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형산파 272화
무료소설 아! 형산파: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72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아! 형산파 272화
272화. 귀환 (3)
아까 펼쳤던 일도직격(一刀直擊)이라는 초식이었다. 단순하지만 강맹한 초식으로 만약 적운상이 펼쳤다면 화산파 도사의 어깨가 그대로 으스러졌을 것이다.
하지만 제대로 익히지도 못했고, 내공도 일천한 방인걸이 펼치는 일도직격은 화산파 도사의 어깨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오히려 그의 팔을 덥석 잡은 화산파의 도사가 내기를 주입해 고통을 주기 시작했다.
“크아아아악!”
“버틸 만하지? 이제 일 초식 남았다.”
그렇게 말하면서 화산파 도사가 그를 휙 던지자 짐을 쌓아놓은 곳에 날아가 부딪쳤다.
“커헉!”
방인걸은 화산파 도사가 내기로 속을 헤집어 놓는 바람에 내상을 심하게 입었다. 이에 피를 한 움큼이나 뱉어냈다.
“끝이냐? 어서 일어나라. 마지막 남은 기회마저 없어질 것이다.”
그때였다. 뒤에서 고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무슨 짓들이죠?”
사람들이 그쪽을 봤다. 일꾼들은 그녀를 보고 다행이라는 듯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이 배의 주인인 상관보연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제가 부리는 일꾼입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제 체면을 봐서 용서해주셨으면 좋겠군요.”
“그는 내 앞에서 대놓고 화산파를 욕했소. 그걸 무마할 정도로 상관 소저의 체면이 대단한지는 생각을 좀 해봐야겠군.”
상관보연의 고운 아미가 살짝 찌푸려졌다. 이쪽이 소란스럽기에 와본 건데 설마 그런 일이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럼 깔끔하게 죽이고 끝내세요. 이후로 상관보는 화산파와 연관된 모든 일을 철회하겠습니다.”
“후후. 겨우 일꾼 하나 때문에 나를 협박하려는 거요? 그럼 상관보의 피해가 엄청날 텐데.”
“그깟 피해, 제 체면보다 못하답니다. 장사꾼은 신용과 얼굴이 생명입니다. 곧 죽더라도 신용을 지켜야 하고, 어디서든 얼굴을 내밀며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상관보의 철칙입니다. 이번 일로 다른 곳에서 제 얼굴의 가치를 알아준다면 그것이 더 이득이죠.”
화산파의 도사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상관보연은 보통여자가 아니었다. 눈빛을 보아하니 정말 화산파와의 모든 관계를 끊을 것 같았다.
사실 그런 거야 별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그게 자신으로 인해 그렇게 된다면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윗사람들에게 혼나고 끝날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좋소. 상관 소저가 그렇게까지 이야기하니 소저의 체면을 안 봐드릴 수가 없구려. 하지만 저자가 스스로 무림인이라 이야기하고 화산파를 욕한 것은 사실이니 거기에 대한 사과는 받아야겠소. 생각 같아서는 목을 날려버리고 싶지만 소저의 체면을 봐서 팔 하나로 끝낼까 하오.”
상관보연도 더 이상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안타깝지만 그녀가 도울 수 있는 건 여기까지였다.
상관보연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화산파의 도사가 천천히 걸어가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있는 방인걸을 걷어찼다. 그리고 발로 그의 오른팔을 밟고 검을 뽑아 들었다.
일꾼들은 겁을 먹고 고개를 돌렸다. 방인걸은 이를 악물고 화산파의 도사를 노려봤다.
“흥! 운이 좋은 줄 알아라.”
그렇게 말하면서 화산파의 도사가 검을 내려치려고 했다. 그때 누군가가 조용히 그를 말렸다.
“멈춰.”
화산파의 도사가 내려치려던 검을 멈칫했다. 그리 큰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런데 바로 옆에서 말한 것처럼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내공이 보통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화산파의 도사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누가 말한 건지 찾을 수가 없었다.
“어느 문파의 고인(高人)이시오? 빈도는 화산파의 제자입니다.”
“그럼 가서 도나 닦지 칼 들고 다니면서 뭘 하는가?”
