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형산파 268화
무료소설 아! 형산파: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75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아! 형산파 268화
268화. 재회 (1)
“헉헉…….”
박노엽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어둠이 도와줬고, 미로같이 복잡한 골목길이 도움이 되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벌써 잡혀서 목이 날아갔을 것이다.
너무 성급했다. 적운상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자 마음이 조급해진 것이 원인이었다. 하지만 정보를 찾아냈다. 사부인 임옥군을 죽이라고 지시한 자가 누구인지를 알아냈다.
하지만 꼬리를 잡혔다. 게다가 부상까지 입었다. 베인 왼쪽 팔이 욱신거렸다. 다행히 언제고 이럴 때가 있을 거라 생각해서 미리 준비해놓은 것이 효과를 봤다. 잠시나마 적들을 따돌릴 수가 있었다.
“후욱…….”
호흡을 가다듬은 박노엽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정보를 전해야 했다. 가야 할 곳은 정해져 있었다. 적운상을 찾아가야 했다.
그가 사력을 다해 뛰어가는 모습을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건물의 지붕에서 느긋하게 보고 있는 자들이 있었다. 박노엽에게 일부러 정보를 흘렸고, 이곳까지 몰아왔으며, 앞으로는 뒤를 쫓아야 할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목표는 무적일검이라 불리는 적운상이었다.
* * *
모용세가로 돌아온 적운상은 한동안 아무 생각 없이 편안하게 지냈다. 배유철은 돈을 받고 돌아갔고, 우형승은 옆에서 같이 빈둥거렸다. 그리고 매일같이 모용화가 찾아왔다.
어쩔 때는 모용세천이나 모용혜와 같이 와서 하루 종일 있다가 가기도 했다. 모용혜는 여전히 적운상에게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적운상이 시종일관 같은 태도로 대하자 자존심이 상했는지 마음을 접은 것같이 행동했다.
모용세천은 모용화 덕분에 우형승에게 무공을 지도받을 수가 있었다. 이에 뛸 듯이 기뻐했으나 한 번 지도를 받고는 반응이 시큰둥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우형승은 말로 다 했다.
그것도 모용세천도 이미 다 알고 있는 기본적인 내용들을 이러쿵저러쿵하며 쉴 새 없이 떠들었다. 모용세천은 먼저 가르침을 청했으니 끙끙거리며 그걸 전부 듣고 있어야만 했다.
그런 모용세천을 보며 다음날이 되면 안 올 거라 생각했는데 그는 또 와서 가르침을 청했다. 모용세천은 우형승이 자신을 시험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흘이 지났을 때는 그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형승은 애초부터 자신에게 도움을 줄 생각이 없었다는 걸 알았다. 실망이 컸다.
그래서 시무룩해 있는데 적운상이 툭 한마디를 던졌다.
“모용 형은 기본기가 약하오.”
“그게 무슨 뜻입니까?”
“모용세가의 무공은 분명 상승의 무공이오. 잘만 익힌다면 높은 경지에 오를 수 있을 거요. 하지만 모용 형은 기본이 약해서 익힌 무공이 제 위력을 내지 못하고 있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나는 그동안 오히려 남들보다 더 기본에 충실하다고 여겼는데 그런 말을 들으니 혼란스럽군요.”
적운상은 모용세천을 빤히 쳐다보다가 태룡도를 뽑아 들었다. 그리고 풍뢰십삼식의 한 초식을 반복적으로 펼쳤다.
“어떻소?”
“단순하지만 빠르고 강하군요.”
“그게 아니오. 내 움직임을 봤냐는 거요?”
“봤습니다.”
“처음에 펼친 것과 어떻소?”
모용세천은 적운상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표정을 읽은 적운상이 다시 풍뢰십삼식의 초식 하나를 계속 반복해서 펼쳤다.
그걸 가만히 보고 있자니 모용세천은 왠지 가슴이 답답했다. 처음에는 그 이유를 몰라 의아했는데 유심히 보니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적운상이 보여주고 있는 초식은 너무나 완벽했다. 몇 번이나 반복적으로 펼치는데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움직임이 똑같았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단 말인가?
도대체 얼마나 반복 수련을 했기에 저리 되는 것일까?
“봤소?”
“봤습니다.”
“기본이 탄탄하다는 건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오.”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겁니까?”
“물론이오. 나는 기본을 탄탄히 한 것만으로 무상지검의 경지에 올랐소.”
적운상이 하는 말에 모용세천은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동안 모용세천은 상승의 무공을 익혀야만 높은 경지에 오를 수 있다고 여겼었다. 그래서 무공이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 후에는 기본보다는 상승의 초식들 위주로 연공을 했었다.
무림인이라면 열에 아홉은 그런다. 그런데 적운상은 그게 아니라 말하고 있었다. 아마 다른 사람이 그런 말을 했다면 그냥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을 것이다.
그러나 적운상이 누구던가?
삼류문파의 무공으로 명성이 쟁쟁한 명문정파의 고수들을 모두 꺾은 사람이었다.
“형님이 모용 형에게 기본을 강조하면서 다 아는 이야기를 계속 하는 이유도 그래서요.”
