. 자신들이 이렇게 죽을 정도로 잘못을 했냐고.

적운상은 박노엽의 죽음도 슬펐지만 스스로 자제를 하지 못한 것도 슬펐다. 스스로에게 연민의 정이 느껴졌다. 불쌍타. 불쌍해.

한참 동안 하늘을 올려다보던 적운상은 태룡도로 땅을 파기 시작했다. 생각 같아서는 들개의 먹이가 되도록 놔두고 싶었다. 하지만 방금 느낀 아주 약간의 후회가 땅을 파도록 만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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