적운상이 그를 노려보자 그제야 알아본 화산파의 도사가 놀란 눈을 했다.
“그대는… 누구요?”
시선이 부딪치는 순간 화산파의 도사는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간파했다. 냉정하고 차가운 눈 속에 소름이 돋을 정도의 살기가 담겨 있었다.
“적운상이다.”
“헉!”
적운상이 스스로를 밝히자 모두가 깜짝 놀랐다.
화산파의 도사들과 공동파의 도사들이 뒤늦게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상관보연은 눈을 크게 뜨고 뚫어져라 적운상을 쳐다봤다. 화산파의 도사에게 한 손을 밟히고 있는 방인걸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적운상을 올려다봤다.
행색이 초라해서 그저 일꾼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적운상이라니…….
“검 집어넣어라.”
적운상이 조용히 말했다. 그러자 화산파의 도사들과 공동파의 도사들이 어떻게 할지를 몰라 하며 서로를 봤다. 검을 거두라는 말은 싸울 뜻이 없다는 건데, 정말 그런지 알 수가 없었다.
“죽고 싶지 않으면 검 집어넣어라.”
협박조가 아니었다. 그저 가볍게 내뱉은 말이었다. 하지만 그 말은 적운상에게서 나왔다. 말에 힘이 있었다. 머뭇거리던 공동파의 도사가 먼저 검을 집어넣었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눈치를 보다가 모두 검을 거뒀다.
상관보연은 믿기지가 않았다. 저들은 화산파와 공동파의 제자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단지 검을 치우라는 한마디에 겁을 먹고 그대로 따르고 있었다.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저 사람은 무섭게 성장했구나. 할아버지의 눈이 정확했어.’
상관보연의 할아버지인 상관도백은 적운상을 처음 보고 도움을 받은 이후로 계속 형산파와 인연을 만들어 왔다. 비록 막정위와 상관보연의 관계는 틀어졌지만 그에 신경 쓰지 않고 여전히 형산파에 도움을 줬다.
이번에 임옥군이 죽고 적운상이 무림 공적으로 몰리자 형산파를 밀어주던 대부분의 상인들과 문파들이 등을 돌렸다. 오로지 형산파가 있는 남악현 사람들만이 여전히 따를 뿐이었다.
상관보에서도 그리 하자는 의견이 나왔었다. 상인은 치고 빠질 때를 잘 알아야 한다. 그래야 손해를 보지 않는다.
하지만 상관도백이 너무나 강력하게 반대를 했다. 사람을 보는 안목이 없다며 오히려 화까지 냈었다. 이에 사람들은 형산파와 손을 끊자는 말을 다시는 하지 못했다.
그때만 해도 상관보연은 상관도백의 그런 반응을 이해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오늘, 오랜만에 적운상을 보자 왜 상관도백이 그랬는지 이해가 갔다.
무림 공적?
웃기는 일이었다. 저 사내를 적으로 돌리겠다는 건가?
아무리 소림사와 무당파라 해도, 무림 전역의 수많은 문파들이 뭉쳐 있는 무림맹이라 해도, 그건 잘못된 판단이었다.
그들은 적운상이 어떤 사내인지 모른다. 후회할 것이다. 땅을 치며 후회할 것이다. 저 사내를 적으로 돌린 대가를 지불한 후에야 때늦은 후회를 하겠지.
상관보연은 그런 생각이 들자 자신도 모르게 입가가 올라갔다.
“봐서… 알겠지만… 그가 먼저 화산파를 욕했소.”
아직도 방인걸의 발을 밟고 있는 화산파의 도사가 어설프게 변명을 늘어놓았다. 적운상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낮게 말했다.
“발 치워.”
그제야 화산파의 도사가 화들짝 놀라며 발을 치우고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적운상이 방인걸을 일으켜 세워 앉혔다.273화. 형산파에서 (1)
배가 선박장에 정착하자 일꾼들이 짐을 내리기 시작했다. 상관보연은 아랫사람에게 일을 맡기고는 가까운 호남상단의 지부로 향했다. 그녀가 올 것을 알고 미리 준비를 하고 있던 사람들이 문 앞까지 나와서 반겼다.