“나는… 그런 줄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그저 내가 싫어서 그런 줄 알고… 하아… 부끄러워서 뭐라 할 말이 없군요.”
“그래서 내가 지금 말해주고 있는 거요.”
“고맙습니다. 적 형. 덕분에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동안 신세진 것에 대한 대가라고 생각하시오.”
“떠날… 겁니까?”
“내일 떠날 거요.”
“그렇군요.”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모용세천이 적운상을 봤다.
“적 형. 나도 같이 가도 되겠소?”
생각지도 못한 부탁이었다. 다른 때라면 승낙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피를 봐야 한다. 거기에 모용세천이 말려들게 할 수는 없었다.
“미안하오. 개인적으로 할 일이 있소.”
“음, 무리한 부탁인 줄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혹시라도 마음이 바뀌면 내일 떠나기 전에 이야기해 주십시오.”
“그러겠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적운상은 그럴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날 저녁 조촐하니 연회가 열렸다. 모용화는 우형승에게 떠나지 말라고 했다. 적운상도 그러는 것이 좋겠다고 했지만 우형승은 고개를 내저었다.
적운상은 술을 마시면서 슬쩍 모용화에게 눈짓을 했다. 우형승을 놔두고 갈 테니 부탁한다는 뜻이었다. 눈치 빠른 모용화가 금방 그 뜻을 알아채고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고맙다는 뜻으로 고개를 살짝 숙였다.
적운상은 우형승에게 술을 많이 권했다. 모용백중과 모용세천까지 합세를 하자 결국 우형승은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형님을 잘 부탁합니다.”
“음, 정말 이대로 가도 되겠나?”
모용백중이 조금 걱정이 되는 얼굴로 물었다.
“나중에 다시 들르겠습니다. 형님께는 잘 말씀해 주십시오.”
“알겠네. 그건 걱정하지 말게.”
“형수님.”
모용화는 적운상이 형수님이라고 부르자 얼굴이 빨개졌다.
“형님은 그동안 외롭게 사셨습니다. 검을 버리고 강호를 떠나려고 했는데 저 때문에 그러지 못했습니다. 형수님이 그 뜻을 이해하고 잘 보살펴 주십시오.”
“물론이에요.”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같이 갑시다. 적 형. 밤이 어두우니 내가 배웅을 하겠소.”
모용세천의 말에 적운상이 거절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예의였기 때문이다.
모용세천은 말을 타고 중심지를 벗어날 때까지 따라왔다.
“이제 돌아가시오.”
“알겠습니다. 이제 어디로 가는 겁니까? 무림맹으로 갑니까?”
적운상은 대답 없이 모용세천을 쳐다봤다. 그러자 모용세천이 씁쓸하니 웃었다.
“거대문파와 세가들이 정도련을 밑에 두기 위해 어떤 일을 했는지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적 형이 뭘 하려는지도 대충 짐작을 하고요.”
“해야 할 일이오.”
“알고 있습니다. 부탁이 있습니다.”
“말해보시오.”
“혹시라도 무림맹에 갔다가 형님을 보게 되면 손에 사정을 둬 주십시오. 부탁합니다.”
모용세천이 포권을 취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적운상이 마주 포권을 취하면서 말했다.
“한 번은 참겠소.”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그럼 이제 가보겠습니다.”
“다시 또 봅시다.”
“가는 길이 평안하기를.”
모용세천이 말 머리를 돌려서 돌아가는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던 적운상은 그가 더 이상 보이지 않자 천천히 말을 몰았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말고삐를 잡아당겨 말을 세웠다.
은은하게 느껴지는 살기 때문이었다. 적운상 정도 되니까 알아챘지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알아챘나? 역시 제법이구나.”
어둠 속에서 천천히 노인 한 명이 걸어 나왔다. 적운상은 그를 보며 미간을 살짝 좁혔다. 누군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누구지?”
순간 노인의 얼굴이 팍 구겨졌다. 그러나 금방 활짝 펴졌다.
“나를 잊었느냐? 나는 한시도 네놈을 잊지 않았다.”
“그러니까, 누구냐고?”
노인의 얼굴이 다시 일그러졌다. 그때도 그랬지만 대놓고 사람 열 받게 하는 재주가 있는 놈이었다.
“객잔에서 있었던 일을 잊었단 말이냐? 네놈 덕에 내공을 회복하느라 고생한 것을 생각하면… 모용세가에서 네놈을 죽이려 했지만 기회가 없었지. 하지만 이렇게 혼자 나왔으니 이미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다.”
그제야 적운상은 그 노인이 적염도인이라는 것을 알았다. 가슴까지 내려오던 수염을 깔끔하게 밀어서 못 알아봤던 것이다. 그리고 생각해보니 모용세가에서 몇 번 마주쳤었다.
적운상은 웬 노인이 계속 아는 체를 하나 했는데 그게 적염도인이었던 것이다.
“쌓인 건 풀어야겠지. 하지만 후회하게 될 거다. 너는 그냥 도망갔어야 했어. 그랬으면 오늘 목이 날아가지는 않았을 거다.”