상관보연은 적운상과 방인걸을 잠시 객청에서 기다리게 하고 일을 처리했다. 이번 일은 제법 큰 건이었다. 그래서 그녀가 직접 가서 물건을 옮겨온 것이다.
저녁때가 되자 모든 일이 다 끝났다. 원래는 이삼일 정도 걸릴 일이었지만 적운상과 형산파에 가야 했기 때문에 대충 마무리를 지었다. 나머지는 아랫사람들이 알아서 할 터였다.
객청으로 가보니 적운상이 방인걸에게 무공을 가르쳐주고 있었다. 세월이 지나도 사람은 변하지 않나 보다. 그녀는 예전에 적운상이 사람들에게 무공을 가르쳐주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을 겹쳐보며 미소를 지었다.
“형산파의 무공인가요?”
“그렇소.”
“풍뢰십삼식이라면 저도 할 줄 아는데, 한 번 봐주시겠어요?”
풍뢰십삼식은 남악현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줄 알았다. 무당파가 알맹이를 뺀 태극권을 전파해서 양민들을 위하고 명성을 높였듯이 풍뢰십삼식도 그런 식으로 번져가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형산파와 인연이 깊은 상관보연도 자연스럽게 풍뢰십삼식을 배우게 된 것이다.
“한 번 해보시오.”
“보고 비웃지는 말아 주세요.”
“물론이오.”
상관보연이 자세를 잡고 풍뢰십삼식의 열세 가지 동작을 펼치기 시작했다. 제법 틀이 잡혀 있었다. 하지만 익힌 내공심법이 달라서 숙련도에 비해 제 위력은 나오지 않았다.
“멋지군.”
“훗! 부끄럽네요. 어때요? 지적하실 곳이 너무 많죠?”
“아니오. 전혀 없소.”
“예의상 하는 말이겠죠?”
“그렇지 않소. 풍뢰십삼식은 초식이 단순해서 누구나 익히기가 쉽소. 자세가 크게 흐트러지지 않은 이상 문제될 것이 없소. 나머지는 본인이 하기 나름이오. 하나의 동작이라도 얼마나 수련을 하고 얼마나 정성을 들이느냐에 따라 그 완성도가 나타나는 거요.”
“그렇군요. 그럼 그런 점에 비추어봤을 때 제 풍뢰십삼식은 어떤가요?”
“기대 이상이었소.”
“호호. 빈말이라도 기분은 좋네요. 가요. 저녁은 제가 사죠.”
상관보연은 인근에 있는 큰 객잔으로 갔다.
“일단 씻는 것이 좋겠어요. 그러고 다니면 사람들이 더 의심할 걸요. 차라리 깔끔하게 다니며 돈 좀 있는 부잣집 공자 흉내를 내는 게 더 낫겠어요.”
“좋은 생각이 아니오.”
“여기서 형산파까지는 며칠 걸리지 않아요. 그런 모습으로 돌아가면 사형제들이 모두 실망할 거예요. 옷은 제가 준비해놓죠.”
상관보연이 그렇게 말하고는 두 사람의 등을 떠밀었다. 객잔은 비싼 곳답게 방 안에서 씻을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일꾼들이 물을 퍼다 나르자 적운상은 오랜만에 몸을 물에 담그고 깨끗하게 씻었다.
그리고 나오니 상관보연이 준비해놓은 옷이 보였다. 그 옷을 입고 머리를 뒤로 넘겨 영웅건으로 묶었다. 거기에 태룡도를 허리에 걸치자 제법 태가 났다. 오랜만에 이리 멋을 내보는 것 같아서 기분이 괜찮았다.
하지만 적운상은 방을 나와 아래층으로 향하면서 살짝 후회를 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너무 몰리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적운상의 모습은 굉장히 헌앙했다. 잘생긴 얼굴에 호리호리하면서도 다부진 체격, 거기에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묘한 분위기까지 느껴졌다.
이곳은 비싼 객잔이라 나름 멋을 낸 남녀들이 많이 와있었다. 그들 모두가 적운상을 힐끔거렸다. 특히 여자들의 시선이 뜨거웠다. 안 보는 척하면서 입가에 살짝 웃음을 띤 채 계속 추파를 던졌다.
“깜짝 놀랐어요. 제가 보낸 옷을 몰랐다면 딴 사람인 줄 알았을 거예요.”
“이래서 좋은 생각이 아니라고 한 거요.”
“음… 확실히 사람들의 시선을 너무 끄네요. 방으로 가요.”
상관보연이 그렇게 말하면서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적운상이 자리에서 일어나 뒤를 따라갔다.
객잔 구석에서 그런 두 사람을 유심히 보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보통 사람들보다 머리 하나 정도는 더 컸다. 덩치도 대단해서 마치 커다란 곰이 앉아있는 것 같았다.
“흐흐. 드디어 만났구나.”
그가 나직이 중얼거리면서 술잔을 비웠다.
* * *
객잔에서 식사를 하고 나와 거리를 걷는데 지나가는 사람들이 힐끔거리며 갔다. 적운상 때문이었다. 이에 방인걸은 괜히 어깨가 으쓱거렸다.
“갑자기 주 소저와 백 소저가 부러워지는 걸요. 저도 진즉 적 공자한테 달라붙을 걸 그랬어요.”
상관보연이 부끄럽지도 않은지 농담처럼 가볍게 이야기를 했다.
“대사형과 안 돼서 유감이오.”
“훗! 너무 거리를 뒀었나 봐요. 할아버님이 찬성은 하시면서도 적극 밀어주시지 않은 것도 있죠. 할아버님은 데릴사위를 원하셨으니까요. 홍 소저도 좋은 사람이잖아요.”
적운상은 그 말에 선뜻 동의를 하지 못했다. 홍은령은 곱게 자란 천방지축이었다. 안 본 사이에 철이 좀 들었는지 모르겠다.
“미행이 있군.”
“네?”
적운상이 하는 말에 상관보연과 방인걸이 뒤를 돌아봤다. 그러고는 깜짝 놀랐다. 덩치가 산만한 사람이 약 삼 장 정도의 거리를 두고 서있었다.
“설마 저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인가요?”
“그렇소. 우리가 객잔을 나왔을 때부터 계속 따라오는군.”
“음… 아닐 거예요. 그냥 서 있잖아요. 우리를 미행한 거라면 들켰으면 숨거나 도망가야죠.”
“안 그런 사람도 있는 법이오.”
그렇게 말하면서 적운상이 걸음을 옮겼다. 상관보연과 방인걸도 그를 따라 자연스럽게 걸었다. 그러면서 뒤를 보니 그 거대한 체격의 사내가 따라오고 있었다.
“정말이네요. 누구죠? 처음 보는 사람인데.”
“나도 모르오.”
한참을 걸었는데도 그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계속 따라왔다.
“계속 따라오는데요.”
“신경 쓰지 마시오.”
“흐음…….”
중심지를 벗어나서 외곽으로 가자 그가 조금 거리를 좁혔다.
“조금 더 가면 장원이 하나 있어요. 거기에 말이 준비되어 있으니 그걸 타고 가요.”
“두 사람은 먼저 가 있으시오. 곧 뒤따라가겠소.”
적운상이 멈춰 서서 하는 말에 상관보연이 살짝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곧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인걸과 함께 장원으로 향했다.
적운상은 천천히 돌아섰다. 그러자 그 커다란 덩치의 사내가 느긋하니 다가왔다.
“크크크. 언제고 한 번 만나고 싶었다.”
“누구요?”
“호천마궁에서 왔다.”
“의외로군. 조비가 직접 올 줄 알았는데.”
“소궁주도 움직이고 있다. 내가 먼저 왔지만.”
“그럼 궁주가 보낸 거요?”
“그렇다.”
“그에게 전하시오. 나중에 한 번 찾아가겠다고.”
“지금 가야 한다. 궁주님이 너를 데려오라고 했다.”
“조비가 오면, 이야기해보고 움직이던가 하겠소. 그러니 돌아가시오.”
“말귀를 못 알아들었군.”
사내가 목을 좌우로 꺾으며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말귀를 못 알아들은 건 당신이로군.”