적운상이 냉랭하게 말하면서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 천천히 태룡도를 뽑았다.
적염도인은 침착했다. 믿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인근에는 약 칠십여 명의 살수들이 몸을 숨기고 있었다. 모두가 최상의 실력을 지닌 자들이었다.
적운상의 무공이 아무리 대단해도 살아남기 힘들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그의 착각이었다. 그리고 그 착각의 대가는 그의 목이었다.
쉿!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아무도 몰랐다. 오로지 적운상만이 알았다. 적운상은 방금 무극의 영역에 들어갔다가 나왔다. 그 결과, 적염도인의 목에 가는 혈선이 생겼다. 그러더니 머리가 옆으로 뚝 떨어졌다. 그걸로 끝이었다. 적염도인의 최후였다.
살수들이 당황했다. 그들은 고도로 훈련을 받은 자들이었다. 목표가 누구건 항상 성공했었다. 두려움을 갖는다는 건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달랐다. 그들은 적운상에게 두려움을 느꼈다. 적운상은 자신들과는 다른 세계에서 사는 사람 같았다.
어차피 의뢰인도 죽었다. 괜히 나서서 죽음을 자초할 필요가 없었다. 이에 한두 명씩 빠르게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때 적운상의 목소리가 조용히 울려왔다.
“또 한 번 나를 노리면 목을 내놓아야 할 거다. 용서는 이 번 한 번뿐이다. 절대로 내 눈에 뜨이지 마라. 십 장(十丈) 안으로는 들어서지도 마라. 한 놈이라도 걸렸다가는 모조리 죽여 버리겠다.”
오싹 소름이 돋았다. 한두 명이 아니었다. 자신들을 협박하는데도 그게 당연하게 느껴졌다. 단 한 명에게 칠십여 명의 살수들이 두려움을 느끼며 비참하게 모습을 감췄다.
* * *
박노엽은 뼛속까지 파고드는 추위를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살아야 했다. 어떻게 해서든 살아야 했다. 지금은 오로지 그 생각뿐이었다.
그들이 쫓아오고 있다는 것을 박노엽도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 저들은 모른다. 적운상이 얼마나 강한지.
지금 뒤를 쫓아오고 있는 자들은 자신들이 충분히 적운상을 상대할 수 있을 거라 여기고 있을 테지만, 그건 착각이다. 그들이 아는 적운상은 과거의 적운상이다.
적운상은 심검의 벽을 깨기 위해 떠났다. 지금쯤 아마 벽을 무너트리고 더 강해졌을 것이다. 박노엽이 아는 적운상은 그런 사람이다.
한 번도 누군가를 실망시키는 법이 없었다. 무슨 일을 부탁하든지 믿을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바로 적운상이었다.
“큭큭.”
박노엽은 적운상을 생각하자 웃음이 나왔다. 지금 그의 상황은 최악이었다. 다친 팔은 제때에 치료를 하지 못해 감각이 없었고, 이틀이나 굶어서 서있을 힘도 없었다. 게다가 계속 무리를 해서 움직였기 때문에 정신도 혼미했다.
그런데도 박노엽은 웃었다. 오로지 적운상과의 만남만 생각하며 걷고 또 걸었다. 뽀도독거리며 눈을 밟는 소리와 함께 기다란 발자국이 흔적을 남겼다.
놈들이 그 흔적을 따라올 것이다. 그걸 생각하자 또다시 웃음이 나왔다.
‘따라와라! 아둔한 놈들아. 네놈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지옥이다. 형산파를 건드린 대가를 뼈저리게 후회하게 될 것이다.’
남은 건 그런 독기밖에 없었다. 그걸로 버티고 있었다. 그때였다. 뒤에서 비도 하나가 날아와 박노엽의 등에 꽂혔다.
“크윽!”
박노엽이 쓰러졌다. 계속 이런 식이었다. 놈들은 마치 자신들의 죽음은 생각지도 않으며 박노엽을 재촉하고 있었다. 비도는 손이 안 닿는 절묘한 위치에 꽂혀있었다. 그래서 뽑을 수가 없었다.
“이대로는… 안 쓰러진다… 개, 자식들아…….”
입에서 거친 욕설이 나왔다. 옛날 일이 생각났다. 금벽도문에서 그는 성질이 개 같은 문주의 비위를 맞추며 생활했었다. 그러다 적운상을 만났고, 임옥군을 사부로 모시며 그의 능력이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정말 행복했었다.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관심 받는다는 게 그렇게 기쁜 일이라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그래서 모든 것을 다 바쳤다. 그게 하나씩 결과를 보일 때는 눈물도 흘렸었다.
“후후… 그 정도면 만족할만한 삶이지.”
부들부들 떨리는 몸으로 간신히 일어났다. 그리고, 걸었다. 적운상에게 가야 했다.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저 빌어먹을 놈들의 죽음을 보고 싶었다. 아니 면상이라도 보면, 그걸로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욕지거리라도 할 수가 있으니까. 이대로 쓰러지면 그러지도 못한다. 그러니 가야 했다. 가야 했다. 적운상에게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