그 순간 적운상이 움직였다. 무극의 영역에 들어서서 사내의 뒤로 돌아가 무릎 뒤를 차며 팔로 어깨를 내려쳤다.
콰앙!
“크윽!”
사내는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갑자기 어깨에 엄청난 충격이 오면서 무릎이 풀썩 꺾였다.
“이제 말뜻을 알겠나? 가서 내가 한 말을 궁주에게 그대로 전해라.”
“지금 가지 않으면 후회할 거다.”
“뭔가 있군.”
“네가 나를 따라가지 않으면 호천마궁의 정예가 움직인다. 그들은 이미 이곳에 도착해 있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무림맹을 상대하기에도 벅찬데 호천마궁에서 이렇게 움직였을 줄은 완전히 예상 밖이었다. 적운상은 잠시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였다. 그러다 결정을 하고는 나직이 말을 내뱉었다.
“가서 궁주한테 전해. 아까 말했듯이 조비가 오면 갈지 말지를 결정하겠다고. 그리고 호천마궁의 정예고 뭐고 형산파에 발을 들여놓았다가는 전부 죽여 버리겠다. 오려면 각오하고 오도록.”
적운상은 그를 놔줬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태연하게 갈 길을 갔다. 사내는 멀어져가는 적운상의 뒷모습을 보면서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운상은 자신들이 감당할 수 있는 사내가 아니었다. 그를 상대하려면 조비로도 힘들었다. 궁주가 직접 움직여야 했다.
“이야기가 잘 끝났나 보군요.”
방인걸과 같이 장원의 문 앞에서 말고삐를 잡고 기다리고 있던 상관보연이 웃으면서 물었다.
“말귀를 잘 알아듣더군.”
“가요.”
상관보연이 말의 고삐를 적운상에게 건넸다. 그러자 적운상이 그걸 받아 쥐고 말 위로 올라탔다.
“하아!”
박차를 가하자 말이 앞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상관보연과 방인걸이 뒤를 따라 달렸다.
* * *
“흐음…….”
무당파의 장문인인 일영진인은 무림맹으로부터 온 서찰을 받고 고심에 빠졌다. 호천마궁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무림맹을 결성하는데 한몫 거들고 제자들까지 내줬지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는 어르신들에게 부탁까지 하란다.
이걸 들어줘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었다. 그러다 그 어르신들이 한 번쯤 세상에 나가 무당파의 이름을 다시 알리는 것도 괜찮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에 무당파의 금역(禁域)인 청죽림(靑竹林)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곳은 선현들이 속세를 등지고 우화등선(羽化登仙)을 할 때까지 마지막을 준비하며 지내는 곳이었다. 장문인조차도 특별한 일이 없으면 함부로 들락거릴 수가 없는 곳이었다.
일영진인이 쭉쭉 뻗어있는 대나무들을 보며 허허롭게 걸었다. 그러자 어디에선가 은은하니 목소리가 들려왔다.
“걸음걸이를 보니 아직 멀었다.”
“사질이 사숙님을 뵙습니다.”
일영진인은 목소리를 듣자마자 그 자리에서 예를 갖추며 고개를 숙였다. 누구건 이곳에 있는 사람은 무조건 그보다 윗배였다.
“무슨 일로 온 것이냐?”
“사숙님들에게 부탁이 있어서 왔습니다.”
“우리가 속세의 일에는 관여를 하지 않는다는 걸 잊었더냐?”
“무당의 안위가 걸린 일입니다.”
잠시 목소리가 끊겼다.
“어느 놈이 무당을 노린단 말이냐? 그동안 네놈은 뭘 했고?”
“부끄럽습니다. 능력이 부족하여 이리 찾아왔습니다.”
“말해봐라.”
“형산파에 적운상이라는 자가 있습니다.”
“그런데?”
“감당이 안 됩니다.”
또다시 목소리가 끊겼다. 그러더니 큰 웃음소리가 허공에 울렸다.
“하하하하하.”
일영진인은 귀가 울려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은근히 내공을 끌어올려 마음을 진정시켰다.
“대무당이 기껏 한 사람을 감당하지 못한단 말이냐?”
“부탁드립니다. 사숙님.”
“돌아가라.”
“사숙님!”
“돌아가라 했다.”
“세 분 모두 가주셔야 합니다.”
이번에는 침묵이 길었다. 일영진인이 말하는 세 분이란 무당삼현을 뜻했다. 만약 그가 그냥 계속 부탁을 했거나 아니면 한 명이라도 가달라고 했다면 호되게 나무라서 보냈을 것이다. 그런데 세 명이 모두 가달라고 한다. 그만큼 그 적운상이라는 자가 대단하다는 뜻이었다.
“형산파라 했느냐?”
“그렇습니다.”
“우리 셋이 움직여야 한다고?”
“그렇습니다.”
“허언이 아니렷다.”
“어느 안전이라고 허언을 하겠습니까?”
또다시 목소리가 끊겼다. 그러더니 잠시 후에 허락의 뜻이 담긴 말이 울려왔다.
“길안내를 할 아이를 하나 골라놓아라.”
“알겠습니다.”
“괜찮나?”
“네, 네…….”
방인걸은 아직도 믿기지 않는 듯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용기는 가상하다만 다음부터는 실력을 갖추고 용기를 보여라. 그렇지 않으면 만용일 뿐이야.”
“네…….”
작게 대답하며 방인걸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런 방인걸의 어깨를 적운상이 가볍게 두어 번 두드려줬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화산파와 공동파의 도사들을 봤다.
“나를 찾으러 왔나?”
그들은 대답을 망설이며 서로를 봤다.
“두 번 묻게 하지 마라. 어차피 대답해줄 놈들은 많으니까.”
“마, 맞소. 당신을 찾으러 왔소.”
“얼마나 왔지?”
“오백 명이 움직였소.”
화산파의 도사가 적운상에게 겁을 주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 하지만 적운상은 겁을 먹기는커녕 입가를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겨우 오백이 온 건가? 무림맹의 윗대가리들도 머리가 안 돌아가는군. 나는 형산파에 있을 거다. 가서 전해라. 애꿎은 사람들 보내서 목 날아가게 하지 말고 직접 찾아오라고. 오지 않으면 내가 무림맹으로 찾아갈 것이다. 가서 사부님의 죽음에 대해 죄를 물을 것이다. 어느 쪽이 피해가 적을지 잘 생각해 보라고 해. 가라.”
적운상의 말에 그들이 주춤거리며 한쪽으로 가려고 했다. 그러다 적운상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오자 그 자리에서 멈칫했다.
“아! 그리고 충고 하나 하지. 웬만하면 산에 틀어박혀 도나 닦고 나오지 마라. 또다시 내 눈에 뜨이면, 그때는 단칼에 베어버리겠다.”
살기 가득한 말에 그들은 오싹함을 느꼈다. 이에 앞 다투어 구석으로 가 몸을 사렸다.
“오랜만이군요.”
상관보연이 입가에 미소를 띠며 인사를 건네왔다.
“오랜만이군.”
“요즘 좋지 못한 소문이 들려오더군요.”
적운상은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배는 장사(長沙)까지 가요. 거기에 짐 내려놓고 함께 형산파로 가요. 나도 마침 볼일이 있으니까요.”
“위험할 수도 있소.”
“괜찮아요. 감히 상관보를 적으로 돌릴 문파는 없어요. 당신은 공격해도 저는 그냥 놔둘 거예요. 인질로 잡혔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죠.”
상관보연이 하는 말에 적운상이 잠시 그녀를 보다가 승낙을 했다.
“그럽시다.”
“저도 데려가 주십시오!”
갑자기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적운상이 고개를 돌렸다. 방인걸이었다.
“평소에 존경하고 있었습니다. 저도 데려가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적 사형!”
여전히 호칭이 적 사형이었다. 적운상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를 보고 있자니 패악룡이 생각났다. 그도 처음에는 저런 패기밖에 없었다. 지금은 어떻게 변했을지 궁금했다.
“죽을 수도 있다.”
“각오하고 있습니다.”
“일행이 늘었군.”
적운상의 말에 잠시 멍한 얼굴을 하고 있던 방인걸은 그게 허락의 뜻이라는 걸 알고 환호성을 질렀다.